하느님은 흑인이다 (God is a Negro)
(Bishop Henry Turner, The Voice of Missions, Feb., 1898)
성서적으로도, 그리고 다른 이유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이 흑인이라고 믿을 권리가 있다. 당신들 백인들이 하느님이 잘생기고 반듯하고 잘 꾸민 백인 남자로 믿고 있듯이 말이다. 당신들과 이 나라의 바보같은 흑인들은 하느님이 하늘 나라 어디엔가 왕관을 쓰고 앉아 있는, 흰색 피부에, 파란 눈에, 직모에, 우뚯 솟은 코에, 평평한 입술에 좋은 옷을 입은 백인 신사라고 믿고 있다. 유사 이래 모든 인종들이 언어, 그림, 조각, 그리고 다른 형태나 형상을 통해 하느님을 묘사하려고 노력해 왔으며, 자신들을 만들고 운명을 결정지은 하느님이야말로 자기의 모습으로 상징된다는 믿음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흑인들이라고 다른 사람들처럼 하느님이 자기를 닮았다고 믿지 못하란 법이 있는가? 우리는 자기들이 하느님처럼 생겼다고 믿지 않는 인종들에 어떤 희망도 없다고 생각한다.
미쳤다고 할지 몰라도, 하느님이나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었을 때 백인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면, 우리는 복음의 나팔을 버들가지에 걸어놓고 설교를 중단할 것이다.
하느님의 인격성을 믿으면서 그분이 흑인이 아니라고 믿어야 한다면, 차라리 무신론자가 되거나, 하느님이 없다고 믿거나, 모든 자연이 하느님이라는 범신론자가 될 것이다. 히브리어 코샤크가 의미가 있는 말이라면, 검음은 흼보다 오래되었다. 밝음 이전에 어둠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물질의 영원성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기 백만 년, 천만 년, 수억 년 이전부터 혼돈이 무한한 어둠이나 흑암의 형태로 떠다녔음을 믿는다. 인간의 이해력이 닿는 한 그 상황을 이해해 본다면, 그 시간 동안 하느님은 물질적인 빛을 가지지 않고 어둠에 둘러싸여 지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색깔에 연연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 분이 어느 색깔을 가져야 한다면, 우리 머리 위의 푸른 하늘색이나 바다의 푸른 물색을 통해 가깝게 상징될 것이라고 믿는 편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백인이라고 한다면, 하느님이 하얀색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결단코 저항할 것이다. 우리는 육체를 지닌 존재이지만 하느님의 색깔의 문제는 추상적인 것으로 남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아프리카의 이주해서 흑인들의 나라를 세우는 것을 소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백인들 사이에 남아 있는 한, 흑인들은 악마가 검은색이고 흑인은 악마에 가깝다고, 하느님은 하얗고 흑인은 하느님과 닮은 점이 없다고 믿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서의 효과는 자신을 경멸하고 깍아내리는 데 이른다. 절반의 흑인들이 하얘지려고 노력하고 있고, 나머지 절반은 백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들의 불목하니가 되려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결과 우리 종족을 위대하게 하고 드높이기 위한 생각에 바쳐질 시간이 자기가 백인이 아닌 것이 얼마나 슬픈가를 생각하는데 허송된다.
<<옵져버(Observer)>>지(紙)가 우리를 미쳤다고 평결하기 위해 제시한 내용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맺는다-- "하느님은 흑인이다."
간단히 이 글의 배경을 달아 놓는다.
1. 미국 흑인의 대표적인 종단인 AME 교회(Af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터너 주교(위의 그림)가 1898년 [옵져버]지의 주장에 반박해서 발표한 글이다.
2. 19세기 말 노예 해방 이후, 미국 흑인들이 살기가 좋아졌냐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짐 크로우(Jim Crow) 법이라는 인종차별법이 제정되어, 흑인들을 선거권을 박달당하고, 모든 공공시설 사용을 금지당하게 된다. 1915년까지 흑인들에 대한 차별이 극에 달하는데, 그래서 이 시기를 바닥 시대(the Nadir period)라고 부르기도 한다.
2. 19세기 말 노예 해방 이후, 미국 흑인들이 살기가 좋아졌냐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짐 크로우(Jim Crow) 법이라는 인종차별법이 제정되어, 흑인들을 선거권을 박달당하고, 모든 공공시설 사용을 금지당하게 된다. 1915년까지 흑인들에 대한 차별이 극에 달하는데, 그래서 이 시기를 바닥 시대(the Nadir period)라고 부르기도 한다.
3. 흑인들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교회였다. 따라서 사회 개혁의 욕구가 교회를 통해 결집하는데, 그 노선은 다양했다. 여기서도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꽤 깊었다. 터너 주교의 지적대로 백인들의 가치를 내면화해서 살아가는 흑인들의 숫자도 많았기 때문에, 흑인들의 목소리가 결집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4. 터너는 미국을 떠나 아프리카로 가자는 극단적인 노선을 주장했다. 실제로 서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는 미국으로부터 온 흑인들이 주축이 되어 건국한 나라이다. 하지만 주류는 미국 사회에 남아 그 일원이 되는 길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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