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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선교사문헌

무스, "한국의 마을 생활" 중에서

by 방가房家 2009. 8. 4.

Moose, J. Robert, <<Village life in Korea>> (Nashville: Publishing House of the M. E. Church, South, Smith & Lamar, agents, 1911). 우리말 번역본은 <<1900, 조선에 살다>>


소경 상태에 있는 비참한 이교도들(poor heathen in their blindness)을 보라.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관습의 족쇄에 묶여 있는지 보라. 또한 그들이 얼마나 끔찍한 상복을 입고 있는지를 보라.
그러고 나서 아주 솔직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고향 저쪽으로 떠났다는 이유로 모든 여성들이 검은 옷을 입고 큰 검은 면사(綿絲) 뒤에 얼굴을 가려야만 하는 우리의 엄격한 복식 규정이 이교도의 모습과 과연 무슨 차이가 있는지를 보도록 하자. 도대체 왜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을 믿는 남녀들이 사랑하던 사람이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절망적인 이교도 관습의 가리개를 쓰고 있어야 하는가? 이제 기독교 여성들은 분연히 일어나 어둡고 절망적인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이 이교도 관습을 영원히 떨쳐버릴 때가 되었다.(175-76)



제20장 마을 종교

(189)
이 장을 시작하기에 앞서 ‘종교’라는 용어의 의미를 명확히 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전과 여러 책에서 많은 정의들을 볼 수 있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운 정의는 없다. 그래서 나는 많이 사용되어온 용어 ‘종교’에 대한 정의를 시도하고자 한다. 이 정의는 어원론적 의미를 밝히려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사용된 의미보다는 결국 바라보는 시점에서의 마음속에 있는 의미를 밝히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영적 영역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믿음의 총체이다.(Religion is the sum total of all man's belief in a spiritual realm)
어떤 종류의 종교도 갖고 있지 않은 민족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흔히 말한다. 마찬가지로 무엇을 믿을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령(spirit)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 종교가 없다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조금만 보아도 그러한 사람들이 영적 영역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종교에 대해서 코웃음을 치는 교육받은 미국인들이라도 침대차의 13번 침대나 호텔의 13번 방을 배정받는다면, 혹은 13명이 참석하는 파티에 오라고 초대한다면, 이를 거절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종교의 일부이다. 이는 행운을 위해 말이 편자를 문에 걸어놓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마을 종교를 다루기에 앞서 내가 이상의 근본적인 원칙들을 언급한 것들은, 독자들이 이 주제를 넓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한국의] 마을 종교(village religion)는 순수하고 단순한 종교로, 어떤 특정한 종교 체계는 아니다. 그것은 유교라고 불릴 수도 없고, 불교도 아니며, 순수하고 단순한 주물숭배(fetichism)도 아니다. 마을 사람들은 정령숭배자(spirit worshipper)들이며, 정령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들의 종교에 덧붙이려는 태도를 지녔다. 교육 받은 양반들은 자신이 큰 스승 공자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집에 들어가 보면 유교와 무관한, 정령숭배의 기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것은 불교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 역시 자신의 [종교] 체계에서 유교나 주물숭배에 속한 것들을 배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마을 사람들의 종교적 행위와 신념 속에는 기원을 가늠할 수도 없는 아득한 옛날로부터 내려온 것들이 많이 들어 있다. 이 점은 4세기 중엽 한국에 들어온 불교나, 그 시기로부터 멀지않은 시점에 이 나라에 등장한 유교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그들이 들어온 시점보다 훨씬 이전부터 한국인들은 종교를 갖고 있었고, 오래된 체계의 많은 부분들이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살아있는 것이다.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온 우주는 육해공에 살고 있는 혼령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다양한 계급을 이루고 있으며, 그들 중에는 선하거나 악하거나 선악에 무관한 다양한 부류가 있다. 어떤 것들은 순수하고 단순한 정령으로 시공간에 존재하지 않고, 다른 것들은 육체에서 벗어난 인간 영혼이다.
이 정령들 중에 우두머리는 하느님(Hananim)으로, 만물을 창조하고 햇볕과 비를 내리는 존재이다. 그는 기독교의 하느님(God) 관념에 근접한 정령이다. 그래서 개신교파에서는 하느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모든 정령 중 최고인 이 존재는 사람들의 제사에서는 별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이것은 아마 그가 선한 존재로 인식되지만 한국 종교가 공포의 종교이지 사랑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생긴 결과가 아닌가 한다. 해를 끼치지 않는 선한 정령을 굳이 건드릴 이유는 없다. 하지만 악한 정령은 달래어져야 한다. 극심한 가뭄 때에는 왕의 특명으로 양을 잡아 하느님께 제사 드린다. 이 제사가 드려지는 제단을 제외하고는 하느님을 위한 사원이나 사당은 없다. 그러므로 마을 종교는 위대한 정령 하느님과 큰 관련이 있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정령숭배에는 특별한 사원이 없다. 이점에서 불교와는 다른데, 불교는 훌륭한 사원을 많이 갖고 있으며 주재하는 많은 수의 사제들을 거느리고 있다. 정령숭배는 주물과 사당들이면 충분한데, 이 나라 어디에서도 이것들을 볼 수 있다. 사제를 유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무당과 판수가 있어 다른 종교 체계의 사제에 어느 정도 맞먹는 역할을 한다. 무당은 언제나 여성이고 가장 하위의 비천한 계급에 속한다. 그녀는 세상에 만연한 악령에 직접 접촉하여, 심신을 괴롭히려 들어온 악령들을 떠나도록 간청하고 설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의 종교적 감성은 너무 강력해서 고위급의 교육 받은 계층의 사람들도 어려움에 빠지면 무당을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무당들처럼 돈을 많이 버는 여성 계급은 이 나라에 없을 것이다.
판수는 어떤 계급 출신도 될 수 있지만, 그 직업은 무당과 마찬가지로 가장 천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모든 판수는 맹인이며, 설득이 아니라 힘으로 정령을 다스릴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들은 점을 치며, 아픈 사람들에서 악령을 몰아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령들은 종종 이 사람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데, 그 증거는 그들이 맞는 막대기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이 막대기 묶음을 흔히 볼 수 있었는데, 빗자루 정도 크기에 2 피트 정도의 길이였다. 불쌍한 정령들이 판수 손에 얻어맞는 바람에 막대기 끝은 갈라져 있다고 했다. 어떤 때는 다루기 힘든 정령을 병에 넣고 복숭아나무 가지로 만든 마개로 막아 무당에게 주어 멀리 가져간 후 땅에 묻기도 한다. 판수는 하나의 계급을 이루어 잘 살고 돈을 많이 번다. 서울 거리에서는 대나무 막대로 길을 더듬어가며 낮은 소리로 고객을 부르는 판수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또 아픈 사람에게서 악령을 쫓아내기 위해 그들을 찾는 사람들에 이끌려 서둘러 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무당과 판수는 혼상례의 길일을 정하고, 여행 떠나는 날을 잡는 등 일상의 다른 많은 일들을 위해 일하기도 한다. 모든 마을에는 정령을 기리는 특별한 축제의 날이 있고, 이때도 무당과 판수가 참여한다.
어딜 가나 오래지 않아 정령 숭배의 모습을 보게 된다. 모든 집에는 지키는 정령들이 있다. 집자리의 정령 혹은 주인[터주]은 흔히 뒷마당에 있는데, 그의 거처는 작은 천막 모양으로 볏짚을 덮은, 쌀 낟알이 담긴 옹기이다. 터주의 거처를 무당이 만드는 경우도 있다. 무당은 종이를 몇 겹으로 접고 겹겹이 돈과 쌀을 끼워 넣는다. 그러고는 그것을 술에 듬뿍 적셔 기둥이나 집의 한쪽으로 던진다. 그것이 거기  달라붙어서 터주가 머무르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집에는 또 여성들이 특별히 복을 비는 정령이 있다. 이것은 여성의 구역에 항상 있는데, 삼각형 쌀자루를 채워서 목적에 맞는 격리된 장소에 걸어 둔 것이다. 그밖에도 일일이 언급하기 힘들 정도의 정령들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집집마다 이루어지는 숭배의 일부를 이룬다. 죽은 친지의 정령은 많은 주의를 요한다. 그들을 잘 먹이고 입혀야 하기 때문에, 정령들에게 바쳐진 천과 옷가지로 가득한 바구니가 있어 안전한 곳에 보관된다. 사람들은 신실하게 그것을 보관하고 대대로 물려준다. 또한 집의 다른 구석에는 종이로 된 장식물, 낡은 신, 넝마, 정령을 위해 특별히 만든 신 등이 매달려 있다.
마을의 입구는 한 무리의 나무 기둥들의 보호를 받는다. 이 기둥 꼭대기는 무시무시한 외양으로 봐서는 정령을 놀래켜 쫓아내기 위한 얼굴이 새겨져 있다. 이들에겐 악마의 기둥(devil post)이라는 적당한 이름이 붙여졌는데, 여기엔 정령에 바치는 공물로 종이, 천조각, 머리카락 뭉치가 묶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언덕배기를 넘어가는 길에는 대부분 산신령(spirit of mountain)을 위한 사당이 있는데, 이것은 길이 없는 언덕이나 산꼭대기에도 많이 있다. 이러한 사당의 종류는 매우 다양한데, 가장 흔한 것은 나무 아래에 돌 한 무대기가 있고 그 나무에는 오색 비단과 다른 천조각, 종잇조각, 정령에 받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제물을 담은 주머니가 달려 있는 형태이다.  사당중에는 잘 지어진 집도 있다. 이들은 모두 조그마하며, 기와를 한 것도 있고 초가를 올린 것도 있다. 그 안에는 산신령을 나타내는 노인의 그림, 위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제물들이 있으며, 특별한 모양의 돌이나 철로 된 작은 말, 그리고 석불이 있기도 한다. 이 사당 중 많은 곳에는 신자들이 가져다놓은 돌들이 쌓여있다. 이 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쌓여 있었는지는 누구도 말할 수 없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이 길을 지났더라면 길가 사당의 돌들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이 예배(이렇게 불러도 된다면)에서 이상한 부분은, 행인이 멈춰 서서 정령들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돌무더기 위에 침을 뱉는다는 것이다. 밥과 다른 음식들도 돌 위에 올려진 것도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은 보이지 않은 세계로부터 도움을 구하는 고단한 영혼들이 올려놓은 것이다. 나는 이곳을 지나다가, 최대한 정성을 다해 차린 음식상을 돌무더기 앞에 갖다 놓고, 정령에게 나와 드시라고 부르며 손을 빌면서 엎드려 절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보고 슬퍼졌던 일이 몇 번 있었다.
(195……196)

마을 종교에서 주목해야 할 다른 형태는 유교에 기원을 둔 조상 숭배이다. 이것은 한국 유교의 버팀목으로, 조혼, 남아선호, 축첩, 여성비하 등 온갖 악습을 낳는 근원이다. 오직 아들만이 조상숭배 의식을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아들은 부모의 앞날과 무궁한 행복을 위해 절대로 필요하다. 양자가 이 의식을 행할 수는 있지만, 딸은 할 수 없다.
(196……199)

이 오래된 숭배의 완고한 율법은 무지한 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교육받은 상위 계층 사람들도 변치 않는 위력으로 사로잡고 있다. 기독교가 이 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벌여야 할 가장 어려운 전투는 이 오래된 숭배의 율법 주위의 성채에 집중될 것이다.
(199……203)

바울이 “아레오바고 법정(Mar's hill) 가운데 서서, ‘아테네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내가 보기에 모든 면에서 매우 종교적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가 말한 것은 오늘날 한국 마을에 들어온 어떤 선교사들도 진실로 똑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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