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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기독교세계

[번역] 불구덩이를 통해 보낸 신호

by 방가房家 2026. 1. 28.

미국 개신교회의 대안적 핼러윈 문화 중 하나인 ‘헬 하우스(Hell House)’를 소개한 논문이다.(전에 다른 대안 문화인 트렁크 앤드 트리트를 간단히 언급한 적이 있다.) 세속의 ‘귀신의 집’을 ‘지옥의 집’으로 변형하여 기독교 죄 개념을 보여주는 공연을 만들었다. 지옥에 갈 죄의 항목 중에는 동성애와 낙태가 강조된다.
논문은 헬 하우스의 현황, 공연을 주도하는 사람들의 생각, 그러한 공연의 역사적 맥락 등을 흥미롭게 소개하였다. 다만 이 공연을 통해 ‘종교 감정의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분석적으로 서술하는 데는 부족해 보인다. 글 마지막의 표현대로 ‘소박한 시도’라는 아쉬움이 있다.

Ann Pellegrini, “‘Signaling Through the Flames’: Hell House Performance and Structures of Religious Feeling,” American Quarterly 59, no. 3 (Fall 2007): 911935

불구덩이를 통해 보낸 신호: 헬 하우스(Hell House) 공연과 종교 감정의 구조
앤 펠리그리니(Ann Pellegrini)

 

"핼러윈은 새로운 크리스마스인가?" 이것은 200610월 널리 유포된 온라인 기사에서 ABC 뉴스가 던진 질문이다. 해당 기사는 핼러윈이 "이제 크리스마스 바로 다음가는, 연중 두 번째로 큰 장식 축제"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실제로 핼러윈은 수십억 달러 규모의 비즈니스다. 전미 소매 연맹(National Retail Federation)20069월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소비자들의 2006년 핼러윈 지출액은 전년도의 329천만 달러에서 증가한 496천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었다. 물론 엄격히 재정적인 관점에서 볼 때 크리스마스가 당분간 유령이나 고블린 눈치를 볼 일은 없다. 평균적인 소비자가 크리스마스 관련 구매에 791.10달러를 지출하는 반면, 핼러윈에는 단 59.06달러만을 소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전적 수치만으로는 모든 이야기를 다 설명할 수 없다. "핼러윈은 새로운 크리스마스인가?"라는 ABC의 수사적 질문은 사실 현대 미국 내의 종교 정동(religious affect)과 감정(feeling)의 정치에 관한 실질적인 문제들을 시사한다. 미국의 보수 개신교인들은 핼러윈이 이교도적 신앙 및 오컬트와 연관되어 있어 청소년들을 사탄의 유혹에 취약하게 만든다고 오랫동안 우려해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려는 핼러윈이 새로운 크리스마스가 된다는 점보다는, 핼러윈이 크리스마스의 참된 의미인 그리스도를 완전히 부정하게 만드는 통로가 된다는 데 있다.

이러한 우려로 인해 복음주의, 근본주의, 오순절 교파를 포함한 일부 보수 개신교 교회들은 '트릭 오어 트리팅(trick-or-treating)' 대신 추수 축제나 헤이라이드(hayrides)와 같은 대안적 행사를 제공해 왔다. 반면 다른 이들은 사탄에게 정면으로 맞서 핼러윈을 창의적인 전도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스스로 "오컬트 반대 전문가이자 침례교 악령 퇴마 전문가"라고 칭하는 트로이 프랭클린(Troy Franklin) 박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른바 '할로위트니싱(HalloWitnessing, 핼러윈+증언)'이다. 기독교 연합(Christian Coalition)의 설립자인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 또한 이 시기를 이용하고 있다. 과거 그는 <700 클럽>에서 핼러윈을 맹렬히 비난하며1982년의 한 악명 높은 방송분에서 그는 핼러윈 폐쇄를 주장하며 마녀 분장을 하는 것을 "사탄의 의식을 수행하고 그에 참여하는 것"과 동일시했다오늘날 그가 운영하는 기독교 방송망(CBN) 웹사이트는 자녀를 걱정하는 부모들에게 핼러윈을 복음 전도의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자원들을 제공한다.(예컨대 트릭 오어 트리팅 하는 아이들에게 사탕과 함께 종교 팜플렛을 나누어 주라는 제안 등이 포함된다.)

핼러윈을 사탄의 의식과 동일시하는 로버트슨의 발언은 월드 와이드 웹(WWW)이라는 영원한 현재 속에서 계속 유통되고 있으며, 2004년 핼러윈에 대한 복음주의적 우려를 다룬 나이트 리더(Knight-Ridder) 기사에서도 인용된 바 있다. 이 인용구가 마치 로버트슨의 현재 입장("핼러윈을 폐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을 대변하는 것처럼 재활용되는 것은, 많은 복음주의 보수주의자들이 청소년 포교를 위해 세속적 대중문화와 벌이고 있는 지속적인 협상 과정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것은 청소년 문화와 세속적 오락의 언어를 활용하려는 노력이다.

핼러윈과 그 잠재적 위험에 대한 가장 혁신적인 대응 중 하나가 바로 '헬 하우스(Hell House)' 현상이다. 헬 하우스는 매년 핼러윈 시즌마다 세속 문화 곳곳에 등장하는 '귀신의 집(haunted houses)'을 복음주의적으로 변주한 것이다. 세속의 귀신의 집중 일부는 영리 목적의 놀이공원에서 운영하는 시즌 상품이며, 다른 것은 지역 공동체 단체가 운영하는 저예산 모금 행사다. 일반적인 귀신의 집이 하느님 맙소사가 나올 정도로 관객에게 겁을 주는 것(scare the bejeezus out of you)을 약속한다면, 헬 하우스는 관객을 예수께 인도할 만큼 겁을 주는 것(scare you to Jesus)을 목표로 한다. 전형적인 헬 하우스에서는 악마(demon) 가이드가 관객을 안내하며 피비린내 나는 일련의 재현 장면들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동성애, 낙태, 자살,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을 거부하는 행위 등 나쁜 행동으로 인해 지옥으로 곧장 떨어지는 죄인들의 모습이 묘사된다.

본 논문은 헬 하우스에서 복음 전도의 매체로 연극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논의한다. 필자는 200610월 콜로라도주 덴버 교외 손턴(Thornton)에 위치한 '뉴 데스티니 크리스천 센터(New Destiny Christian Center)'에서 상연된 헬 하우스를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필자는 10일간의 공연 기간 중 두 차례 공연을 관람했으며, 해당 센터의 담임 목사인 키넌 로버츠(Keenan Roberts)와 심층 인터뷰를 가졌다. 또한 2001년 다큐멘터리 <헬 하우스>를 참조하고, 이를 200610월 뉴욕 브루클린의 한 '세속적' 극단이 무대에 올린 헬 하우스와 비교함으로써 논의를 보완할 것이다.

본 고찰을 통해 종교적 감정이 어떻게 살아 움직이고, 경험되며, 전달되는가에 관한, 더 큰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필자는 이러한 공연들이 어떻게 복음 전도 기능을 수행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문화 비평가들이 단순히 헬 하우스의 노골적인 내용이나 신학(헬 하우스가 무엇을 말하는가)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고 제안한다. 대신 헬 하우스 공연이 참여자들을 위해 생성해 내는 정동적으로 풍부한 세계(헬 하우스가 무엇을 하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방법론적 접근은 정치적 판단이나 윤리적 비평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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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 하우스가 세속 대중문화의 시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조지 래틀리프(George Ratliff)2001년 다큐멘터리 <헬 하우스(Hell House)>를 통해서였다. 이 작품은 영화제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20025월 미국 공영 라디오(NPR)의 유명 프로그램인 <디스 아메리칸 라이프(This American Life)>"내 어깨 위의 악마(Devil on My Shoulder)" 에피소드에서도 다루어졌다. 이 다큐멘터리는 텍사스주 시더 힐에 위치한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 트리니티 교회'가 매년 기획하는 헬 하우스에 초점을 맞추었다. 매년 11천 명에서 15천 명에 달하는 인파가 달라스 근교의 이 교회로 몰려든다. 래틀리프를 비롯한 이들은 트리니티 교회가 1990년에 헬 하우스를 창시했다고 보았으나, 사실 이 현상은 적어도 197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제리 폴웰(Jerry Falwell) 목사가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의 토마스 로드 침례교회(TRBC)에서 '스캐어메어(Scaremare)'를 처음 무대에 올렸기 때문이다. 스캐어메어는 오늘날 폴웰이 설립한 리버티 대학교의 청소년 사역팀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스캐어메어 웹사이트는 이 연례 행사를 "유령의 집(fun house)과 죽음의 집 사이의 균형"이라고 묘사한다. 분명한 것은 스캐어메어, 헬 하우스, 그리고 1980년대 중반에 등장한 저지먼트 하우스(Judgment Houses) 모두 공포 장르에 대한 관객의 익숙함과 세속적 놀이공원의 유령의 집 시설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익숙함은 스캐어메어와 그 파생 기획을 만드는 이들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세속 대중문화에 대한 지식을 '구원받지 못한 자들'과 연결하기 위한 통로로 사용한다. 인류학자 수전 프렌드 하딩(Susan Friend Harding)은 그녀의 저서 제리 폴웰의 서(The Book of Jerry Falwell)에서, 월트 디즈니 월드의 '헌티드 맨션(Haunted Mansion)'이 스캐어메어의 직접적인 영감이 되었다는 한 청소년 사역자의 말을 인용한다. 하딩의 견해를 빌리자면, 기독교적 유령의 집은 기독교 메시지를 확장하기 위해 세속 문화와 기독교를 결합한 "의도적 혼종성을 띤(willfully hybrid)" 경험인 셈이다.

이러한 혼종성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히 18세기 부흥사 조지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는 젊은 시절 연기를 공부했던 경험을 살려 그리스도에게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 연극적 관습을 활용했다. 그는 런던과 미국에서 수천 명의 관객을 사로잡았는데,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과 온몸으로 표출하는 열정 등 스스로를 극화한 그의 설교는 연극 무대를 강력히 비난하고 반연극적 신학을 수용했던 그의 입장과 대비되어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해리 S. 스타우트(Harry S. Stout)는 화이트필드가 회심 후 자신의 첫 열정이었던 연극과 맺은 관계에 '모방적 경쟁(mimetic rivalry)'의 요소가 있다고 분석한다. 화이트필드는 이후 연극을 마치 '경쟁 관계에 있는 교회'처럼 맞서 싸웠으나, 정작 그 싸움에는 경쟁자의 도구(연극적 기법)를 사용했다. 때로는 주의 일을 하기 위해 악마와 거래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대중문화와의 결합은 개신교 내부의 단순한 교파적 분열을 초월하고, 점차 상업화되는 공론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표현 양식과 감성적 스타일을 제공했다. 화이트필드는 에이미 샘플 맥퍼슨(Aimee Semple McPherson)의 삽화 설교부터 테드 해거드와 짐 바커가 자신의 죄성을 증언하며 흘린 남성적인 눈물에 이르기까지, 스타일 면에서 미국 복음주의 퍼포먼스의 전형을 세웠다.

헬 하우스는 복음주의적 현상이지만, 신학적·정치적으로 다양한 복음주의 개신교 전체를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필자는 헬 하우스가 지향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종교적 감수성과 생활 방식이 더 넓은 복음주의 세계관 속에서 공유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필자가 여기서 탐구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공유된 종교 감정이다.

헬 하우스의 가장 두드러진 지지자는 19세기 말 성결 운동과 1906년 아주사 거리 부흥 운동에 뿌리를 둔 오순절 교파인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 소속 교회들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성회는 전 세계적으로 5천만 명 이상의 신도를 보유한 미국 및 세계 최대의 오순절 교단이다. 회심을 단 한 번의 사건으로 보는 조지 화이트필드의 철저한 칼뱅주의와, 자유 의지, 점진적 성화, 그리고 (자유 의지가 있기에 가능한) 신앙적 타락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성회의 알미니안주의적 경향 사이에는 신학적 간극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감정의 문화와 배양'에 대한 놀라운 강조다. 호소의 대상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다. 하나님의 성회는 그들의 사명 선언문에도 명시되어 있듯, "신자들을 영적으로 성장시키고 다음 세대를 헌신자로 준비시키기 위해 모든 효율적인 수단을 동원"할 의지가 있다. (대중 연예 산업과 구원 사업을 결합한 선구자 맥퍼슨이 초기 설교 사역을 하나님의 성회 목사로서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전도와 제자 훈련이라는 이 쌍둥이 헌신은 헬 하우스의 사역에서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미국 전역에 헬 하우스를 전파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은 뉴데스티니(New Destiny) 교회의 담임목사 키넌 로버츠(Keenan Roberts). 그는 대중 매체를 영리하게 활용하여 헬 하우스의 메시지가 문화적 변두리를 넘어 확장되도록 도왔다. '키넌 목사'1995년부터 덴버 지역에서 헬 하우스를 기획해 왔으며, 현재의 뉴데스티니 교회 역시 시더힐의 트리니티 교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회 소속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키넌 목사는 시원시원한 웃음과 탁월한 이야기꾼의 재능을 지녔지만, 그 내면에는 강렬한 목적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농구 장학생으로 대학에 다녔던 그는 6피트 5인치(195cm)의 거구로 압도적인 신체적 존재감을 자랑한다. 그는 2006년 연기 활동을 중단하기 전까지 매 시즌 '악마 가이드' 역을 맡았는데, 관객들에게 꽤나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악마 가이드 연기를 "최고"였다고 자평하며, 필자 또한 이를 의심할 이유가 없다. 그는 "그 역을 수행하며 정말 즐거웠고, 덩치가 커서 더 재미있었다"라고 회고한다.

키넌 목사는 1990년대 초반 동료 청소년 목사로부터 기본 개념을 전해 듣기 전까지 헬 하우스에 대해 들어본 적조차 없었다. 그는 전도 도구로서 그것이 가진 잠재력에 "바로 사로잡혔다"고 회상한다. 이후 그는 1993년 뉴멕시코주 로스웰의 한 교회에서 자신의 첫 헬 하우스를 무대에 올렸다. 비록 헬 하우스 현장에 뒤늦게 합류했을지는 모르나, 그는 아웃리치(outreach, 대외 선교)와 메시지 확산의 도구로서 그것이 지닌 잠재력을 십분 활용했다. 1996, 그는 "헬 하우스 아웃리치 키트"(2006년 판 가격은 299달러였다)를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지난 10년 동안 미국 전역과 유럽의 일부 교회에 약 800세트의 키트를 판매했다고 밝혔다(도판 1 참조). 헬 하우스 아웃리치는 마케팅과 선교 사업을 절묘하게 결합한 결과물이다.

헬 하우스는 경계가 지워진 "안전한" 공포 체험을 갈망하는 관객의 욕구를 파고들려 한다. 관객들은 타인과 함께 숨을 죽이고 경악하기를 원하며, 아무런 상처 없이 그 자리를 떠나기를 바란다. 그들은 심장이 뛰고 속이 뒤틀리는 '오락으로서의 공포'가 주는 카타르시스를 원한다. , 놀이기구나 영화 혹은 공연이 끝나면 다치지 않은 채 현실 세계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공포의 대상(가령 흡연이나 뱀파이어)은 가상임이 드러나고, 롤러코스터와 같은 무서운 경험은 일시적이며 생존 가능한 것으로 판명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헬 하우스는 영원을 위한 놀이다. 헬 하우스는 근본적인 영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안전""공포", "실재""가상"의 경험을 이용하고 재부호화하기까지 한다. 그것은 관객들이 지혜롭게 살지 않을 때 마주하게 될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기를 원한다. 그 현실은 고통과 잔혹함 속의 죽음뿐만 아니라(찰스 담브로시오가 지적하듯, 헬 하우스는 오직 가장 참혹한 결말만을 상상할 뿐이다), 영원한 저주다. 롤러코스터는 결국 멈추지만, 지옥은 영원토록 지속된다. 더욱이 헬 하우스 공연이 폭로하는 세계 속에서 악마는 알레고리나 무의식의 투영이 아니다. 그는 실재하며 당신을 쫓고 있다. 그러나 이 무자비한 환상은 이 세상의 그 어떤 해피엔딩보다 철저한 안전에 대한 약속,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에 의해 완화된다.

헬 하우스의 주 타겟은 10대 청소년이며, 이러한 타게팅은 헬 하우스가 논란이 된 원인 중 하나이다. 비판론자들은 이들이 특히 취약한 인구 집단에 증오를 설교한다고 비난한다. 예컨대 2006년 핼러윈 시즌을 앞두고 '전미 게이 및 레즈비언 태스크포스(NGLTF)'는 헬 하우스와 그 운영자들이 편견과 동성애 혐오 메시지를 퍼뜨리고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헬 하우스의 메시지가 "성소수자(LGBT) 청소년들을 문자 그대로 악마화함으로써, 많은 이들이 매일 겪는 괴롭힘과 폭력을 부채질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보고서의 저자인 사라 케네디와 제이슨 찬초토는 또한 헬 하우스가 "청소년이 성소수자인 동시에 기독교인일 수는 없다"는 잘못된 관념을 고착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콜로라도 교회 협의회'와 같은 기독교 단체들도 헬 하우스가 기독교 메시지를 왜곡하는 공포 기반의 신학에 의존하고 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매년 미국 전역에서 헬 하우스(Hell House) 사역에 참여하는 수천 명의 성인 남녀와 청소년들은 스스로를 증오나 불관용을 퍼뜨리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으며, 타인의 공포를 부당하게 조작하고 있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이에 대해 키넌(Keenan) 목사는 "공포가 효과적인 스승이 아니라고 누가 결정했는가?"라고 반문한다. 그의 이러한 수사적 질문은 다큐멘터리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트리니티 교회의 청년부 목사이자 헬 하우스 코디네이터인 팀 퍼거슨(Tim Ferguson)의 말, "지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구원의 일부다"라는 대목과 궤를 같이한다. 이러한 문답이 시사하듯 헬 하우스는 관객에게 겁을 주도록 하되, 그것이 능숙하게 모방하는 세속 오락물보다 훨씬 고귀한 목적을 지향한다. 키넌 목사는 자신이 증오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단호히 거부한다. "누군가가 그 메시지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증오 섞인 메시지라는 의미는 아니다. ... 또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바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심판(judgmental)이라고 믿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충분한 근원이라고 믿는다." 헬 하우스의 경험을 이해하는 방식 사이의 불협화음증오와 사랑, 왜곡과 진실은 이데올로기나 신학의 문제인 만큼이나 정동(affect)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감정의 구조(structure of feeling)'로서의 구원이다.

'감정의 구조'라는 용어는 물론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에서 온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와 문학에서 윌리엄스는 "아직 완전히 명료화되지는 않았으나 활발하게 작용하고 압박을 가하는" 경험들인 '-발생적(pre-emergent)'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 표현을 제안했다. 그는 '세계관'이나 '이데올로기'같은, 보다 형식적인 개념과 구별하기 위해 '감정'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그는 이러한 개념들을 포기하기보다는, "형식적이거나 체계적인 신념들"이 어떻게 구체적인 관계와 경험 속에 내포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지 진지하게 고찰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가 논의하는 것은 충동, 억제, 어조의 특징적 요소들, 구체적으로는 의식과 관계 속에 있는 정동의 요소들이다. 이는 사고에 대항하는 감정이 아니라, 느껴진 사고(thought as felt)이자 사고된 감정(feeling as thought)이다. 즉 살아있고 상호 연관된 연속성 속에서 나타나는 현재적 형태의 실천적 의식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요소들을 하나의 '구조'로 정의한다. 이는 특정한 내부 관계를 지닌 집합체로서, 동시에 서로 맞물려 있으면서도 긴장 관계에 있다. 또한 우리는 여전히 과정 중에 있는 사회적 경험으로 이를 정의한다. 이는 종종 사회적인 것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사적이고 특이하며 심지어 고립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분석을 통해서는(드물긴 하지만) 그 발생적, 연결적, 지배적 특성, 나아가 그 위계질서를 드러낸다.

헬 하우스 홍보 자료는 자신들이 객관적 현실과 성경에 기반한 진리를 제시한다고 주장하지만, 결국 개종자를 얻거나 영적 헌신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은 사실 확인이나 성경 해석학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정동적 일치(affective congruences)의 문제다. 헬 하우스 공연은 관객에게 '증언'한다. 확신이 생기는 과정에서 동성애는 그르다거나, 낙태는 악이라거나, 사탄은 실재한다는 식의 기존 신념이 작용할 수는 있으나, 그 확신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참여자는 이질적이고 심지어 모순적인 경험, 신체적 감각, 감정, 그리고 사고를 하나로 묶어주는 더 깊은 종교 감정의 구조에 몰입(또는 재몰입)하게 된다.

편견을 조장하거나 기독교적 메시지를 왜곡한다는 헬 하우스에 대한 비판이 참여자들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반대자들이 '사실'을 가지고 논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감정은 사실로 싸워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봉자들에게 헬 하우스는 틈새를 메우고 모순을 달래며, 불협화음 속에서 공명(resonance)을 만들어낸다. (아래에서 명확히 하겠지만, 헬 하우스가 연극성에 의존한다는 것은 그 틈새가 다른 곳에서 다시 나타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키넌 목사는 지옥으로 가는 동성애자나 피투성이가 된 '낙태 소녀'의 묘사로 인해 야기된 논란을 오히려 반겼다. 그는 이러한 논란을 "믿기지 않는 축복"으로 여긴다. 언론의 거센 비판은 교회가 독자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 메시지를 "증폭시키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메시지는 더 큰 무대를 앞두고 있다. 제작자 아담 슐만(Adam Shulman)과 줄리 실버맨-(Julie Silverman-Yorn)에 의해 헬 하우스를 소재로 한 영화가 기획 중이다.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밝힌, 2005년 영화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의 감독 스콧 데릭슨(Scott Derrickson)이 연출자로 낙점되었다. 이 장편 영화는 한 기독교 단체가 헬 하우스를 상연하면서 마을에 생긴 논쟁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다.

이것이 키넌 목사가 모든 비판에 무감각하다는 뜻은 아니다. 필자와의 90분간의 인터뷰 동안, 그는 자신의 메시지와 사역을 프레드 펠프스(Fred Phelps) 목사의 그것과 명확히 대조하며 두 번이나 언급했다. 캔자스주 토피카의 웨스트보로 침례교회를 이끄는 펠프스는 1998년 살해된 게이 대학생 매슈 셰퍼드(Matthew Shepard)의 장례식에서 시위를 주도하며 악명을 떨친 인물이다. 펠프스와 그의 소수 추종자들(대부분 가족들)"하나님은 동성애자를 증오하신다(God Hates Fags)", "매슈는 지옥에 있다"와 같은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었다. 펠프스와 그의 교회는 지금도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예를 들어, 웨스트보로 침례교회는 선동적인 웹사이트(Godhatesfags.com)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펠프스는 이라크에서 전사한 미군 장병들의 장례식에서도 시위를 벌였는데, 그는 이들의 죽음을 미국이 동성애를 용인한 것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해석했다. 피켓 중 하나에는 "전사한 군인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적혀 있었다. (펠프스의 행위로 인해 여러 주 의회는 장례식이나 추모식 500피트 이내에서의 정치적 시위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펠프스가 증오에 찬 극단주의의 척도가 되는 상황에서, 합리적이고 자비로운 모습으로 비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키넌 목사는 펠프스를 "광기 어린 미치광이... 내 의견으로는 그가 하는 모든 말은 성경과 정반대다"라고 묘사했다. 이와 극명하게 대조하며 키넌 목사는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나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 그리고 삶에서 온갖 문제들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한다. 그들의 특정한 문제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나는 그들을 아낀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동성애에 대한 헬 하우스의 정죄]이 증오에 찬 메시지라고 믿지 않는다." 키넌 목사 스스로는 헬 하우스 사역을 훌륭한 부모의 책임에 비유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서 놀아야 할지, 어디서 놀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매우 명시적이다. '여기서 놀아라, 저기서는 놀지 마라'고 전하는 것이 하나님이나 우리를 심판자처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좋은 부모들도 똑같이 행동한다." 키넌 목사는 증오를 조장한다는 비난에 매우 민감하며, 증오스러운 것과 고통스러울 정도로심지어 공격적일 정도로정직한 것 사이에는 명확한 구분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필자는 키넌 목사의 이러한 부인을 위선이나 망상으로 치부하기보다는,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고자 한다. 물론 헬 하우스와 키넌 목사의 수사학을 온전히 증오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싶은 유혹이 강렬할 것이다. 그러나 이 유혹을 거부함으로써 우리는 헬 하우스의 종교 감정의 구조가 어떻게 복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더 넓은 미국 공공 영역의 감정 문화와 맞닿아 있는지, 즉 어떻게 공명하고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사실 키넌 목사의 태도는 동성애에 관한 수많은 공적, 세속적 토론을 주도하는 "죄인은 사랑하되 죄는 미워하라"는 태도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재닛 R. 야콥슨(Janet R. Jakobsen)과 필자가 다른 곳에서 주장했듯이, "죄인은 사랑하되 죄는 미워하라"는 논리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관용적"이고 "개방적"이라고 느끼게 하면서도, 동시에 이웃과 동료 시민들에 대해 징벌적인 판단을 내리고 차별적인 정책을 옹호할 수 있게 한다. 실제로 엄격한 도덕적 판단과 뒤섞인 관용의 고백은 미국 정치 생활의 일상적인 특징이다. 심지어 쿠 클럭스 클랜(KKK)과 같은 증오 단체를 법정에 세우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단체인 '남부 빈민 법률 센터(Southern Poverty Law Center)'조차 증오에 맞서기 위해 "관용을 가르칠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관용은 진정으로 무엇을 제공하며, 누구에게 제공되는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동성 결혼을 금지하는 연방 헌법 수정안을 지지했을 때이는 영구적인 헌법적 하층민을 양산하는 조치였음에도 불구하고그는 "친절과 선의와 품위"를 호소하며 연설을 마무리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위선이나 정치적 기회주의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사회적 차별이 지배적인 감정으로 삽입되어 유지되는 미국 정치 생활의 거대한 구조에 관한 문제다. 관용의 감정은 실제로는 위계와 사회적 지배를 지탱한다. 관용은 보통 폭력과 사회적 분열에 대한 대응책으로 장려되지만, 실제로는 지배적인 중심과 주변부 사이의 '우리와 그들'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기존의 사회적 위계를 긍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더 냉혹하게 말하자면, 관용을 베푸는 자들에게 관용은 기분 좋은 선의처럼 느껴질 수 있겠으나, 관용의 대상이 되는 이들에게 그것은 증오받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필자는 헬 하우스가 성소수자(GLBT) 및 성 정체성을 고민하는 청소년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한 전미 게이 레즈비언 태스크포스(NGLTF)의 우려에 깊이 공감한다. 그런 청소년들에게 게이 남성이 에이즈로 죽어가는 모습에 환호하는 악귀들을 묘사한 헬 하우스를 목격하는 것은 자아에 대한 깊고 근원적인 소외감을 주는 타격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기독교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헬 하우스의 영향이 NGLTF 보고서가 우려하는 것처럼 일방향적이기만 할까? 우선, NGLTF는 퀴어 청소년들의 회복 탄력성을 과소평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메시지의 수용은 발신자의 의도에 의해 완전히 결정되지 않는다. 특히 성적 재현에 있어서는 의도치 않은 결과가 늘 발생한다. 어떤 청소년들에게는성소수자이든, 고민 중인 자이든, 혹은 아니든단지 동성 간의 에로티시즘을 엿보는 것 자체가 변태적인 즐거움이 되어, 원래는 고려하지 말아야 했던 가능성을 드러내 주는 계기가 될 가능성을 우리가 배제할 수 있을까? , 헬 하우스가 관객에게 다가가기 위해 사용하는 바로 그 매체인 '연극'이 메시지의 기조를 묘하게 뒤틀어버리는(queers the pitch)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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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 하우스와 관련하여 필자의 흥미를 끄는 대목 중 하나는, 관객에게 다가가 그들을 변화시키는 연극의 힘에 대한 신뢰다. 키넌 목사와 그의 사역팀은 오늘날 신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현대 미디어와 기술을 포함한 이 세상의 형식들과 결합해야 한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다. 2006년 판 홍보 키트부터는 제작 가이드, 헬 하우스 공연 DVD, 특정 장면의 공포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음향 효과와 음악이 담긴 CD 등 모든 구성 요소가 디스크에 담겨 제공된다. 웹사이트의 광고 문구에 따르면, 여기에는 "자살의 목소리부터 루시퍼의 소름 끼치는 도입부, 그리고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수많은 음향 효과"가 포함되어 있다.

키넌 목사의 대본은 모든 키트에 수정 가능한 문서 형태로 포함되어 있어, 각 교회 상황에 맞게 각색할 수 있다. 그의 헬 하우스는 7개의 장면으로 구성된다. 기본 키트의 처음 5개 장면은 키넌 목사가 "사회적 죄 문제"라고 부르는 것들, 즉 동성애, 낙태, 자살, 음주 운전, 사탄주의를 다룬다. 키넌 목사는 매년 자신의 교회에서 상연할 새로운 대본을 쓰는데, 5개의 "사회적 죄" 장면 중 2개는 항상 동성애와 낙태를 다루도록 남겨둔다. 그는 신이 달리 지시하지 않는 한 이 두 주제를 계속 최우선 순위에 둘 것이라고 말한다. 나머지 3개 장면은 새로운 이슈가 등장함에 따라 매년 주제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2006년 공연에는 메탐페타민 사용의 해악에 관한 새로운 장면이 추가되었다. 이 장면은 물론 비극적인 자동차 사고로 끝을 맺었는데, 이는 표준 대본의 음주 운전 서사와 일부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교회들이 매년 새로운 키트를 구매할 필요는 없다. 이미 구매한 키트를 보완하기 위해 업데이트된 새로운 장면들을 개별 CD로 구매할 수 있다. 현재 웹사이트에서는 음향 효과와 배경 음악이 완비된 16개의 개별 장면을 판매 중이다. 표준 대본의 첫 번째 장면은 "태생적 동성애라는 거짓말을 믿고 에이즈로 사망한 젊은 동성애 남성의 장례식"을 묘사한다. 그러나 45달러를 추가로 지불하면 "게이 결혼식 장면 패키지"를 구매할 수 있다.

이 활기찬 장면은 동성애의 요새와 태생적 동성애라는 기만에 맞설 강력한 무기를 당신의 병기고에 추가해 줄 것이다. 악마 가이드는 실제로 젊은 기혼 커플이 참여하는 예식을 집행한다. (아내는 필요한 남성적 외양을 위해 남성용 메이크업을 한다.) 가이드는 그들을 "남편과 남편"으로 선포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타임 워프를 통해 몇 년 후로 이동하며, 한 파트너가 에이즈로 죽어갈 때 악마들이 병실로 몰려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패키지에는 오리지널 로큰롤 웨딩 마치 CD, 사악한 분위기의 배경 음악 CD, 그리고 죽음의 북소리 트랙 CD가 포함되어 있다.

2006년 공연에서 이 장면(게이 결혼식)은 극의 서막을 열었는데, 이는 동성애와 특히 동성 결혼이 많은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에게 어떻게 결정적인 현안으로 자리 잡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림 1의 중앙에는 뉴 데스티니 교회의 게이 결혼식 장면 스틸컷이 보인다.) 그러나 연극이 너무 성공적일 때 발생하는 문제도 있기 마련이다. '태생적 동성애라는 기만'은 죄로 향하는 길을 닦기 위해 사탄이 놓은 덫이다. 게이 커플 역을 반드시 이성애자 기혼 커플이 연기해야 한다는 키넌 목사의 고집은 관객과 배우 모두에게 닥칠 위험을 최소화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성적인 장면이 아닌 다른 장면에서는 이와 유사한 예방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 , '낙태 소녀' 역에 반드시 남성이나 출산 가능 연령이 지난 여성만을 캐스팅해야 한다는 식의 특별한 경고는 없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소위 '게이 섹스'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헬 하우스 키트에서 추가로 구매 가능한 패키지 중 하나는 현대 청소년들의 '통제 불능의 성욕'을 묘사한다. 키넌 목사는 성관계를 맺으려는 십대 청소년 역에 항상 젊은 기혼 커플을 캐스팅하며, 극 중 소녀는 경험 많은 남자친구에게 '순결이라는 진주'를 바친다. 대본의 무대 지시사항에는 이 장면이 "품격 있으면서도 화끈하게(tasteful yet sizzling)" 연출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처럼 성적인 장면은 배우와 관객 모두에게 매우 휘발성이 강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 점은 다큐멘터리에서도 강렬하게 전달된다. 20018월 대본 회의 중, 팀 퍼거슨은 헬 하우스 청년 리더들에게 트리니티 교회의 그해 공연을 위해 기존 테마에 "새로운 반전"을 제안해 보라고 권한다. 한 젊은 여성이 "두 여자가 서로 유혹하는" 게이 바 장면을 넣자고 제안하자, 퍼거슨은 즉각 거절한다. "그러고 싶지 않다. 지금 방식대로 병상 장면을 연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 그는 지난 공연들에서 동성애 문제를 다루었던 방식을 언급한 것이다. 동성애를 에이즈와 동일시했던 그들은 대개 에이즈로 죽어가는 게이 남성이 임종을 지키는 여성 친구의 간곡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영접하기를 거부하다가, 숨을 거두는 순간 악마에게 끌려 지옥으로 가는 장면을 묘사했다. (결국 2001년 공연에서도 이 장면이 상연되었다.)

필자에게는 이 장면의 무엇이 "충분히 힘든(bad enough)" 것인지 여전히 불분명하다. 관객이 젊은 게이 남성의 육체적 고통에 공감하느라 그를 기다리는 영원한 형벌을 보지 못하게 될까 봐 그러는 것인가? 젊은 여성이 게이 바 장면 제안을 굽히지 않자, 퍼거슨은 자신의 반대 이유를 다른 방식으로 상세히 설명한다. "우리가 헬 하우스에서 이성 교제 장면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다. 공연 기간 내내 너무 붙어 있다 보면, 나는 그런 상황(현실에서의 부적절한 관계)이 벌어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분명한 우려는 연습 과정의 강렬한 친밀감이 예술을 너무 닮아버리는 삶의 다른 친밀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다큐멘터리에서 퍼거슨은 헬 하우스를 통해 문화를 "감염"시키고 "침투"시키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낸다. 그는 성적인 장면이 젊은 배우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불안감을 표출하지만, 형식을 만지작거리는 행위(dallying with forms)가 지닌 더 넓은 위험성을 인식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퍼거슨이나 키넌 목사, 혹은 홍보 키트가 무엇을 규정하든 '재현(mimesis)'은 그리 쉽게 통제되지 않는다. "품격 있으면서도 화끈하게." 헬 하우스가 과연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있을까?

이러한 우려스러운 가변성(porousness)은 관객 쪽에도 존재한다. 관객들은 자신들만의 기대치와 취약성을 안고 헬 하우스를 찾기 때문이다. 필자가 손턴에서 관람한 공연은 규모가 작았다. 매일 밤 관객은 총 150명도 채 되지 않았으며, 그중 상당수는 의무적으로 참석한 듯한 버스 동원 청년부 신도들이었다. 이는 매년 시더힐에 구름처럼 몰려드는 인파를 예상했던 필자의 기대와는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다. 다큐멘터리에 묘사된 시더힐 관객의 규모는 묘한 병치를 만들어낸다. 예컨대 음주 운전 사망 장면의 진지함과, 지옥 투어를 기다리며 들떠 있는 명백히 취기 어린 청소년들의 소란스러움이 교차하는 식이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내레이션을 통해, 전년도 공연 이후 한 마법사(warlock)가 교회 사역팀에 연락해 오컬트 장면이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상을 온전하게 되돌려 받으려는 마법사의 재현 욕구는 헬 하우스 제작자들이 활성화하려는 재현 욕구와는 다르지만, 그 차이는 라이브 공연이 지닌 휘발성을 다시 한번 부각한다.

배우와 연기 내용, 그리고 공연을 완성하는 관객 사이의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상호작용은 연극의 정서적 파급력이 쉽게 미세 관리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게이 남성을 연기하는 기혼 커플이 "실제로" 키스하는 장면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관객이 있는가 하면, 그 옆에는 두 남자가 서약을 나누고 키스한 뒤 죽어가는 연인의 몸 위에서 오열하는 모습, 즉 사랑하는 이가 떠나가는 순간의 마지막 포옹을 목격하는 또 다른 관객이 있을 수 있다. 이 장면의 정서적 힘은 신학적 구속복(straitjacketing)을 넘어서거나, 넘어설 잠재력을 지닌다. 과연 "충분히 힘들" 만하다.

헬 하우스 투어의 마지막 두 코스는 언제나 지옥과 천국, 이 순서대로 진행된다. 이 두 장면의 대본은 매년 바뀔 수 있지만, 기본 줄거리는 동일하다. 필자가 본 공연에서 루시퍼 역의 배우는 보이스 박스를 통해 목소리를 변조하여 위협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극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 장면은 연극적으로 완성도가 높았고 세심하게 기획되었다. 관객들은 폐쇄공포증을 유발하는 지하실 지옥에 다닥다닥 붙어 서 있었다. 노소를 불문한 저주받은 영혼들이 철조망에 몸을 던지며 도와달라고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고, 얼굴을 완전히 가린 검은 옷차림의 악귀들은 루시퍼의 연설 중간중간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며 긴장감을 더했다. 출연진 중 가장 어린 아이들이 맡은 악귀들은 왜소한 체구 덕분에 인파 사이를 기어다닐 때 특히 효과적이었다.

'헬 하우스 입문' 과정과도 같이, 기세등등한 루시퍼는 앞선 다섯 장면을 깔끔하게 요약하며 각 장면에서 내려진 잘못된 선택을 강조했다. 하나님이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핑계 뒤에 숨어 동성애를 택한 게이 남성부터, 세상의 성공으로도 영적인 공허함을 숨길 수 없었던 십대 자살자까지 말이다. 감각의 과부하가 극에 달했을 때 밝은 빛이 터져 나오며 흰 옷을 입은 날개 달린 천사들의 합창이 시작되었고, 사탄의 연설은 중단되었다. 천사들은 우리를 마지막 목적지인 천국으로 인도했다. 그곳에는 인자한 모습의 금발 예수가 복음을 전파했고, 자리에 앉은 관객들에게 구원 기도를 인도했다. 필자가 참관한 이틀 밤 동안 관객석에서는 낮은 웅성거림이 들렸다. 일부는 기도를 따라 읊조렸고, 다른 이들은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지옥의 화려한 시각적 효과에 비하면 천국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일차적으로 이는 순전히 미학적인 문제다. '선함'보다는 ''가 훨씬 흥미로운 볼거리와 서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는 화려하고 관능적이며 연극적으로 풀어내기 쉽다. 반면 '선함'은 전형적이고 지나치게 달콤하며 단조롭다. 설교조가 영혼에는 좋을지 모르나 재미는 없다. 이것이 헬 하우스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키넌 목사와 그의 신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다." 필자는 구원 기도 동안 침묵하며 감동받지 않은 채 앉아 있었지만, 여전히 듣고 있었고 여전히 증언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구원 기도 후에는 뉴 데스티니 교회의 부목사 중 한 명이 짧게 연설하며 우리 모두에게 홍보용 응답 카드를 작성해 달라고 권유했다. '천국'의 모든 의자 밑에는 카드와 교회 정보, 클립보드, 펜이 놓여 있었다. 카드에는 체크할 수 있는 네 가지 항목이 있었다.

-오늘 밤 처음으로 구원 기도를 드렸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에 영접했습니다.
-오늘 밤 예수 그리스도께 내 삶을 다시 헌신(재헌신)했습니다.
-참여할 교회나 청년부 모임을 찾고 있습니다.
-카드 뒷면의 기도 제목을 기억해 주십시오.

필자가 관람한 이틀 저녁 동안 사람들은 충실히 카드를 작성했지만, 추가 기도나 대화를 위해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앞선 투어의 강압적인 설득과는 대조적으로, 부목사의 마지막 권유는 매우 따뜻하고 가벼운 어조로 진행되었다. 키넌 목사가 공언하듯, 헬 하우스는 "정면으로 돌진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것이 일 년 중 며칠 동안 우리가 행하는 헬 하우스만의 개성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많은 사람에게 색다른 방식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헬 하우스의 경험은 단순한 노상 전도가 아니다. 그것은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공격적인 연극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배우에게서 관객에게로 옮겨가는 일종의 '전염'으로서의 연극에 의존한다. 우리는 다시 퍼거슨의 "감염"이라는 은유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연극이 전염될 수 있다는 이 약속은, 역설적으로 연극이 역사적으로 수많은 도덕적 지탄과 노골적인 비난의 중심에 서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국가에서 재현(mimesis)을 맹렬히 비난한 플라톤부터, 구경거리에 관하여에서 연극을 우상숭배에 비유한 테르툴리아누스, 그리고 1583년 논문 악습의 해부에서 연극을 성적 타락과 연결한 청교도 논객 필립 스텁스에 이르기까지,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연극이 관객을 '그릇된' 종류의 사상과 관습으로 "감염"시킬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왔다. 우려는 단순히 '보는 것이 믿는 것'이 된다는 차원을 넘어, 믿음이 행동을 낳을 수 있다는 지점에 닿아 있다.

이러한 반()연극적 편견은 물론 어제의 뉴스만이 아니다. 그것은 청교도들을 따라 '신대륙'으로 건너왔으며, '음란성' 논란, 예술에 대한 공적 자금 지원, 연령별 미디어 콘텐츠 적절성 논쟁 등에서 지금도 계속 스며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 화이트필드의 경력이 증명하듯, 연극의 도덕적 위험에 대한 이러한 의구심은 종종 그 힘을 정치적 혹은 영적 갱신심지어 개종을 위한 기제로 활용하려는 욕망과 나란히 존재해 왔다.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부터 중세 가톨릭의 수난극, 시아파 이슬람의 타지예(Ta’ziyeh)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여기에도 긴 역사가 있다.

연극이라는 형식은 단 하나의 정치적 입장만을 대변하지 않는다. 정치극이라고 하면 대개 베르톨트 브레히트나 클리포드 오데츠, 그룹 시어터(Group Theatre)의 작업과 같은 정치적 좌파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연극적 변화가 단 한 방향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연극 및 공연학 학자들이 공연의 '세계 구축' 능력, 즉 가능한 새로운 지평을 불러내고 대항적인 공중(publics)이나 생활세계를 결집하고 재결집하는 능력을 거의 경외에 가까운 용어로 언급하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되었다. 필자 역시 관객을 그 이상의 존재로... 어쩌면 하나의 '공중'으로, 혹은 심지어 하나의 '혁명'으로 변화시키는 공연의 힘에 대한 이러한 믿음을 공유한다. 미국 전역에서 매년 헬 하우스를 무대에 올리는 수백, 수천 개의 복음주의 공동체들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키넌 목사와 그의 양 떼가 연극의 힘을 진정으로 믿는 이 시대의 마지막 신봉자들이 아닐까? 어쩌면 헬 하우스야말로 새로운 아방가르드를 대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공연학자인 데브라 레빈(Debra Levine)은 이 점을 상세히 고찰하며, 헬 하우스를 안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잔혹극(theatre of cruelty)" 전통 속에 예리하게 위치시킨 바 있다. 잔혹연극론(1938)에서 아르토는 "우리의 모든 고정관념을 뒤엎고, 이미지들의 불타는 자력으로 우리에게 영감을 주며, 그 손길을 결코 잊을 수 없는 영적 치료법처럼 우리에게 작용하는" 연극을 주창했다. 아르토의 잔혹극은 줄거리보다 감정을 우선시하며, 모든 방향에서 새로운 감각으로 관객을 몰아침으로써 관객과 구경거리 사이의 인위적인 벽을 허물고자 한다. 이것은 정서적 몰입이자 공동체적 사건으로서의 연극이며, "치료법"은 결코 부드러운 다독임이 아니다.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연극을 고안하며 아르토는 잔혹연극론의 서문을 연극과 희생, 그리고 정화(purification)를 연결하며 마무리한다. "그리고 만약 우리 시대에 여전히 지옥 같고 진정으로 저주받은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화형대의 희생자처럼 불구덩이 속에서 신호를 보내는 대신, 예술적으로 형식을 만지작거리고(dallying with forms)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들은 매우 격정적인 은유들이다. 그러나 헬 하우스에 대한 공격을 십자가 처형에 빗댄 키넌 목사 또한 만만치 않다. "예수님께 일어났던 일이 이것[헬 하우스에 대한 비판]에도 똑같이 일어날 것이다. 즉 그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했으나 결과가 어떠했는지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사람들이 이것[헬 하우스]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해도, 그것은 복음의 메시지에 관한 것이기에 결코 죽일 수 없다." 키넌 목사는 특히 2004년 할리우드에서 상연된 헬 하우스 패러디 버전에 대한 대응으로 이 비교를 제시했다. 해당 공연에는 사라 실버맨(Sarah Silverman)과 사탄 역을 맡은 빌 마허(Bill Maher) 같은 유명인들이 출연했는데, 키넌 목사는 마허가 연기를 그리 잘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마허는 자신의 대사조차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듯 보였는데, 이는 최소한 전문성에 대한 죄악이라는 것이다.

할리우드 헬 하우스의 경험으로 인해 키넌 목사는 뉴욕의 실험 극단인 '레 프레르 코르뷔지에(Les Freres Corbusier)'가 뉴욕에서 헬 하우스를 상연하고 싶다고 연락해 왔을 때 더욱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패러디나 비난 섞인 비평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공법(straight up)" 버전을 원했고, 이를 통해 뉴욕 관객들에게 평소에는 완전히 낯선 사회적 세계의 단면을 보여주고자 했다. (물론 이것이 뉴욕시와 그 주변 대도시 지역의 종교적 다양성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뉴욕은 미국에서 오순절 교인이 가장 많이 밀집된 곳이기도 하다.) 결국 극단의 집행 이사인 아론 레몬-스트라우스(Aaron Lemon-Strauss)는 키넌 목사에게 자신들의 동기가 진심임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레 프레르 코르뷔지에는 200610, 브루클린의 덤보(DUMBO) 지역에 있는 '세인트 앤 웨어하우스(St. Ann’s Warehouse)'에서 헬 하우스를 상연했다. '맨해튼교 하부 지역(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의 약자인 덤보는 개조된 창고, 아트 갤러리, 힙한 술집과 음식점들이 즐비하며 임대료가 계속 치솟는 지역이다. 세인트 앤은 최첨단 연극과 공연 행사로 유명한 곳이며, 이곳의 전형적인 관객들은 기도 모임보다는 미술 전시회 오프닝에 더 자주 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확실히 세속적인 헬 하우스의 등장은 미디어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는 뉴스위크뿐만 아니라 뉴욕 타임스, 덴버 포스트, AP 통신, 심지어 버라이어티의 기사와 리뷰로 이어졌다. 미디어는 한결같이 이 공연이 실제헬 하우스를 충실하고’ ‘진지하게재현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예컨대 뉴욕 타임스의 수석 연극 비평가 벤 브랜틀리(Ben Brantley)200610월 리뷰에서 이 공연을 실제 모델의 아이러니가 제거된 복제품이라 묘사하며, 극단이 "불신자들을 기다리는 불타는 고통의 환시를 눈짓이나 비웃음 하나 없이"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헬 하우스에 대한 레 프레르(Les Freres)’ 극단의 진지한 접근 방식이 오히려 패착이었을 수도 있다. 필자의 눈에 이 공연은 진지하기보다는 진지함을 연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따옴표는 아이러니를 경고하는 표시가 아니다. 출연진은 최고 수준이었고 전문적이며 재능이 넘쳤다. 특수 효과 또한 잘 고려되었는데, 낙태 장면에서의 피 분출(그림 2)이나, 바로 전 장면에서 다른 남성과 결혼했던 스티븐(그림 3)이 에이즈로 죽어가며 병원 침대의 트랩도어를 통해 지옥으로 떨어지는 장면(그림 4)처럼 의도적으로 저예산이면서도 동시에 정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연은 자신들이 아닌 어떤 상태를 자기지시적으로 가리키는 것처럼 보였다. , "나를 보라, 나는 아이러니하지 않다"라는 선언임과 동시에 "나를 보라,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거나 적어도 저런 부류의 기독교인은 아니다"라는 선언이었다. 연극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레 프레르의 공연은 몰입적이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이어야 할 때, 혹은 선혈이 낭자한 아르토적(Artaudian)이어야 할 때조차 차갑게 브레히트적(Brechtian)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프로그램 노트는 다음과 같은 면책 조항으로 시작한다. "레 프레르 및 세인트 앤 아트 센터로부터: 이 헬 하우스의 정통적 묘사는 특정 종교 운동에 대해 교육하고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지, 특정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기 위한 것이 아님." 레 프레르는 자신의 헬 하우스를 살아있는 실체가 아닌 일종의 사회학적 유물로 내놓았고, 이러한 인류학적 접근 방식은 연극적으로 한계를 드러냈다. 이 한계는 자신들이 헬 하우스의 정통적(authentic) 묘사를 제공하고 있다는 극단의 주장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사용된 언어는 혼란스럽다. 레 프레르의 주장은 처음에 보이는 것보다 그 폭이 좁다. 그들은 헬 하우스를 직접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현(depiction)’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그들을 실제로부터어쩌면 안전한 거리만큼떨어뜨려 놓는데, 여기서 실제란 곧 종교를 의미한다. 이 맥락에서 정통적이라는 수식어는 의아하다. 과연 정통적 재현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이것이 좋은 복제품(진지하기에 좋은 것)과 나쁜 복제품(할리우드 헬 하우스 같은 것)을 구별하는 그들만의 방식인가? 자신들의 차별성을 선언하면서도 동시에 정통성을 주장하는 방식을 통해, 레 프레르의 구성원들은 복음주의라는 케이크를 직접 먹지는 않으면서도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 했다.

극단 레 프레르가 일종의 역방향 전도로서 복음주의 교회들을 대상으로 홍보 활동을 펼쳤다면 공연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추측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레 프레르의 헬 하우스가 그들에게는 어떻게 보이고 느껴졌을까?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뉴욕시의 종교적 지형에 복음주의적 헬 하우스가 포착하는 세계관을 실제로 공유하는 많은 이들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헬 하우스의 인과응보 신학과 도시 힙스터들의 세계관 사이의 상당한 교집합을 직면하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레 프레르의 힙스터 관객 중에는 분명 선하고 영적으로 구원하는 섹스나쁘고 타락시키는 섹스라는 목가적인 관념을 신봉하거나, 인과응보의 희석된 버전을 믿는 이들이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에게 헬 하우스가 저세상(otherworldly)의 경험이었겠는가?

물론 뉴 데스티니의 복음주의적(‘정통적?) 헬 하우스와 레 프레르의 공연 사이에는 수많은 차이점이 존재했다. 키넌 목사의 모델이 단막극의 극적 구성을 지닌 7개의 장면을 권장한 반면, 레 프레르는 9개의 방을 운영했다. 키넌 목사의 버전은 투어당 두 명의 악마 가이드를 제안하지만, 레 프레르의 악마들은 단독으로 활동했다. 게이 결혼식 장면에서 레 프레르는 두 남자를 신랑 역으로 캐스팅했으나, 두 남자가 키스하기 직전에 멈추게 했다. 신랑들의 입술이 닿으려 할 때 한 남자가 두 사람의 입 사이에 손을 끼워 넣은 것이다. 또한 레 프레르는 키넌 목사의 대본을 자유롭게 각색했다. 그들이 공연한 버전은 목사의 대본, 2001년 다큐멘터리의 장면들, 그리고 극단이 자체적으로 추가한 요소들이 혼합된 것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추가 장면은 6번 방으로, 악마 가이드가 지옥 카페(Cafe Hell)’라고 부른 힙스터 카페를 배경으로 했다. 20대의 남녀 셋이 흥분하여 디 어니언(The Onion), 존 스튜어트(Jon Stewart), 그리고 종교인들을 조롱하는 공연을 올릴 가능성에 대해 토론한다. 이때 하급 악마들이 이 아이러니스트 무리를 끌고 가고, 악마 가이드는 으르렁거리며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긴다. "요즘 진짜 뜨는 게 뭔지 알아? 바로 진지함이야. 고통스러울 정도로 정직한 진지함(Painful Sincerity)."

키넌 목사는 레 프레르 공연의 개막 주말에 참석했다. 그가 내린 평결은 공연에 진지함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강렬함(intensity)’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복음주의 헬 하우스의 강렬함은 출연진과 제작진이 자신들의 공연에 우주적 판돈(stakes)이 걸려 있다고 믿는 데서 기인한다. 결국 레 프레르와 키넌 목사 사이의 수많은 구조적, 텍스트적 차이점은 정동 감수성(affective sensibility)의 문제 앞에서 빛이 바랜다.

헬 하우스는 연극이지만, 동시에 연극 그 이상의 무엇이다. 키넌 목사가 관찰하듯, "그것은 단순한 연극이 아니며, 단순한 무대 예술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삶에 엄청난 영적 의미를 지닌 무엇이다." 단순하지 않음이를 과잉(excess)’이라 부르자은 우리를 다시 종교 감정의 구조로 데려간다. 뉴 데스티니 센터의 웹사이트는 "사역을 통해 평균 33%의 구원 및 재헌신 결정률을 기록했다"고 주장한다. 시더힐의 트리니티 교회는 그보다는 겸손하지만 여전히 유의미한 20%의 회심 및 재헌신율을 주장한다. 이러한 통계에 대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측정했는지를 두고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해 보이는 것은 뉴 데스티니나 트리니티 교회의 헬 하우스 참여자들 사이에 흐르는 감정의 회로다. 남녀노소, 출연진과 제작진 모두가 의미 창출의 거대한 공동체와 그들이 보기에 더 높은 목적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회심은 결코 완료된 프로세스가 아니며, 헬 하우스는 타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만큼이나 개별 참여자들의 신앙적 헌신을 재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연극으로서 헬 하우스는 종교적 이해나, 그 감정과 의미 창출의 넘쳐흐름을 통제하려는 종파적 시도를 초과한다. 키넌 목사의 말이 맞다. "크게(강렬하게) 노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단 하룻밤이라도, 혹은 그 이상이라도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보는 것 또한 즐겁다. 헬 하우스를 다룬 디스 아메리칸 라이프2002년 방송분 <내 어깨 위의 악마>에서 래틀리프 감독은우리가 굳이 상기할 필요가 있다면헬 하우스에서 가장 탐나는 역할은 죄인들이며, "거의 모든 사람이 [죄인을] 연기하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어간다.

예수나 천사 역할을 하겠다고 오디션을 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쩌면 무대 위에서는 선한 존재보다 악한 존재가 되는 것이 더 즐거울지도 모른다. 교회에 다니는 신실한 기독교인에게 신실한 기독교인을 연기하는 것은 그리 흥미롭지 않을 수도 있다. 주최 측은 대개 선한 기독교인 역할을 맡기기 위해 불쌍한 아이들을 직접 섭외해야만 한다.

다큐멘터리에서 감독은 출연진들에게 헬 하우스에서 가장 좋은 장면이 무엇인지 묻는다. 한 소녀가 주저 없이 대답한다. "레이브 장면이 최고예요. 춤을 출 수 있거든요." 그녀의 동료들도 일제히 동의한다. 연극적 가면을 쓰는 즐거움은 일상을 위반하고, 자신이 아닌 존재가 되며, 무대 위와 아래의 역할 사이의 누수(leakiness)때로는 위험할 정도로자신을 개방하는 즐거움이다. 연극 이상, 종교 이상인 헬 하우스는 관객과 배우, 세속 문화와 종교 행사 사이의 깔끔한 경계를 거부한다. 최선의 경우에도, 때로는 최악의 경우에도, 연극은 인간을 어떠한 상태에 취약하게(susceptible) 만들 수 있다. 무엇에 취약해지는지, 그리고 그것이 좋은 일인지는 누구의 관점에서 계산하느냐에 달려 있다.

헬 하우스의 성공을 처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수로 측정한다면 헬 하우스는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트리니티 교회의 20%라는 통계조차 재헌신하는 관람객들의 높은 숫자로 부풀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기묘한(queer) 수렴이 존재한다. 공연학자 데이비드 로먼(David Roman)과 퍼포먼스 아티스트 팀 밀러(Tim Miller)는 공동 집필한 에세이 <신봉자들에게 설교하기(Preaching to the Converted)>에서 자신들을 위해 공연하는 것의 가치를 옹호한다. 그들은 회심이 "정체성에 대한 지속적인 시험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정체성은 단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이는 곧 취약성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뚜렷한 퀴어적 관점에서 집필하며, 로먼과 밀러는 공동체 기반의 공연이 종종 적대적인 세상에 맞서 자아와 공동체를 ()구성하는 긴박하고 심지어 생명을 구하는 경험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퀴어 연극이 비판자들이 조롱하듯 "신봉자들에게 설교하기"라면, 로먼과 밀러는 바로 그 점을 가치 있게 여기고자 한다.

복음주의 기독교인들 또한 스스로를 주변화된 존재로 느끼며 완충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헬 하우스는 그들이 세속적 헤게모니라고 느끼는 것에 맞서 신앙을 재확인하는 한 가지 방법을 제공한다. 물론 여기서 주변화되었다는 감정과 그 감정의 정확성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지난 20년 동안 보수 기독교가 미국의 선거 정치와 정책 결정에 끼친 부인할 수 없는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소외감은 여전히 활발하게 작동하며 신도들을 결집시킨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종교계와 세속계를 막론한 많은 진보적 비평가들에게 헬 하우스가 정치적으로 무섭게 느껴지는 이유다. 헬 하우스는 훨씬 더 큰 정치적, 문화적 흐름을 대변하며, 분열의 정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열은 헬 하우스의 공포 요인에까지 확장된다. 복음주의 옹호자들에게 헬 하우스는 더 높은 선을 위해 공포를 활용하는 도구다. 반면 NGLTF나 콜로라도 교회 협의회 같은 비판자들에게 헬 하우스는 취약 계층에 대한 사회적 고정관념과 공포증을 잔인하게 조작하는 행위다. 작가 찰스 담브로시오(Charles D'Ambrosio) 같은 세속적 비평가에게 헬 하우스의 문제는 그것이 충분히 무섭지 않다는 점에 있다. , "훌륭한 공포의 집이 갖추어야 할 고뇌와 고통"이 결여되었기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필자의 경우, 헬 하우스와 그 제작자들의 문화적 정치학이나 신학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지만, 내가 본 공연들에서 공포를 느끼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그들의 하면 된다는 식의 연극적 정신과 그들이 누리고 있는 듯한 명백한 즐거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즐거움은 필자를 결코 포함하지 않는 즐거움이었다. 적어도 단순한 방식으로는 말이다. 퀴어 공연학자로서(무신론자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필자는 헬 하우스와 그것이 하는 일, 그리고 그것이 성취하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며 나름의 즐거움과 도전을 발견한다.

다시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용어를 빌리자면, "적극적으로 살아 움직이고 느껴지는 의미와 가치"에 주목함으로써, 진보적 학자들은 헬 하우스가 참여자들에게 갖는 매력뿐만 아니라 보수적 문화 정치를 형성하는 데 감정이 수행하는 역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린다 킨츠(Linda Kintz)가 주장했듯, "전통주의 보수주의에 의해 정당한 위협을 느끼는 학자들은 종종 그 매력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학문적 기대에 따라 표현되지 않는 신념을 이해하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숙한 용어로 명료화되지 않은 주장들을 묵살함으로써, 우리는 정치가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장소들, 즉 무의식의 가장 깊은 층위, 우리의 신체, 신앙을 통한 소통, 그리고 감정과의 관계를 간과하게 된다." 본 논문은 이러한 다른 방식의 발화들에 귀를 기울여 보려는 소박한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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