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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_자료/문헌

마젤란이 파타고니아에서 만난 '귀신'

by 방가房家 2023. 6. 3.

파타고니아는 남아메리카 남부를 일컫는 지명으로 아르헨티나와 칠레 남부 지역이다(브리태니커 항목). 얼마 전 ‘신데렐라 언니’가 스페인어를 배워서 가고 싶어 했던(제3회, 극중에서는 우수아이아라는 그 지역 도시 이름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 지역이기도 하다. 1519년 스페인에서 출발한 마젤란 선단船團은 대서양을 거쳐 남미 남단을 돌아 태평양으로 가게 된다. 이 때 남미 남단을 돌아가는 것이 이 항해의 첫 고비였다. 그전까지 남미의 ‘남쪽 끝’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 그전의 배들은 긴 남미 대륙을 더듬다 중간쯤에서 포기하고 되돌아가곤 했다. 마젤란 선단 역시 마젤란 해협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약간의 시행착오를 겪느라 남미 남부 지역에서 몇 달간 머무른다. 그 동안 그 지역 사람들과 접촉하였는데, 마젤란이 만난 원주민은 “거인처럼 키가 큰 남자”였다.(마젤란이 만난 사람들이 실제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마젤란은 이들을 ‘거인’이라는 뜻의 ‘파타곤patagon’이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이 지역은 ‘거인들의 땅’인 파타고니아Patagonia라고 불리게 되었다.

마젤란 선단의 18명의 생존자 중 하나인 피카페타의 기록에는 마젤란 일행이 ‘거인들’과 교류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그들은 처음에는 거인들의 생김새와 옷차림에 주목했고, 그 다음에는 무엇을 믿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기록에는 이렇게 전한다.

“신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매우 기초적이다. 아마도 잡신을 믿는 정도에 그치자 않나, 하는 생각이다. 선원들이 알아들은 바에 의하면, 누가 죽으면 열이나 열둘 가량의 귀신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나타난다고 한다. 귀신들 가운데 가장 몸집이 큰 귀신이 춤을 주도한다. 이 귀신들을 그들은 세테보 또는 케레울레라 부르는데, 땅 위에 사는 자기들처럼 얼굴에 칠을 한 채 나타난다고 한다.”[안토니오 피카페타, 박종욱 옮김, <<최초의 세계 일주>>(바움, 2004), 89.]
‘선원들이 알아들은 바’는 무엇을 말할까? 거인의 땅을 떠날 때 마젤란 일행은 거인 하나를 사로잡아 배에 태워간다. 새로운 땅에 갔을 때 원주민을 사로잡아 유럽에 가서 보여주는 것이 그들의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그 거인은 몇 달 후 배 안에서 죽게 된다.
“어느 날은 십자가를 보여주면서, 예수상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거인은 세테보가 몸 안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쯤 지난 후 거인은 병에 걸렸다. 기력이 없어진 거인은 십자가를 원했고, 예수상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자기도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에게 파블로라는 세례명을 주었다. 결국 거인은 얼마 지나지 않고 죽고 말았다.”(102)
배 안에서 이 거인과 약간의 의사소통이 있었던 것 같다. 기록자는 “배에서 거인과 함께 머물면서, 나는 우선 눈에 띄는 물건들이나 먹을 것과 같은 이름들을 도표로 만들어 보았다”(104)고 말한다. 책에는 그들이 손짓 발짓으로 얻어낸 거인들의 어휘 목록이 실려 있다(104-7).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듯이, 대부분의 어휘는 신체부위들(눈, 코, 입, 목, 가슴, 엉덩이, 고환, 발, 손톱 등)이거나 동물들(개, 늑대, 거위, 물고기 등), 자연물(태양, 별, 물, 바다, 바람, 폭풍), 물건(수건, 모자, 나무 그릇), 행위(걷다, 싸우다, 요리하다, 긁다 등)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목록의 가장 처음에 실린 어휘 둘은 위 인용문에 등장한 세테보와 케레울레이다.
세테보Setebo = Demonio mayor = 악마
케레울레Queleule = Demonio menor = 귀신
우리말로 옮긴다면 세테보는 ‘큰 귀신’, 케레울레는 ‘작은 귀신’일 것이다. 어떻게 해서 구체적일 수밖에 없는 어휘 목록에서 이런 추상적인 종교 개념이 등장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거인의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이 단어를 얻어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그보다 이 어휘는 그들이 찾고자 했던 것을 보여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유럽인들은 신대륙 사람들과의 첫만남에서부터 데몬(demon=귀신)을 찾고자 했다. 이후의 행동(특히 필리핀에서)에서 잘 드러나듯이 마젤란의 항해는 기독교를 전하기 위한 항해이기도 했다. 타자를 아는 것, 타자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기독교를 전하기 위해서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타자들의 귀신을 찾는 것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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