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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출판물

종교학이 신화학을 말하다

by 방가房家 2023. 6. 3.

최근에 신화를 다루는 중요한 종교학 서적들의 번역이 쏟아져 나왔다. 이 기쁨을 나누기 위해 서평을 하나 써서 기고하였는데, 방대한 폭의 책들을 한데 모아 이야기하느라 애를 많이 썼다. 솔직히 말하면 상당히 거친 글이 되었다. 하지만 신화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지 않은 나로서는 머리속에 든 것을 박박 긁어서 쓴 글이기 때문에 새로 제대로 써보라고 해도 더 나은 글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애초에 쓰기로 했던 것 자체가 무리했던 것. 글은 신통치 않아도 공부는 많이 되었다. 다루어진 책들은 <<20세기 신화 이론>>(이학사, 2008), <<신화 이론화하기>>(이학사, 2009), <<다른 사람들의 신화>>(청년사, 2007)이다.

 

막스 뮐러로부터 비롯해서 종교학사 내내 신화는 종교 연구의 중심적인 주제였다. 그래서 종교학 연구자에게 신화를 종교현상의 일부로 연구하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그러한 생각이 꼭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신화가 문화적 유행으로서 사회적 관심을 받게 되면서, 신화와 신화에 대한 설명은 종교와 필연적인 관계를 갖지 않으면서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어느덧 신화학은 종교학보다 덩치가 커졌다. 현재 인터넷 서점의 도서분류에는 이러한 사정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대부분의 서점에서 종교학 도서가 “인문학>신화학>종교학”이라는 체계로 분류되어 있는 것이 출판계의 염연한 현실이다. 어찌보면 종교학이 신화학의 하위범주가 되어버린 종교학의 굴욕(!)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좀 비굴하게 안위한다면 신화학이라는 잘나가는 아들 덕에 종교학이 그동안 염원하던 인문학 코너에 진입하게 되었다는 것이 출판시장을 보면서 갖는 느낌이다.
신화학은 종교학과 마찬가지로 문학, 철학,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등 여러 학문분과가 중첩되는 분야이다. 우리나라에서 문화적 유행에 편승하여 신화학이 성장하는 동안 여러 분과들의 목소리가 합쳐졌는데, 그 안에서 종교학의 목소리는 생각만큼 활발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종교학의 목소리는 많은 저서들이 번역된 엘리아데를 통해서 전달된 것이 거의 전부였다. 그동안 이러한 상황이 아쉽게 느껴진 것이 사실이다. 엘리아데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었느냐의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엘리아데 이후의 세대가 담당하는 지금의 종교학에서 신화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엘리아데가 생각하는 대로가 아닐진대, 도대체 지금 종교학자들이 신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분명히 정리되어 전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엘리아데를 비롯하여 신화에 대한 다양한 분과의 이론들을 오늘날 종교학의 자리에서 정리하여 발언하는 일이 지금껏 종교학계에 요청되었다. 예를 들면, <<신화 이론화하기>>의 번역자이기도 한 김윤성 선생님이 종교학 수업에서 신화 이론을 가르칠 때의 고민을 말씀하신 것이 생각난다. “한 주는 엘리아데의 신화이론을 가르치고, 한 주는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을 가르쳐. 그런데 완전히 다른 두 신화 개념을 학생들에게 어떻게 조화시켜서 가르칠 수 있을까?”
이러한 상황을 생각해볼 때 최근 이 년 남짓한 기간 동안 최근 종교학계의 대표적인 신화 이론서들이 한꺼번에 번역 소개된 것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다. “학계에서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대중들에게는 여전히 인기가 높은 조셉 캠벨과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비교신화학에 대한 대안적인 신화학 서적”이라고 할 만한 이 책들은, 이반 스트렌스키의 <<20세기 신화 이론>>, 웬디 도니거의 <<다른 사람들의 신화>>, 브루스 링컨의 <<신화 이론화하기>>이다. 이 서평은 번역자들의 노력에 의해 신화에 대한 종교학의 중요한 이론적 성과들을 우리말로 누릴 수 있게 된 행복한 상황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기획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세 권의 책들이 동일한 쟁점을 다룬다고 할 수는 없다. 스트렌스키의 <<20세기 신화 이론>>과 링컨의 <<신화 이론화하기>>가 ‘신화학자’들에 대한 책인 반면에, 도니거의 <<다른 사람들의 신화>>는 ‘신화’와 신화를 누리는 삶을 다루는 책이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링컨의 책이 신화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신화학자들이 다룬 ‘신화’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고, 반면에 도니거의 책은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필연적으로 신화를 이론적으로 다루는 ‘학자’의 이야기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겹쳐지는 영역이 존재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 서평에서 각각의 책들이 담고 있는 신화에 대한 풍성한 이론적 논의들을 개괄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보다는 세 책에서 비교적 겹쳐진다고 생각되는 ‘신화학자’에 대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 논의는 엘리아데가 종교학에 남긴 지적인 자산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라는, 종교학의 반복되는 쟁점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기도 한다.

Ⅰ. 신화학자들의 삶과 학문에 대한 풍성한 정보

이반 스트렌스키의 <<20세기 신화 이론>>은 20세기 신화연구의 네 대가, 카시러, 말리노프스키, 엘리아데, 레비스트로스의 이론을 내적인 콘텍스트(학사의 맥락)와 외적인 콘텍스트(정치적 맥락)와의 관련 아래 탐구하는 연구서이다. 이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그동안 사전정보 없이 영화를 보는 것처럼 전후맥락에 대한 설명 없이 ‘날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던 대가들의 이론들이 어떤 사연을 갖고 만들어진 것인지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나름대로 갖게 되는 것이다. 카시러는 왜 정치적 신화의 문제에 몰두하였는가? 말리노프스키가 인간 삶의 기본적인 욕망과 신화를 연결시켜서 설명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엘리아데가 말하는 ‘역사’에는 그의 어떠한 경험들이 담겨 있는가? 레비스트로스가 신화의 논리적 측면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콘텍스트를 제공하는 것이 위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직접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엘리아데 저작을 읽으면서 ‘역사’가 생경한 용법으로 사용되었던 것에 당황하고 레비스트로스 저작을 읽으면서 왜 이렇게 신화가 도표화되어야 하는지 의아해했던 경험들을 떠올려 볼 때, 스트렌스키 저작에서 알려주는 내용들은 내가 가졌던 의문들을 해소하는 데 출발점이 되는 기본적인 정보라는 점에서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다른 곳에서는 잘 알 수 없었던 귀중한 정보들을 많이 얻을 수 있었는데, 이 점은 책 후반부의 엘리아데와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부분에서 두드러진다. 특히 6, 7장에서 레비스트로스를 다루면서 뒤르케임 학파와의 연관성을 설명한 부분이야말로 작가의 강점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보통 레비스트로스의 학문적 배경이라고 하면 야콥슨의 구조주의 언어학과의 관련성을 언급하는 정도가 보통인데, 스트렌스키는 다른 곳에서 듣기 힘든 프랑스 사회학파와의 관계를 치밀하게 해설해주어 가려웠던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준다. 뒤르케임의 직계 제자는 아니면서도 레비스트로스가 뒤르케임의 의제를 계승한 부분, 그러면서도 뒤르케임의 전통 중에서도 받아들인 부분과 반대한 부분들을 분명하게 정리한 것은 이 저작의 분명한 기여라고 생각한다.

4, 5장에서 엘리아데에 관련된 정치적 상황에 대해 잘 정리해 놓은 것도 종교학도로서 눈에 띄는 부분이다. 흔히 엘리아데의 정치적 배경을 언급하는 것은 그를 정치적으로 연루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예를 들어 엘리아데는 “종교적 색채가 강한 ‘부드러운 파시즘’을 택한”, “1930년대의 루마니아 파시즘 운동의 한 이론가였다”고 가혹한 평가를 내린 박노자의 비판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읽은 바로 스트렌스키는 그러한 식의 판단에 상당히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엘리아데의 소설과 일기 그리고 다른 기록들을 통해서 1930년대 루마니아의 정치적 상황, 엘리아데와 친분이 있었던 우파 민족주의자들과 사상가들에 대해 상세히 알려준다. 그는 엘리아데가 처해 있었던 상황을 보여주는 데 주력하였으며, 적어도 그가 제공한 정보를 통해 내가 도달한 생각은 박노자 식과는 다른 것이었다. 나는 엘리아데가 왜 이데올로기적 혐의를 받는지 정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엘리아데가 매달린 역사와 신화의 대립이라는 주제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긴 했지만, 그럼에도 역사적 정황을 엘리아데의 학문 개념에 직접 연결하는 것이 섣부르다는 생각도 동시에 갖게 되었다. 그런 식의 이해가 스트렌스키가 의도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맥락과 이론 사이의 연결에 대한 스트렌스키의 설명이 미약하기 때문에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 것으로 보인다.
스트렌스키가 이 저작에서 제기한 질문은 “삶이 학문에 어떻게 스며들어있는가?”이다. ‘스며듦’이 낭만적으로 느껴진다면 ‘영향’이라든지 ‘결정’이라고 강하게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이다. 우리 손에는 엘리아데의 ‘학문’과 스트렌스키의 연구가 전해주는 엘리아데의 ‘삶’이 주어져 있는데, 이 둘 간의 관계가 ‘어떻게’ 맺어지는지에 대한 고민은 우리에게 남는다. 스트렌스키의 글에서 이 ‘어떻게’의 문제는 미완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는 루마니아 우파들이 공유했던 전통주의가 엘리아데가 추구한 우주적 가치의 ‘기준’이 되었다고 결론을 내리며, 다른 대목에서는 엘리아데의 학문적 비전과 루마니아 전통주의의 ‘연결’, 엘리아데의 ‘삶과 글이 혼융됨’을 언급한다. 그러나 그가 정보를 조사하여 알려줄 때의 철저함에 비하면, 둘 간의 관계성에 대한 결론은 잠정적인 것에 가깝다는 것이 내 느낌이다. 어쩌면 스트렌스키는 시대적 상황이라든지 학자들의 개념과 비슷한 당대 사상을 보여주기만 해도 명백히 관련성을 밝힌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보다는 신중한 태도를 취한 나머지 언급을 아꼈을 수도 있다. 나는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브루스 링컨이 뒤메질과 아리안주의의 관련성을 탐구하면서 언급했듯이, 엘리아데와 같은 창조적 학자가, “비범한 학식과 섬세함을 갖춘 학자가 받아들인 입장은 분명 중층적으로 결정된 것(그래서 단정적으로 인과관계를 말하기 힘들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트렌스키는 명쾌하고 때로는 도발적인 문장을 통해 글을 진행한다. 그러나 정작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 즉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콘텍스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밋밋하게 들린다. 그의 주장은 책에서 다룬 네 학자의 이론 형성과정에서 역사가 개입하는 양상을 ‘20세기 유럽’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한정했다는 점에서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삶과 학문의 관계는 특수한 상황에 대한 고찰을 넘어 일반화시켜서 탐구될 가치가 있다. 이것은 링컨의 저작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Ⅱ. 이데올로기로서의 신화, 엘리아데와의 결별

스트렌스키가 학문과 시대 상황이라는 문제를 제기했던 반면에, 링컨은 그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둘 간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설명하는 모델을 정교화시킨다. 스트렌스키가 20세기 유럽 학자들의 작업에 시야를 한정한 반면에, 링컨은 신화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는 그리스로, 그리고 낭만주의와 신화연구가 결합하여 아리안 신화를 형성하는 종교학사 초기에서부터 현대 종교학까지 시야를 확장한다. 링컨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신화 이론화하기>>는 스트렌스키의 작업을 선행연구 삼아 그것을 보충하고 심화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그 심화의 정도는 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뛰어난 학자의 글을 읽을 때면 그를 본받고 싶다는 욕망이 들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링컨의 작업을 대할 대면 본받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리스 고전부터 시작해서 세계의 고전문화권과 유럽 지성사를 넘나드는 광활한, 그러면서도 극히 간명한 그의 논의의 방대함은 학자의 꿈을 키우는 나를 기죽게 하기 때문이리라.
링컨이 역사적 상황과 이론의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을 진척시켰다고 했는데, 그것은 패러다임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학자들이 공유했던 ‘이론적 신화’의 형성을 밝히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책의 머리말, 제2부, 에필로그를 관통하는 중심적인 주제는 ‘아리아인 가설’(현재의 인도-유럽인 가설)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이론 구성물의 형성이다. 낭만주의 이후 많은 학자들이 이 담론의 바탕 위에서 작업하였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와 결부된 역사적인 조건과 관계를 가진다. 링컨은 이 틀을 바탕으로 학자들의 구체적인 개념과 자료 분석이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갖는지를 반성적으로 탐구한다. 키펜베르크가 지적하였듯이, 스트렌스키가 단순히 외부 콘텍스트에 역사의 폭력을 위치시켰던 반면에 링컨은 이 폭력이 학자들이 공유한 가설에 내재한다고 설명을 정교화했다. 학자 개인의 능력보다 우위에 있는 학문적 신화의 힘을 강조함으로써 주체성에 대한 물음에 해답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신화 이론화하기>>의 주된 주제는 학자들이 지녔던 ‘신화적인 이론’이다. 하지만 이 책은 학자들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신화에 대한 링컨 특유의 분석과 사례를 풍부하게 제시한다는 강점을 지닌다. 7장에서 제시하고 있듯이, 링컨은 뒤르케임과 모스의 분류 체계의 형식으로서의 신화 이론에 주목하고, 그것이 뒤메질과 레비스트로스를 통해 계승되는 이론적 흐름을 따른다. 그 결과 링컨에게 신화는 “서사 형식으로 된 이데올로기”이다. 링컨이 생각하는 신화는 레비스트로스의 것처럼 지적인 구조물의 양상이 강조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링컨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신화를 논리적 취향이 강한 신화 개념, 즉 ‘이론적인 신화’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이쯤에서 앞서 언급했던 김윤성 선생님의 질문을 다시 떠올리도록 하겠다. 엘리아데 식의 신화 개념과 바르트 식의 신화 개념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내 생각을 이야기하자면 두 개념을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바르트 식, 그러니까 신화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강조하는 사회과학적 신화 개념을 택하느냐, 엘리아데적인 개념을 유지하느냐의 양자택일의 문제이다. 링컨과 도니거는 현대 종교학자가 선택할 수 있는 두 선택지의 예를 보여준다. 링컨은 명백히 엘리아데의 개념을 버리고 이데올로기적인 신화 개념을 택하고, 그 개념을 고대 그리스까지 소급시켜서 전통적인 사례들에 일관적으로 적용하는 작업을 보여준다. 반면에 도니거는 엘리아데 식의 개념을 유지하면서 현대의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그 개념이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덜 중요한 부분일 수도 있지만) 링컨의 선택이 드러나는 부분을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이 책이 “한때 의식이 부족했다는 점을 만회하고 이를 고치기 위한 시도”임을 밝히며 책을 시작한다. 이것은 그 자신의 정치적인 순진함에 대한 자각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의 자각에는 엘리아데에 대한 평가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는 7장에서 세계대전 이후 신화연구의 동향을 개괄하면서 엘리아데의 신화연구가 이데올로기적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지적한다. 그는 엘리아데의 ‘시원적(archaic)’이라는 범주에는 아주 문제가 많다고 언급하고, 급기야는 엘리아데 포기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1945년 이후 지배적이었던 모델이나 방법 중 어느 것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어 보인다. 또 오늘날의 지적 활동도 이미 다른 방향으로 돌아섰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엘리아데의 학문을 특징짓는 결점이 실제적이고 심각하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자각은 내게 쓰라린 아픔을 주었다……나는 그분이 추구했던 그런 종류의 연구에는 제한적인 미래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링컨은 엘리아데와 레비스트로스에 대해서는 스트렌스키의 작업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서술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왜 이렇게 엘리아데에 대해 강하게 부정적 평가를 내렸는지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다. 다만 그 비판의 강도와는 별도로, 우리는 링컨이 이론적 입장을 정립하는데 엘리아데를 포기하는 것이 필연적인 것이었을 읽어낼 수 있다. 링컨의 학문적 이력을 되새기는 것은 여기서 간단히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다만 그의 초기 저작인 <<고치에서 날아오르기(Emerging from the Chrysalis)>>만 해도 의례에 사용되는 상징들의 우주론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엘리아데적인 해석의 영향이 짙게 나타났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후 그의 작업은 신화의 분류 체계적 속성, 정치적 담론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쪽으로 발달하였다. <<신화 이론화하기>>의 엘리아데 서술에는 링컨의 그간의 학문적 발달 과정, 그리고 방향 선회가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엘리아데를 버리지 않고서 신화 이론을 구성하는 길은 무엇일까? 그 길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웬디 도니거의 신화학 작업이다.

Ⅲ. 잔존하는 신화를 향유하는 현대인의 삶

웬디 도니거의 <<다른 사람들의 신화>>는 신화에 관련된 종교학의 쟁점들을 정교하게 풀어나가는 일곱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 담긴 풍부한 이야기들 중에서도, 이 글에서는 이론적 작업과 연관성을 가지는 1, 2, 6, 7장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앞에서 논의한 학자들과 도니거의 태도를 비교하도록 하겠다.
링컨이 신화를 ‘서사 형식의 이데올로기’로서 강조하였다면, 도니거가 신화에서 강조하는 것은 ‘중요한 이야기’로서의 측면이다. 그녀가 정의하는 신화는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성스럽게 여겨지는, 공유된 이야기”이다. 신화가 사람들에 기억됨을 통해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엘리아데 식의 신화 이해가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전통적인 신화 개념으로 현대 사회의 신화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인데, 도니거가 현대의 신화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중요하게 사용하는 개념은 ‘신화의 키치’(mythological kitsch)이다. 현대 사회에서 신화가 존재하는 다양한 양상이 이 용어를 통해 설명된다. 신과 악마의 대결을 묘사하는 인도 영화들, <<마하바라타>>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만화, 성자 챠바나를 동원한 회춘약 광고, 마네킹으로 만들어진 신들이 들어있는 동물원 우리, 물속에 넣으면 그리스 신화 주인공이 나타나는 제품 ‘인스턴트 신화’, 그리고 통속 드라마에 등장하는 신화적 주제 등, 신화의 키치들을 훑는 도니거의 시선은 경쾌하다. 하지만 그녀의 서술에서 통속적 예술품을 의미하는 ‘키치’의 경멸적인 함의는 엄연히 존재한다. 그녀는 신화의 키치에는 종교적 질문이라는, 전통적 신화에 존재하는 본질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신화의 키치는 고전과 대조되는 관점에서 서술된다. 도니거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현대 대중문화에서 신화의 존재 양상을 신화의 키치로 표현한 것은, 신화의 잔존, 위장된 신화, 더 나아가 상징의 유치화(幼稚化, infantilization)라는 엘리아데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다. 조금 더 감각적으로 표현했을 뿐, 현대 문화 속의 신화에 대한 엘리아데의 입장이 거의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신화의 키치는 ‘신화의 잔존’만큼이나 현대문화를 서술하기에 딱딱하고 비관적인 개념이라는 것이 내 생각인데, 내가 알기로는 도니거의 후기 저작에서는 그리 많이 활용되는 개념이 아니다. 이후 저작에서 이 대목에 대한 도니거의 태도는 좀 더 유연해져서, 대중문화를 통해 신화가 새로이 창작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입장을 보여준다.

이 책의 제목에는 현대 사회에 신화가 위치한 흥미로운 맥락이 제시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의 신화를 향유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점은 전통적인 신화 이해를 지향하는 이 책이 직면한 도전적인 상황이기도 하다. 도니거는 다른 사람들의 신화를 즐길 수 있는 이 상황을 축복으로 묘사한다. 7장의 크라쿠프의 랍비 이야기가 말해주듯이, 남의 신화를 통해 자기 신화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대인이면서도 인도 신화를 자신의 신화로 경험하며 삶의 의미를 풍요롭게 누리고 있는 자신의 경험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도니거의 이상적 묘사가 다소 불편하다. 그녀는 다른 신화들의 ‘주어짐’을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는데, 이 점은 종교 다원주의를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한 시장 모델에 입각해서 이해하는 미국 학자들 특유의 낙관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보인다. 시장 모델에 따르면 종교들은 선택할 수 있는 여럿 중의 하나로 주어진다. 그러나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선택은 이상론일수밖에 없다. 다른 신화의 ‘주어짐’에 있어서 상황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은, 그리스 신화만을 편중되게 받아들이는 우리나라의 신화 붐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앞서 말했듯이 도니거는 신화가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공유되는 것이라는 전통적인 신화 개념을 제시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신화’는 그것이 배태된 공동체와의 연결이 상실된, 탈맥락화된 신화이다.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이 단위가 되어 탈맥락화된 신화를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분명 전통적인 신화이론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롭고 모험적인 상황이다. 도니거의 표현을 빌면, 전통적인 성스러움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였으나 새로운 양상으로 성스러움을 경험하는 ‘재신화화된 사람들’이라는, 신화를 수용하는 새로운 인간 집단을 가정해야 하는 실험적 상황인 것이다. 이런 불확실한 정황에도 불구하고 도니거가 낙관론을 밀고나가는 뚝심의 근저에는 신화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이 존재한다. 그녀는 한 아일랜드 사냥꾼이 하늘이 오리로 가득 찬 것으로 보일 정도로 만취한 상태에서 총을 쏘아 (사실은 하늘에 한마리 있던) 오리를 잡았다는 ‘다원주의 오리 사냥’ 이야기를 들려준다. 굉장한 낙관론이다. 이것은 우리 앞에 놓인 많은 신화들은 ‘단일한’ 문제에 대한 여러 개의 답에 해당한다는, 신화의 보편적 기반에 대한 도니거의 믿음에 의해 가능한 인식이다. 이 믿음은 원서의 부제이기도 한 ‘(다양한) 메아리가 울리는 (하나의) 동굴’ 은유를 비롯해 여러 이미지로 나타나는데, 책 마지막 부분에서는 ‘신화의 기관차고’ 이미지로 제시된다.

신화는 낯선 문화 사이의 가교로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이 다리들의 네트워크는 기차가 어떤 선로로든 통과할 수 있도록 철도의 모든 선로가 만나는 것인 원형의 기관차고(roundhouse)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신화의 기관차고는 우리가 한 사람의 실재 선로에서 다른 사람의 실재 선로로 그들 모두를 표현하는 신화를 통과해 움직일 수 있는 장소이다. 이 기관차고는 세계의 모든 신화들이 함께 모이는 일종의 동굴, 즉 공동의 장이다.

이것은 도니거에게 핵심적인 은유이다. 그래서 이후의 저작인 <<숨어있는 거미(Implied Spider)>>에서 이 은유는 더욱 세련되고 방어 가능한 형태로 다듬어져서 제시된다.
링컨과 도니거의 작업을 비교해보면 신화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뚜렷하다. 링컨은 서사 형태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신화를 주장한다. 신화의 정치성을 강조하는 것은 바르트의 현대 신화 분석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주제인데, 링컨은 엘리아데와 결별하고 레비스트로스의 도움을 받아 이 주제를 전통적인 신화 분석으로 확대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도니거는 소중한 이야기로서의 신화를 주장한다. 이것은 신화의 보편적 가치를 이야기하는 엘리아데의 견해를 현대의 신화의 상황과 학문의 상황에서도 지켜나가는 노력이다. 전통적인 신화 개념을 현대의 새로운 맥락에서 유지하는 것에는 적지 않은 위험이 뒤따르지만 도니거는 노련한 방식으로 이 모험을 즐긴다. 두 저자의 책은 현대 종교학이 신화학을 논하는 두 가지 방식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두 방식을 대표하는 저작들을 우리말로 소유하게 된 것을 계기로, 종교학이 신화에 대해 발언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더욱 치밀해지고 풍성해질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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