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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

새로운 주술론, <비밀번호486>

by 방가房家 2023. 6. 2.

종교를 설명하는 것과 연애를 설명하는 것에는 비교할 거리가 풍성하다. 그 비교가 위험에 빠지는 경우도 없지 않겠지만, 기본적으로 종교와 사랑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관점들을 많이 얻게 된다. (이런 논의는 학자들의 글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데, 내가 최근에 본 것으로는 메소포타미아 종교에 대한 보테로의 글이 기억난다.) 기본적으로 종교와 연애는 삶(흔히 사소한 일상들)을 의미화하는 과정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기억이나 추억에 의해서 전에는 사소하던 어떤 장소나 때나 사물이 성스러운 것이 되는 과정에 대해서 할 이야기들이 많을 것이다. 이런 의미화의 기본 구조는 종교나 연애나 동일하다.

미지의 타자에 다가서는 과정이라는 점에서도 둘의 공통된 양상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성(異性)을 완전히 파악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이성에 대한 무수한 설명 체계들이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해서 연애 이데올로기가 형성된다. 그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경험이나 사색으로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문화적으로 전승된 것이요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설명체계들이다. 설명 체계가 형성되는 과정에 있어서나, 사람들이 그것을 믿고 간직하는 방식에 있어서나 연애의 이데올로기와 종교의 교리 체계에는 공통된 점들이 많다. 둘은 다르지 않은 인식 구조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야기들이 뻗어나갈 수 있겠다.

오늘 하고 싶은 비교는 이와는 좀 다른 측면이다. 그것은 인식과 행위의 관계, 종교에 있어서 교리 체계와 실천 체계의 관계(예를 들면 신화와 의례의 관계), 연애에 있어 애정과 스킨십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종교학 교과서들을 보면 교리와 의례, 믿음과 행위는 동등한 것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종교경험이 언어적으로 표현된 것이 교리이고 몸짓으로 표현된 것이 의례이지, 그 둘은 따로 떨어져 있는 현상이 아니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이 타당한 이야기는 그리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종교학에서 의례에 대한 관심이 부각된 것은 최근 20년 정도의 일이다.

의례를 강조하는 학자들이 많이 지적하는 “개신교적인 편견”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종교에 있어서 교리를 중요한 것으로 보고 의례는 이에 비해 부차적이고 보조적인 것으로 보는 편견을 이야기한다. 종교 개혁에서 핵심 쟁점 중 하나가 성사(聖事)에 대한 평가였다. 성사를 진행하는 사제의 지위, 성만찬에서 실제 예수의 피와 살로의 변화가 일어나는지의 화체설 논쟁, 성사의 종류 등 숱한 논쟁들이 있었는데, 핵심적인 것은 개신교 논자들은 성경의 말씀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놓고 의례의 가치를 폄하하였다는 것이다. 성만찬을 예수 사건에 대한 ‘기념’으로 보는 입장에서 잘 드러나듯이, 외적 행위는 내적인 신앙을 진작시키기 위한 도구로서의 의미만 지닌다. 천주교인들이 신앙과 성사가 둘 다 중요하다고 말할 때, 개신교인들은 그렇게 듣지 않고 천주교를 외적인 형태에 매달리는 종교라고 비판했다. 의례에 대한 천주교의 강조는 중세적 미신의 잔재라고 인식되었을 뿐이다.
의례에 대한 개신교적 태도는 오랫동안 종교 연구를 지배했다. 그 좋은 예가 ‘주술’(magic)에 대한 이해이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서 대표적으로 그려지듯이, 주술은 ‘원시인’의 종교행위를 대표한다. 주술은 정해진 행위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형식적인 것을 충족하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해된다. 이런 식의 이해는 원시인에 대한 편견과 의례에 대한 편견이 결합되어 나온 결과이다.
몸짓에 대한 가치절하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 요즈음의 분위기이고, 그것은 종교 연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믿음의 행위는 믿음의 사유에 비해 열등한 것이 아니며, 분리되는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도 언어 체계와는 다른 독자적인 몸의 의미 체계를 형성한다는 점이 요즘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것들이다.

교리와 의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연애하기와 비교하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되고 잘하면 설명의 모델을 얻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연애하기에 있어서 ‘개신교적 편견’은 유지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현실에서 플라토닉 러브의 신봉자를 만난 적이 없다. 좋아하는 마음이 몸의 부대낌에 비해 우월한 것이라든지, 몸짓의 교환은 애정의 언어에 종속된(혹은 표현 방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라는 주장은 현실의 연애 세계에서 유지되기 힘든 가설이다. 연애의 교리와 연애의 의례는 각자 독자적인 세계를 지니며 서로를 끌어올리며 남녀 사이를 굴러가게 한다. 분명 관계에 있어서 언어적 설명에 의해 형성되는 부분이 있고, 몸짓의 주고받음에 의해 형성되는 부분이 있다. 둘 다 중요하지만 서로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이다.
윤하의 <비밀번호 486>의 첫 부분을 들을 때는 연애에 있어서 주술론을 배격하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한 시간마다 보고 싶다고 감정 없이 말하지 마라
흔하게 널린 연애지식은 통하지 않아
백번을 넘게 사랑한다고 감동 없이 말하지 마라
잘 잡혀가던 분위기마저 깨 버리잖아

이것은 정신이 부재한 형식을 질타하는 반(反)의례적 담론의 전형을 떠올린다. 감정이나 감동, 다시 말해 진정한 정신이 결여된 행위를 비난하고 있다. 그렇다면, 윤하는 주술을 배격하고 진정한 정신을 추구하는 것인가?
그러나 ‘비밀번호 486’이 무엇인지 밝혀주는 절정부에서 이것이 단순히 주술/의례의 배격이 아니라 새로운 주술/의례를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루에 네 번 사랑을 말하고
여덟 번 웃고 여섯 번의 키스를 해줘
날 열어주는 단 하나뿐인 비밀번호야
누구도 알 수 없게 너만이 나를 가질 수 있도록

이것은 새로운 의례의 제시이다.
혹자는 의례의 간소화를 지적하고 싶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486 의례 체계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이 역시 고도의 몸의 단련(discipline)을 요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보고 이렇게 하라고 하면 사흘만에 게거품을 물 것 같다.) 이 의례론의 핵심은 마음이 중요한 거니까 형식은 간단히 하라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새로운 의례의 제시에 있다. 그것은 “흔하게 널린 연애지식”과 “단 하나뿐인 비밀번호”의 대조에 있다. 의례와 교리는 서로가 서로를 형성한다. 단순히 전수받은 교리에 맞추어 의례를 한다면, 그때야말로 형식화와 교리의 화석화가 발생한다. 새로운 관계는 새로운 교리와 새로운 의례를 필요로 하며, 또 새로운 교리와 언어의 상호 관계에 의해 발달한다.
프레이저는 주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원시인들이 절차에 맞추어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만 하면 그 결과가 자동적으로 주어질 것이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그 ‘원시인’들은 의례가 일부임을 알고 있다.(민족지 자료에는 절차의 엄밀한 준수를 강조하는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은 하루에 네 번 사랑을 말하고 여덟 번 웃고 여섯 번의 키스를 했기 때문에 연애가 이루어졌다고 믿는 현대인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우둔한 해석이다.

윤하- <비밀번호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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