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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_자료/이미지

대박(大舶)의 꿈

by 방가房家 2023. 6. 1.

앞의 글에서 초기 천주교와 정감록 전승의 관련성을 언급한 鈴木信昭의 <朝鮮後期天主敎思想と <<鄭鑑錄>>>이라는 논문 중에서 내 관심을 끌었던 작은 대목이 있다. 강이천은 중국으로부터 서학 자료를 많이 구해온 사람이고, 그래서 그의 집에는 서학책과 세계 지도가 있었던 모양이다. 강이천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은 김건순은 강이천 집에 있는 세계지도를 토대로 서양 선박에 대한 확신을 깊게 하였다고 한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강이천은 정감록적인 예언 전통을 천주교의 도래와 연결지어 생각하였는데, 그 중요한 매개가 된 것이 당시 서해와 남해에 출몰한 이양선(異樣船)이었다. 정감록 전승에서 진인이 오는 경로는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가장 많은 것은 진인이 서해나 남해의 어느 섬으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들어온다는 내용이었다. 강이천을 비롯한 신자들은 서해 쪽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나중에 천주교가 박해를 받아 주문모 신부 체포령이 떨어졌을 때 신자들이 주문모에게 서해의 섬으로 피신하라는 좀 황당한 제의를 했던 것도 이러한 전승과 관련이 된다. 강이천, 김건순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들은 서해 어느 섬에서 군사들이 조련되고 그들이 큰 배를 타고 올 것이라는 “대박(大舶)의 꿈”을 키워온 것이다. 그 대박의 상상력은 이양선 출몰에 대한 소문과 지도에 그려진 배의 존재를 통해서 자라났다.

대박의 꿈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자료는 유명한 <황사영 백서>이다. 프랑스 함대를 요청한 황사영의 서한에는 대박을 바라는 초기 천주교인들의 신앙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자료를 아직 제대로 검토해보지 못했다. 해서 제대로 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지금은 김건순이 강이천 집에서 세계지도를 보며 대박의 꿈을 키웠다는 그 대목에만 집중하도록 하겠다. 강이천 집에 있던 세계지도는 <곤여전도>이다. 바로 <곤여전도>에 그려져 있는 서양배의 그림이 상상력의 자양이 되었다는 것인데, 나는 이번에 <곤여지도>에 대한 이미지 자료를 입수한 덕에 그 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큰 지도를 샅샅이 뒤진 결과, 나는 다음과 같은 배의 그림이 지도의 바다 부분에 그려져 있는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바로 다음 그림들이 강이천이 보았다는 그 배들!








대박(大舶)의 꿈을 접하면서 상관없는 다른 도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홍차의 꿈’이다. 나는 실론티의 맛을 좋아하긴 하지만, 홍차의 꿈이라는 표제 아래 적혀있는 문안을 볼 때마다 상념에 젖어들게 된다. 도대체 이 얼토당토 않은 문구는 누가 어떤 생각으로 지어낸 것인가하고 말이다. 딱히 비문을 잡아내기도, 내용상의 문제를 지적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무언가 아름답게 꾸미려고 지어낸 이 언어의 형용하기 힘든 공허함이 나를 쉽게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나는 실론티를 마실 때마다 이 문구를 감상하는 악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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