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도수(皮道秀)라는 미국 선교사가 있었다. 미국 이름은 피터즈(Victor Willington Peters)이다. 1928년에 내한하여 지금의 철원 지역인 김화읍 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41년 일제가 선교사들을 모조리 추방할 때 한국을 떠난 선교사이다. 그렇고 그런 많은 미국 선교사들 중에서, 이 사람은 굉장히 특이한 선교사였다. 이 사람이 특이한 이유를 몇 가지 들어보도록 하겠다.
1. 그는 국내의 신비주의의 운동가들과 친분이 있었다. 김익두에 관한 글을 연재하기도 하였고, 특히 이용도와의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용도에 관한 이야기를 대표적인 선교잡지인 "Korea Mission Field"에 “시무언, 한국의 신비운동가”(Simeon, A Christian Mystic)라는 글을 장장 10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그 글은 [이용도 목사의 영성과 예수 운동]이라는 책에 번역되어 있다.
2. 그는 1938년에 이화여전 영문과 출신의 한흥복과 결혼한다. 선교사와 한국 여자의 결혼, 드문 일이다.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왔지만, 철저히 자기들끼리 결혼했다. 심지어 죽은 동료가 남긴 과부를 재활용하면서까지 자기들끼리 결혼한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피도수 이전에 한국인과의 결혼이 있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결혼은 미국인 선교사와 한국인의 최초의 결혼으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3. 그는 한국(혹은 한국의 문화)을 매우 사랑한 선교사였다. 개신교 선교사로는 매우 드물게 토착화의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나는 이 점 때문에 그에게 흥미를 느끼고 자료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다른 설명보다도, 오른편의 그림 하나만으로도 한국에 대한 그의 관심이 장난 아님을 말해줄 것이다. 이 그림, 놀랍게도 이 미국 선교사가 그린 것이다. 십자가 아래 마리아의 모습을 완벽한 조선 여인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 운보 화백의 그림보다 20여 년 전의 그림이다. 과문한 탓에, 이 시기에 토착화된 다른 성화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판단으로는 이 토착화된 성화는 그의 독자적인 성취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있던 김화 교회를 토착화된 양식으로 건축하였다. 지금은 그 교회 건물이 남아 있지 않아 어떤 모습인지 잘 모르겠다. 그가 남긴 글 중에 두 편의 글이 토착화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하나는 자신이 김화 교회에 그린 (오른편 그림을 포함한) 네 편의 성화를 설명한 글이다. 동양적 배경으로 그리스도를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Visualizing the Presence of Christ," KMF, 41.4) 다른 글은 김화 교회를 어떻게 토착화된 양식으로 건축하였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건축 뿐 아니라 제의 도구나 교회 음악 등에 한국의 양식을 어떻게 활용할지를 논한다. (“Korea Also Serves the Sanctuary," KMF, 40.7)
한국에서 이른바 토착화 신학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 1960년대 말이고, 신학적 논의를 넘어서서 실천적인 분야에까지 소급된 것은 1980년대 들어서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1930년대의 이 선교사의 노력은 상당히 앞선 것이었다. 주목해서 연구할 가치가 있다.
아래 그림은 그가 김화 교회 행사에서 사용한 그림이라고 한다. 역시 토착적 양식이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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