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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

신정론이라는 물음과 해답

by 방가房家 2023. 5. 31.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라는 신학 용어가 있다. 국어사전에는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신정-론(神正論) [--논] 명[철학] 신은 악이나 화를 좋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인정하고 있으므로 신은 바르고 의로운 것이라는 이론. 이 세상에 악이나 화가 존재한다는 이유를 들어 신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이론에 대응하여 생긴 것이다.
종교 전통에서 이것은 참 고전적인 물음이다. 자기 주변에서 착한 사람이 고난을 받고 못된 인간들이 떵떵거리고 잘 사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거의 보편적인(?) 경험에 속한다. 그럴 때마다 과연 이 세상의 법칙성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이 세계를 주재하는 신은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솟구쳐 오르게 된다. 이 세계의 본질을 고통으로 규정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치는 불교나 힌두교 전통에서는 상대적으로 이런 문제가 덜 첨예하다. 그러나 선과 악의 이분법이 뚜렷한 기독교와 같은 유일신 전통에서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된다.

기독교인들은 두 개의 매우 중요한 명제를 안고 살아간다. 하나는 “하느님은 전능하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악이 현존하는 이 현실에서 도대체 이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개의 명제를 조화시킬 수 있을까? 두 개의 명제 중 하나를 포기하면 기독교인이 정체성에 문제가 생긴다. 예컨대 “하느님은 우리 현실의 고통까지 손을 뻗칠 정도로 우리의 작은 일까지 신경쓰지 않아,”혹은 “뻗칠 수 있는 분이 아니야”라고 생각한다면 기독교의 믿음에서 많이 물러선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두 명제 다 안고 가야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숙명이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끊임없는 해답들이 시도되어 왔다. (예컨대, 구약성서의 욥기가 이 문제에 대한 고전적인 작품이다.) 그리고 아직도 그 물음과 답변은 진행중이다. 다만 신학자들만이 하는 일이 아니라, 기독교를 신앙으로 지니고 있는 이들은,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든 아니든, 이 물음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찾고 있거나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이라는 개념을 자기 삶에서 어떻게 의미화시켜 살고 있느냐를 의미한다.
 (위의 그림은 Arthur Davis Broughton의 작품 “Theodicy” http://www.eclecticityezine.com/archives/fall2002/stormbound.html )

종교라는 일이 무릇 그러하다.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그저 주어진 해답이 아니다.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믿는데서 만사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전능하신 존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내 주변의 상황은 이리 혼란스러운지를 자문하고 나름대로 해답을 찾아가야 한다. 해답의 완결이라기보다는 고민스러운 지적인 과정의 시작이다.
이 점에 주목한 학자가 막스 베버(Max Weber)이다. 그는 신정론이라는 문제가 다만 기독교 신학 전통의 문제가 아님을 간파하고 이 용어를 신학 너머로 확장시켜 종교사를 서술하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여러 종교들은 신정론에 대한 다양한 해답이 된다. 예컨대, 신정론에 대한 매우 명쾌한 해답중 하나가 이원론, 즉 이 세상은 선한 신과 악한 신의 투쟁으로 점철된다는 것인데, 이것이 마니교의 주된 모티브가 된다. (이 생각이 기독교에 영향을 끼치면 “마니교적 이단”이 된다. 마르시온이라는 신학자는 구약의 야훼는 악한 신이고 신약의 예수의 아버지 하느님이 선한 신이라고 구분하였다. 교계에서 이런 “마니교적 이단”을 치를 떨며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기독교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마르시온의 해답은 언제나 기독교인에게 치명적인 유혹으로 남아있다.)
그의 신정론 용어가 어느 정도까지, 과연 모든 종교들에 적용되었는지는 그의 저작을 다시 읽어보고 확인해야 할 부분이다. 베버의 글이 좀 난삽하다... 하지만 분명히 베버의 논의에서 도출할 수 있는 중요한 주장은, 종교의 역할은 인간에게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둘러싼 세계는 혼란스럽고 무의미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종교는 인간에게 세계를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신정론에서 보이듯, 세계를 의미있는 것으로 수용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수용의 과정이 종교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종교는 의미를 제공하다는 베버 명제는 종교학 전통에서 매우 핵심적인 논의가 된다. 엘리아데의 종교 논의가 그런 점을 잘 보여준다. 종교는 혼돈(chaos)으로부터 질서(order)를 창출하는 것이라는 엘리아데의 주장은, 그의 저작 전체에 걸쳐 있다. [우주와 역사]나 [종교사 개론]을 읽어보면 이런 사례들이 매혹적인 방식으로 거듭 열거되고 있으니 여기서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진홍 선생이 종교를 정의하는 방식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당장 옆에 책이 없어 정확히 인용은 못하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종교는 “궁극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물음과 해답으로 구성된 상징체계”이다. 물음과 답변, 신정론이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이다.
*** 영화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다가 서론이 너무 길어져 버렸다. 게다가 보시다시피 굉장히 딱딱한 논의여서 분리된 포스트로 올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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