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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

현대 종교학 이론 수업

by 방가房家 2023. 5. 31.

“Religion502: Contemporary Theories of Religion,” 이것은 이번 학기(2004년 봄학기)에 들은 한 수업이다. 현대 종교 이론들을 정리하는 이 수업은 대학원 필수 과정이다. 이 수업은 내게 중요했다. 조금 과장해서 얘기한다면, 내가 미국에 건너가 공부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이론에 대한 갈증”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대학원에 있을 때 내가 갖고 있었던 막연함 두려움 중 하나가, 내가 세계의 이론적 흐름에서 이탈해 있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70년대에 유학하신 선생님은 70년대의 학문을 가르치고, 80년대에 유학하신 선생님은 80년대의 이론을 가르치는 것이 한국 대학원 커리큘럼의 현실이었다. “현대” 이론은 간헐적으로 다루어지기에, 대학원생들끼리 세미나라는 일종의 비정규군을 편성하여, 제본과 아마존에 의존하여 영미권의 새로운 이론에 대해 “안테나”를 곧추세우는 일을 하곤 했다.

그러했던 내가 이제 본토에 상륙한 내가 본격적으로 현대 이론을 다루는 수업을 듣게 되었을 때, 각오만은 남달랐다. 독하게 마음먹고, 수업에서 제시된 독서 분량을 대충 읽어 넘기지(skip) 않고 다 소화하겠노라고 달려든 수업이었다. 때에 따라서는 다른 건 다 깽판쳐도 이것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마저 들었던 과목이었다. (여러 수업에서 요구하는 분량이 내 능력을 넘어설 때 나는 선택을 강요받게 되고, 사실 그 선택의 연속이 유학 첫 해 나의 일상이 되었기 때문에, 어느 수업에 중점을 둔다는 것은 딴에는 꽤 심각한 결단이었다.) 그랬던 만큼, 그 수업에 대한 기억을 될 수 있는 대로 상세하게 여기 남겨 놓으려 한다.

이 수업을 담당한 선생은 라미네즈(Daniel Raminez)라는, 히스패닉 기독교 공동체를 연구하는 새로 부임한 교수였다. 이 선생의 수업은 몇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그런 전공의 교수가 이런 핵심 과목을 가르친다는 것은 나의 연구 관심과 이 학교의 분위기가 잘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다른 문화권에 어떻게 변형되어 수용되었는가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매우 구미에 맞는 수업이었다. 둘째,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종교학이라는 분야에서 순수한 이론 자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책들은 특정 종교 분야에 대한 연구서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이론인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중요한 책은 모두 이론서라고 불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하다는 것은 다른 연구에 아이디어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의미이다. 비교종교학이라는 종교학의 특성상, 어느 종교 전통에서 중요한 연구라면 바로 다른 종교 전통 연구에 바로 영향을 미친다. 유교 전공자라고 힌두교 연구서를 도외시할 수 없다. 다른 말로 해서, 잘된 힌두교 연구서, 미국 흑인 교회 연구서, 부두교 연구서, 유대교 연구서 등이 한국 종교를 연구하는 나에게 이론적인 틀을 제공하는 것이 종교학이 돌아가는 방식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종교현상학, 종교사회학, 혹은 종교인류학, 이런 식으로 추상적인 이론만 정리한 이론서는 요즘 종교학계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론과 현실이 결합되어 있는 구체적인 연구서들을 통해 직접 자신에 필요한 이론을 재구성하는 독서가 요즘 종교학 연구에서 필요한 일이 된다. 셋째, 현대 종교학 이론은 근대(modernity)의 문제를 필연적으로 다루게 된다. 연구주체와 객체의 관계 문제, 탈식민주의의 문제, 서구 담론의 전유, 여성주의 등의 일반적인 주제들을 종교학 역시 필연적으로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얘기들은 하나하나 그 수업에서 다루어진 책들을 살피면 분명해 질 것이다.


(1) Talal Asad, Genealogies of Religion
아사드의 책이 첫 시간을 장식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웠다. 이 책은 내게 낯선 책이 아니다. 어느 강사분의 수업을 통해 접했고, 세미나를 통해 부분적으로 읽은 적이 있는 책이다. 보편적인 종교 정의를 해체하는 유명한 논의로 시작되는 이 책은, 내가 있었던 국내 대학원에서는 빨간책 취급을 받았다. 이 급진적인 인류학자의 논의가 도대체 종교학에 속하는 것인지 자체가, 국내의 선생님들에겐 의심스러웠던 탓이리라.
하지만, 실라부스의 순서에서 잘 드러나듯이, 현대 종교학 이론을 논하는데 이 책의 논의는 출발점이 되었다. 현대 종교를 다루는 그 어떤 논의도 근대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이 책은 준엄하게 제시해준다. 유명한 1장 외에도 보편성을 전제하는 번역에 대한 문제제기(http://blog.empas.com/bhang813/1127862 참조)인 5,6장도 중요하게 읽혔다.

 

(2)Peter Berger, The Sacred Canopy
피터 버거의 책은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있는 종교사회학의 고전인데, 이번에 처음 읽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이전에 종교사회학 수업에서 들었던 내용들이 이 책에 다 압축되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어 놀랐다. 이 책만 제대로 읽으면 될 것을, 이해 안되는 노트 들여다보며 고생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내 종교사회학 지식의 총결산이라고 할만한 이 책을 받아들이는 미국 친구들의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무성의했다. 이 책의 전반부는 제법 이론적인 논의를 담고 있고, 후반부는 미국의 종교다원주의 현상에 대한 분석을 제공한다. 수업 시간의 토론에서는, 너무 뻔한 얘기라고 생각했는지 전반부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가 없었다. 대신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얘기들이 좀 있었는데, 결론은 싱겁게도, “이거 너무 옛날(1960년대)에 대한 이야기지?” 이런 식으로 났던 것 같다. 별로 진지했던 토론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이 책의 뒷부분에 대한 내 생각을 덧붙여 놓는다면, 버거는 미국의 종교다원현상을 시장 모델에 입각하여 분석하고 있는데, 자본주의에 대한 낙관이 배어 있는 분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버거는 여러 종교를 접할 수 있는 현대의 종교인을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진 소비자의 입장에 비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비교는 종교 현실의 측면에서도, 시장 현실의 측면에서도 낙관적인 쪽으로 과장되어 있다.


(3) Victor Turner, The Ritual Process
리미널(liminal), 코뮤니타스(communitas)와 같은 터너의 개념들은 아직도 널리 쓰인다. 참 중요한 책인데, 이 책이 아직 우리글로 번역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우리 학문의 척박함을 증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은 쉽게 했지만, 사실 이 책은 번역하기 참 까다롭다. 박학한 학자의 책을 옮기는 것은 참 고통스러운 일이다. 터너 책 번역하려면 인류학에도 조예가 깊어야 하지만 종교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도 필요하다.
내가 느끼기에 이 책의 압권은, 코뮤니타스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성 프란체스코 사후 그를 계승하는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영성파와 엄수파로 갈라지는 과정을 예로 든 대목이다. 그리고 1960년대 미국의 히피 운동을 다른 예로 들면서, 프란체스코 성인의 이름을 딴 도시(샌프란시스코)에서 그 운동이 일어났다고 언급하는 유머감각도 기억에 남는다.
(http://bhang813.egloos.com/1875373 참조)


(4) Eric Sharpe, Comparative Religion
이 책이 강의에 들어있는 것은 의외였다. 난 그저 이 책이 오래된 종교사 책이라고만 여겼기 때문이다. 낡은 정보나 제공하는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에릭 샤페의 종교학의 관점은 음미할만했다. 이 사람의 관점, 날이 서 있다. 칼칼한 목소리로, 신학적 연구와는 독립된 학문으로 종교학을 정립하려는 시각에서 종교사를 일관되게 서술하고 있다. 신학과 종교학에 양다리를 걸치고, 좋은 게 좋은거지...라는 태도를 보이는 많은 미국 종교학자들의 태도와는 분명히 구분된다. 그러한 선배 세대 학자들의 노력은 참 소중한 것이라고 난 생각한다.
(http://bhang813.egloos.com/1875366 참조)


(5) Walter D. Mignolo, The Darker Side of the Renaissance
처음 들어본 학자였는데, 라틴 아메리카 탈식민주의 연구의 아버지라고 한다. 과연 읽어보니 그 폭넓은 시야에서 대가의 풍모가 느껴진다. 유럽 지성사를 포괄하면서도, 아메리카의 구체적인 현실을 세세하게 논하고 있다. 유럽인들이 어떻게 아메리카를 지배의 대상으로 만들어 갔는가를, 지도 제작, 역사 기술, 문자 체계라는 세 분야의 정치한 분석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예컨대 유럽의 “책의 문화”가 아메리카인들의 기호 체계를 소거하고 지배적인 문화로 올라앉은 과정, 유럽인의 지도 제작이 토착적인 공간인식을 밀어내버린 과정이 서술된다. 유럽 문화의 이식은 토착 문화와의 의미소통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드를 포맷하듯이 이루어졌고, 토착적인 문화 체계는 새 시스템 아래 마치 바이러스처럼 잔존하고 있을 뿐이다.


(6) Thomas Tweed, Retelling U.S. Religious History
내가 발표를 맡은 책이다. 보통 두 사람이 한 수업의 발표를 맡는데, 공교롭게 나 혼자 이 책의 발표를 맡아 한 수업 전체를 책임지게 되었다. 얼마나 쫄았던지... 하지만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준비를 하였다. 손발도 맞지 않는 두 사람이 발표를 하느니, 나 혼자 멋대로 말아먹는 것이 속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으로 나름대로 열심히 읽은 책이다.
아홉 명의 학자가 모여 미국 종교사를 어떤 관점에서 다시 서술할 것인가를 논한 책이다. 새로운 관점을 말하기는 쉬워도, 실제로 그것을 바탕으로 역사를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이 책의 글들은 짧게나마 그런 시도에 성공하고 있다. 새로운 관점이라는 것은 백인 남성(WASP였던가?) 개신교 위주의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다양한 민족들의 만남, 여성이라는 종교사의 주체의 활동, 제의라는 공간을 통한 다른 문화의 소통이라는 주제들을 중심으로 해서 미국 종교사를 다시 이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이 “다시 이야기하기”는 상당히 많은 통찰을 제공해 주는데, 예컨대 여성들의 쪽수가 교회사를 어떻게 결정지어왔는가를 다룬 논문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가장 관심을 끈 논문은 미국이라는 공간에 다양한 민족들이 유입되면서 어떻게 종교사를 구성하였는지를 다시 이야기한 글이다. 백인들이 아메리카 토박이들의 죄의식을 어떻게 재구성하였는지(http://bhang813.egloos.com/1875346)도 그 여러 만남이 빚어낸 이야기 중 하나이다.

 

(7) Richard King, Orientalism and Religion
킹이라는 영국의 젊은 학자는 최근의 근대와 탈식민주의 논의들을 총정리하면서 인도 종교 연구를 다루고 있다. 도대체 인도 종교에 힌두이즘이라는 말이 덧씌워지는 게 어떤 문제를 함축하는가? 인도 종교하면 신비롭다는 연상, 다시 말해 힌두교와 신비주의의 연관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는 학문적 담론은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 이러한 학문적 반성들을 담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의 탁월한 점이라면 서구의 관점의 문제뿐 아니라 아시아인의 반응이라는 문제를 함께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 즉 서구인이 타자를 지식화(그리하여 대상화)하는 방식에 대한 반성은 주로 서구 학계의 문제로 흔히 다루어진다. 학자들의 개념 설정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도, 그 지식의 대상이 되는 아시아인들도 가만있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아시아인들은 서구의 담론, 예컨대 “인도는 신비주의의 나라야”라는 인식을 받아들이고 또한 이용하여 서구인의 입맛에 맞는 모습으로 자신을 변형시켜 서양에 수출하였다. 라마 크리슈나 교단을 만들어 서양에 수출한 비베카난다나, 선불교를 동양 정신의 정수라고 포장하여 팔아먹은 스즈키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아시아 지식인들이 오리엔탈리즘의 담론 작용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음이 지적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앞의 두 가지 예가 지적되었지만, 서구 담론이 아시아 종교 현실에 끼친 영향의 사례는 무한히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강유위류의 유교종교화 운동이라든지, 한국의 신종교들의 성립, 사실상 근대 아시아 종교의 거의 모든 사례들에 대해 비교할 거리를 남기는 흥미로운 책이다.

(8) Michel de Certeau, The Practice of Everyday Life
드 세르토의 이 책은 굉장히 멋지다. 시작 문장이 “보통 사람이라는 무명의 영웅들이 이제 무대위에 서기 시작했다...” 이런 비슷한 내용이었는데, 그 감동이란... 일상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몸짓들, 길거리에서 걸어다니기, 농담, 사소한 대화, 교통 수단 활용 등이 함축하고 있는, 권력(푸코의 용법에서의)에 대한 저항을 분석하고 있다. 프로이트말고는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영역에 대한 세밀한 고찰이다. 엘리트가 아닌 대중 전통의 몸짓 속에 저항을 분석하는 것은 내 관심사와도 상당히 밀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 나의 솔직한 감정은, 내가 얼마나 영미식 글쓰기에 길들여져 있었는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아포리즘의 집합으로만 보이는 이 프랑스 지식인의 책은, 읽어나갈수록 도저히 정리가 되지 않아 거의 읽다가 집어치다시피 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1주일이라는 시간에 이 책을 읽고 정리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걸, 서문만 읽고나서도 직감할 수 있었기에 눈에 띄는 몇 챕터들만 읽고 대충 읽은 척하며 보고서를 내었던 책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 해도, 통찰력 가득한 이 책을 제대로 소화할 자신은 없다.

(9) Carlo Ginzburg, The Cheese and the Worms
종교에 있어서 엘리트 전통과 대중 전통이 어떠한 상호작용을 하는지를, 한 시골 노인의 머릿속에서 구성된 희한한 기독교를 그려주는 이 책은 잘 보여준다. 내가 참 좋아하는 책이다. 국내에 소개되어 있는 책이 때문에 설명은 생략.(http://bhang813.egloos.com/1875336 참조)

(10) Glenn Hinson, Fire in My Bones
남부 흑인 교회의 한 행사를 정치하게 기술한 연구서인데, 한 행사의 요모조모와 관련 인물들을 분석한 책의 분량이 거의 350페이지 정도 되었다. 소설을 쓰듯이 줄줄 써내려 나간 특이한 형식이다. 교인들이 모여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성서 봉독을 하면서 잠시 조용해졌다가, 다시 분위기기가 달구어지고, 기도를 하다가, 나와서 춤을 추기 시작하고... 등등의 교회 행사의 식순 하나하나가 챕터들을 이룬다. 연구사라든지, 다른 연구와의 비교와 같은 학술적인(?) 내용들은 각주와 부록의 자리로, 완전히 눈앞에서 치워버린 것도 상당히 파격적인 구성이다.
연구 과정도 특이하다. 저자는 무슨 분석을 할 때마다 신자들에게 쪼르륵 달려가 일기검사 받듯이 내용을 검토받는다. 그러면 신자들은 주로 아니라고 퇴짜를 놓는다. 그러한 친밀한 대화를 토대로 기술된 책이다. 전적으로 찬성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상당히 의미있는 작업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이렇게 한 의례를 고스란히 담아내려는 책을 읽으면서, 차라리 동영상 시디로 제작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해보았는데, 내 대학원 친구 하나가 저자에게 이메일로 물어본 결과, 아니나 다를까 저자는 이미 그걸 시디로 구워 발간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11) Interpretive, Epistemological, and Moral Quandaries
종교 연구자가 대상과의 관계에서 갖게 되는 문제들을 다룬 논문 7편을 읽었다. 간단히 말하면, 연구가 마냥 객관적일 수 있느냐, 종교 경험의 설명하기 힘든 대목을 연구가 제대로 담고 있느냐, 연구자가 자처하는 비신앙 역시 하나의 종교(?) 전통 아니냐... 등등의 문제들이었다고 기억된다. 하나하나 상당히 답하기 까다로운 문제들이다. 물론 중요하고. 빅터 터너의 부인인 에디스 터너가 최근 잠비아 현지조사를 다시 갔다가 귀신들린 체험을 했다는 논문도 읽었고(이 분, 남편 사후 지금까지 30년이 넘게 살아계신다), 필리핀 산간에서 현지조사를 하는 학자의 글로, 전에는 바기오 부근 필리핀 원주민의 격한 죽음 의례(아마 해골을 수습하는 의례였던 것 같다)을 전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가, 현지조사 중 부인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겪고 나서야 그들의 격한 감정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숙연한 글도 있었다. 조사 대상이었던 흑인 여성 교회지도자와의 우정과 견해차를 그린 논문도 흥미로웠다.
수업 시간에 “Holy Ghost People”라는 비디오를 보았다. 스네이크 핸들러 교회의 예배 장면을 편집한 다큐멘터리이다. 오래전에 제작된 흑백 영상물인데, 그 인상은 무척 강렬했다. 애팔래치아 산골의 수수한 차림의 사람들, 방언하다 몸을 부르르 떨다, 나중에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뱀을 푸는 장면! 마지막 장면에서, 목사는 뱀에 의해 팔뚝이 물린다. 목사가 괜찮다고 손을 훼훼 저으며 나가는 것이 마지막 컷이다. 그러나 이 촬영이 있은지 4시간 후 그 목사는 독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12) 마지막 주는 페이퍼도 있고 해서 대충 읽었고, 개인적으로 흥미있는 내용도 아니었다. 철학자 칸트의 인종주의에 대한 글은 재미있었다. 그 대철학자가 “껌둥이들은 맞아야 사람이 돼”라고 평생 강의하였다고 한다. 나머지 하버마스의 글은 차분히 읽을 시간이 없어 대충 읽고 보고서 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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