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사_자료/문헌

사도신경

by 방가房家 2023. 5. 29.

아는 분께 요즘 사도신경에 변화가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진척이 없나보다. 작년에 한기총과 KNCC에서 공동으로 새 번역을 내놓았는데, 이것이 각 교단 총회에서 인준을 받지 못하여 해를 넘기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흐지부지 될 모양인갑다. 새 번역 중에 주기도문에 대한 저항이 더 심한 편이다. 요즘 여성신학계에서는 주기도문의 하느님에서 아버지라는 부성(父性)을 제거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개신교회에서는 이것을 철저하게 거부하려고 작정을 했는지, 번역 작업에는 여성 신학자를 한 명도 끼워주지 않더니, 급기야는 원문에 두 번밖에 안 나오는 아버지가 다섯 번 나오도록 하는 유래없이 마초적인 주기도문 번역을 내놓았다. (이 글 참조) 이에 대한 반발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사도신경으로 다시 돌아가서, 왜 종래의 사도신경이 개정되어야 하는지를 지적하는 것은 너무 쉽다. 다음이 현재 개신교회에서 사용되는 사도신경이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사,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주어 ‘나’가 앞으로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라 빌라도 통치하에 고난을 받은 것이다; 장사한지는 수동형이 되어야 한다; ‘저리로서’는 요즘 사람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말이다. 단순히 ‘거기로부터’의 고어 형태일 뿐이다; ‘공회’는 기독교 공동체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는 말이 아니다; ‘교통’은 일반적인 어휘가 아니다.
눈에 대번에 보이는 것만 해도 한둘이 아니다. 이것은 오래전의 번역을 사용하기 때문에 생기는 당연한 현상이다. 현대에 통용되는 언어를 사용하고 어미와 문장만 다듬으면 말이 되는 신경이 될 것이다. 작년에 제안된 번역안에서 이 작업은 거의 이루어졌다. 다음이 보기 좋은 쪽으로 다듬어진 새 번역안이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당연히 바꾸어야 할 것은 개신교회는 바꾸지 못하고 있다. 종래의 것이 더 편하다는 신자들이 다 늙어죽을 때까지 안 바뀔지도 모르겠다.


내가 논하고 싶은 쟁점은 현대어로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이다. 사도신경의 새 번역에는 다른 신학적 논쟁이 숨어있다. 요즘 영문 사도신경이 함께 실려 있는 찬송가책도 많이 있기 때문에, 영문과 한글 사도신경을 비교해서 읽어본 교인이라면 이 점을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영문 사도신경에는 우리의 것에는 없는 이상한 구절이 있다. 다음이 영어 사도신경이다.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creator of heaven and earth. I believe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He was conceived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and born of the Virgin Mary. He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ied, and was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 to the dead.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He ascended into heaven. He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and He will come again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the life everlasting. Amen.

예수가 장사된 것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사흘만에 부활한다는 내용 사이에, “예수가 지옥에 내려간다”(He descended into hell)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라틴어 원문 "descendit ad inferos"의 번역이다. 원문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 다른 나라 사도신경에는 이 구절이 있다. 우리나라 개신교회에서만 빠져 있다. 천주교회에서 쓰는 사도신경에는 “저승에 가시어”라고 되어 있으며, 성공회에서 쓰는 사도신경에는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시어”로 나타난다.

예수가 지옥에 갔다는 게 무슨 말인가? 예수천당 불신지옥인데, 이 어찌된 일인가?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지옥 개념과 다르다. 죽은 자들이 머무는 지하세계라는 의미이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음부(陰府)라고 번역된다. 그래서 영어 사도신경에는 'into hell' 옆에 'to the dead'라는 부연설명을 갖다붙였다. 전통적인 설명에 의하면 예수는 십자가형 이후 지하세계에 내려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선한 영들을 구한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 야곱, 이삭과 같은 유대인 족장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 사람들이지만 예수 이전에는 구원이 없으므로, 그렇다고 지옥으로 갈 수도 없어서 지하의 임시 거처에 머무르고 있다가 예수 사후에야 구원을 받아 하늘나라로 올라간다. 그런 식으로 지하세계 하강이 설명되기는 하는데, 복잡한 것이 사실이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이분법적인 사후관을 갖는 개신교인으로서는 이러한 제3의 장소에 대한 상상은 난감하다. 제3의 장소는 천주교의 연옥 교리와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연옥과 연결시키지 않기 위해 개신교 신학자들은 고심하지 않을 수 없는데, 예를 들어 칼뱅은 이 구절이 예수가 지옥까지 내려가는 죽음의 고통을 겪은 것으로 풀이한다. 어떤 신학자는 예수의 권세가 지옥에까지 미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머리를 많이 쓴 해결책들인데, 다른 내용들은 문자적으로 믿으면서 그 구절에 가서는 의미를 돌려 해석하는 것이 신자들에게는 쉽지 않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도신경에는 왜 예수의 지옥행이 빠져있나? 나는 이에 대한 만족할만한 해답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바로는, 우리나라에서 이 구절은 “슬며시” 번역에서 빠져버렸다. 최초의 번역인   1894년 <찬양가>에 실린 언더우드 번역의 사도신경에는 “디옥에 나리사”라는 구절이 분명 등장한다. 1905년 책에 실린 사도신경에도 “음부에 나리셨더니”라고 번역되어 있다. 반면에 1897년 번역에는 나오지 않으며 1908년 번역부터는 보이지 않는다. 이후에는 지금 형태로 굳어져 내려왔고. 처음에 사도신경을 번역한 것은 미국 선교사들이었고 지옥행 구절을 빼버린 것도 그들인데, 그들은 아무런 설명도 남기지 않았다. 어떠한 토론이 있었다는 기록도 없다. 언제부터인가 소리 소문 없이 빠졌고, 한국 신자들은 그 사도신경을 받아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랬을 이유를 추측할 수밖에 없다. 개신교 입장에서 이 구절이 불편할 수도 있다는 점은 앞에서 이야기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엔 다른 이유도 있었다고 보인다. 그것은 저승세계 하강 모티브가 우리나라 무속의 세계관과 너무 잘 맞아떨어진다는 점이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이 지옥 혹은 음부를 무속적인 세계관을 통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걱정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아무 양해 없이 그 구절을 삭제했던 것 같다.

물론 우리나라 신학자들은 공인된 사도신경 본문에 있는 구절이 한국 개신교회에서만 빠져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새 번역이 시도될 때 그 구절을 살릴지 말지를 놓고 논쟁이 있었다. 결론은 구절을 빼고 원래대로 가자는 것. 해서 새번역안에서도, 공인된 원문을 사용한다는 원칙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구절은 삭제되어 있다. 기존의 좋은 점은 살린다는 식의 논리가 적용되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논하고 삭제를 지지하는 한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굳이 신앙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소지를 주는 문구를 사용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 문구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사도신경에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속죄사역이라는 대속적 죽음의 충분한 의미가 잘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주장이 오만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신학적 해석을 통해 텍스트를 결정하는 것은 월권이다. 독해의 권리는 신자에게 주어져야 한다. 사도신경의 단어 하나하나가 그것을 암기하는 신자들에게 중요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는 이러한 위험을 알지만 너희들이 그것까지는 알 필요는 없다’는 태도는 현대사회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 아닐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