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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만남

인디언 성녀, 카테리 테카크위타

by 방가房家 2023. 5. 27.

카테리 테카크위타(Kateri Tekakwitha)


북미 원주민의 기독교에 관한 책을 읽다가 낯선 성인 하나를 만나 그 내용을 정리해 본다. 인디언 전통과 천주교 전통이 어떻게 결합하였는가라는 쟁점이 흥미롭고, 한 명의 인디언 성인을 배출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한 부분도 흥미롭다. 결국에는 북미 원주민에 대한 바티칸의 정치적 배려에 의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북미 지역을 방문하기 몇 년 전에 복녀로 인정받게 된다.
1650년대 예수회는 이로쿼이 인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1667년 테카크위타라는 이름의 소녀에게 세례를 주게 된다. 이 인디언 이름은 다양하게 해석된다. “그녀는 손으로 민다,” “길을 더듬어 걷는 이,” “열심히 일하는 여자,” “가지런히 정리하는 이,” 등. 이 소녀는 세례를 받은 지 일년 만에 미사에 참석하게 되는데, 이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보통 인디언 신자들은 세례를 받고 7년의 기간을 거친 후에 미사 참석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신실함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리라. 몇 년 후 겨울, 그녀는 인디언 동료들과 사냥을 떠난다. 사냥은 인디언들이 응당 하는 일이지만, 인디언이 신앙촌을 만들어 정착하기를 원했던 신부들이 금지한 일이었다. 게다가 사냥 도중에 성적인 방종이 있었다는 소문까지 퍼져 그녀를 곤경에 빠뜨렸다. (오른쪽 그림은 카테리 성녀 그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카우테키 신부에 의해 1682-1693년에 그려졌다.)

테카크위타는 그녀의 죄를 회개하기 위하여 고행을 시작한다. 털옷을 입은 채, 단식을 하고, 추운 데 나 있고, 그 외 여러 자기 부정의 수행을 한다. 그녀는 여성 동료들을 규합하여 고난 수행을 계속하는데, 그 강도에서 그녀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모카신을 신지 않고 겨울의 얼음장을 맨발로 걸어 발에 동상을 입는다. 그녀는 모래와 유리를 씹어먹고 피가 날 때까지 회초리로 매질을 한다. 이런 육체적 고행은 가톨릭의 전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로쿼이 인들의 전통을 따른 것이기도 하다. 즉, 고통, 상처, 배고픔을 참으면 참아낼수록 좋은 것이라는 이로쿼이 인들의 사고가 작용하고 있고, 이러한 면에서 그녀의 수행은 두 전통의 혼합의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또한 그녀는 절대 순결을 서약하는데, 여기서도 여성을 격리시켜 처녀성의 영적인 힘을 통해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수행을 했던 이로쿼이 전통이 작용하고 있다. 테카크위타의 수행은 가톨릭 개종과 금욕을 통해 이로쿼이 전통을 재생한 것이라고 평가된다.


신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테카크위타는 고행을 계속하다 건강을 해치고 1680년에 죽고 만다. 그 때 그녀의 나이는 24살이었다. 이후 그녀는 북아메리카 가톨릭의 모범 사례로 높이 칭송된다. 신부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하였고, 그녀의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차우차티레라는 신자의 환시에 발현하였다고 이야기되었다. 1720년에 건립된 예배당에는 그녀 유골이 안치되었다. 그녀에 의한 기적 이야기가 형성되고 전설들이 수집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그녀는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가톨릭을 대표하는 인물로 추앙받는다. 테카크위타에 대한 신앙은 이로쿼이족을 넘어서서, 전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일부 백인들에까지 퍼진다. 어느 인디언 여성은, 가톨릭은 믿지 않지만 테카크와타는 믿는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인디언 보호구역마다 그녀 성화가 보급되었고, 뉴욕주 폰다에 있는 그녀 성당(http://www.katerishrine.com/)에는 많은 순례객들이 찾아들었다. 20세기에는 테카크와타를 시성하려는 운동이 지속적으로 펼쳐졌다. 토착적 영성에 관심을 갖는 2차 바티칸 공회 이후의 가톨릭 신학의 흐름과 맞물려, 테카크와타의 시성 가능성이 차츰 가시화되었고, 1980년에 드디어 복녀로 시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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