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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돌아다니다가

조선신궁 있던 곳

by 방가房家 2023. 5. 24.

서울역 건너편 힐튼 호텔에서 시작해서 길 건너 계단을 이용해서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어린이 놀이터와 백범광장, 안중근기념관, 교육과학연구원(옛 어린이회관), 그리고 분수대가 있는 남산공원으로 이어진다. 이 영역은 일제시대 건립한 조선신궁(朝鮮神宮)이 자리하던 영역이다. 지금 이곳에는 일제 시설에 대한 어떠한 표시도 남겨놓지 않고 여러 동상들과 비문들을 비롯한 국가의 기호들이 과잉으로 들어앉아 있다. 다만 계단의 배치와 지형이 주는 느낌을 통해서 일제가 그들의 성소를 만들기 위해 산을 깎아 마련한 공간이라는 어렴풋한 느낌만을 받을 뿐이다.김대호의 논문에서 얻은 자료에 따르면 일제 당시 서울 중심부의 지도는 다음과 같다.


현재 지도에서 조선신궁 자리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나는 신사의 일반적인 구조를 잘 모른다. 조선신궁이 많은 계단을 올라가서 참배하는 구조로 되어있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하는 정도이다. 첨부된 논문에 수록된 자료에 건물 배치를 그린 도면이 있어 여기 올린다. 그리고 조선신궁을 다루는 일본어 웹페이지에서 얻은 그림도 도움이 되어 올린다.
 
위의 도면과 현재 상황을 정밀하게 비교한 작업은 아직 본적이 없다. 현장에도 아무런 표식이 남아있지 않아 옛 사진들과 비교해서 추측하는 정도이다. 위의 일본 웹페이지에도 사진이 몇 장 있고, 다른 곳에 관한 것이지만 ‘경성신사 주변의 모습’이라는 글도 참고가 된다. 그런 식의 자료가 조선신궁에 대해서도 더 발굴될 필요가 있다. 그 외에 첨부파일에서 얻은 사진 몇 장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힐튼 호텔부터 올라가는 길은 계단과 중간 중간의 광장으로 이어지는데 절정이 되는 마지막 계단은 교육과학연구원을 왼쪽에 끼고 올라가는 긴 계단이다. (*이 계단을 일명 '삼순이 계단'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나의 착오였다. <내이름의 김삼순>의 마지막 장면 촬영지는 교욱과학연구원 약간 남쪽, 남산도서관 옆 계단이다. 모양이 거의 같고, 특히 중앙 난간이 똑같아 착각하였다. 하마터면 신궁 자리 앞 광장에 곧바로 연결되는 계단이 현재 연애의 성지라는 역설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뻔 했다. 사실 이 착각이 이 글을 준비한 이유였는데....) 그날 찍은 사진과 참고가 되는 사진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마지막으로 남산공원에 다다르면 확 펼쳐진 공터가 안온한 느낌을 주는데, 이 느낌은 아무래도 신궁을 위해 조성된 공간에서 오는 느낌이 아닐까 한다. 신궁 터에 있었던 남산식물원은 현재 철거되었고, 나무들을 심어 흔적을 지우고 있다. 남산 제모습 찾기의 일환으로 철거되었다고 하는데, 어떤 모습으로 복원이 될지 알 수 없다. 지금은 신궁 앞부분이었을 것 같은 공간에 네모 모양의 휑한 벤치가 놓여 있어 이상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일제가 자신들의 성스러운 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깎아놓은 남산 중턱, 신사는 일본인들 스스로의 손으로 정성스레 철거하였지만 그들이 닦아놓은 터는 남아있다. 그 터에는 대한민국의 을씨년스러운 근대를 보여주는 공허한 상징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 상징물들이 담고 있는 기괴한 사연들은 <오마이뉴스>의 글, “일제 떠난 남산, 독재정권이 접수하다”에 잘 정리되어 있다.

종교사적으로, 성스러운 공간이 다른 주체들에 의해 점거되는 상황은 흔히 일어난다. 예루살렘의 예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으로 보아주려 해도, 남산공원의 상징체계에서는 비정상적이라는 느낌을, 빨리 정리가 되었으면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일본인들이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시기 위해 정성을 다해 건설한 이 곳, 한국인들이 참배에 동원되어 힘들게 오르내렸을 계단, 이승만 정권이 국회의사당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던 공간,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킨다는 미명하에 김유신, 김구, 안중근 등의 동상이 되는대로 자리잡은 곳, 어린이회관이 자리해 꿈나무들이 힘들게 올라왔을 그 계단, 지금은 연인들이 찾아가는 운치 있는 계단.... 이 정신없는 역사는 무언가를 기준으로 정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공간의 사연은 꼭 기록되어 잘 보이도록 표시해 놓아야 한다. 그곳이 조선신궁 자리임을 잊게 하는 것이 제자리찾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공간에 서린 뼈아픈 기억을 잊지 않도록 정확하게 고증하고 표시하는 것은 최소한 필요한 일이다. 아무 흔적도 없이 나무만 열심히 심어놓은 신궁자리를 보며 한숨이 나왔던 것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역사의 부재화’라는 것을 알아차릴 여유조차 없는 우리의 한심한 모습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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