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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돌아다니다가

사슴 계곡 암각화 (The Deer Valley Rock Art Center)

by 방가房家 2023. 5. 24.

미국 애리조나 피닉스 북부에 위치하는 디어 밸리 암각화 센터(The Deer Valley Rock Art Center)는 북미원주민들이 남긴 바위 그림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입구를 지나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은 사막 벌판을 조금 걸어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바위들로 온통 뒤덮힌 기이한 언덕이 나타난다. 특이한 바위들이 범상치 않은 느낌을 주는데, 이곳은 애리조나 지역에 살던 여러 북미원주민들에 신성한 장소였고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부족의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와서 그림들의 의미를 새기고, 그림을 그리고, 의례를 행했던 장소였다.
이곳에만 모여 있는 이 검은 바위는 오랜 동안의 태양열의 작용에 의해 검게 변색된 것이라 한다. 변색 작용에 의해 이 바위 표면에는 주황색과 검은색의 두 층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바위의 검은 표면을 조금만 벗기면 주황색이 나타난다. 이 검은 층을 벗겨내는 방식으로, 북미원주민들은 여기다 그림을 남겼다.

돌무더기 언덕을 자세히 살피면 여러 그림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보호를 위해 돌무더기를 올라가 그림을 보지 못하고 어느 정도 먼발치에서 볼 수밖에 없어 몇몇 그림들만 눈에 넣어둘 수밖에 없었다. 자세히 보면 산의 거의 모든 바위 위에 무언가가 새겨져 있다. 산 전체가 커다란 스케치북, 혹은 낙서장 같다. 설명서에 의하면 여기에 1500개 이상의 암각화가 있다고 한다. 내 눈으로 확인한 것은 100개도 안 되었던 것 같다. 나는 눈썰미가 좋지 않고 끈기가 없어 이런 것들을 대충 보아버리고 만다.

운이 좋게도 그곳엔 ‘사막의 작은 곰’이라는 북미원주민 아저씨가 안내를 하고 있었다. 야퀴족인 그는 거기서 안내도 하고, 암각화 도안을 직접 만들어서 판매하기도 하는 분이었다. 자기 전통에 대한 애정과 밥벌이 수단이 약간은 기이하게 결합된, 현재 북미원주민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나눠준 명함에는 그의 갤러리 웹주소(Rock Art Creations)가 적혀 있다.
작은 곰과 이야기를 나누며 이해한 바에 따르면 이곳의 암각화들은 한 시대, 한 부족에 의해 그려진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사람들이 거쳐가며 형성된 것인데, 설명서를 보니 기원전 2000년대의 그림, 기원전 1000년대의 그림, 기원후 800년대의 그림이 같은 바위 위에 포개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장 최근에 추가된 그림은 오십년 전의 것이라 한다. 조상들이 그린 그림들에 경배를 드리는 동시에 계속적으로 다른 그림들이 덧그려진 것이다. 어찌 보면 이 돌산은 전승되면서 삶의 정황에 따라 계속적으로 살이 붙어나가는 구전 전통과도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사슴 계곡에 오는 이들은 애리조나 근처 20여 부족 사람들로, 부족마다 이 그림의 의미에 대한 다양한 구전 전통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구전 전통의 특성상 자신이 새로 발견한 의미가 구전 속에 새로 통합, 추가되어 전승되기 때문에 의미의 층은 계속 축척되고, 변화하고, 풍부해진다. 작은 곰의 이야기는 다소 낭만화되어 있다. 일단 수천년 전에 최초에 이 그림을 그린 이들과 지금의 부족을 이루는 사람들이 같은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다. 그 사이 많은 사람들의 이주가 있었으며, 그래서 고고학적 유물을 남긴 호호캄 사람들이나 아잔시 사람들이 지금 애리조나의 북미원주민과 같은 이들인지에 대한 증거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공간이 어떤 부족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었는지, 그리고 각 부족에 의미에 대한 구전이 어떻게 존속되는지 엄밀히 알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학술적 자료를 통해 그러한 것들을 꼼꼼히 살피는 기회가 내게 올 지는 미지수다. 그러기엔 너무 게으르다.
일단은 지금 북미원주민의 믿음의 체계를 살피는 것만으로 만족이다.

이 돌무더기는 거대한 기호의 덩어리다. 조상들이 남긴 기호 위에, 다른 기호의 층들이 계속해서 덧씌워지는 팔림세스트(Palimpsest)로 존재해왔다. 다의성(多義性), 다성성의 향연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이곳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상징이라고 불릴 수 있다. 각 부족들이 이곳에서 각자의 의미를 전유(專有)하되 다른 부족이 지닌 의미를 간섭하지 않는다. 전유된 의미들 각각은 또한 구전을 통해 각 세대의 맥락을 포괄한 새로운 의미의 층들을 쌓아나간다. 이 돌무더기는 텍스트이되, 단일한 해석을 고집하는 문자 텍스트(오늘날 보수적인 신자들에게 성서나 꾸란의 예처럼)들의 나쁜 버릇을 가지지 않은, 의미들이 소통하고 거쳐가는 정류장이나 환승역 같은 곳으로 북미원주민들에게 존재해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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