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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_자료/영상

그의 엔딩은 언제나 슬펐지만

by 방가房家 2023. 5. 22.

1. 내 삶에 영향을 준 그 엔딩

흔히 김병욱 피디의 새드 엔딩을 이야기할 때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마지막의 박정수의 죽음을 언급한다. 내 경우엔 두고두고 머릿속에 남은 것은 다른 장면이었다. 이 엔딩은 김민정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데, 다른 사람들의 소식을 전한 후 마지막으로 자신과 애인의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난 [유학 떠나는] 재황 오빠와 예정된 이별을 했다. 
몇 년이 될지 모르는 유학을 앞에 두고, 
우리는 서로에게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약속이나 기다림에 관한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자기 앞에 주어진 길을 최선을 다해 걷자는 말을 눈물 속에서 주고받았다.

유학을 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때라서 그랬던지, 내겐 이 이야기가 예사로 들리지 않았다. 나는 드라마에서 연인이 유학을 위해 깨끗하게 헤어지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다는 게 신선했고, 생각할수록 그럴 듯 했다. 따라한 것은 아니지만, 몇 년 후 어쩌다 보니 나 역시 사귀던 사람과 냉정하게 헤어진 후 유학을 가게 되었다.(이런 쿨한 태도는 내 쪽의 일방적인 것이긴 했다.) 어쩌면 <<웬만해선>>의 엔딩이 머릿속에 간직되어 있으면서 은연중에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그 때만 해도 연애하던 주인공을 마지막 회에서 이렇게 쿨하게 이별시켜 버리는 진행에 대해 저항이 거세지 않았던 것 같다. <<똑바로 살아라>> 마지막에도 최정윤과 천정명의 헤어짐이 무리 없이 그려졌다. 두 <<하이킥>>을 거치며 러브라인에 대한 관심이 폭주해 누구누구를 이어달라는 주문이 게시판에 쏟아지는 지금 사정과 비교해보면 그 땐 둘을 찢어놓기(?)가 조용하고 편안했다. 김병욱 시트콤 세계에서 라인의 연결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가 옆에서 뭐라고 참견하던 간에.
 
2. 게임이 끝나고 난 뒤
김병욱 시트콤에서는 게임(구구단 게임, 이번 <<지붕킥>>에선 묵찌빠)이 선호되기도 하지만, 시트콤의 기본적인 구도 자체가 게임에 가깝다. 한정된 공간에서 인물들이 장기말처럼 역할을 맡아 한 판의 에피소드를 구성한다. 게임의 장기판 역할을 하는 공간은 주로 가정이다. 이 공간은 시트콤의 물질적 조건에 의해 부여된 것이다. 우리나라 방송사들은 시트콤은 싸게 만들어서 시간 때우는 장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시트콤에는 투자되는 예산은 열악하고, 그래서 시트콤은 야외 촬영은 거의 생각하지 못하고 세트장(집)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로만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역설적으로 똑같은 공간 내에서 배열되는 요소들의 차이에 의해서 다른 에피소드를 생성하기 때문에 시트콤의 구조주의적인 속성이 강조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시트콤이라는 놀이가 벌어지는 터는 집, 특히 거실 텔레비전 앞의 소파와 식사가 이루어지는 식탁, 그리고 제2 주거지(<순풍>의 찬우네, <웬만해선>의 홍렬이네, <똑살>의 영규네 하숙집, <지붕킥>의 자옥네 하숙)가 되고 거기에 몇몇 부가적인 공간(회사, 학교, 병원 등)이 활용되는 식이다. 
내게 있어서 시트콤 마지막 회의 가장 슬픈 순간은 사람들이 지지고 볶던 그 놀이터가 조용해질 때이다. 마지막 회에서 카메라는 “게임이 끝나고 난 뒤” 비어있는 거실과 식탁을 잡아준다. 그 무심한 화면에 나는 눈시울이 붉어진다. 나는 마지막 회의 진정한 역할은 빈 공간을 보여주는 것, 비록 여전히 사람들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늙거나 떠나가거나 해서 이젠 더 이상 이전처럼 활기차게 노는 판이 되지 못함을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트콤의 마지막 회는 필연적으로 새드 엔딩이다. 연애가 성공하든 부자가 되었든 어찌 되었든 간에 더 이상 거기서 놀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슬플 수밖에 없다. 아래는 <<웬만해선>>의 빈 공간.
<<지붕킥>> 126회에서도 빈 공간이 잠시 비추어진다. 세경이가 공항으로 떠나기 직전에 집을 둘러볼 때의 장면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마지막 회의 중요한 내용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잘못 생각했음은 이내 드러났다. 
<<거침없이 하이킥>>과 <<지붕킥>>을 거치면서 통시적인 이야기의 속성이 가미되었고 이전의 구조주의적인 속성(그 절정은 <<똑살>>이라고 생각함)은 교란되었다. 빈 공간 장면 이후 세경이 공항으로 출발한 이후 10분 동안, 나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예상 못했던 마무리를 맞이한다... 빈 공간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단 말인가?

 

<<지붕킥>> 마지막 회를 보고나서 이틀 동안 정리되지 않은 이런 저런 생각이 지나갔다. 지금도 깔끔하게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내 생각의 가장 주된 흐름이라고 한다면 흔히 이야기하듯이 “새드 엔딩을 좋아하던 김병욱 피디가 이번에도 비슷한 사고를 쳤다”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내가 보아왔던 그의 엔딩들을 떠올릴 때 이번 엔딩은 이전의 엔딩들과 매우 다르게 느껴졌고 그래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전과 연속선상에 있지만 이번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뒤틀렸고, 그래서 이해할 수는 있지만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엔딩이다.(뚜렷한 결론을 갖고 있지 않기에 이 글은 필연적으로 잡스럽다.)


3. 마지막 여행
사실 ‘마지막 여행’은 그의 엔딩의 주요 테마이다. <<웬만해선>>의 끝을 맺는 것은 가족들이 떠나는 마지막 여행이다. 버스를 타고 떠난 여행은 (박정수의) 장례식 차량으로 절묘하게 바뀌어 돌아온다. 마지막 여행은 이제 주인공들이 놀이판을 떠나 각자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을 상징하는 움직임이다. <<똑살>>의 마지막 여행은 기차여행이다. 주인공들은 각자의 삶의 문제들을 안고 기차에 오른다. 무거운 분위기가 흐르지만, 이것은 앞날에 대한 낙관도 비관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리나는 출산하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에서 기차에 오르지만, 사실 몇 회 전 에피소드에서 리나가 미래에 애기 엄마가 되는 장면이 슬쩍 나온 적이 있다. 이런 암시는 사실을 결정지으려는 것보다는 열린 결말을 지어놓으려는 시도일 것이다.

<<지붕킥>>의 ‘마지막 여행’은 (실패한) 비행기 여행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전에 세경과 지훈이 미술관에서 유심히 쳐다본 ‘마지막 휴양지’ 그림이 결말에 대한 복선이라는 주장(기사 참조: ‘마지막 휴양지’는 복선?)은 타당하다고 생각되며, 이는 제작진의 답변(기사 참조)과도 일치한다. 마지막의 전회에서 세경이 타이티로 이민가게 되었다고 순재 가족에 말할 때, 보석은 “타이티, 휴양지 아냐?”라는 반응으로 보여 복선을 뒷받침한 바 있다. 휴양지로 가는 비행기 여행길은, 시간이 멈추어버린 휴양지로의 여행이 되어버렸다. 종교학 용어를 동원하면 이것은 조너선 스미스가 말하는 ‘유토피아적 세계관’이다. 유토피아는 ‘없음(u)+장소(topia)’이기 때문에, 유토피아 지향은 현실의 어느 장소에 속하지 않은 곳으로 향하는 것, 즉 이곳을 벗어나려는 지향을 말한다. 

 
4. 끔찍한 무의미성
대저 여행은 돌아옴을 전제로 한다. 여행에서 무슨 경험을 했건 돌아와 일상 속에 복귀함으로써 여행은 마무리된다. 그러나 <<지붕킥>>의 여행은 돌아오지 않는 여행이기에 우리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 되었다. 이것은 예기치 못한 종말론의 개입이다.
나는 유토피아적 세계관에 속하는 여러 종교 전통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이 종말론의 의미를 다양한 언어와 사례들을 사용해서 해설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납득하지 못한 이 엔딩을 그런 식으로 의미화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리라.
나는 평소에 드라마에서 교통사고가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린다. 교통사고라는 상투적 요소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우발적 요인을 끌어들여 다른 쪽으로 쉽게 돌려버리려는, 작가의 무성의, 무책임, 무신경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이 드라마가 교통사고를 당해버렸다.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어요.”라는 대사와 함께 화면이 하얘지고, 그 순간에 내 머릿속도 하얘지면서 드라마가 끝났다. 그리고 며칠 동안 이 엔딩이 진한 여운을 주었던 것은, 다른 식으로 말하면 괴로움을 주었던 것은, 이 장면이 엄청난 무의미성을 던져주었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장면을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작자가 말하는 열린 결말은 이 대목이다. 두 주인공이 죽었는지 어딘가로 도망쳐서 살아있는지, 아니면 귀신인지에 대해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왜?’(줄리엔 버전)에 대한 단서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순간에 지훈이 사랑이 이루어지는 길은 여기서 뒈지는 것뿐이라고 냉정한 판단을 내리고 운전대를 확 튼 것인지, 세경의 말에 멍때리고 있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차를 피하지 못해 사고가 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운명의 결정에 어느 정도 선택이 개입한 것인지, 철저한 우연의 산물인 것인지 알지 못한다. 왜라는 물음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괴로움은 정확하게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원인이다. 우리는 인생의 무의미성, 순전한 우연성을 용납하지 못한다. 하다못해 이지훈이 개자식이기 때문에 개죽음을 당한 것이라는 설명이라도 덧붙여야 마음이 좀 풀린다. 만약 지난 주말에 <<지붕킥>> 엔딩의 의미를 풀어주는 설교나 설법이 있었다면, 나는 그 교회나 절에 신자등록을 할 의향이 있다. 이런 괴로움을 벗어나는 데 힌트를 주는 것이, 삶의 의미화가 집적된 문화체계인 종교의 역할에 다름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큰 교통사고를 당해 삶의 방향이 다소 바뀐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 사고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직 답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은 내가 살아있는 한 계속 지니고 있을 물음일 것이다. 만약에 사고를 당한 것이, 그리고 그 사고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였는지, 인연에 의한 것인지, 아무튼 문화적으로 전승된 어떤 해답의 체계를 내가 받아들이는 날이 온다면, 그때 나는 그 종교를 받아들인 것이 될 것이다. 지훈과 세경의 죽음 역시 물음으로 남게 되었다. 숱한 텍스트들이 우리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지만, 복잡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진정한 물음으로 남기란 정말로 힘든 일이다. <<지붕킥>>은 나를 며칠간 뒤흔들었고, 물음을 남겼다. 기쁘던 그렇지 않던, 이런 강렬한 뒤흔듦이야말로 작품의 힘에서 나온 것이리라.
 
5-1. 남은 잡담 1
결론은, 없다. 그래도 내 생각을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겠다.
나는 그의 시트콤의 결말은 원래 슬픈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시트콤의 마지막은, 한 판 잘 놀고 나서 놀이판을 거두는 쓸쓸한 작업이다. 놀이판을 거둔 후 말로 사용되던 인물들이 어찌되는 것은 부록과도 같은 내용이다. 언론에서는 그들이 행복하게 되느니 마느니 관심이 많겠지만 그것은 핵심이 아니다. 엔딩이 슬픈 것은 순전히 놀이가 끝나서이지 말들이 어찌되어서가 아니다. 그 슬픔의 핵심은 말이 치워진 빈 공간에 있다.
이상이 내가 원래 이해했던 (구조주의적인) 시트콤의 엔딩이지만, 이번 엔딩은 전과 연속선상에 있으면서도 너무 달라져서 나를 괴롭게 했다. 괴로움의 원흉은 교통사고라는 외부적이고 우연적인 요소의 개입에 의해서 세상이 끝장난다는 것. 극 내내 추구해왔던 것이 종말론이었다면 그처럼 허무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엔딩을 수용하지 못했다. 그것은 괴로운 물음을 안겨주는 강렬한 것이었지만, 결코 내 삶에 영향을 주는 엔딩으로 수용되지 않을 것이다.
 
5-2. 남은 잡담 2
이 엔딩은 여러 가지를 남겼다. 긍정적인 쪽으로 말하자면 이 엔딩은 세경이를 극의 주인공으로서의 지위를 회복시켰다.(유일하게 잘 썼다는 생각이 드는 다음 기사를 참조: 그래서, 모두가 '세경'을 사랑했다) 부정적인 쪽을 말하면 이 엔딩은 내게 “안재환 효과”를 남겼다. 
나는 재방으로든 컴퓨터로든 그의 시트콤을 지겨울 정도로 반복해서 보는 사람이다. 나같은 시청 행태를 보이는 사람(앞뒤 맥락 없이 아무 회나 보는 사람)에게는 서사성이 가미된 것보다는 구조성이 강한 이전의 작품들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강렬한 결말을 지닌다면 그것은 이전 것을 되풀이해서 보는 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이전에 내가 가장 되풀이해서 보던 작품은 <<똑살>>이었다. 그런데 재작년에 안재환의 비극적인 죽음을 경험한 이후, 그가 주인공인 <<똑살>>을 보는 나의 시선도 영향을 받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전보다는 조심해서 웃고, 그 웃음에 허무의 색깔이 스며들어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아무리 구조주의적으로 보려고 해도 후의 사건에 의한 통시적 결과의 영향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을 '안재환 효과'라고 부른다.
이미 <<지붕킥>>의 재방을 볼 때 그런 식으로 보는 눈이 달라져 있는 내 자신을 보게 된다. 결말의 죽음이 오버랩되면서 재방 에피소드를 그 자체로 즐길 때도 웬지 마음놓고 웃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안재환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5-3. 남은 잡담 3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다."라고 속으로 외쳤다. 이번 <<지붕킥>>은 어느 작품보다도 어두웠고, 이 어두움에는 지금 시대가 반영되어 있다. 물론 시대를 고발하는 것이 작품의 의도는 아니지만, 현실 속에서 웃음의 소재를 길어내려는 작가들의 노력이 예기치 않게 이 작품을 시대에 대한 증언으로 남게 하였다고 보인다.
어디서 들은 것도 없고 당연히 확인도 할 수 없지만, 내가 느끼기에 김병욱 피디는 노빠다. 이전의 그의 작품에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의 흔적이 남아있고, 그것은 행복한 시절을 기념하게 해준다. <<똑살>>에는 웃음의 소재로 '노무현'이 등장한다. 이름이 비슷한 주인공 노주현은 보고 동네 할아버지가 "어, 저기 노무현이네"라고 잘못 말씀하시는 짧은 장면, 그리고 형욱이가 "아빠 이름이 노무현 대통령과 비슷하니까 흉내를 내보세요"라고 해서 당시 개그맨의 노무현 흉내를 따라하는 장면에는 순간적이기는 하지만 대통령 이름을 갖고 함께 즐거워할 수 있었던 행복했던 정서가 십분 활용되고 있다. 좀더 본격적으로는 한 에피소드를 강금실 법무부장과 노무현 대통령이 검사들과 벌인 대국민 공개토론을 패러디하는데 할애하기도 했다. 이 역시 행복한 시도였다. <<거침없이 하이킥>>이 방영될 때는 상황이 좀 달라져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바닥을 기는 시점이었고, 연예 방송에서 대통령을 언급하는 것은 시청자의 짜증을 유발하는 금기시된 행위였다. 그런 시점인데도 피디는 "지금 대통령은 노무현이다"라는, 외면받는 사실을 떳떳이 드러내었다. <<거침없이>>의 1회는 신지와 최민용 사이의 아기의 탄생 내러티브와 함께 시작되는데, 여기서 자기가 태어난 2002년은 월드컵의 해임과 동시에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해임을 굳이 말한다. 순재 한의원에는 대통령과 찍은 사진이 자랑스레 걸려있다. 순재와 혜미가 청와대에 가서 기념촬영을 한 것을 다룬 에피소드도 있었다. 가상이긴 하지만 대통령도 잠깐 등장한다.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을 꺼려던 상황에서도 대통령이라는 기호를 즐겨 사용하는 피디의 뚝심을 보며, 나는 그가 노빠라고 확신하였다.
반면에 <<지붕킥>>은 빵꾸똥꾸도 용합하지 못하는 정권에서 제작되었다. 황정음이 학벌, 취업, 경제 문제로 마지막까지 고생하는 모습에는 지금의 어려운 세태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지붕킥>>은 입주 가정부라는, 80년대에나 존재하던 개념으로 인물 구도를 설정하였다. 2000년대에 입장에서 무리한 시도가 아닐까 걱정이 되었던 설정인데, <<지붕킥>>은 오히려 그의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본 궤도에 오르기까지 시동이 걸리는 시간 없이 곧바로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오히려 과거회귀적인 설정이 '잃어버린 10년' 이전으로 되돌아가려는 지금 상황과 맞물려 억지스럽지 않게 받아들여진 것도 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나는 여기에서 강하게 벗어나려는 마지막 회의 움직임에서도 이 시대의 암울함을 느낀다. 특히 세경이가 말하는 이민가는 이유가 짠하다. 자신의 계급 사다리 이야기도 그러했지만, 무엇보다도 신애가 주눅 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나라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가 가슴에 와닿는다. 
세경과 지훈의 사고는 정음과 시윤에 의해 "3년 후"에 회상된다. 3년, 이 얼마나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시간인가?
3년 후에는 우리도 그들처럼 "그 때는 제대로 숨쉬고 살기 힘들었지."라고 말하며 어두운 과거를 회상할 것이다. 그리고 3년 전의 <<지붕킥>>이 그렇게 암울한 결말을 맺은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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