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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_자료

한국교회의 십일조

by 방가房家 2009. 1. 11.

[지식거래소에 십일조에 대한 답변을 남긴 적이 있다. 얼마전 우연히 내 답변을 보니 엄청나게 많은 댓글들이 달려 있는 것이다. 반응이 그렇게 다양할 수 있다는 데 일단 놀랐고, 내 언어가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는지를 알 수 있었다. 물론 괜찮은 의견과 생각해 봄직한 의견도 많았다.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어 여기 저장해 놓는다.]

  [질문-3048564]     한국교회의 십일조
  비공개 님이 2003-04-13 22:13 작성 채택 포인트 0   답변 2   한줄의견 0   조회 3666  평가자 69명  평점 3.6   
전 5년전에 케나다로 갔다가 몇개월전에 한국으로 다시온 사람인대여.
케나다에서 교회를 다닐때는 십일조?같은건 없었는대.. 여기 한국은 처음 듣는
헌금이 많더군요. 그리고 수요예배 금요예배 등등.. 전 평일엔 열심히
일하거나 공부하고 일요일에 예배하는 걸로 배웠고 케나다에선 다들 그래왔었거덩요..
질문의 요지는 십일조와 수요예배는 한국에만 있는건지? 아니면 케나다에서만
않하는 건지 궁굼하군요.

  [질문자 채택답변]     한국에만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bhang813님이 2003-04-15 02:42 작성
수요예배, 새벽기도회, 십일조는 한국 교회의 독특한 모습입니다.

딴 분이 말씀하셨듯이 수요예배와 새벽기도회는 한국 교회에만 있습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한국 교인들의 열심이 넘쳐서, 주일 예배로만은 성이 안 차다 보니 주일 이외에도 모여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일주일의 중간이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나와 모여 기도를 하였는데 차차 수요일로 통일되어습니다. 특히 새벽기도는 새벽에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를 하는 한국 고유의 종교 신행이 기독교와 만나 생긴 한국적인 기독교 의례입니다.

십일조 문제는 좀 복잡한데, 주로 한국에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교회에서는 거의 시행되지 않습니다. 미국의 일부 매우 보수적인 교회에서만 시행되지 문자 그대로 '십분의 일'을 떼서 바치는 십일조는 한국 교회에서만 매우 의무적으로 시행되고 있습니다. 캐나다 교회가 독특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교회가 독특한 거죠. (어느 교회에 나가셨는지 모르겠지만 캐나다 교회는 한국과 미국에 비해 진보적인 교회가 많습니다.)

검색해 보니 십일조에대해서는 이미 질문들이 많더군요.
그런데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 주로 "그런 거 생각할 바엔 내지마라." 이런 투가 많더군요. 글쎄, 그런 식의 대답은 질문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것 같습니다. 십일조의 경우 그 전거가 구약, 그러니까 신약에 의해 폐지되었다고 보는 구약의 율법(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식의)에 속한 것이기에 그것이 참된 기독교 신앙인지에 대한 논란 거리가 많습니다. 이러한 신앙적 판단은 각자가 알아서 생각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만 역사적으로 십일조가 우리나라 교회사의 독특한 상황으로 인해 정착된 제도라는 점만 지적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개신 교회가 100년의 역사 동안 눈부시게 성장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 성장은 교인들의 철저한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 진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에 처음 선교사들이 들어왔을 때, 그들의 선교 정책은 한국 현지에서 자금을 조달하여 교회를 확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네비어스 정책이라고 부릅니다.) 100%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몫의 금액을 한국 교인들이 십시일반으로 조달하였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즉 하나라도 교회를 더 지어야 하는 초기 한국 교회의 성장기라는 맥락에서 십일조라는 제도는 자연스럽게 한국 교회의 제도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 역사적 과정을 자세히 논구한 논문을 아직 접하지 않아서 확실히 말씀드리기 힘들지만, 제 생각엔 한국의 십일조는 1900년대 초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던 시기 교회 헌금 열풍이 몰아닥치던 시기에 일반화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십일조는 초기의 한국 교인들이 교회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제도입니다. 비록 성서적 근거가 있고, 역사적으로 시행된 적이 있긴 해도, 그것은 한국의 상황에서 채택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십일조를 둘러싼 많은 논의들이 이 점은 언급하지 않더군요.
그것은 성장기에 필요한 제도이기에, 과연 요즘의 상황에서 적합한 제도인지에 대해서 자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풍족한 현재의 교회에서 과연 십일조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한국 교회는 냉정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견 : 어느정도 이해가 되네요. (비공개 님이 2003-04-18 12:16 작성)
성서적인 근거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신학자나 종교 지도자사이에도 있기에 한가지로 말하기에는 사이버상에서 객관적이고 합리적 결론을 내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십일조가 교회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지 안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상황을 도저히 아닐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의견 : 십일조 라는 것은 말이죠 (비공개 님이 2003-04-19 07:31 작성)
십일조가 옳은지 안옳은지 따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 자신이 내는 것이기 때문에요
저도 교회 다니지만 저는 교회 나가고 싶을때 나가고 나가기 싫으면 안나가거든요
그덕분에 교회 안나간지는 2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다만 어렸을때부터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교회 사정을 잘 아는데요
십일조를 안낸다고 눈치주는 사람도 없구요 내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더더군다나 헌금도 이름을 밝히면서 내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저같은 경우에는 무명으로 항상 봉투에 안넣고 몰래 돈을 넣었기 때문에 십일조를 넣든 말든 신경 쓸 사람도 없었어요
십일조에 대해서 교회에서 강요를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십일조를 가지고 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성격 학자이신지요? 하고 물어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요
참 신기해요 기독교를 왜 사람들이 욕하고 난리인지
하나님 께서 자신의 교회일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기분 어떠실지 생각이 드네요
만에 하나 십일조가 잘못된거라고 하더라두요(잘못됬다는 뜻은 절대로 아님)
의견 : 신약과 구약 (godcan 님이 2003-04-19 13:51 작성)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미리" 사하시는 일로 인하여
더이상 "구약"은 의미가 없어졌다(?- 오해는 마시길)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구약시대의 일을 당연히 알아야 하고, 또 그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알아야하지만,
그 때의 율법을 지금에도 100% 지켜야하는 것을 아니라는 말입니다.

십일조도 같은 의미라고 생각되어지는데요...


아래 어떤분처럼 당연히 지켜야 해서 헌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나의것이 모두 주님의 것이라는 순수한 고백에서 드려지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견 : 이러한 의문을 가지는 것 자체부터 좋은 현상입니다.. (lmjin78 님이 2003-04-19 20:49 작성)
교회나,성경에 관해 궁금하다는 것 자체가 좋은 현상이라봅니다..
이러한 궁금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알지못하는 하나님에 대해 점점 알아갈 수가 잇으니까요..
제가 영국에 있을 때 영국의 교회에 나갔었습니다. 이 교회에도 수요예배(우리의 표현)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수요예배, 수요기도회 등등..이렇게 표현하지요..
하지만,제가 나갔던 영국교회에선 수요일에 성경에 관해 좀더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주일에도 오전 예배와 오후예배가 있는데, 목사님께서 오전엔 성도들을 위한 말씀을 선포하시고 오후엔 복음적인 말씀을 선포하셨죠..
이나 저나 다 말씀이긴 하지만, 이러 저러한 포커스를 가지고 말씀을 전하셨다는 뜻입니다.

예배가 언제 언제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배에 임하는 우리의 맘이 중요한 것이지요..
하나님을 신이라 생각하기이전, 자기가 사랑하는 이를 한 번 떠올려보세요..
그리고 그 사람을 대하고 그사람을 만날때의 우리의 마음, 우리의자세를 말이죠..
의견 : 기독교는 본사없는 체인사업과 달라보이지 않습니다. (obcafri 님이 2003-04-19 22:27 작성)
전 안티기독교라고 미리 말씀드립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는 본사없는 체인사업과 달라보이지 않기 때문이지요.

다시 정정해야겠습니다. 전 안티 한국기독교지요.

누구든 목사자격을 가지고 창업을 하게됩니다.

그리고 개척교회로써 열심히 목회활동을 하지요.

그렇게 열심히 하는 와중에 신도들이 늘어갑니다.

한 200명쯤되면 수입이 대기업 부장급입니다.

그래도 그 돈을 헤프게 쓰지 않습니다.

왜냐구요? 교회를 늘려야하기 떄문이지요.

점점 교회는 성장해가고 자기 아래에 또다른 체인점을 만듭니다. 기도원도 운영합니다.

그래서 총 신도수가 만명쯤 되면 현금 보유 및 동원능력이 우리나라 10대재벌에 맞먹습니다.

이렇게 커다는 와중에 산하단체? 에서 사고가 터집니다.

예를들면 신도 성폭행, 안수기도중 사망, 기도원 감금폭행 등

그러면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강력한 면죄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저거 이단이다' 라는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이런 막강한 권력이 이제는 담임목사 세습까지 하고있습니다.

가장저질스런 스폿신문 스포츠투데이 사장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조용기의 아들입니다.

교회의 사유화, 종교의 사유화가 문제입니다.

전 이런 문제가 카톨릭에 대비해 한국기독교가 갖고있는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누구나 내마누라 내새끼는 더 잘 먹이고 더 잘 입히고 싶은 것입니다.
의견 : 궁금한데 (비공개 님이 2003-04-21 14:14 작성)
십일조는 왜 광고 시간에 누가 냈다고 발표를 하는지요 ??
의견 : 자세한 내용을 담은 책을 소개하지요. (tgarden 님이 2003-04-29 19:31 작성)
'조누가'(필명)가 쓴 책 '십일조를 넘어서'를 보시면 우리가 십일조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음다. 결론은, 십일조는 요즘 기독교인의 의무가 아니라는 겁니다.
의견 : 기독교를 본사없는 체인사업이라고 하신분.... (eventok 님이 2003-04-30 02:31 작성)
님께서 서두에서 안티 한국기독교인이라고 말씀하셨으니
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것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또한 기독교인임을 먼저 밝혀둡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중에
누구나 목사가 되어 창업을 하신다고 했는데...
누구나 목사가 되는것은 아니지요...
요즘 세상에 신학대 나오지 않고 가라목사하는경우는 없다고 봐야지요
님께서 하신말씀은 마치 무자격자가 목사를 하는것으로 들릴수 있거든요...

그리고 님께서 지적하신 글들이 마치 교회의 시작과 성장 그리고 그 성장속에서
썩어가는것이 마치 순리인양 일반적인 경우로 서술하신듯 보이거든요...
교인이 한 만명쯤 되는 교회가 되면 10대 재벌의 현금동원 능력과 맞먹는다...
이대목을 일단 생각해보지요.....
기독교인이던 불교신자던 우리나라 대한민국 사람 만명을 모으면 현금동원능력이 그렇게 커집니까? 일단은 이것만으로도 좀 과장된 표현같구요...
그리고 모든교회가 어느정도의 시기가 지나면 만명정도의 대형교회로 성장합니까?
우리나라에 만명이상의 교인이 있는 교회가 정확히 몇개나 있는지 아시는지?

통상 천만 기독교인이라고하는데.....교회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아니는지?
우리나라 교회가 만개밖에 없다면 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겠지만.....
좀 지나친 표현으로 받아들여질수도 있겠군요...

좀 긴글을 쓰려고 하는데
왜 이런 생각을 하게됐냐하면
"기독교가 뭐가 좋은게 있는진 모르지만 이런이런 나쁜점은 난 정말 싫어~!" 라는 표현과
"이런이런 나쁜점때문에 난 기독교가 전부나쁘다고 생각해 무조건 싫어~!"라는 표현과의
차이가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교회가 오래된다고 전부 커지는것도 아니고 그리고 큰교회가 전부 부정한 일을 저지르는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런교회가 전부 세습이 이루어지는것도 아닙니다.

왜 세간에 님이 지적하시는 사항이 욕을먹고 신문방송에 나오는지 아십니까?
그것이 항상 그렇고 모두 그렇다면 이미 그것은 언론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왜냐구요 그건 더이상 기사거리가 안되기 때문이지요
적어도 그것이 세상사람들의 혀를 차게 만드는것은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다수가 그렇게하지 않기때문인거죠
그리고 교회가 그렇게 많은데 님의 지적하신 사항이 전적으로 맞다면
그 교회들이 무너지기도하고 그래야할텐데 이땅에 왜그리 교회가 많은지 아십니까?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말씀드리면...아직도 복음을 전해야할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왜 무너지지 않고 있는것일까요? 왜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다닐까요?
교회가 그래도 이땅에 존재하는 이유는...님께서 지적하신 어두운 부분을 덮고도 남음이 있는
선하고 밝은 부분이 더 크다는 사실입니다.
님께서는 기독교에서 이 세상을 위해 하고있는 많은 일들을 알고 계신지 묻고싶군요
아파하는 아이들, 배고픈 아이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 나라가 일일이 챙기지 못하는 세상의 아픈곳을 찾아다니며 어루만져주는 수많은 일들.......

님이 지적하신것은 애석하게도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랍니다.
불교의 종파분쟁, 종권다툼, 교단내의 조폭세력 등등등
무리한 시주의 문제, 주지의 불법적 사례, 불신도와의 불미스런 사례....
이정도면 님이 지적하신 기독교의 문제와 별반 차이가 없어보이구요...

천주교 성직자의 성추문, 동성애, 물의를 일으킨 성직자의 파면대신 다른곳으로 이직, 알콜중독의 성직자 사례, 신도와 사랑에 빠지는 신부사례.....
이정도면 천주교도 님이 지적하신 기독교와 별반 차이가 없는거라 생각되구요...

그러니까 님께서 지적하신 부분은 완전하길바라는 종교의 모습에서 실망스런 부분을 발견하신것이구요
그것은 비단 기독교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구요 정도의 차이와 형태의 차이만 있을뿐 어디나 있는것이지요...
그렇다고 어디나 있는것이니 문제가 없는것이다라는 이상한 논리를 펼치자는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걸 어떤 분들은 인간이 결부가되어 발생하는 현상들이 그럴수 밖에 없다고도 합니다.
인간이란 존재가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발생하는 필연이라다고.....

그런 불완전한 상황을 이해할수 없다고 해도...
어둡고 추하고 안좋은 면이 존재하는것 때문에 ....
님께서 지적한 기독교의 전체를 매도할수는 없다는것입니다.
즉, 그것의 존재가치 전부를 부정할수는 없다는것입니다.

공무원 한명이 돈먹었다고 이땅의 공무원이 전부 뇌물수수자도 아니며~
경찰관 한명이 인권침해를 했다고 이땅의 민중의 지팡이 전부를 욕할수도 없는것이며~
의사 한명이 환자에게 실수를 했다고 온국민이 병원에 가기를 거부할수도 없는거고~
학생때린 선생님 한분때문에 이땅의 고귀한 교사를 전부 비난할수 있을까 싶기도하고~

모 아니면 도 / 흑 아니면 백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지만 세상에 열이 전부도 아니지 않습니까?

좀더 세상을 넓은 시각으로 바라봤으면 합니다.
님이 그럴수 없으시다면
이 글을 읽으시는 다른님들이라도 그래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내가알고 있는부분이 아주 작은 부분이라는 겸손함까지 갖출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비판은 내가 많이 알고 깊이 알고 있다는 자심감에서 나올수도 있지만....
내가 알고있는 부분이 얼마나 작은 부분인지 아니면 내가 모르고 있는 부분이 얼마나 큰지를 알지못하는 오만함과 무지에서 나올수도 있는거거든요....

비판에는 그래서 용기도 따르는 것입니다.

님께서 않좋게 생각을하실 그런 많은 일들이 제가 믿는 종교 내부에서 발생한것에대해서 부끄럽게 생각을 합니다.
그것으로 인해 님이 반대를하시고 비판을 하시는것은 충분히 이해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판단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몫인것입니다.
그러므로 님의 그러한 판단을 돌이키고 싶다거나 역으로 비판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냥 끝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혹여나 님께서 세상의 다른부분을 바라보실때는 좀더 넓은 시각으로...
좀더 깊이있는 앎으로 현상을 대하실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적어도 님이 그동안 보지못했던 생각하지 못했던것을 가져다 줄수도 있을것입니다.

의견 : 새벽기도와 십일조 (cnipart 님이 2003-07-31 16:00 작성)
막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성경에 나와 있듯이 새벽기도는 예수께서 가장 먼저 시작하셨습니다.

눅 11: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

위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 그래서 아브라함이 가장 먼저 시작한 십일조는 신약시대에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완전해 진 것이지요 . 위에 예수께서 분명히 십일조를 버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위와 같이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
따라서 예수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은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수요일 , 금요일 , 토요일 ... 모일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읍시다.
의견 : [교회 십일조]: 우리 터놓고 이야기 해봅시다.(퍼온 글) (비공개 님이 2003-08-31 20:59 작성)
(1) 들어가는 말
선진국은 일부교회를 제외하고는 헌금바구니를 돌리지 않거나 십일조제도가 없답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십일조 강조는 미국 선교사들의 가르침으로 절대 순종을 요구해 왔고, 지금도 '십일조'에 관한 이야기는 금기시 되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주권을 쥐고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명예, 권위, 수입과 직결되는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 (1/10; 十一租; Tithing) 는 신구약성경에서 언급하는 단어입니다. 원래 십일조는 제정일치시대의 세금 (Tax) 이었지요. 국민은 누구나 납세의 의무를 갖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십일조/세금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구약성경을 모르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다시 말해서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의 사전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법이나 제도 관습들이 대부분 열방문화의 영향을 받았거나 세속 종교들로부터 도입된 것이지요. 십일조는 지중해 해역을 중심으로 중동지방 전역에서 행해졌던 고대관습으로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이 이 제도를 도입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불교와 유교문화권인 한국 땅에 기독교가 상륙하여 정착되는 동안 본질과는 다르게 많이 변질되었지요. 기복신앙의 원조인 불교, 허식과 권위로 옷 입은 유교와 혼합된 한국의 기독교는, 불교의 기복신앙과 유교의 허식과 권위를 수용한 [짬뽕종교] 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결론일지도 모르지요.

이런 문제를 연구하는 학문이 구약성서학 중에서도 고대 근동학(Ancient Near Eastern Studies)으로 분류가 되지요. 이 분야를 연구하려면 소위 과학적 접근(Scientific Approach to the Old Testament) 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고문서학, 고고학, 사회인류학, 고대 지리학, 고대 역사학, 고대 신화학(Mythology)등을 섭렵해야 하는 고달픈 작업입니다.

물론 한국에는 이 분야를 전공한 학자가 없습니다만, 있다고 해도 한국 기독교 풍토상 한국에서는 생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이 학문분야는 베일(Veil) 에 가려져 있는 기독교 (또는 종교)를 완전히 해부하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학문입니다. 종교는 베일에 가려져 있을 때 가장 신성하고 아름다운 것이지요. 베일을 벗기고 나면 거기엔 허상만 남게 마련입니다. 물론 종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종교들이 정도는 다를지라도 허구성이나 부패성이 신비로운 베일로 성스럽게 포장되어 있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허상으로 가려진 부분들을 이용하여 종교 지도자들은 성도들을 기만, 우롱하고 부패를 양산시키는 첩경이 되기 때문에 그런 요소들을 도려내는 수술이 필요합니다. 이런 작업을 감당해야 하는 자들이 신학자들이지요. 그래서 건전한 종교의 발전을 위해서는 실력과 소신과 자질을 갖춘 신학자가 필수적입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이렇게까지 타락한 이유도 그 첫째 책임은 신학자들의 몫입니다. 그들은 망망대해 어둠의 바다에서 등대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내지 못한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2)십일조에 관한 세속적인 실례:
십일조의 기원은 구약성서에서 완전한 해답을 기대할 수 없으며, 구약 이전시대나 그 당시 열방문화와의 비교분석이 필요합니다. 십일조의 징수 즉, 노동이나 전쟁 전리품의 1/10 를 바치는 일은 고대근동지방의 종교나 문화에 있어서 일반적인 관습이었습니다.
애굽인들은 수확의 2/10 를 바로 왕에게 바쳤고 (창 47:24), 페기니아인들이나 카르타고인들이 자기들의 신들에게 1/10를 드렸으며, 왕들이 신격화 되면서 신들에게 바쳐지는 헌물을 왕들이 취하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시에도 빼앗은 곡물의 1/10를 신께 바쳤으며 그것을 왕이 취했지요. (Herodotos/ Historiaio). 이때는 BC 586년 이후 바벨론 포로기간으로, 대부분의 구약성서가 성문화되기 이전입니다. 또한 수리아(마카비상 10:31; 11:35), 루디아 (Herod, 1:89), 바벨론 (M. Jastrow, The Religion of Babylonia and Assyria, 1898, p. 668) 등에서도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지요.
십일조는 정치적인 의미(조공 및 세금) 와 제단에 제물을 드리는 종교적인 의미를 포함합니다. 세속 종교에서1/10 는 신에게 바쳤는데, 이는 땅의 소유자는 신이며, 인간은 그 땅을 빌어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라는 사상이 깊이 자리 잡게 되면서 고대종교에서 십일조의 기원이 되었던 것이지요.
역사적으로 볼 때에 제정일치시대였던 거지요. 제사장과 군장이 하나였으니 일종의 세금적인 성격도 강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왕을 하늘이 내린 아들(신의 성육신)이요 신으로 숭배했기 때문에 왕에게 바친 것입니다. 땅 (Land) 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는 동일한 사상입니다 (레 25:23).
그렇다면 [기독교의 제사제도가 이방종교로부터 기원했단 말이냐?]고 물으시겠지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이를 부인하고자 할 것입니다. 기독인들은 성경을 하늘에서 뚝딱 떨어진 신비의 마술 책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정직하게 시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실체를 미화하거나 숨기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 보이는 정직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금나오라 뚝딱]하는 마술쟁이가 아닙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우리 개개인의 개성과 문화와 역사를 존중해 주시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입니다.
이야기가 옆길로 나갔군요. 다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이런 현상은 로마시대까지도 계속 이어졌는데 그들은 Augustus 나 Tiberius 등 그들의 황제를 신적 존재로 숭배했지요. 로마제국의 황제숭배 행위는 페르시아인들 중에 나타나는 종교와 애국심의 혼합 및 경건한 플루타크에게 충격을 주었던 톨레미의 숭배와 같이 고대인들의 마음속에서 마치 세균이 번식하듯 본능적 발로였다고 말할 수 있지요.
이러한 관습들은 수리아나 소아시아에서도 널리 행해졌지요. 그들은 왕들을 救世主, 平和의 主, 人民의 主로서 섬겼습니다. 이런 신적 통치자에게 1/10 를 바치던 것이, 통치자가 종속국 민중이나 자국의 백성에게 부과하는 오늘날의 세금의 개념으로까지 발전되어 온 것이지요.

(3) 구약에 나타난 십일조:
성경에서 최초의 십일조 언급은 창세기 (14:18-20) 에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살렘의 왕인 멜기세덱에게 1/10를 바쳤다고 기록 합니다. 가장 오래된 신명기 법전 (12-26)에서는 십일조로 제사축제를 즐겼는데 이는 바벨론 포로 이전까지 계속되지요.
바벨론 포로시대에는 십일조가 제사장들 (Priests) 에게 바치는 세금으로 규정됩니다. 재언하면, 열방에서의 세금 은 신의 아들인 왕의 이름으로 징수하였으나, 신정정치(神政政治/Theocracy) 아래 있는 이스라엘은 [십일조세금]이 신의 법으로 인식 된 것이지요.
그런데 구약에서의 십일조는 가난한 레위인 (오늘날의 목사) 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을 위하여 드려졌습니다. (신 26:12). 구약에서 율법이 주어질 때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민족이 애급에서 고통 받던 때를 회상시키지요: [너희가 애급에서 종노릇하였을 때를 기억하라]고 말입니다.
[올챙이가 개구리 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있지요. 잘 살고 좋은 자리에 있을 때 힘없고 가난한자를 대하면, 항상 애굽에서 종노릇하면서 굶주리며 고통 받던 때를 기억하고 그들을 돌보라는 경고입니다. 레위인은 소작농도 없었고 성소에서 봉사한 데 대하여 치루어 진 대가였지요. 물론 레위인들도 십일조를 제사장에게 바쳤지요.
구약에서는 여러 가지 상이한 방법으로 십일조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행해진 것을 말합니다. 왕정시대 때는 왕에게 십일조를 바쳤으며(삼상 8:15, 17), 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우상의 전에 십일조를 바치기도 하고 (암4:4), 십일조를 무시하고 바치지 않을 때도 있었지요. (말 3:7-12).

(4) 신약의 십일조에 관한 견해:
신약시대에 있어서 십일조 징수에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몇 곳에 십일조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만 이는 예수께서 외식과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실 때에 언급되고 있지요: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 도다] (눅 11:42). 가장 중요한 공의, 사랑, 은혜, 신앙은 져 버리면서 허식과 위선으로 십일조를 논하는 바리세인을 향해 책망 합니다 (마 23:23).

(5) 교부시대와 유대문학시대:
교부시대 지도자들은 몇몇 성구 (마 10:10, 눅 10:7, 고전 9:7) 에 호소함으로 십일조의 정당함을 주장하였으나 이레니우스 (Irenaeus)나 에피파니우스(Epiphanius)와 같은 교부들은 이 구절에서 도출한 논증이 타당하지 못함을 밝혔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인,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 (마 19:21) 는 말씀에 근거하여, 힘없고 돈 없는 자들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자발적으로 수행하도록 강조하였습니다. (한국 큰교회 목사들은 일류 회사 대표이사보다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는데, 몸소 노력하여 버신 것일지라도 한원하실 생각들은 없으신지?)
랍비문헌(Rabbinical Literature) 시대에 접어들어 십일조를 바치는 일은 BC 2세기경 마카비시대 (마카비상 10:31) 와 미쉬나와 탈무드 (십일조에 대한 논술 1:1) 에 정교한 규칙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십일조는 가난한 자에게 주도록 규정하고 있지요. 그러나 이것은 유대교의 경우입니다.

(6) 종교개혁이후 시대:
1640년 영국성공회의 대주교 라우드(Laud)는 교회운영이 어렵게 되자 십일조를 인상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있었지요. 이 당시 청교도를 중심으로 일부 양식 있는 성직자들은 십일조 제도를 폐지하고 자진해서 헌금해야 된다는 운동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유럽교회에서 십일조의 악폐가 점점 사라졌으나, 근래에 들어서 오순절교회(Pentecostal Church(흑인교회ꡑ라고도 함) 가 미국에서 유럽으로 역수출 되면서 미국자본주의 사상이 교회 안에 팽배해지고 십일조를 강요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7)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이 로마 통치아래 들어가면서 문제는 시작됩니다.: (1) 예수께서 십일조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세금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라는 말씀으로 세금을 로마정부에 납부하라고 명합니다.
여기서 가이사는 로마황제를 말합니다. 가이사 (Caesar/ BC37-14AD)는 최초의 로마 황제였으며 하드리안(hadrian/ 117-138AD) 때까지 모든 로마 황제들에게 붙여진 왕통의 이름으로 상속되었지요.
이것은 성전에 십일조도 드리고 로마정부에 세금도 따로 납부하라는 말씀이 아니지요. 세금에는 고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이중과세 (二重課稅, Double Taxation)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 십일조를 드리는 자는 정부에 납부하는 세금을 면제 받아야 하고 (선진국의 경우), 우리나라처럼 일률적으로 정부에 세금을 납부하는 경우는 더구나 교회에 십일조를 드릴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이 정부에 납부하는 세금과 교회에 드리는 십일조를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이렇게 반문하시겠지요, ꡒ정부가 집행하는 세속적인 사업과 교회의 복음사역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느냐?ꡓ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 많은 교회 수입에 대하여는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모두 독식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나라의 일도 하나님께 속한 사업입니다. 교회에서 전도/선교하는 일이 소중함같이 나라일도 우리에게 귀중한 것입니다. 다만 국가의 정책입안에 문제가 있거나 지도자들이 부정부패에 빠지게 될 때는 신랄한 비판의 칼날을 목에 들이 대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크리스천의 자세이지요.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독일의 벨하우젠 (J. Wellhausen) 도, [확신하건대, 예언자들은 개인보다 국가와 사회에 대하여 보다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정의로운 제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선교여행시에 돈 많은 교회에서 자발적인 헌금을 걷어 가난한자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수행 하였습니다. 구약에서 십일조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제도였는데도, 정작 십일조에 관한 언급은 회피하고 헌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고전 16:1).
신약은 율법이 폐기된 것으로 보지 않고 사랑에 의해 성취된 것으로 보지요. 그러나 이에 반해 신약은 모세의 제사법전 (십일조 포함)을 폐지했으며 (막 7:19b; 갈 5:2, 히 10:18), 구약의 행정법(통치를 위한 율법)을 채용하지 않고 있지요. 여기서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면, (1) 이미 가이사 (정부)에게 세금을 납부하는 것과, (2) 율법시대의 막이 내리고 은혜시대의 도래입니다.
전자와 관련하여 우리는 이미 국민으로서 국가에 납세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으며, 후자와 관련하여서는 율법시대와 같이 안식년법이나 희년법 (레 25) 을 지켜야 한다든가, 짐승을 잡는 제사행위나 할례의 필요성도 없게 된 것이지요. 현존하는 시공간의 세계에서 구약의 통치법을 수용할 수 없는 한계성을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로 대신하게 된 것이지요.
인간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다른 법의 적용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의 생활을 얽어 메고 구속하는 율법의 지배아래 있지 않고 그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복음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는 십일조라는 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됨과 동시에 더 크고 막중한 책임을 감당해 내야 할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지요. (마 19:21).
그것은 1/10 라는 가시적이고 축자적인 틀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규정안에 구속될 수 없는 무한한 은혜와 사랑의 나눔입니다. 십일조는 예수께서 오심으로 인해서 이미 2000년에 시효가 말소된 제도입니다. 십일조는 복음과 은혜의 개념으로 헌금문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세금이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에서는 십일조라는 이름으로 걷혀졌음을 위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습니다. 교회에 십일조를 내고 있는 성도들은 정부에도 이미 납세의 의무를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이중과세의 부담을 안게 되지요. 이것은 결코 정의롭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참고로, 목사도 정부에 세금을 납입해야 옳습니다. 목사들이 세금을 공제 받아야 할 성서적 근거는 전무합니다. 구약의 레위인 (종교지도자)들도 그들이 받은 십일조 중의 1/10를 다시 제사장에게 바쳤습니다. (민 18:21). 물론 정부에서도 목사들의 노후복지대책을 마련해야 하겠지요.
또한 선진국 일부교단의 경우, 교회담임목사의 50%는 일반 사회직종에 근무하면서 동시에 목사직을 감당하고 있음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고 무보수로 사역을 수행하고 있지요. 이런 경우는 목회자들의 자질이 갖춰져 있고 기독교가 안정권에 정착된 선진국에서나 가능한 일이지요.
기독교가 로마 정부에 의해서 공인된 이후부터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기까지, 돈을 내면 죄 사함을 받는다는 사죄권 판매제도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성도들을 기만하고 우롱하는 제도였습니다. 이제는 또 다시 이미 2000년 전에 폐지된 십일조 제도를 왜곡시켜 성도들을 세뇌시키고 진리처럼 받아들이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부분의 한국목사들이 올바른 신학지식이 결여 되어 있기도 하지만, 생존을 위해서라면 진리를 왜곡해서 팔아먹는 삯꾼 신학교수들이 기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부패는 언제나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기인하였음을 교회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때 유럽에서도 십일조의 악패가 있었으나 그 제도는 점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럽의 마틴 루터, 칼빈, 존 웨슬레 같은 종교 개혁가들도 이 문제를 다루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십일조의 악패를 인식했으면서도 교회의 재정문제를 돕기 위하여 묵인했던 것으로 간주 됩니다.
한국에도 신학대학 교수들로 이루어진 [청교도 정신을 계승하자]는 무슨 [청교도학회(?)]가 이미 기존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 청교도들이 가장 큰 이슈로 다루었던 십일조문제를 언급하지 못하는 걸 보면 [돌팔이 청교도학회]이거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청교도를 파는 위선자들임에 분명합니다.
쯔빙글리(Zwingli, Ulrich/ 1484-1531)도 종교개혁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십일조문제를 다루긴 했으나 교회의 생존권을 위협한다하여 교회자율에 맡길 것을 호소하고 성서적 근거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였지요.
종교개혁가 브룬펠스 (1488-1534) 는 교회가 부유해짐은 적 그리스도적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교회가 돈이 많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며 사업(Business)입니다. 십일조의 문제는 교회지도자들에게 맡겨서 해결 될 일이 아닙니다. 푸줏간을 고양이에게 맡기는 셈이지요.
그렇다면 목회자가 어떻게 물질적인 문제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요?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힘없는 자들을 어떻게 돌볼 수 있을까요? 물론 헌금입니다. 물질적으로 목회자를 돌봐야 할 의무가 교회 성도들에게 있지요. 그러나 그 수단으로 이미 2000전에 폐지된 십일조제도를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교회 운영문제에 심각한 위기가 온다 하더라도 진리를 왜곡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소신입니다. 교회성도 스스로가 올바른 성서지식을 익혀 자질을 높여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의견 : 십일조... (proship 님이 2003-09-09 14:08 작성)
구약에서는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과 교통을 하기 위해서는 제사장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는 하나님과 우리가 직접 교통이 가능해졌습니다. 즉 우리 개인개인이 제사장이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십일조는 바로 우리 개인개인 자신이 받아야 되는 것이라는 논리가 되겠내요. 그러기에 십일조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후에는 별 언급이 없습니다. 신약시대의 초기에는 믿는사람들이 몹시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입의 일정 부분을 떼어 드리는 십일조가 있었다면 반드시 신약에 언급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런 말이 성경에 없었다는 것은 그당시 믿음이 너무 강해서 십일조에 대한 어떤 문제의 소지도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요?

신약시대 초기 순교자가 끊임없이 나왔던 그 믿음이 강성한 시기에도 십일조는 없었습니다. 즉 신약 이후에 성경내에서 십일조에 대한 의무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자발적으로 믿는 사람이 십일조를 드리겠다면 막을 일은 없지만 꼭 예배당에 해야 하는 것은 아니죠.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다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곳에 사용하는 것이 바른 일일듯 합니다. 예를 들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직접 돕는 다든지, 소년소녀 가장과 결연을 맺어서 꾸준히 돕는다든지, 위험한 지역에서 주님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송금한다든지... 그런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하는 것이 예배당에 맹목적으로 바치는 것보다 훨씬 하나님을 기쁘게 하시는 일인듯 합니다.

신약 이후에 땅위에 목자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양떼에 불과합니다. 목자는 오직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뿐입니다.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양떼에 불과합니다. 목자가 없다면 지도자 양이 필요하겠지만, 우리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목자가 존재하지 않습니까? 세속적인 예배당 키우기와 목사들의 고급저택, 고급 자가용 유지를 위해 우리의 피땀을 낭비하는 것을 하나님이 정말 원하실런지를 기도해 봅시다. 우리가 맹목적으로하는 십일조가 하나님을 상품화 시키는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의견 : enventok님 (비공개 님이 2003-09-27 15:34 작성)
그래서 목사는 하나님이 세우는 게 아니라 인간이 세우는 거죠^^
대부분 하나님이 세웠던 선지자들은 일반인이면서 없고 가난하고 진실되게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지.신학대학을 나와서 학식과 능력을 갖춘분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쵸^^
  [답변]     흠....
  holyact님이 2003-04-14 07:46 작성
어떤 이유로 궁금해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수요예배나 새벽 예배 등은 다른 나라에서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중심이 되는 예배를 새벽, 삼일(수요일) 예배, 철야 예배 등으로 나눠 드리는 것이겠지요.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에 예배는 가능하면 많이 참석하는 것이 좋겠지요. 단, 마음이 중심이 하나님께 향해 있지 않다면 의무로 나온다면 주님께서 기뻐받으시지 않겠지요.
헌금의 경우 구약을 보면 많은 헌물의 종류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 그 헌물은 의미가 있었지요. 요즘에 와서 헌물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고 맘대로 줄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헌물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으로 헌물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세상 가운데 역사하는 물질의 가증한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를 하나들면 자신을 위해 아프다거나 맛있는 것을 먹거나 하는데는 어떻게 든지 돈을 투자하지만, 주님의 나라를 위해 천국에는 쌓아두려 하지 않지요. 헌금의 이름, 명목이 여러가지 일지 모르지만, 주님께선 감사함으로 넉넉히 내는 것을 기뻐하시겠지요. 주님께서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돈에 매인 인간의 죄성을 헌금을 함으로 통해 극복하고 그것을 통해 말씀에 약속된 복을 주시려는 것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헌금, 예배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자신이 그런 헌금과 예배 하나 하나를 어떻게 받아 들이고 드리느냐 입니다. 말씀에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했지요. 인간은 이익이 뻔히 보이는 곳에는 투자하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놀라운 곳에는 투자하려 하지 않지요. 그렇기에 그런 예배, 헌금을 통해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는 훈련을 하고 하나님께서는 기뻐받으시고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가 이 땅과 천국에서 누리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지요. 그런 분께서 왜 우리에게 교회를 통해 헌금과 예배를 말씀하시는지를 생각하면 답이 나오겠지요. 다시 말하면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의견 : 십일조는 나늬것이 아님... (비공개 님이 2003-04-18 14:30 작성)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자신을 시험 해 보시라고 한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십일조 많이 해서 망한 사람은 없습니다.
많이 하면 할 수록 많아지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해보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세요..
의견 : 헤어지슈~ (비공개 님이 2003-04-18 20:26 작성)
목사아들이유~
왜 그리 욕심이 많으유
의견 : 난. (zamiboyak 님이 2003-04-19 15:22 작성)
십일조라고 해서 11%내는걸로 알고 있었는데
십분의 일이구나.. 근데 정말 신자들은 전부 내나요?
부자동네 교회는 왠만한 기업보다 더많이 벌겠네요.

근데 궁금한것이 그돈가지고 뭘하냐는거죠..ㅡ,.ㅡ^
의견 : zamiboyak님 말에 추천 하나.. (비공개 님이 2003-04-21 21:21 작성)
그돈을 걷어서 교회의 이익만을 위해 쓰니깐 문제지요.

교회는 자신들만을 위해 돈은 대부분 써도 그 걷은 돈을 다른곳에 베푸지는

않더라고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거는 왜 기독교는 자신들만이 천국에 간다고 할까요?

기독교 만큼 타 종교에 배탁적인 종교는 못본거 같네요.

물론.. 천주교 같이 구교 조차도.. 같은 하나님(혹은 하느님)을 믿는 곳인데도..

인정을 못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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