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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얻어배우는 것

불교라는 학문 대상

by 방가房家 2023. 5. 19.

(2005.5.26)

어제 참석한 “불교학 형성과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심포지엄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가 오갔던 대목은 불교라는 현실의 종교와 불교학의 관계에 대해서였다. 나를 비롯해서 불교에 문외한인 참석자들은 세부적인 논의보다는 다소 추상적인 그런 논의에 우선 눈길을 두기 마련이다. 종교학과 종교의 관계라는, 언제나 논란거리를 남겨두고 있는 그 문제가 불교의 영역에서는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는 관심이 가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불교학의 경우는 확실히 다른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보면 종교학의 역사는 신학으로부터의 독립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내부적 관점에 머물러 있다가, 근대 학문의 탄생과 더불어 외부적 관점을 갖고 다른 종교들과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종교학이 생겨났다. 기독교의 진리를 전제하고 옹호하는 신학에서 벗어나 학과도 따로 만들고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불경한 이야기들도 하면서, 종교학이라는 학문이 성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부의 시선에서 외부의 시선으로의 이동이다.
반면에 불교학은 철저히 외부의 시선에서 출발하였다. 유럽의 식민지 관료와 문헌학자들로부터 시작된 이 학문은, 타자를 서구의 지적 체계 안에 설명가능한 대상으로 위치시키는 (좋은 말로 이해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렇게 시작했으나, 이제는 대상이었던 아시아 불교인들도 연구에 참여하고 근대적 교학 전통을 수립하며 자기 전통과의 관계를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외부의 시선에서 내부의 시선으로의 이동이라고 할 만하다.

어찌 보면 불교는 기독교의 신학처럼 자기 전통을 변호해줄 근사한 근대학문을 가져보지 못했다. 그러한 목마름 때문에, 근대 초기부터 절에서 학생들 열심히 유학보내 불교학을 익혀오게 한 것인데, 학생들은 서구에서 객관적인 학문을 배워와서 썰렁한 이야기나 하니 가슴이 미어졌을 것이다. (환속하는 경우도 많았고.) 불교학에 대한 불교의 기대, 혹은 짝사랑은 심재관 선생이 재인용한 김성철의 글에 잘 나타난다.
서구의 불교학 방법론이 도입되면서 불교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불교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서슴없이 편다. ‘천태의 五時敎判은 허구다’ ‘대승불전은 모두 후대에 편집된 가짜 불전들이다’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다’ ‘능엄경과 원각경, 대승기신론은 모두 중국에서 조작된 僞經들이다’ ‘원효스님은 자신이 저술한 금강삼매경에 스스로 주석을 달았다’...그리고 이러한 연구성과들이 교육과 포교의 현장에서 중구난방으로 불교 신행자들에게 전달된다. 현재 불교학자들의 이러한 주장들을 모두 사실이라고 인정할 경우 과거의 스님들은 대부분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며, 우리가 신봉하는 불교 교리는 모두 가짜가 되고 만다. 신앙으로서의 불교가 망실되는 것이다. 현대의 불교학자들은 어째서 이러한 훼불의 불교학에 종사하게 된 것일까
(김성철 「현대 불교학의 과제와 해결 방향」 <<불교평론>> 2001 경울 제3권 제4호, 221쪽.)

이러한 불교인의 반응은 성서 연구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반응과 비슷하다. 현대 학문의 성과를 “고등 비평”이라고 욕하며 상대하지 않은 우리나라 개신교인의 태도를 상기시킨다. (그에 맞춰 내 글도 저자세로 나가게 되는 거고.) 차이가 있다면 개신교인의 태도가 강자의 위치라면, 불교인의 태도는 한맺힌 약자의 위치라는 것이다.

배신감은 잘못된 기대의 결과이다. 불교학과 불교의 위치설정이라는 구조적인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심재관 선생의 발표에서 알 수 있었다. 불교학이 독립적인 객관적 학문이 되려면 독립할 대상이 번듯하게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교학 체계가 부실하게 형성되고 아직 자리잡지 못했다면, 그로부터의 독립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게 웃길 것이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혼자 ‘아니’라고 말하는 경우가 공부하는 사람에게 심심찮게 생긴다. 삐딱선을 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인식론적으로 건강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신학적인 인식을 생각의 전제로 수용하고 당연하게 여기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종교에 대해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상황에서 공부하는 사람은 신학적인 인식을 벗어나는 학문을 하는 게 당연하다. 반면에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불교가 낯선 대상으로 남아있는 상황이고(서구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게다가 불교 자신이 온전히 몸을 일으키는 것이 힘겨운 모습이라면, 연구자에 불교를 아껴주는 태도가 은근히 배어있는 게 당연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민용 선생의 발표 마지막 단락에서 감지되는 불교에 대한 애정은 바로 그러한 자리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 시대에서 오리엔탈리즘의 비판을 겪고 있는 불교학이 과거의 전통 연구에만 매달려 있을 수 없다. 또한 다른 사상으로 단순화 시키거나, 서구적인 틀로 재단한 불교학의 모습에도 결코 공감할 수 없다. 불교학은 불교의 신앙체계에 나름대로 동참할 수밖에 없다. 이는 마치 예술품에 공감함이 없이, 예술품의 아름다움과 창조성을 음미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동안 객체화된 대상으로 불교를 연구해 온 서구의 학자들이 이제 불교의 신행에 공감을 표명하며 연구하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불교 신행에의 진입이 불교로 개종을 한다거나 신학의 차원으로 빠지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개종의 형태가 아니라, 연구의 공감을 위한 수행적인 차원(performance)이다.
(이민용, “서구 불교학의 창안과 오리엔탈리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05년 상반기 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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