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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된 침묵... 기독교 안의 동성애- 입을 떼다

by 방가房家 2023. 5. 19.

(2004.6.20)

특별한 기독교 행사에 다녀왔다.
제목부터가 인상적이다. “강요된 침묵... 기독교 안의 동성애- 입을 떼다”
약간은 개인적인 이유에서 간 곳이었다. 발표자 한 분이 잘 아는 선배라서 갔고, 현경이라는 사람을 한 번 보고 싶었다.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 문제는 솔직히 그 다음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별 생각 없이 갔다가 이런 저런 것들을 보고 느끼게 되었다. 이 행사가 한기총의 동성애를 반대하는 성명서 발표와 한 동성애자 기독교인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음도 행사 후에야 알게 된 내용이다.

(행사 내용에 대해서는 오마이뉴스의 기사 후반부를 참조할 것. 참고로, 기사 전반부는 종묘에서 있었던 퀴어 문화 축제에 관한 내용인데, 사실 난 이 행사도 흘깃 보았다. 때마침 내가 종묘 앞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춤추는 사람들을 실은 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솔직히 무슨 행사인지 몰랐다. 비가 무지하게 내리고, 좁은 종로 거리에 사람들이 빽빽해서 우산으로 힘들게 사람들을 비집고 지나가고 있던, 상당히 짜증나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차 위에서 춤추는 홍석천도 못 알아보았고, 무신경하게 지나치면서 ‘요즘 나이트 선전은 저렇게 하나?’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1.
약간 빗겨난 얘기를 먼저 하자면, 식전 행사에서 이자람이라는 가수를 본 것이 큰 수확이었다. 처음 보는 가수였는데, 자기가 만든 노래를 갖고 나와 잘도 부르더만. 놀라운 것은 그 여자애가 자신이 나온 행사의 의미를 완벽히 파악하고 소신을 명쾌하게 밝히는 것이었다.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돌아와 검색해보니 이자람은 옛날에 예솔이로 알려진 아이였고, 이후 판소리를 공부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국악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인 것 같다. 대중 음악은 취미로 하는 거라고 한다. 국악이라는 음악적 배경, 가창력, 그리고 사회 문제에 대한 선명한 의식. 앞으로 뭐할 건지 모르겠지만, 대중 가수가 된다면 지금 김윤아가 하고 있는 역할을 능가하는 가수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몇 년 후엔 세계적으로 자랑할만한 여가수 하나가 생겨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자람은 이 행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자신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만,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를 믿는 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바보”들을 만날 때면 답답하다고. 목회자들이 그런 설교를 할 때 어떤 반박을 할 수 있는지를 배우러 왔다고 당당하게 말하였다. 기독교인은 바보들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하는가... 행사의 취지를 잘 요약해주는 적절한 멘트였다.

2.
기독교 단체에서 왜 이런 행사가 있는가? 비디오로 상영된 홍석천의 인터뷰가 그 점을 잘 설명해준다. 홍석천은 어릴 적부터 전가족이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홍석천에게 요즘도 교회에 나가냐고 질문을 하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자기가 방송에 출연하지 못하게 편지, 전화, 메일 등의 온갖 방법으로 압력을 넣는 사람들의 80%가 기독교인이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3.

도대체 기독교가 동성애랑 무슨 웬수를 졌는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성서에서 동성애를 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고. 그것은 하느님의 창조 섭리에 어긋난 것이라고. 분명 이 태도에도 성서적인 근거가 있다. 행사에서는, 이 태도를 어떻게 반박할 것인지에 대해 두 입장이 제시되었다.
첫 번째는 성서학자 곽라분희의 입장으로 성서는 꼭 집어서 동성애를 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 문제를 언급할 때 흔히 회자되는 것이 영어 단어 소도미(sodomy)의 어원이 된 “소돔의 악행”인데, 이 소돔의 악행이 동성애인지는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황상 악행은 동성애와 이성애를 포괄하는 음란함을 가리키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바울 서신에서 “남색”이라고 번역된 단어 역시 잘못된 번역이라고 지적한다. 이 단어는 음란함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딸딸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는 단어이다. 성서 구절 풀이를 더 나열하는 것은 생략하도록 한다. 하지만 위의 두 사례로만도 동성애를 성서에 기록된 범죄로 확언하는 기독교인의 자신에 찬 태도에 문제가 있음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성서가 동성애를 정죄하는지가 불확실하다고 해도, 히브리 성서가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였음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는 예수님은 동성애자들에 대해 침묵하였다. 그 침묵을 긍정적인 의미로 주장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뒤따른다.

기독교에서 히브리 성서가 차지하는 모호한 위치가 여기서 문제가 된다. 구약은 폐기된 율법인 동시에 하느님 말씀의 보고이다. 거기서 하느님을 만나면서도, 거기 쓰여 있는 돼지고기 금기는 지켜지지 않는다. 월경한 여자와 성관계를 갖는 것도 구약에 따르면 율법 위반이지만 지금 와서는 의미없는 구절이다. 과연 동성애에 대한 히브리 성서의 입장은 시대의 변화에 의해 재해석되어 폐기된 율법에 속하는 것일까? 현재로는 기독교인들의 폭넓은 합의를 도출하기가 까다로운 문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현경의 입장은 이 문제와 연관되면서도 더 과격하다. 현경은 성서라는 텍스트가 진보적인 입장에서 재해석될 때만이 복음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사에서 기독교가 행한 범죄들에서 잘 예시되듯이, 성서가 자체로 그냥 주어질 때는 너무나 악용될 소지가 많다는 것이다. 예수의 사랑이라든지 평등의 정신에 입각하여 성서를 해석하여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의 여성차별적인 발언(여자들은 교회에서 입 닥치고 있을 것)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비슷한 예가 될 것이다.

현경의 얘기는 너무나 맞는 이야기지만, 기독교의 정체성이라는 문제까지 건드리는 근본적인 논쟁을 야기한다. 전형적인 여성신학자의 입장인데, 현실 기독교의 차원에서는 아직은 논의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는 청중의 질문에 대해, 현경은 "냅둬라"고 대답하였다. 동감이 가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들과는 아예 담을 쌓고 살아가야 하는지...

4.
거칠게 행사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인데, 기독교가 오히려 남을 사랑하는 것을 죄악시하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어휘의 역사성 때문에 이 주장은 그리 간단히 들리지 않는다. 사랑의 의미는 제각각이다. 예수님이 말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안 되는 사랑이 있고, 히브리 성서에 이야기하는 종족 번식에 관련된 사랑이 있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근대적 사랑 개념이 있다. 육체적 사랑인 에로스와 정신적 사랑인 아가페의 이분법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복잡한 개념사가 연루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역사를 정리할만한 능력이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위의 주장은 예수의 선언으로부터 유추된 추상화된 사랑 개념을 갖고 히브리 성서의 내용에도 재해석을 한다는 것이라고 이야기 될 수 있다. 이 때의 추상화된 사랑 개념은, 순수한 추론이라기보다는 현대의 사랑에 대한 논의들을 포괄하는 사회적, 문화적 가치의 합의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극단화시켜 이야기하면, 현대의 관점에서 성서를 재구성하는 것인데, 이 대목에서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인들의 태클이 들어오는 것은 불가피하다. 도대체 성서의 권위는 어디 있는 것이냐고 반문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서로 세상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성서를 읽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종교학의 자리에서 본다면 이런 논쟁들은 말장난에 가깝다. 왜냐하면 성서를 재해석하면서 받아들이지 않는 기독교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는 성서의 말씀 그대로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받아들인다고 주장하고, 누구는 진보적 입장에서 재해석한다고 말하겠지만, 엄밀히 말해서 해석을 거치지 않은 “그대로의 성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두 진영의 차이는 해석의 정도의 차이이다. 세상을 통해 성서를 읽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성서를 통해 세상을 읽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런 의도의 차이로 인해 신학의 언어들이 꼬여 있을 뿐이다.
 
5.
이 행사의 발표자는 세 명이었다. “전"신학교수와, “외국 대학”에 재직 중인 여성신학자, 그리고 기독교 입장에서 외부인인 “종교학과” “강사.” 셋 다 한국 주류 개신교와의 거리가 아득하다. 이 주변의 목소리가 언제 주류 안에서 메아리칠 수 있을까? 그 견고한 성벽에 균열을 보게 될 때는 언제일까?

나는 개신 교회 개혁 운동의 동력은 평신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신학 대학의 개혁을 통한 개혁? 어림없다. 그보다는 차라리, 그저 평신도의 상식에 부합하는 수준만 이끌어 내어도 그게 바로 한국 개신교회의 개혁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성추행 하는 목회자를 눈감아주지 않고, 아들에게 세습하려는 교회 지도자를 눈감아주지 않고, 철없는 보수적인 정치적 주장을 강요하는 행태에 침묵하지 않고 우리 사회의 평균적인 수준으로 종교계를 끌어올리는 것이 다름아닌 개혁일 것이다. 그래서 평신도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현상이다. 이 행사는 한기연이라는 평신도들의 모임에 의해 기획되었다. 목사들의 모임인 한기총의 뻔뻔한 태도에 분노한 평신도들의 목소리였다. 그래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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