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연구에서 선입관을 바로잡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 자체가 연구의 목적인 경우도 많다. 이번에 번역된 베르나르 포르의 책은 바로 이러한 목적에 충실한 개론서이다. 불교에 대해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것에 대해 시원하게 설명해주는 책이다.
내가 느끼기에 이 책의 내용은 매우 시원하다. 전공자들에게는 불편하고 다소 과격하거나 편향적이라고 느껴질 내용들도 분명 있지만, 내 취향에는 딱 맞는다. 이 산뜻한 책을 정확하고도 잘 읽히게 옮겨준 번역자에게 감사를 표한다.
불교란 무엇이 아닌가 - 베르나르 포르 지음, 김수정 옮김/그린비 |
책에서 다루는 선입관들은 23개로 다양한데, 그 안에서 어느 정도 반복되는 저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저자가 주된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불교를 순수한 사유체계로 증류해서 받아들이려는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이다. 그것은 단지 불교에 대해 무지한 서양인들의 오해일까?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불교인들을 포함한 우리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유난히 순수정통주의를 좋아하는 우리의 종교적 정서 때문에, 순수한 불교를 추구하려는 경향은 우리나라에서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수행자들은 법통을, 학자들은 원시불교를 유난히 중시한다. 불교가 역사적 발전을 거치면서 발달시켜온 다양한 전통들, 우리 생활 속에 살아있는 불교의 형태들은 흔히 근기가 낮은 것, 심하게는 미신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포르는 그러한 것들을 포함하지 않은 불교 이해는 공허하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한다.
이러한 인식은 책 전반에 깔려 있는데, 눈에 띄는 몇 대목만 기록해 놓았다.
깨달음은 계속해서 ‘진정한’ 불교의 목표로 내세워져 왔다. 반면 다른 신앙적 행위나 불교의 신들에 대한 기도와 같은 현세적 이익에 대한 고려는 그다지 진실되지 못한 불교의 형태로, 즉 지역 문화와 대중의 요구에 서툴러 영합한 결과로 간단히 치부해 버린다. 하지만 동양에서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신앙해 오면서도 결코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며, 수세기 동안의 굴절 이후 서구인들이야말로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이해했고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아마 주제넘은 태도일 것이다.……서구는 불교를 이상화하며, 불교를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가르침으로 곡해하며, 그 가르침 중에서도 오직 깨달음에만 조명을 가하는 경향을 갖고 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불교를 잘못 보고 있는 것이다.[베르나르 포르, 김수정 옮김, <<불교란 무엇이 아닌가: 불교를 둘러싼 23가지 오해와 답변>>(그린비, 2011), 63-64.]
순전히 관념 속에 있는 ‘오리지널’ 불교와 대중적인 ‘미신’ 사이의 이 흔한 이분법은 살아 있는 전통으로서의 불교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그 가르침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 왔으며, 역사적으로 볼 때도 지금은 서양인들에게 ‘미신’으로 비춰지는 형태들이 실은 대중들뿐 아니라 수많은 고승들에게서도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러한 것들은 신들을 달래고자 하는 ‘방편’ 혹은 ‘승려들의 타락’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교도들에게 붓다나 불교의 신은 상징이나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실제 이들의 존재를 경험했기 때문에 불상이나 다른 신상 앞에서 절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107-8)
부처님에 대한 이해에 역사적 예수 연구가 영향을 미쳤음을 지적한 부분도 흥미롭다.
예수에게 적용하였던 바로 그 역사비평적인 분서의 방법으로 붓다의 ‘전기’를 만들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 결과, 대승불교 전통에서 모든 ‘형이상학적’ 부처들은 역사적인 붓다에 의해 빛을 잃기 시작했고, 대승불교가 판타지 정도의 영역으로 취급된 반면, 오직 상좌부 전통만이 붓다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고 하며, 상좌부의 전통을 ‘정통’ 불교의 지위로 격상시키는 결과는 낳게 되었다.……붓다의 역사적 진실에 관한 문제는 붓다의 삶을 무엇보다 따라야 할 하나의 이상으로 여기며, 그것을 믿어 온 전통적 불교도들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다.[베르나르 포르, 김수정 옮김, <<불교란 무엇이 아닌가: 불교를 둘러싼 23가지 오해와 답변>>(그린비, 2011),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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