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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만남

전씨 아주머니 이야기

by 방가房家 2023. 5. 17.

한국 무당과 여성을 전문적으로 연구해온 인류학자 로렐 켄달(Laurel Kendall)의 최근 글은 한국 무속과 종교 정의의 관계 문제를 제기한다.[Laurel Kendall, "Korean  Shamans and Defining 'Religion': A View from the Grass Roots," in Jacob K. Olupona (ed.), <<Beyond Primitivism>> (London: Routledge, 2004).] 

켄달이 전해주는 전씨 아주머니(Auntie Chun)의 이야기, 이것이 글의 중심적인 소재이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보편적이고 덕을 강조하지만, 무속은 그런 식으로 체계화되어 있지 않아요. 이건 무당의 지위 때문이에요. 별로 배우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기적(miracle)은 무당에게 많이 일어나죠. 불교나 기독교보다 더요.……기적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어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죠. 하지만 종교는 [누구에게나] 필수적인 거에요. 우리 무속은 이런 데 약해요. 우리에겐 진짜 기적과 신내림은 있지만, 무당들의 교육 수준이 낮거든요. 그게 실생활을 구원하는 데 연결되어야 하는데 너무 신령만 강조하죠. 내 말은 기적만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거에요. 물론 기적은 항상 있는 거지만, 무당들이 단골들에게 올바른 길을 인도할 만큼 교육 수준이 되어있지 않아요. 기적을 통해 도와주긴 하지만 말이에요. 그래서 무속에는 체계적인  것이 없어요.
(247, 우리말 인터뷰를 영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중역의 과정에서 원래의 내용과 얼마나 달라졌을지 궁금하다. 특히 ‘기적’은 무속인의 원래 이야기에서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1. 우리사회에서 ‘미신’으로 무시 받아온 무속인들의 한이 담겨 있는 이야기이다. 무당이 염원하는 조직화, 체계화, 교육 등이 반드시 ‘종교’의 정의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분명 그 일부에 해당하는 것이고, 켄달은 이것을 종교 문제로 한정해서 논의를 이끈다. 켄달이 지적한대로 켄달과 무당은 종교에 대해 재미있는 입장 차이를 보인다. 켄달은 미국 학계에서 한국의 무속을 설명하면서 청중이나 독자들에게 서구적인 종교 개념을 적용한다면 무속에 대한 오해가 발생한다고 강조하는 입장이고, 전씨 아주머니는 무속이 ‘종교’의 꼴을 갖추지 못해 무시를 당한다고 한탄한다. 종교에 대한 불편함과 종교에 대한 갈망이 대립하는 형편이다.(247-48) 

내가 요즘 하고 있는 작업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종교’라는 대상을 확립해가는 과정에서 그 무속이 중심적인 현상이 되었다는 논의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한국 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무속이 종교에 속하지 못해 설움을 겪은 이야기이다.  시대의 차이에 따라 반대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담론의 형성 과정과 그 영향이 이렇게 상반된다는 점은 내가 그 동안 묻어두고 있었던 측면인데, 앞으로 두고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2. 켄달이 이 글에서 하는 것은 전씨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위치시키는 것’이다. 켄달은 이 이야기를 종교 개념이 수용된 한국 근대사 안에 위치시킨다. 기독교적 종교 모델이 한국 사회에 수용되고, 또 그 모델이 ‘미신타파’에 사용된 과정을 요약적으로 제시하면서 전씨 아주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된 사연을 이해시킨다. 
또한 켄달은 이 이야기를 종교학자들의 논의 속에 위치시킨다. 서구적 종교 개념의 형성 과정(켄트웰 스미스)을 통해 왜 그것이 한국에서 ‘맞지 않는지’를 이해하고, 토착 계보학(local genealogy)을 추적하는 작업의 중요성(코마로프)에 공감하면서 한국을 그 사례로 추가한다. 보다 직접적으로, 책에 참여한 저자들과 대화한다는 점이 돋보인다. 전씨 이야기를 토착 전통과 세계 종교간의 만남을 보여주는 ‘세밀한 이야기’(micro-narrative)로 본다든지(브루스 링컨), ‘변화하는 연속성의 흐름’(카렌 브라운)에서 파악하는 데 동의하는 것이 대화의 예들이다.
아마 전씨 이야기는 우리 주변의 무당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세계 여러 곳의 ‘종교’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종교학자들의 대화에 이야깃거리로 참여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대화는 아직 그렇게 많이 진행되지 않았지만, 대화를 열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켄달의 이 작은 글의 의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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