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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발제

엘리아데 읽기의 어려움

by 방가房家 2023. 5. 16.

아래 글은 엘리아데에 대한 서평 과제를 채점한 후 들었던 생각 정리와, 엘리아데에 대한 논쟁 모음집인 <<Changing Religious Worlds>>의 전반부에 대한 논평이 짬뽕된 글이다. 학생들이 어려워했던 그 부분이 학자들의 논쟁이 집중되었던 그 부분이기도 하고, 학생들이 혼란스러워 하고 혹은 창조적으로 읽어낸 그 대목이 학자들이 자신의 이론을 새로 발전시켜 나간 그 대목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엘리아데,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킨 동시에, 숱한 오독(誤讀)을 남긴 학자이기도 하다. (과제에 사용된 책은 <<영원회귀의 신화>>(심재중 옮김, 이학사)이다. 내가 간직하고 있는 번역은 <<우주와 역사>>(정진홍 옮김, 현대사상사)이다. 두 번역의 차이는 심각하지 않은 것 같다.)



엘리아데의 <<영원회귀의 신화>>를 읽으면서 학생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1) 고대인과 현대인: 많은 공대생들이 “고대인” 이야기를, 현대인 이전에 존재했던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원형회귀의 신화는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 사람들의 미개한 사람들을 설명하는 이야기로 이해된다. 우리와는 다른, 이해하기 쉽지 않은 바보같은 옛날 사람들을 설명한 책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 경우, 엘리아데가 현대인과 고대인의 연속성을 이야기하고자 한 이 책이, 학생들에게는 현대인과 고대인의 단절성을 강조한 책으로 읽혔다.

2) 원형의 반복: 고대인들은 정말로 태초의 것과 똑같은 것을 반복하고 그래서 새로운 것이 창조되었다고 믿는 바보들인가? 고대인이 현대인과 다르다고 생각한 학생들은 고대인을 창조성이 결여된, 발전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해버렸다. 그들은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었다. 정말 그런가?

3) “기독교는 전락한 현대인의 종교”라는 마지막 서술을, 엘리아데가 “현대인들은 기독교 믿고 구원 받으세요”라고 이야기했다고 오해하는 학생이 많았다. 엘리아데가 기독교를 이야기한 것은 역사주의를 비판한 맥락에서였고, 역사주의의 주범인 기독교에 대한 태도는 싸늘했다. 그럼에도 현대인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 학생들은 현대인의 종교인 기독교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고대인과 현대인의 연결성을 환기하고자 하는 것이 엘리아데의 목적이다. 그러나 그는 그 연결성을 직접 서술하는 대신에, 고대인에 대해 서술하면서 그것을 읽는 현대인 독자들이 ‘아, 이게 내 얘기구나!’라고 무릎을 치도록 해 놓았다. 예를 들어 고대인들의 신년맞이 의례에 대한 서술이 그렇다. 이것은 학술적이라기보다는 문학적인 글쓰기이다. 고대인/현대인은 이상형(ideal-type)으로 제시된 개념이다. 현존하는 현대인을 끌고 와서 보면 그 안에는 현대인과 고대인의 속성이 공존하며, 반대로 어느 고대인을 관찰한다면 그에게도 두 속성이 공존한다. 그러나 엘리아데는 그렇게 글을 쓰지 않는다. 현대인에 몇 %의 현대인과 몇 %의 고대인이 있는지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저 현대인인 “우리” 안에 고대인이 있음을 깨우칠 뿐이다. 현대인에 고대인이 어떻게 공존하며 조화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서술해야 할 여지를 남긴다. 이 지점에서 시걸(Robert Segal)이 헤매고 있다. 고대 신화의 특성을 요점정리해서 현대인의 잔존한 신화에 대입하면 당연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게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적용할 내용이 아닌 것이다.(30-31) 엘리아데는 깨우침을 주었을 뿐, 서술은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현대인인 우리 안에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고대인이 존재함을 깨우치는 엘리아데의 작업에 대하여, 머피(Tim Murphy)는 매우 날카로운 비판을 제기한다. 그는 “성(聖)은 의식 구조 내의 요소”(37)라는 정확한 엘리아데 이해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러나 우리 안에 있다는 고대인이 타자와의 만남을 지칭하는 것(41-44)이라고 지적한다. 결국 의식의 주체가 되는 “우리”는 서구적 주체, 유럽의 인간("Man")이라는(44-46), 데리다의 비평을 적용한 머피의 작업은 엘리아데에 가해진 가장 아픈 비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머피의 논리에 따르면, 고대인을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학생들의 이야기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학생들의 점수를 높여줄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여도, 학생들 이야기는 오독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왜'를 설명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맥커천(Russell McCutcheon)이 인정했듯이 엘리아데의 언어는 독특하기 때문에(16), 그의 맥락을 철저히 전제로 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은 독서의 기본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다만 엘리아데의 지적 맥락을 전제한다는 것이 기본에 해당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를 특권화시키는 것인지 “분석의 층위”(18)를 지정하는 작업은 중요하다. 예를 들어 레니 같은 치들이 이야기하는 대로 엘리아데 언어를 반복하는 것이 그를 계승하는 것이라는 식의 태도는 찬성할 수 없다. 그들은 동어반복에 머물고 있다. 엄밀한 비교를 위하여 엘리아데를 포함한 이전의 비교를 재검토하자는 스미스의 주장을, 더 이상 비교는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올슨(Carl Olson)의 멍청한 독서(73)따위는 치워버리자. 엘리아데를 이해했다면, 엘리아데가 설명하지 않은 부분을 발전시켜야 하며 그것이 포스트-엘리아데 종교학이 내거는 기치이다. 엘리아데 시대를 끝장낸다는 표현이 좀 싸가지가 없었을 뿐, 콜레스(Roger Corless)나 맥커천은 엘리아데를 계승하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아는 입장이다. 엘리아데 이야기에서 종교라는 한정된 영역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지도”(8)를 읽어내는 것, 그래서 체계 이론(system theory, 9)을 발달시키는 것이 좋은 예이다. 성스러움과 권력, 권위가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연구하는 브루스 링컨의 작업이, 맥커천이 이야기하는 대로 엘리아데 이후 종교학의 모습이다.(21)
현대인 안에 고대인이 존재하듯이, 고대인 안에도 현대인이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자료를 읽을 때 엘리아데가 환원주의라고 불렀던 문제의식들이 요청되기 마련이며, 상징에 관련된 권력의 문제를 이야기하게 된다. 중심의 상징에 어떠한 권력 작용이 관련되는지를 밝히는 것이 우리에게 놓인 분석 작업이다. (예를 들어, 중심의 상징)
고대 상징의 반복은 반복이면서도 똑같은 반복이 아니다. 어느 국악과 학생의 지적대로, 도돌이표는 동일한 반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반복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창조는 무엇일까? 고대인을 우리와 다른 존재로 놓을 필요는 없다. 반복해야할 구조(신화든 의례 형식이든)는 언제나 현실에 적용되는 것인데, 그 현실은 동일하지 않다. 제사에서는 동일한 음식이 올려져야 하는데, 그 음식이 준비되지 못하는 상황도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점에 대한 고찰로부터, 조나단 스미스의 “불일치(incongruity)에 대한 성찰”이라는 주제가 나왔다고 생각한다.
엘리아데의 계승 문제에 대해서,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 바라본다”는 우아한 비유보다는, 엘리아데의 시체에서 기어나온 구더기들에 의해 창조되는 세계라는 신화적 심상이 어울린다. 엘리아데는 후학들에게 양분을 공급한다. 그의 변형에 대해 우려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구더기들이 그의 진정한 계승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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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ing Religious Worlds>>의 전반부에 실린 글들을 간단히 평하면 다음과 같다.
1장 Roger Corless: 졸나 싸가지 없는 글
2장 Russell McCutcheon: 쓸데없는 데다 힘을 낭비한 글
3장 Robert Segal: 시걸 바보!
4장 Tim Murphy: 엘리아데를 잘 이해하면서도 비평한, 수준 높은 글
6장 Carl Olson: 븅신같은 글. 학자 맞나...
(모두를 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편드는 쪽은 확실하다.
나는 바보,븅신, 그리고 머저리(레니) 보다는 싸가지와 싸움닭(맥커천)의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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