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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메모

도구상자 은유

by 방가房家 2023. 5. 16.

<<Implied Spider>> 6장에는 도구상자(toolbox)라는, 방법론에 대한 은유가 나온다. 내 주변에서 여러번 회자되었던 은유이고, 그게 좋니 나쁘니, 정확하게 말하면 누가 그걸 좋게 보았느니 아니니 말들이 좀 있었던 개념이라서 그 부분을 좀 주의 깊게 읽어보았고 다른 글들도 좀 찾아보았다. 내 입장은 좀 냉소적이다. 그런 논쟁은 하수들의 슬픈 이야기라고.


바둑에선 고수의 기풍(碁風)을 말한다. 조훈현은 발빠르고 이창호는 실리적이면서도 두텁다. 박영훈은 타개에 능하며 최철한은 축, 장문 안 되면 끊고 싸우고 보는 힘바둑이다. 그러나 하수가 고수의 기풍을 안다고 생각하고 무턱대고 따라했다가는 낭패를 본다. 기풍은 바둑이 일정한 경지 이상이 되었을 때 구분가능한 미세한 차이다. 기본이 갖추어진 이후에야 의미를 갖는 언어이다. 하수가 고수의 기풍을 함부로 논할 수 없다. 반면에 하수들이 발언을 하도록 제도적으로 강제되는 것이 학문의 세계이다. 학계는 그들의 언어가 빚은 혼란으로 가득 차 있다.

조나단 스미스는 “도구상자 은유를 써가며 방법에 관한 관심을 감소시키려는 최근 시도들”을 삐딱하게 바라본다. [Jonathan Z. Smith, "A Matter of Class: Taxonomies of Religion," Relating Religion, 175.]
이반 스트렌스키도 비슷한 시각이다. 그는 ‘이론과 방법’ 수업들이 옛날 대가들 모아놓고 워너비(wannabe) 철학을 주입한다고 꼬집는다. 그 결과 이론이 제기된 역사적 맥락은 제쳐두고, 어디엔가 쓸모가 있겠다 싶어 이론들을 쟁여 놓았다가 꺼내 쓰는 도구상자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Ivan Strenski, "Durkheim Sings," Teaching Durkhei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15.]
둘 다 웬디 도니거 자체를 대놓고 비판하지는 못한다. 문제는 도니거 이야기가 입맛에 맞다고 생각하고 자기 편한 대로 가져가서 쓰고 자랑하는 얼치기들에 있기 때문이다. 도구상자의 오용은 한국에까지 퍼져 있다.
분명 도니거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도니거가 이런 절충주의 방법론을 이야기하는데는, 신학 대가 트레이시의 맘 편한 발언이 바탕이 된다: “이데올로기들은 구조주의, 기호학, 해체주의 설명 방법들에 고유한 것이 아니다.”(150) 그래서, “이데올로기를 제하고 방법들을 사용하는 것, 다른 방법들과 결합하여 방법들을 적용하는 것이 진정 묘수”가 된다. 이데올로기를 제하는 것은, 이론의 지적인 맥락, 물음이 제기된 정황, 나아가 학문을 배태한 삶을 제하는 것과는 다른 것일까? 도니거의 위의 표현들은 도구상자를 너무 만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도니거는 고수고, 도구상자를 방만하게 쓰는 것을 제약하는 단서를 분명 달아놓았다. “모든 학자/손재주꾼은 특정한 분석에 있어서 가장 알맞은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을 골라 꺼낼 수 있는 도구상자를 가져야 한다. 이 학제간 접근은 해결책이지만, 문제이기도 하다.”(153) 토라에 대해서는 70가지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 이야기는 얼핏 해석의 자유로움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러나 도니거는 경고한다. 얼치기 당신의 해석은 그 중 하나가 아니라고. 어느 국면에서 고수의 다양한 선택을 보일 수 있지만, 하수의 행마는 대부분 그 다양한 선택들 중 하나가 아니다. 그 선택은 국면을 읽고 판을 어떻게 짜 나갈지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도구상자에서 골라쓰는 재미에 빠질 것이 아니라, 도니거가 구조주의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레비스트로스가 내리기 한 정거장 전에 브리콜라쥬 버스에서 내리는 일은 그리 맘 편한 일은 못된다. 레비스트로스를 회춘시켜 구조에 역사적 관점을 부여하는 일은 단순히 다른 이론을 결합한 것이 아니라, 레비스트로스의 논의의 맥락을 놓치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도구상자의 편리함이 아니라 손재주꾼의 사려깊음이 아닐까.
[구조의 역사화 논의는 살린스도 보여준다. 그는 역사 내의 수행 과정에서 “국면[위기, 정세]의 구조”(structure of the conjuncture)를 통해 구조가 변동됨을 주장한다. Marshal Sahlins, Historical Metaphors and Mythical Realities (Ann Arbor: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81).]
-"Erector set" 사진. 내가 이 사진을 올린 것은 도구상자 은유를 가리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손재주꾼(브뤼콜뢰르) 은유를 가리키기 위해서이다.

(책 가장 마지막에 “줄타기”라는 소절에서는 현지조사에서 만나는 딜레마를 이야기하며 모두 다(both/and)의 해결책을 강조하며 끝을 맺는다. 이 부분과 관련해 한국천주교사 자료에서 비슷한 문제를 던지는 흥미로운 자료를 발견해 적어 놓은 것이 있다. 그 포스트를 작성할 때는 내가 읽었다고 생각한 어느 인류학(?) 책이 사실은 웬디 도니거 책이라는 것도 기억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책에 대한 요약이 상당히 이상한 것을 볼 수 있다. 역시 기억에 의지 한다는 것은... 그럼에도 통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 대목은 유효한 것 같다: 큰 신이 우세하다니까 성당으로 가는 수밖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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