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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발제

펠리컨, <기독교 전통>, 4-1,2

by 방가房家 2023. 5. 11.

펠리컨의 <<기독교 전통>> 제4권의 1, 2장은 14세기와 15세기의 신학사상사에 관한 내용이다. 이 시기는 중세신학의 정합성에 균열이 나고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기 바로 전의 시기로, 혼란스러운 동시에 새로운 생각들이 등장하는 시기였다. 분열이 팽배해 가던 이 시점에, 역설적으로 가장 큰 신학적 목소리는 교황청을 지키려는 “하나의 보편적 진리”라는 소리였다. 이것은 “장미의 이름”의 시대에 신학적 언어가 현실을 역으로 반영하는 방식이었다.
이 시기의 다양한 논의들을 살펴보면 종교개혁 때 폭발한 논의들이 어떻게 준비되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다.

Jaroslav Pelikan, <<The Christian Tradition 4: Reformation of Church and Dogma (1300-1500)>>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1), chap. 1-2.

 

1. 중세 후기의 교리적 다양성

13세기가 종합의 시대였다면 14세기로부터 비롯하여 15세기에 이르는 기간은 신학에서 엄청난 다양성이 나타났던 시기이다. 성만찬에 관한 교리들, 마리아 숭배와 관련된 교리들은 그러한 다양성을 잘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 원죄론, 악을 예정한 신의 의지, 참회 등과 같은 핵심적인 교리들에도 다양한 의견들이 난립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도대체 권위의 본성과 위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때문에 야기된 것들이다.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인 교황의 통치권이 정당한 것인지, 심지어는 교황이 이단이 아닌지에 관한 물음이 던져지기도 했다.
“마치 바벨탑과 같은, 상호 소통되지 않는 표현과 언어들의 혼란”에 대해 교회의 통일성을 기하려는 신학적 노력이 가해졌으며, 단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가운데의 통합성을 이야기하면서 13세기의 신학 판도는 그럭저럭 꾸려졌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종합을 넘어서서
13세기에 아퀴나스와 보나벤투라의 상호보완관계에 의해 이루어졌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종합’(Augustinian Synthesis)에 대해서 다양한 각도에서 비판이 쏟아지고 새로운 대안이 모색되었다. 특히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 체계가 지닌 가능성들을 다 발휘하지 못하였을 뿐더러 교회의 교리적 필요성을 충족시키지 못하였다고 비난받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퀴나스와 보나벤투라가 사망한 해(1274년, 그러나 스코투스가 이 해에 태어났다는 것은 전설에 의한 것이다)에 태어난 스코투스는 아우구스티누스 종합을 새로이 시도하는 14세기의 분위기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아퀴나스에 대한 반론은 잡스러워 보이는 논의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①문: 수도사가 죽은 후 부활하였을 때, 그는 이전과 동일한 수도회에 가입해야 하는가? /답: 서원을 했기 때문에 그는 수도 생활을 해야 한다. 단 동일한 수도회일 필요는 없다.
②문: 부활했을 때 그리스도는 소화할 능력이 있었는가? /답: 능력은 있었지만 쓰지는 않았다.
③문: 동정녀 마리아의 머리색은? /답: 붉은색이나 검은색. 검은색일 가능성이 큼.


이러한 문제제기들은 모두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들을 인용하여 이루어진 것들이다. 같은 방식으로 의지에 비해 이성을 우위에 놓는 토마스의 다른 교의들도 비판받았다. 성만찬에서 성배를 제공할 것인지의 문제, 무염 시태의 문제에 대해서도 토마스는 적절한 답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여 많은 비난을 받게 된다. 그러나 1323년 토마스는 시성(諡聖)되었으며 그의 후계자들이 그를 옹호하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후계자들은 토마스의 언어와 주장이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도출된 것이고 그것을 종합한 것이라는 논리로 비난을 무마하였다. 이러한 논쟁을 통해 보건대, 그 시기를 아우구스티누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 양분해서 보는 것은 무리한 도식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14,15세기는 이전의 아우구스티누스 종합을 넘어서서 새로운 아우구스티누스 종합으로 나아가고자 노력한 시기라는 점이다. 모두가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이었다. 모든 주장들은 아우구스티누스를 출발점으로, 그를 전거로 하여 이루어졌다. ①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이 다시 강조되었다. 브래드워딘과 그레고리(Gregory of Rimini)가 은총론의 입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계승하였다고 자청한 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다시 또아리를 틀기 시작한 반(半)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항하여 ‘은총의 박사’의 훈수를 청하여 은총론을 확고히 하였다. ②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은 안티-펠라기우스적 논의에 치우쳐 안티-도나투스 계열의 교의들은 간과한 편이었다. 이 시기 들어 교회론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은 교회론의 맥락에서 새로이 조명받기 시작되었다. 이러한 지적 작업은 종교개혁시기까지 지속된다. ③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에 의해 새로이 주목받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중요한 측면은 『고백록』에 나타나는 주관주의이다. 이로 인해 기독교에서 개인의 내면이 중시되기 시작하였다. 중세 문헌에서 주관주의는 빈번하게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프란체스코의 영성의 영향으로 더욱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는 동방교회의 신비주의 전통과도 연결되어 ‘경험의 신학’의 기초를 형성한다.
14,15세기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주요한 신학 논의가 없을 정도였다. 특히 마리아 숭배(원죄 이론), 영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의 관련성(신의 도성), 교회 분열과 악한 사제의 처리 문제(도나투스 논쟁)에서 그의 영향은 두드러진다.


구원의 계획
아우구스티누스 체계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은 속죄와 구원의 계획에 관한 교리이다. 이 구멍을 메꾸어 주는 것이 안셀름의 속죄이론, 즉 인간이 신의 정의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신의 자비로 순결한 아들로 하여금 인간의 모습을 취한 채 희생하여 신의 정의를 만족시켰다는 이론이었다. 안셀름의 설명에 대해서 14세기의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편이었다. 위클리프, 장 거손, 피터 첼키키, 토마스 아 켐피스, 가브리엘 비엘 등이,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자비와 정의의 충돌을 대속을 통해 해결하는 안셀름의 묘수에 대체로 동의했다. 그러나 이러한 동의에도 불구하고 정의, 자비, 구원의 섭리에 관한 이견들이 몇몇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①스코투스: 14,15세기 들어 신의 주권 의지가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스코투스는 신의 의지가 최상의 원인이 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제에서 출발하여, 신의 의지가 정의의 규범과 근원이 된다고 하였다. 또한 자비도 신의 불변하는 의지에 속한 문제였다. 따라서 정의와 자비는 신의 의지의 표현들로 설명된다. 한편 스코투스는 신의 의지에는 필연적인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의 대속도 자비와 정의에 의한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대속이 필연적인 것이라면 대속의 가치가 격하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 12세기에는 “죄가 없어도 성육신이 있었을까”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죄인이어서 행복해요”라는 역설도 운위된다.)
그는 예정설의 문제에서도 신의 의지를 강조한다. 그는 신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신은 제일 원인으로서 사건들을 우연적으로 필연성 없이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예정은 신의 의지에 의하여 지적인 창조물 중 몇몇을 은총과 영광에 이르도록 질서지운 행위이다.
②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은 예정에 있어서 은총의 역할의 강조를 답습한다. 브래드웨딘은 은총 개념을 정교화하여 모든 생물에 적용되는 ‘일반 은총’과 일부에만 수여되는 ‘특수 은총’(은총의 도움이라고 이야기되는 것)을 구별한다.
③위클리프: 그는 교회 개혁의 일환으로서의 교리를 주장한다. 그는 교회를, 교황에 의해 지배받는 제도로서가 아니라 ‘예정받은 사람들의 모임’으로 규정한다. 신은 제일 원인이기 때문에 구원 예정의 유일한 원인이기도 하다. 구원에서 있어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인 입장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는 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을 ‘필연적’이라고 불렀으며, 결정론적이고 이중예정론의 입장을 취했다. 그의 문제제기는 자유의지의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④오캄: 예정과 자발성의 결합, 결정주의적인 동시에 펠라기우스적인 형태의 신학이 오캄에 의해서 제시된다. 그는 신의 예지의 무오성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놓는다. 하지만 신이 구원받을 사람을 필연적으로 예정해 놓은 것은 아니다. 신에 의해 창조된 자유의지는 신이 정해놓은 길을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우연적으로 따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조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그를 본받는 것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 숭배와 그의 모범을 따르는 것은 14,15세기에 강조된 신앙이고, 여기에는 프란체스코의 영향도 있었다. 토마스 아 켐피스가 쓴 15세기의 베스트셀러 『그리스도 본받기』(Imitation of Christ)는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은총의 통공
중세 기독교사의 교리적 발전이라고 꼽을 수 있는 것은, 성인들(특히 마리아)을 통한 은총의 통공에 대한 교리와 성사에 대한 내용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 두 주제는 중세 말기의 신학적 다양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①성모 숭배에 대한 교리
성모 특유의 성스러움이 원죄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의 문제를 중심으로 논쟁이 진행되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신학자들은 스코투스를 좇아 성모에 대한 새로운 교리를 지지하였고, 도미니크 쪽은 아퀴나스를 변호하며 이에 반대하는 쪽이었다. 시대의 대세는 마리아를 숭배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전통적인 숭배 요소들(이브와 마리아 동일시, 신의 어머니(Theotokos) 교리, 마리아를 ‘해를 입은 한 여자’와 동일시함) 외에도 마리아를 찬양하는 새로운 개념들이 등장한다.  자비로운 여왕(Queen of mercies)이라는 표현은 그녀를 인간의 보호자로서 강조하였고, ‘아베 마리아’라는 기도문은 은총의 충만과 연결된다.
⑴그녀는 예수에 비견되는 중개자(mediatrix)의 지위를 갖게 된다. 예수만 찾을 것이 아니라 성모도 찾도록 권해졌고, 그러한 과정에서 예수에게 주어졌던 특권적 속성들이 조금씩 그녀에게 이양되었다. ⑵그녀는 사도 전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누가에게 복음을 보완해주고 사도들에게 사도신경 작성을 도와주었다. 그녀는 성서를 잘 이해하게끔 해주는 역할(illuminator)을 한다고 인식되었다. ⑶성모에 대한 숭배는 극단적으로 발달하여 그녀를 신적인 위치에 올려놓게 되었다. ⑷한편 성모는 청빈의 이미지를 지녔고, 세상을 위해 아들을 내어 놓는 인간적 슬픔을 지닌 존재(Stabat Mater)로도 생각되었다. (중개자 개념과는 대척점에 있는 이러한 이미지들은, (신앙의) 주관주의라는 새로운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다.) ⑸성모는 피조물 중에서, 그리고 성인들 중에서 최고의 위치를 점하였다. 그러나 승천의 교리(the doctrine of the assumption)를 둘러싸고 아직 답해지지 않은 문제들이 있었다. 하나는 그녀가 죽은 후 부활하였는지 여부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승천에 대해 성서에서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 사실 성모 교리는 성서적 가르침과 비성서적 전통 사이의 관계에서 야기되는 복잡한 문제들을 함축한다. 많은 부분 일종의 추론적 개연성들이 인정받게 되었고 신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신의 성스러움을 소급하는 것이 인정되었다. (한편 성모에 관련된 축일들이 이 시기 교회력에 들어가는데, 이 과정은 신념 체계와 실천의 상호 작용을 보여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모를 보편적 원죄의 예외로 인정한 바 있다. 성모가 태어날 때부터 원죄가 없었는지, 속죄할 필요가 없는지, 중개의 정도는 어디까지인지, 과연 그 독특성이 어디까지 인정될 수 있는지 많은 논쟁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스코투스는 극대화(maximalism)라는 신학적 방법을 제시한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는 경우 이왕이면 높여주는 쪽으로 생각하자는 것.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성모 숭배는 극단화되어, 심지어는 하느님의 창조 당시 마리아의 몫을 따로 떼어 놓았기 때문에 원죄로부터 자유롭다는 해석도 등장한다.

②성사에 관하여
성사에 대해 성서에 충분한 설명이 제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논쟁들이 있었다. 예컨대 언제 세례가 시작되었는지, 결혼은 영적인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퀴나스는 “예수 이전에는 성사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가르쳤는데 이것이 많은 잡음을 야기하였다. 예수 이전에 있었던 침례, 결혼, 그리고 이후에 생긴 견진 성사 등이 문제가 되었다.
뭐니뭐니해도 성만찬(the Eucharist)을 둘러싼 논쟁이야말로 중세 신학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세례에서는 예수의 권능이 나타나는 반면에 성만찬에서는 권능뿐만 아니라 그의 ‘실체’(substance)도 나타난다. 이 점이 성만찬에 대한 규명을 까다롭게 한다. 빵이 어떻게 예수의 몸으로 변환되는가를 둘러싼 다양한 설명들이 등장한다. (“믿어라 그러면 넌 이미 먹은 것이다”라는 구절을 설명하기 위해 ‘영적 먹음’과 ‘성사적 먹음’을 구분하기도 하였다. 물론 영적 먹음이 우월한 것이고, 이것은 후스파의 논리를 배격하는데도 사용된다)
실재적 임재(real presence)를 설명하는 화체설(transubstantiation), 즉 빵의 실체는 존재하기를 멈추고 예수의 실체는 빵의 우유(accident) 아래 존재하게 된다는 교리가 확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서 다양한 이견들이 존재하였다. ⑴파리의 존(John of Paris)은 빵의 실체가 남아있다고 주장한다. 성만찬은 성육신과 같은 것이어서 빵의 실체는 예수의 인성처럼 존속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빵화(impan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⑵오캄( William of Ockham)은 빵의 실체가 완전히 사라진다고 주장하였다. 신의 의지가 이루어지는데 모순은 없기 때문이다. 실체는 사라져도 색, 맛, 덩어리의 ‘양’은 남는다. ⑶위클리프( John Wycliffe)는 빵이 남긴 남는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물질로 남는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성찬의 피와 살은 진실되고 실제로, 그러나 상징적으로, 혹은 영적이면서도 실제적으로 존재한다.


하나의 진실된 신앙
다양한 이견들을 수렴하기 위해서, 교리는 보편적으로 존재하지만 그 안에서 신학적 견해는 다양할 수 있다는 식의 종합이 시도되었다. 이러한 틀 안에서는 교리적 다양성이 교회의 통일성을 저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4,15세기에 지식의 우선성(아퀴나스주의)으로부터 의지의 우선성(아우구스티누스, 보나벤추라)으로의 변환이 있었다. 즉 “참된 신앙에 기반한 이성을 통해 신의 본성을 추구하는 노력”으로부터 “고상한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신의 사랑을 부여잡는 것”으로 노력의 방향이 바뀌었다. 일단 신앙을 가지면 어떤 형식으로든 이해의 가능성을 갖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심지어는 현세에 믿음을 가지면 다가올 세상에서는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라고 주장되기도 하였다.
14,15세기는 신비주의 전통이 공식적 교리와 서로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공존하던 때였다. 양 쪽 전통, 즉 사변적 신학과 신비적 신학에 모두 능했던 그레고리, 베르나르, 거손과 같은 학자들이 그러한 공존을 잘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보나벤투라는 지적인 측면과 신앙 감성의 측면이 경계를 흐리지 않고 완벽하게 공존한 유일한 예로 평가된다.
신비주의 신학이 지니는 위험한 지점이 신화(deification) 교리이다. 이것은 창조주와 창조물의 경계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신화는 철저히 신의 능력에의 참여로, 자신의 인간적 속성이 전혀 소거되지 않는 성육신적 성격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정통 교리로부터 이단시되지 않았다.


2. 하나의, 성스러운, 보편적인, 사도적인?

15세기는 교회론에 대한 논의가 급격하게 대두된 시기였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던 교회 개념은 심각하게 위협받았다. 디트리히(Dietrich of Nieheim)는 로마 교황이 수장인 ‘사도 교회’와 그리스도가 머리인 ‘보편 교회’는 다른 것이라 하고, 보편 교회 밖에 구원이 없는 것이지, 사도 교회 밖에 구원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꼬집었다. 이처럼 교황권의 실추를 배경으로 하여 교회론이 가장 우선적인 쟁점으로 부각되었으며, 다른 모든 교리 원칙들은 교회론에 종속된 것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교황의 무오성을 논한 책에서 오캄은 당시의 논의의 쟁점을 네 가지로 제시하였으니, 즉, 하나됨(one), 성스러움(holy), 보편적임(catholic), 사도적임(apostolic)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 쟁점을 축으로 당시의 교회론 논쟁을 따라가 보도록 하자.

교회의 단일성
교회는 하나라는 당연해 보이는 주장은 근거가 흔들리게 되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배경들이 있다.
①교황권의 분열: 로마와 아비뇽의 분열로 시작된 교황들의 대립은 14세기에서 15세기에 이르는 기간동안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한 몸에 두 머리가 달린 모습이더니, 한 몸에 머리 셋이 되어 요하킴이 말한 우스운 삼위일체 교회의 꼴을 연출하였다. 그 후엔 두 몸에 두 머리를 단 형상, 한 머리에 몸이 두 개인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이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신학적 노력이 집중되었고, 공의회가 분열을 해결하는 유력한 수단으로 대두된다. 공의회주의자들은 교황보다는 공의회에 우선권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도덕적 통합을 주장하는 한편, 일차적으로 교회의 머리로서 그리스도를 놓고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이차적인 자리에 교황을 놓는 교회의 통합을 제시하였다.
②후스파의 분열: 후스는 자신의 교회를 로마의 교회로 규정하지 않고 ‘예정받은 자들의 모임’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교황이 있는 물리적 교회와 그리스도의 신부인 성스러운 교회를 구분하였으며, 일시적으로 교회에서 축출되더라도 예정받은 자들은 진정한 교회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외적인 가입으로 ‘교회 안에 있는 것’(in the church)과 진정한 택함을 통해 '교회의 일부가 되는 것'(of the church)은 다르다는 것이다. 후스파에서는, 인간들로 구성된 집단이 교황을 뽑을 권리는 없으며 오직 신만이 지도자를 정한다는 극단적인 주장도 제기되었다.
③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 동서교회의 화합이 서방 교회의 문제의 근본적인 치유책이 된다는 것은 반복되어 제기되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에게 함락되었고 일치의 여망은 공허한 안타까움과 미련으로 남았다. 그러한 중에도 통합의 노력은 그리스 교부들의 문헌이 번역 소개되는 성과를 낳았는데, 트라베사리(Ambrose Travesari)의 활동이 돋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방 신학자들에게 동방교회는 ‘그리스의 우상숭배’이며 이단으로 인식될 뿐이었고 상투적인 반론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신학적 다양성과 더불어 이러한 분열들의 존재로 인해, 하나의 참된 신앙을 위해서 교회의 통일성의 성격과 자리를 교회론적으로 확립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하나됨은 신앙의 통일성과, 하나의 신앙에 봉사하는 선한 도덕들의 의도와 확인의 통일성을 기반으로 한다고 주장되었다. 단일성(unity)은 다수성을 배제하지만 통일성(union)은 다수성을 포용한다. 교회의 통합은 다성음적인 화음으로, 다양성 속의 하나(multipliciter una)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통일성을 이룩하는 방식을 놓고, 교황주의자와 공의회주의자들의 대립이 존재하였다. 교황주의자들은 오직 베드로의 중개를 통한 권위만이 인정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베드로 안의 교회의 일치를 떠나서는 어떠한 은총도 죄의 용서도 존재치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공의회주의자들은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을 관리자(dispensator)로서 인정하였지 주인(dominus)으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에 따르면 교회의 통합은 교황에 의존하거나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 하에 열리는 공의회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쟁의 와중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이 등장하였으며, 이들은 교회론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다. ⑴중도 우파: 교회를 세속적 정치체로 파악하는 입장으로, 이들에 따르면 교회는 지상에 가시적으로 나타난 신의 왕국이다. 그리스도는 왕인 동시에 사제이기 때문에 교황은 세속적인 동시에 영적인 왕이다. 그러나 이들은 교황의 왕권을 세속에 대한 우선적 권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지 세속에 대한 직접적 통치로서 이해하지는 않았다. ⑵우파: 이들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위가 교황에 집중된다고 보았다. 모든 세속적 일들을 쥐락펴락하는 직접적인 통치권을 주장하였다. 왕권과 사제적 통치를 동시에 지닌 멜기세덱이 그들의 이상이었다. ⑶좌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언명에 기초한 입장이다. 베드로는 교회의 신도들을 다스리는 영적 권위만을 받았지 왕에 대한 정치적 권위는 지니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⑷중도 좌파: 교회와 국가는 모두 신으로부터 나왔지만 서로에게는 소속 관계가 없다. 이것은 계시와 자연이라는 이원 구조를 전제한다. 교회와 국가는 각각 영적 세계와 세속 세계를 다스리지만, 위계적 평등(hierarchical equality) 속에서 영적, 계시적 영역이 자연, 세속의 영역에 대해 우월성을 지닌다.

성스러운 교회
교회의 난맥상으로 인해 교회의 성스러움에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후스와 같은 비판자들에 직면하여 교회는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 오류일 리가 없다”는 논리로 교회의 성스러움을 변호하였다. 그러나 당시 교회의 타락상은 많은 이들의 걱정을 불러일으켜, “양치기가 영혼을 잡아먹는 늑대로 변한 것은 아닌가?”라는 반문을 받는가 하면 “도둑놈들의 소굴”이라는 베르나르의 장탄식이 시대적인 공감을 얻는 판국이었다. 개혁은 많은 이들의 공통된 지향이었다. 14,15세기의 ‘성스러움의 추구’는, 개인적인 청정함(sanctity)의 추구와 교회의 성스러움의 본성과 위치에 대한 탐구와 관련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도적 청빈에 관한 논쟁이 진행되었다. 이것은 원래 프란체스코 수도회 내부의 논쟁이었지만, 수도회의 분열이 교황과의 관계 문제로 번지면서 교회론적인 차원의 문제가 되었다. 요한 22세는 영성파를 정치적으로 공격하면서, 아울러 그들의 청빈 개념은 그리스도나 사도와 연결되지 않는다고 공격하였다. 영성파 프란체스코주의자들은 교황의 입장을 예수의 청빈에 대한 왜곡이라고 반발하였다. 그들은 극단적 청빈이라는 완전한 순결이 교회의 완전성을 위하여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청빈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근간일 뿐 아니라 교회 자체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데 대해 교황 측은 청빈 개념의 애매함을 지적하면서 권위적 완전성은 재산소유 여부에 관계없이 가능하다고 논박하였다. 교회의 무소유를 주장한 후스를 예로 들며 그 위험성을 말하였다.
이러한 양 입장 사이에, 재산의 소유는 성스러움과 양립불가능한 게 아니라는 가톨릭적 중도(catholic middle way)의 입장이 나타난다. 그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를 칭찬하며, 재산과 성스러움 사이의 좋은 예로 제시하였다. 콘스탄티누스의 세속적 토지와 재물은 악의 산물이지만 좋은 의도로 교회에 기증된 것이며 그것이 교회의 순수성에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중용 노선은 후스나 위클리프같은 순수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교황이 충실한 관리자로서 역할을 하기만 한다면 교회는 성스러울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교회가 성스러운 것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성스럽기 때문이 아니다. 교회 안에는 더러운 것도, 죄인들도 존재한다. 교회가 성스러운 것은 성직이 수행되고 성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스러움에 대한 논의는 성사의 객관적 효력을 이야기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반도나투스적인 논의로 귀결된다.
도나투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위클리프와 후스의 관계에 대해 잠시 언급하도록 하겠다. 흔히 후스는 위클리프 신학의 표절로 평가된다. 그러나 성사론에 있어서만은 후스는 위클리프와 다른 입장을 취한다. 위클리프는 타락한 사제들의 성사를 부정하였다. 그러나 후스는 타락한 사제라도 성사의 효력은 인정한다는 점에서 도나투스주의에서 벗어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따른 셈이다. 그러나 그러한 후스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서 벗어난 지점이 있으니, 그것은 중세 교회의 커다란 딜레마였던 성직 매매를 비난하고, 그것을 이단으로 규정한 점에서였다. 성직 매매는 신학자들을 당혹케 하는 주제여서, 부정한 사제의 성사의 효력을 입증하기 위해서 신학자들은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따라서 교회 권위의 기초는 성직자들의 신성함이라고 주장될 수 없었다. 성직자들의 문제를 인정한 채 교회의 성스러움은 다음과 같이 주장되어졌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찌들고 구겨졌다고 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숭배로부터 그의 배우자인 교회는 그 형태에 있어서 보편적이고, 성스럽고, 순결하다고 불릴 수 있다.

보편적 일치
쿠사의 니콜라스의 저작 『보편적 일치』(Catholic Concordance)는, 교회의 존속은 ‘일치’에 달려 있으며 그래야만 교회가 보편적이라고 불릴 수 있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다. 일치는 당시 사람들의 공통된 여망이었던 바, 이것을 공의회를 중심으로 추진하는 사람들과 교황을 중심으로 추진하는 사람들 사이의 논쟁이 교회론의 한 부분을 이룬다.
①공의회주의자들은 교회의 보편성이 공의회를 통해 표현된다고 주장하였다. 공의회는 성령의 도움과 계시를 통하여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사도신경의 권위에 의한 것으로, 신앙의 사안에 있어 만장일치의 결정만큼 권위를 지니는 것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잘못을 역대 교황들을 열거하고, 심지어는 이단성을 지닌 교황도 있음을 지적하면서 공의회를 통해 그러한 잘못을 제어해야 한다고 하였다. 교회가 교황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황이 교회를 위해 존재하므로 언제나 보편 교회를 위한 결정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잘못했을 때 사도 바울이 그에 반대했던 것처럼, 공의회는 베드로의 후예들에 반대할 수 있다.
②교황주의자들은 역사적으로 공의회가 제구실을 해오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그러한 무용성으로 인해 공의회 개념 자체가 역사적 근거를 갖지 못한다. 더구나 공의회는 교황이 소집하는 것인데, 교황에 의해 소집된 모임이 교황을 선출하고 탄핵하고 제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교황의 결정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쪽으로 발달하여, 교황무오설의 전조가 되었다.
가장 논쟁이 되었던 부분은 교황이 이단의 잘못을 저지를 때 교회법으로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는데, 이에 대한 해답에 따라 15세기 교회론은 세 무리로 나누어진다. ⑴교황은 이단일지라도 공의회의 결정에 의해 개혁되고 판결받고 정죄될 수 없다는 쪽 ⑵교황이 이단인 경우에만 한하여 그러한 정죄가 가능하다는 쪽 ⑶교황에 대한 공의회의 권위를 확대하여 보편 교회의 신앙과  조건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사안을 다루어야 한다는 쪽 ⑷이들 세 무리 이외에 교황에 대한 다른 해석이 존재하였다. 그것은 종말론적인 관점으로, 신약에 예언된, 종말 전에 나타나는 “불법자, 곧 멸망의 자식”이 당시의 교황을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사도적 복종을 옹호하며
권위가 실추 될 때, 복종을 요구하는 논리가 성립된다. 사도적 복종은, 교회가 사도와 예언자의 기반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교회에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 복종을 둘러싸고 역시 수많은 이견들이 존재하였다. 바젤 공의회에서 후스의 복종을 요구했을 때만 해도, 후스는 상급자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도 절대 복종한다는 개념에 반대하고 사도적 복종은 성서의 사도의 말씀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맞섰다.
사도성(apostolicity)의 조건은, 사도에 의해 설립되었을 것, 사도에 의해 세계로 확대되었을 것, 사도에 의해 통치되고 다스려질 것의 세 가지였다. 누가 적법한 사도의 계승자인지에 대 논란이 있긴 했지만 사도는 교황이라는 보편적 일치가 이루어졌고, 사도적 복종은 절대충성의 원리로 발전한다. (사도 개념이 교회를 위해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기에, 복음서에 따라 예수의 부활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 막달라 마리아가 사도중의 사도로 칭송받았다. 한편 수도원은 중세 이단의 용어인 사도적 삶을 자신들의 생활에 적용하여 영적 갱신을 추구하였다.)
사도의 논리에서 주목받은 인물은 베드로였다. 베드로는 사도들 중에서도 독점적으로 치리의 권력을 부여받은 이로, 그의 치리는 교회 전체로 확대되어 적용되었다. 그리하여 베드로로부터 받은 권위만이 교회 행정과 성사 집행을 가능케 한다고 주장되었다. 한편 교황주의에 반대한 사람들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사도들 중에서 베드로의 권위가 유일한 것이 아니며 교회의 합의가 권위를 지닌다고 주장하였다. 베드로가 사도들 중 으뜸이라도 그 혼자에 권력이 위임된 것을 아니며, 회중의 일원으로서 권력을 누린다고 하였다. 베드로에 관련해 논의된 또 한가지는 로마라는 지역과 교회의 관련성이다. 분열로 인해 베드로와 로마의 결속은 깨어진 것처럼 보였다. 보편교회와 로마 교구교회는 개념적으로 분리되었으며, 관습적인 이유에서 로마교회는 사도교회라는 명칭을 얻었다.
이 시기 저작에서 흔히 등장하는 것이 옛 교회(ancient church)와 현재의 교회의 대조이다. 현재의 교회에 대한 비난은 원시 교회로 복귀하자는 주장으로 연결되었다. 옛 교회에는 기독교인들이 복이 넘치고, 교회는 선행을 행하며, 사제들은 성인과 같았고, 삼척동자도 성서에 대해 잘 알았다고 상상되었다. 사도 시대는 완전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것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성서의 권위였다. 여기서 성서의 강조라는, 개혁 사상의 맹아가 출현한다. 오직 성서에 의존함으로써 원시 교회로 복귀할 수 있다는 사상이 생겨난 것이다. 반면에 ‘오직 성서만으로’라는 생각에 대한 반동으로, 전통의 중요성이 다시 운위되었다. 성서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안들이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교회의 전통에 의거해 성서로부터 유추하여 해결하든지 합리적인 관습에 의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서는 교회를 통해 이해될 수 있으며, 정경의 범위를 정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성서가 교회에 의존하는 측면이 있음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사도전승에 의해 해석되거나 관습화된 것을 강요함에 있어, 이 시기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 마리아에 대한 숭배와 성찬식 때 평신도들에게 성배를 주지 않는 문제였다. 특히 성찬식 논란은 심각한 것이었다. 성찬식 때 빵만 나누어먹고 포도주는 잔에 따라주지 않는 것은 성서에 나와있지 않을뿐더러 성서에 위배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점에 있어서 후스의 반발은 격렬한 것이었고, 그는 성만찬에서 성체와 성배가 모두 사용되어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 점에 있어 교회는 힘들여 변명을 해야 했다. 교회는 성사를 수정할 권리가 있으며, 이제 교회가 한 종류의 성만찬을 규정하였으므로 이전의 관습은 잘못된 것이라고 설명되었다. 어떤 이는 오히려 초기의 두 종류의 성만찬이 과도한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사의 간소화는 신심의 감소라는 시대 상황의 반영된 것이라고 인정하는 측도 있었다.

연표

1302 "Unam Sanctam" 발표
1309 교황청, 아비뇽으로 옮김
1345 위클리프, 옥스퍼드의 교수가 됨
1377 그레고리우스 11세, 교황청을 로마로 옮김. 위클리프, 이단 선고 받음.
1378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 아비뇽에 거주, 대분열 시작
1381 위클리프, 화체설에 반대함
1403 후스, 종교개혁 기도, 프라하 대학에서 쫓겨남
1411 프랑스, 상스 교회회의에서 아벨라르 이단으로 선포
1412 후스, 프라하에서 이단으로 선고됨
1414 론스탄크 공의회, 공의회주의 전성기
1415 대분열 종식. 공의회는 떡만의 성만찬을 채택. 존 후스 화형. 위클리프 이단으로 선언
1431 바젤 공의회
1453 터키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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