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배움/발제

펠리컨, <기독교 전통>, 3-1,2

by 방가房家 2023. 5. 11.

교회사가 야로슬라브 펠리컨의 5권짜리 대작 <<기독교 전통The Christian Tradition>> 제3권의 1, 2장을 요약한 내용. 1장은 7~8세기, 2장은 8~9세기의 서양 신학사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문외한이 보기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듯한 이 시기에서 대가는 사상적 단초가 마련되는 것을 보여준다. 문외한이 보기엔 고전을 똑같이 묵수하는 그저 그런 이야기들에서 이 대가는 다른 결을 드러내어 준다. 성찬, 교회론, 성모 등 중요한 주제들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체계와의 연속성이 유지되면서도 새로운 사상적 싹이 돋는 모습들을 흥미롭게 볼 수 있다.


Jaroslav Pelikan, <<The Christian Tradition 3: The Growth of Medieval Theology(600-1300)>>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9-105.


Ⅰ. 가톨릭 전통의 완전성

7,8 세기는 기독교가 보편 교회로서의 전체적인 일치(total unanimity)를 갖추어나간 시기였다. 그러나 만장일치는 창조적 소수의 결여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시기의 신학은 고대의 신학적 결과물들의 답습을 통해 이루어졌다. 흩어졌던 교부들의 성과물들을 정리하고 반복하고 전승하는 것이 신학자들의 작업이었고, 신학자들은 자신을 편집자(compiler)로 인식하였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신학, 그것은 당대의 물질적 조건에서 최선의 지적 노력이었는지도 모른다.


1. 신앙과 신조
① 몇몇 용어들
믿음과 관련된 당시의 어휘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믿음의 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 가톨릭 전통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믿음의 규칙’인데, 이것은 보통 교회에 의해 고백된 신조(creed)들과 동일시되었다. 믿음은 신조(이것은 'symbola'라는 용어로 지칭되기도 한다)들을 통해 규정된다. 예를 들어 8세기 선교문서는 기독교 개종자가 배워야 할 필수적인 내용으로 주기도문과 신조(symbol)를 말하고 있다. 한편 믿음(faith)은 완전히 볼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규정된다. 이러한 규정은 믿음이 믿음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내용(신과 인간의 관계)으로 말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교의(doctrine)는 믿음과 거의 비슷하게 사용되는데, 말하고 저술하는데 있어 동의되어야 하는 것으로 정의되었으며, 교의는 행위, 생활 등과 구분되는 의미로 정의되었다. 또 이 시기에는 철학적 견해를 뜻하던 단어 교의(dogma)가 기독교 교의와 동의어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② 보편적 세계에서 신학하기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뜻이며, 그것은 전체에 따름을 의미한다. 교부들의 저작을 인용해서 모으는 것이 당시의 올바른 신학 방법이었다. 당대의 대신학자 알퀸(Alcuin)은 자신의 신학 방법으로서 “교부들과의 관계에서의 ‘자기소거’(self-effacement)”를 주장하였다. 이 때 취합의 대상이 되는 권위있는 교부들의 목록은 대개 라틴 교부들이었다. 시프러스, 제롬, 레오 1세, 카시안 등이 찬양과 함께 즐겨 인용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교부들을 두루 섭렵하여 짜집기하는 식으로 신학을 한, 멀지 않은 세대의 신학자들도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권위의 목록”에 추가되어 교부들과 비슷한 권위를 누리게 된다는 점이다.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 베데(the Venerable Bede), 그리고 이시도르(Isidore of Seville) 등이 그러한 신학자들이다. 물론 가장 권위있었던 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는 권위라는 말이 모자랄 정도로 절대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어, 교의에 대해 논할 때는 그의 이름조차 거명되지 않은 채 너무나 당연하게 인용될 정도였다.
전수받은 전통은 정통성을 지닌 것이어서, 어떠한 종류의 신학적 새로움도 금지되었다. 심지어는 이단에 대한 정의 중 하나로 “신성한 교부들의 교의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새로운 용어를 고안하는데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③ 교의 중에서도 삼위일체의 신비와 그리스도 내에서의 신-인간의 위격 문제가 핵심을 이루었다. 삼위일체는 변함없는 시대의 화두였다. 9세기에는 일반적인 서약을 할 때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할 정도로 그 위력이 대단했다. 삼위일체를 논함에 있어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들이 바탕이 되었다. 이후 필리오케(Filioque)를 둘러싼 동서교회의 이견에도 서방 교회의 아우구스티누스 추종이 한 몫 하게 된다. 이 두 쟁점, 삼위일체와 기독론은 8,9세기의 논쟁에서 다시 쟁점으로 부각된다.


2. 믿음, 소망, 사랑
① 예수 따르기
그리스도를 본받기,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 따르기라는 주제가 등장한 것은 기독교와 이교도들의 만남에서 비롯하였다. [선교가 신학을 형성하는 사례. 타자와의 만남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한다] 이교 부족들을 선교하면서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이 무엇인가를 규정짓게 되었고, 이에 따라 예수의 모델을 구체화함과 동시에 이교의 종교적 실천들을 규제하게 된다. (그 시기 고해성사 모음집에는 주문, 조점(鳥占), 새소리나 재채기에 의한 점, 혜성을 전조로 삼기 등의 사례들이 실려 있다.) 이러한 흐름에서 교의적 정통과 도덕적 준수가 결합되었다. 십계명뿐만 아니라 예수의 복음도 율법으로서 이해되었다. 이러한 율법화 경향에 의해 구원에 대한 이해에서 강조점이 바뀌게 되었다.

② 은총론
도덕적 실천 외에도 구원을 정의하는데 은총이 강조되었다. 여기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이 전제로 수용되었다. 자연(성품?, nature)과 은총의 구분, 은총과 원죄의 관계에 대한 논의, 그리고 이에 관련한 자유의지의 문제 등이 계속 영향력을 미쳤다. (은총에 대한 강조는 종교 개혁 때의 “오직 믿음으로”를 상기시키는 “오직 은총으로”라는 생각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로마서를 인용하며 의롭게됨이 성사의 효력 없이 은총으로만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 일데폰수스(Ildefonsus)의 글은, 후대에 종교개혁가의 사상과의 유사성 때문에 그의 저술에서 삭제되기도 한다.)
은총은 말씀과 성사라는 두 가지 도구를 통해서 실현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우선 은총은 말씀을 통해 전달된다. 신학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역할을 가진 이로서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선교 사업과 관련이 있다. 선교문헌에서 예수는 악을 버리고 회개하고 율법을 지키도록 설교하는 자로서 묘사된다.
한편 은총의 도구로서 성사에 대한 해석이 발달한 것은 이 시기의 중요한 교의적 발전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도나투스 논쟁에서 주장된 성사의 객관적 효능은 성사에 대한 기본적 논리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주로 침례(baptism)에 관련된 것이고 성찬식(Eucharist)이나 장립식(ordination)에 관한 적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성사 이론의 빈 구석은 중세의 논쟁을 통해서 메워졌다. 성사 이론의 적용은 침례, 성찬식, 고해성사에 그치지 않고 다른 성사들이나 성사 비스므리한 의례들에도 점차 소급되었다. (예컨대 축귀의례에 사용되는 십자가의 효능, 기름부음을 통한 병자의 치료)
⑴침례는 그리스도 스스로가 집전한 의례로 하늘나라와 영생으로 가는 길로 인식되었다. (도나투스 논쟁의 결과로 이단에게 받은 침례를 받은 경우에도 객관적 효능이 인정되었지만, 특이한 것은 실수로 예식 중에 삼위일체 중 하나가 결여되면 효능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침례의 중요도는 그에 따른 특별한 기적, 이득, 다양한 혜택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표현되었다. ⑵아우구스티누스는 주로 침례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초기 중세(7,8세기)만해도 침례가 중심적인 성사였다. 그러나 9세기 들어 성찬식이 중심적 의례로 부상하고, 아우구스티누스 체계를 넘어선 설명이 요구되었다. ⑶유럽이 기독교화되고 영아 세례가 일반화된 시점에서 예전의 침례가 가졌던 정화적 기능은 의미가 감소될 수밖에 없었다. 점차 ‘제이의 침례’로서 고해성사가 강조되었고 성사로서의 성격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서도 전체 성사 체계 내에서의 개념적 설명틀이 요구되었다. ⑷망자에 대한 미사는 새로운 신학적 성찰을 요구하였다. 즉 천국과 지옥의 중간 세계의 상정이 불가피해졌는데, 이러한 생각은 연옥 교리의 단초를 마련하였다. 이 문제는 성인들의 영혼의 상태라는 문제와 겹쳐 제기되어,  영혼들이 속죄하는 공간으로 연옥을 규정하는, 사후세계에 대한 새로운 도식화에 이르게 된다.


3. 영감과 문자
영감과 문자의 구분은 원래 바울의 논리인데,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기독교와 유대교를 대조시키는 논리로 사용되었다. 중세에도 이러한 논리가 계속 사용되어 ‘기독교=영적 해석/유대교=문자적 해석’이라는 도식을 통해 양 전통을 차별화하였다. 중세는 영적 해석을 옹호하였으며, 이에 따라 구약 성경에 대한 기독교적인 독해가 이루어졌다. 창세기의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는 구절의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으로 이해되었고, 십계명 중 안식일 계명은 유대인의 사바스 준수와는 다른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이사야의 “주님께서 용사처럼 나서시고”는 예수의 재림으로 해석되었으며, 다니엘의 네 왕국에 대한 예언은 그리스의 왕국이라는 다섯 번째 왕국을 예비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구약 성서는 상징(figure)으로, 신약은 실재(reality)로 이해되었고 때로는 구약은 실재의 그림자로 이해되기도 했다. 구약의 모든 것들, 심지어는 이름과 지명들도 영적인 상징으로 이루어졌다고(예를 들어 여호수아와 예수) 해석되었다. 중세에는 성서의 역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신비적, 영적 의미가 강조되었다. 성서의 기자는 자신의 지식으로 성서를 저술한 것이 아니라 ‘우월한 영감’이 증거하심을 받은 것이라 신앙되었다. 다시 말해 성서의 진정한 저자는 성령이고 성령이 저자나 예언자로 하여금 받아쓰게 하였다는 것이다. [중세판 ‘성서영감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대판 영감설과는 완전히 반대의 결과]
유대교-기독교 논쟁에서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유대교의 특수주의와 기독교의 보편주의를 대조하는 것이다. 이 시기 기독교 보편주의 관념은 기독교 세계의 확장과 관련된다. 유럽의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와 더불어 전세계에 복음이 전해진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이렇게 확보된 세계성은 유대교에 비해 기독교를 우월한 것으로 보는 시각을 마련해 주었다.
몇 번의 공의회를 통해서 교회의 전승(신조들)은 성서와 동일한 권위를 갖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처럼 교회의 전통과 성서가 완벽한 일치된 상태를 보이는 것이 7,8세기 가톨릭 전통의 완전성의 특성이다.


4. 신의 도시
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 저작에서 나오는 ‘도시’ 개념, 성서에 나오는 ‘왕국’ 개념(물론 이 개념에는 종말론적인 의미도 있지만 이 시기에는 중간시대적인 의미로 이해되었다)을 통해 이해되었다. 교회는 신의 예언의 성취로 받아들여져, “내가 나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것을 마신”다는 예수의 약속은 하늘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지금의 교회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되었다. 교회는 예수와 거의 동일시되어, 같은 본성을 지닌 것으로 언급되는가 하면, 이브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왔듯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왔다고 이야기되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말한 세계의 지배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가톨릭 교회를 통해서 성취되었으며,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을 이끌어 와야 한다”는 예수의 예언은 당시 가톨릭교회가 전세계인들에게 예수를 믿을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성취되었다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교회에 대한 권위는 그리스도가 교회 제도의 창시자이며, 그의 정통성이 베드로에게 수여되어 지금의 교회에 전수되고 있다는 주장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베드로 사도 전승에 대한 주장은 영국 교회의 부활절 날짜 논쟁에서 로마 교회쪽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제기되었다. ‘베드로=반석’(petra=Peter)이라는 전거 하에.)


Ⅱ. 아우구스티누스의 종합을 넘어서

8세기말에서 9세기말에 이르는 시기는 가톨릭 전통서 받아들여 왔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종합의 몇몇 측면들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종합은 다시 해석되어야 하고 심지어는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이 점증하면서, 논쟁(controversy), 탐구(research), 신학적 성찰(reflection)이라는 중세 신학의 대표적인 세 활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대체로 이 시기는 신학적인 안정기라고 평가되며, 여기에는 샤를마뉴 대제에 의한 정치적 안정이 배경이 된다.

1. 교의에 대한 재고찰
① 신양자설(新養子說: Felix, Elipandus)
중세기 스페인은 여러 특이한 신학 사유들의 배경이 되었으니,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불온한 상상력의 땅이라 할만했다. 그러한 가장 큰 이유는 스페인에서 행해진 독특한 전례 때문이었다. 전례의 독특성은 다른 형태의 신학 사유를 촉발하였으니, 펠릭스와 엘리판두스의 양자설은 그 한 사례가 된다.
그들은 복음서에서 고통 받고 죽는 이를 신의 아들(the Son of God)이 아니라 인자(the Son of man)라는 명칭으로 부른다는 데 주목하였다. 단순히 예수를 신이 아들이라고 한다면 예수의 인성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본성에 의해서(by nature)가 아니라 입양(by adoption)에 의해 자격을 얻었다는 논의를 기독론에 도입한다. 그들에게 예수는 신의 아들인 동시에 인간의 아들이어야 했다. 만약 예수가 다윗의 아들로서 인성을 지닌다면, 그가 신의 아들이라는 것은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양자채용에 의한 것이라는 의미에서이다. 그들의 용법에서 신이 인간의 모습을 취했다는 것(assumption)은 채택(adoption)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엘리판두스는 예수를 모세와 마찬가지 원리에서 신의 아들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반대자들이 보기에 그들의 주장은 속성의 교류 측면에서 오류를 범하였다. 네스토리우스 이단과 마찬가지로, 양자설은 속성의 교류를 진정한 변환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한 속성 부여로 이해한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하느님이 고통받고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할 때, 그것을 ‘인간은 죽고, 하느님은 그를 올려주었다’고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각각의 속성들은 신-인간이라는 ‘하나의 위격’에 속한다. 양자론자들의 실수는 아들됨(sonship)을 위격의 속성으로 놓지 않고 본성의 속성으로 놓은 데 있다고 공격받았다. 결국 양자론자들은 794년 프랑크푸르트 종교회의에서 정죄받는다.

② 3벌식 신론(trine deity: Gottshalk, Ratramnus)
고트샬크(Gottshalk of Orbais)는 삼위일체를 세 명의 신격, 혹은 세 성령 등의 용어를 써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벌 신격(trine diety)이란, 삼위일체의 각 위격이 각자 신격과 신성을 지닌다는 의미이다. 이에 따르면 성육신은 삼위일체 중 두 번째 신격(성자)만이 인간의 본성을 취한 것으로 설명된다. 신의 활동은 삼위일체를 이루는 세 신격들의 협동작업에 의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수태고지는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없이 높은 분(성자)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주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의 주장은 853년 쇠종(Soissons)의 종교회의에서 정죄받는다.

③ 반대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고트샬크의 주장은 아리우스주의에 가깝고, 펠릭스와 엘리판두스의 주장은 네스토리우스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이들 논쟁이 전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엘리판두스의 경우, “양자되신 이의 고통”이라는 대목이 포함되어 있는 스페인 지역의 성찬식 기도문이 중요한 전거로 인용되며, 마찬가지 방식으로 예수의 인성을 말하는 모사라베 전례(Mozarabic Rite)들도 근거가 된다. 고트샬크의 경우에도, ‘삼벌’(trine)이라는 구절이 포함된 찬송가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된다.

2. 기도 규정
위의 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8,9세기의 논쟁은 전례를 둘러싸고 벌어진다. 지역 특유의 기도문과 찬송가로부터 다른 신학적 견해가 도출되자 교회는 로마 교구의 용법에 근거해 보편적인 기도의 규칙(rule of prayer)을 제정한다.
①성모 숭배의 시작
성모에 대한 교리는 8,9세기 서방 교회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신의 어머니(Theotokos)라는 명칭에서 시작된 논쟁에서, 기도 규정을 비롯한 전례 자료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마리아는 일단 찬송가와 기도문에서 기도의 대상으로서 등장한다. 그리고 미사에서 예수와 함께 예배의 대상으로 나타났으며, 이에 따른 그녀에 대한 다양한 찬양 문구, 호칭들이 나타났다. 아울러 마리아를 구약에 소급하는 예형론적 해석도 이루어졌다. (이사야11:1의 ‘줄기’(virga)가 성모(virgo)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
이 시기에는 성모 교리들의 단초들이 선보인다. ⑴신과 인간 사이 구원의 중개자(mediatrix)로서 성모가 등장한다. 그녀를 통해 세계가 구원받는다는 찬사가 등장하였으며, ‘복된’(blessed)이라는 칭호가 그러한 역할과 관련되어 부여되었다. 다만 그녀는 원죄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는 아니었다. 이 점과 관련해 라드베르투스는 원죄를 지닌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할 때는 특별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하였으며, 이는 12,13세기에 형성되는 무염시태(immaculate conception)의 선구가 되는 논의이다. ⑵마리아의 죽음에 대한 논의. 성서적으로는 근거가 없는 이 부분에 대해, 전례 전통과 승천 기념일이 근거가 되어 논의가 시작된다. ⑶예수를 낳는 과정에 관한 논의. 이 쟁점에 대해서는 라드베르투스(Radbertus)와 라트람누스(Ratramnus)가 불꽃 튀는 논쟁을 벌인다. “낳기 전에도 성모요, 낳을 때도 성모며, 낳은 후에도 성모라”라는 원칙의 해석을 놓고, 라트람누스는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던 반면에 라드베르투스는 신성을 강조하였다. 라트람누스는 처녀로서의 잉태에 기적이 존재하는 것이지, 출산 과정 자체가 기이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이해는 예수의 진정한 인간성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라드베르투스는 출산 과정에 잉태보다 중요한 기적이 있었음을 주장한다. [석가의 본생담에서 나타나는 사유의 방향을 상기시킨다] 원죄의 결과로 이브에게 출산의 고통이 주어졌기 때문에, 예수의 탄생에는 그러한 저주가 사라지는 고통 없는 분만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②성찬식 논쟁
예수 출산 과정에 대한 두 학자의 의견 대립은 성찬식 해석에 대한 논쟁에서 더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성찬식에 있어 주요 쟁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성찬식에서 성체의 성격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찬식에서의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몸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라드베르투스는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몸, 마리아에서 태어나고 십자가에 못박히고 무덤에 들어간 몸과, 성찬식에서 나타나는 몸이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나의 몸”이라는 예수 말씀이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는 것이다.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다름 아닌 진실한 실체로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성찬식에서의 ‘상징’(figure)과 ‘실체’(reality)는 사실상 동일하다. 반면 라트람누스는 상징과 실체를 다른 방식으로 정의하여 적용한다. 실체는 경험적 실체이며 명백한 사실의 나타남을 의미하고, 상징은 어떤 종류의 베일 아래 의도를 감춘 일종의 그늘짐을 의미한다. 성찬식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분명 ‘상징’으로서이다. 성찬식은 신비이기 때문에 외적으로는 인간 감각에 다른 것으로 보이는 것이 내적으로는 신자의 정신에 다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성만찬의 몸과 교회의 몸이 동일한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응답하였다. 그것은 비슷함의 관계이지 역사적 의미에서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를 뜻할 수도, 성찬식을 뜻할 수도, 마리아에서 태어난 몸을 뜻할 수도 있지만, 그것들은 다양한 의미론적인 층위들일 뿐이다.
라트람누스와 라드베르투스의 성찬식 이론에서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부분은, 라드베르투스가 성찬식을 희생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그는 예수의 희생은 매일 반복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매일 죄가 범해지기에 매일 죄에 대한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은 성찬식의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 구절은 ‘우리가 매일 그리스도를 먹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매일 희생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성찬식에 대한 희생론적 설명은 서구 교회에서 중요한 교리로 자리잡게 된다. 몇몇 개념과 용어들, 성사 전체의 맥락에서의 설명 등의 문제가 남아있었고, 그것들은 11세기 경에 정리된다. 물론 몇몇 문제들은 19세기까지 논쟁이 되며, 라트람누스의 글은 16세기 종교개혁기의 논쟁에 영향을 끼친다.

3. 은총의 주권
아우구스티누스의 종합 중에서 가장 극렬한 신학적 논쟁이 이루어진 부분이 예정론에 관한 내용이다. 성찬식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이 너무 모호해서 골치를 썩였던 반면에. 예정론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너무 명백해서 골치를 썩였다. 학자들은 은총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옹호하는 입장이었지만 징벌의 예정이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혼란스러워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의 주권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그의 주장에서 “하느님은 징벌받도록 예정된 자들을 저주하기 위하여, 그리고 은총받도록 예정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활동하신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쪽은 고트샬크를 비롯해 라트람투스. 세르바투스(Servatus Lupus) 진영이고, 이에 반대하는 쪽은 힌크마르를 위시하여 라바누스(Rabanus Maurus), 플로루스(Florus of Lyons) 등의 학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들의 논쟁은 자유의지(free will), 예정론(predestination), 구속(redemption)의 세 키워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고트샬크는 이중예정설의 입장이었다. 즉 구원받기로 된 무리와, 징벌받기로 된 무리가 미리 정해져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가 그러한 입장을 취한 것은, 신의 불가변성, 절대성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신이 악한 이에 대한 징벌을 예정해 놓지 않고 진행한다면 신이 변화될 수 있다는 얘기가 되며 그것은 신성모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은 예정되어 있다. (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반론이 제기되었다. 가장 결정적인 반론은 성사적 측면에서 제기되었다. 즉 징벌받을 이가 예정되어 있다면 원죄를 씻어내는 침례의 은총은 효력이 없다는 얘기가 되지 않는가하는 반론이 그것이다)
이에 반해 힌크마르는 악한 것들이 징벌받도록 예정되어 있었다는 주장을 부정하였다. 그는  예정(predestination)과 예지(foreknowledge)를 구분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에 따르면 신은 악한 자들이 징벌받을 것을 미리 알고 있으며, 선한 자들이 구원받을 것을 미리 아는 동시에 예정하였다. 그의 이 주장을 다음과 같이 교묘하게 바꾸어서 진술한다. 죄지을 사람들이 예정되는 것이 아니라 처벌받을 죄가 예정된다. 예정의 의미에는 벌받을 방향에 대한 예정(predestination to punishment)과 벌받을 사람에 대한 예정(predestination of punishment)이 있을 수 있는데, 힌크마르는 양자는 혼동되어서는 안되며 악한 자에 대한 예정은 전자의 의미라고 주장하였다.

4. 이성의 요구
신학 체계에 변증법적 원칙(이것은 전통의 부정을 함축할 수 있는 방법이다)을 적용한 학자가 9세기에 나타났으니, 그가 에리게나(John Scotus Erigena)이다.
① 성만찬에 대한 견해에서, 그는 제단에 있는 예수의 살과 피는 진짜 살과 피가 아니며, 단지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기억일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이러한 견해에는,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것들 가운데 비물질적이고 비가시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세계 이해에 근거한다. 즉 성만찬의 가시적인 빵과 포도주는 예수에의 영적인 참여에 대한 예형과 비유라는 것이다.
② 그에게 예정은 신이 자신의 활동, ‘제일 원인’ 혹은 만물의 원형을 미리 아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신은 전능하기에 행위를 준비하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동일하다. 즉, 신에게 의지함(will)과 되어짐(being)은 별개가 아니고 동일하다. 그는 징벌에 예정에 관해서 단호하게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신의 예지(그에게 예지는 예정과 동의어이다)는 존재하는 것에만 해당한다. 그런데 악과 죄는 비존재(nothing)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예지나 예정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③ 그는 중세 처음으로 기독교 교리(특히 하느님과 세계의 관계를 설명하는데)를 형성하는데 이성이 필요함을 신학적으로 논증한 첫 인물이다. 그는 “현명한 신자들의 이성의 힘과 신의 은총의 협력”에 의해서 진정한 이해의 길이 결린다고 보았다. 이성과 계시의 조화, 이것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 이단과 죄악이 발생한다고 그는 보았다.
④ 그의 신학 작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신론이다. 그는 신학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부정적, 양부음술적(apophatic) 신학으로 신의 본성이나 실체는 존재하는 그 어떤 것과도 동일하지 않다는 신학이다. 다른 하나는 긍정적, 응답반복적(cataphatic) 신학으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신의 속성으로 기술하는 신학이다. 그는 전자의 신학을 윗길로 쳤는데, 이성과 계시가 전제된 부정의 방법을 통해 신은 어떤 종류의 본질도 어떤 종류의 선함도 어니요, 언표되거나 이해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라는 인식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초월성의 강조는 신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신은 무(nothing)일뿐 아니라 모든 것(everything)이기도 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리하여 그의 신학에는 절대적 초월(transcendence)과 절대적 내재(immanence)가 긴장을 이루고 있다. (내재에 대한 주장에는 두 가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하나는 범신론적인 문제 제기(신이 내재한다면, 만물이 다 신이냐? 창조물의 다양성은 어떻게 된 것이냐?), 다른 하나는 구원론적인 문제제기. 그리고 만물회복론의 혐의)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