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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발제

빅터 터너, <기독교문화의 성상과 순례>, 4장

by 방가房家 2023. 5. 10.

빅터 터너는 종교사에 정통한 인류학자이다. 순례를 종합적으로 다룬 그의 저서 <<기독교 문화의 성상과 순례: 인류학적 관점Image and Pilgrimage in Christian Culture: Anthropological Perspectives>>에는 중요한 종교사 사례들이 다루어진다. 4장에서는 성모 숭배를 둘러싼 긴 기독교사가 정리된다. 성모의 위치를 둘러싼 신학적 논쟁, 성상 문제 등 복잡한 주제들과 성모 숭배의 발전 양상까지, 한 장에서 다루는 것이 욕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방대한 내용이다.


Victor Turner & Edith Turner, <<Image and Pilgrimage in Christian Culture: Anthropological Perspective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8), ch. 4.

4. Iconophily and Iconoclasm in Marian Pilgrimage

1. 성상파괴/성상숭배
성모 숭배는 유럽사의 주요 신학적 정치적 변화와 맞물려있다. 우선 성상혐오(iconophobia)와 성상숭배(iconophily)사이의 논쟁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1538년 런던에서 헨리8세의 대주교 대리 크롬웰이 래티머(Latimer) 주교의 부추김을 받아 성모상을 불태운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완전한 성상파괴를 염두에 두었던 크롬웰과는 달리 래티머는 미묘한 입장 차이를 보인다. 그의 태도는 교회사적으로 한참 거슬러 올라가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의된 내용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성스러운 상들과 십자가는 하느님의 교회에 제대로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그들에 바쳐지는 경의는 “단지 그들의 원형(prototype)을 위한 것”이며, 그들은 “경배(veneration)의 대상이지 숭배(adoration)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동방의 레오 황제와 같은 성상파괴주의자들에 대한 (서방) 교회의 첫 번째 반응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재미있는 것은 상상파괴 논쟁의 역사에서 아이콘(icon=성상?)이라는 말의 의미가 굴절되었다는 것. 아이콘은 원래 단순히 이미지, 특히 환조의 이미지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점차 서방 가톨릭에서 허용된 삼차원 이미지와는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동방교회에서 사용되는 평면 그림이나 모자이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그리스와 러시아어에서 “icon"은 조상(彫像)의 사용과 이미지의 완전한 부재 사이의 타협이다. 그러나 아이콘은, 서방에서 조상이 사용된 것에 비해, 동방에서 더 중요하게 활용되었다. 동방에서는 아이콘 앞에 향을 피웠으며 행렬 중에 그것에 입맞춤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관습적 상징이 아니라 자연주의적(naturalistic) 초상, 재현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래티머가 전적인 성상파괴주의자들과 달랐던 점은 그가 이미지 자체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남용에 반대했다는 점이다. 로마 가톨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의 주장은 대체로 니케아 공의회의 논조를 따르고 있다. 성스러운 이미지는 사실적 재현이 아니라, 집단 표상으로서 기능하는데 알맞은  거의 문장(紋章)같은, 정형화된 성격을 지녀야 한다. 그것은 자연 상징(natural symbols)이 아니라 관습적인 기호(conventional signs)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가 반대하는 이미지의 남용, 자연 상징은 구체적으로 성스러운 이미지가 특정한(particular) 것으로 되어가는 현상을 지칭하는 것이다. 성상이 인간을 표상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점차 인격화된 봉헌의 대상이 되어간다. 주제단에 모셔진 것보다는 부속예배당, 벽감에 모셔진 성상들에, 특히 집에 개인적으로 모셔진 성상들은 인격화가 되어갔고, 이들 물질적 대상들은 영적 진리와 과정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현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찬찬히 뜯어보기로 하자. 잘 알고 있듯이, 모든 상징은 기표와 기의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기표란 감각적으로 지각가능한 개념의 운반체를 말하는거구. 인격화 과정은 이 기표와 기의의 결합 양상의 변화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성모상은 갈릴리에 살았던 한 여성을 나타낼 뿐만아니라 하늘에 거하다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때때로 나타나 신과의 중재를 서주는 성스러운 인물을 나타낸다. 그런데 민중적 경향에 따라서 성모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특정한 상과 결합된 것으로 인식되고 이제 상은 단지 힘의 상징에 머물지 않는다. 기표와 신학적 기의의 연결은 느슨해진다. 상징의 외적 형태는 기표의 규범적(normative) 혹은 이데올로기적 축보다는 정감적(orectic) 혹은 감정적, 의지적 축과 더 긴밀히 연결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현상을 하나 짚고 넘어가자. 그것은 기표의 변화에 의해 야기된 기표-기의의 관계변화이다. 성물은 종종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탈색에 의해(블랙 마리아의 경우. 촛불에 오래 그을려서, 혹은 은의 산화에 의해), 돌발적인 파손에 의해, 혹은 특정한 지방이나 시대의 복장이 입혀져서 특색있는 물리적 외관을 갖추게 된다. 상징 운반체의 모양이 기이하면 기이할수록, 그리고 그 외관에 많은 관심이 집중될수록, 상징이 취했던 원래의 의미, 기표와는 별도로 기표 자체가 생명을 얻는 현상이 발생한다.
신학적 원칙으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원래 의도된 기의는, 공동체의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유래한 새로운 기의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대체된다. 원래의 기의는 전면적으로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의와 혼합된다든지, 의미의 모자이크로서  공존한다. 그런데 여기서 ‘새롭다’고 함은 엄밀히 말해 역사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고 고대의 사상과 믿음의 부활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원래의, 새로운, 고대의 기의들의 복합인 의미론적 장의 창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의 감수성과 ‘민속’을 정화하려는 정통의 충돌. 상상파괴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의미를 정화하기 위해 운반체를 소거시키는 가장 단순무식한 입장이다. 그러나 그들은 가시적이고 실체를 지닌 기의없이 종교 체계를 고안해야 한다는 어려움, 혹은 비인격적이고 중립적이고 추상적 형태로 기표를 생성시켜야 한다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2.
기표와 기의의 관계라는 이론적 관점을 지니고 이제 중세라는 시대를 들여다보자. 요한 후이징하, 에밀 말르와 같은 대가들은, 중세에는 종교적 사고가 이미지로 맺혀지는 경향이 지배적이라고 서술한다. 후이징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다수의 순진한 종교적 의식에게 신앙의 사안에 대한 지적 증거는 필요가 없었다. 단지 눈으로 볼 수 있는 성스러운 것의 상(像)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진실을 확립하는데 충분했다. 그림과 조각상을 보는 것과 실재에서의 믿음 사이에는 아무런 의심도 개입하지 않았다”.
중세적 신앙이 시각적으로 받아들인 것을 실재로 곧바로 연결시켰다는 분석에 대해서, 터너는 그 단순성을 지적한다. 그것은 단순한 동일시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근원으로부터 나온 지시 대상들로 이루어진, 전적으로 의미론적 장이며 다성성의 영역이다.
상징에는 세 의미의 층이 있다. ⑴우선 교회에서 제시하는 신학적 교의의 체졔가 있다. 주의할 것은 문맹인 민중들도 이 신학 체계를 체득하고 있다는 점이다. 터너에 따르면, 많이 돌아다녀보니까 어떤 지역의 시골 촌부라도 놀라울 정도로 신학적 교리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갖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주석적 의미(exegetical meaning)라고 명명한다. ⑵사람들이 상징에 대해 말하는 것과는 별도로, 상징에 관련해서 실천하는 바, 그리고 그러한 행위의 사회적 구조적 맥락이 존재한다. 또한 이와 관련해서 ‘상징의 사회사’를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상징이 관계를 맺어온 사회의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정형화된 기억을 말한다. 이상의 것들이 작동하는 의미(operating mraning)를 이룬다. ⑶상징은 또한 위상적 의미(positional meaning)를 갖는다. 이것은 상징이 상징 체계 내에서 다른 상징들과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의미이다. 예컨대 단독으로 있는 성모상과 성모자상에서 예수와 함께 등장한 성모의 의미의 차이를 말할 수 있다. (성모나 성인 상의 숫자와 위치 배열, 순례지와 연관된 축제의 날 수 등은 기독교 교의와 이전의 전통들의 영향을 동시에 받아 형성되기도 한다).
후이징하의 말대로, 중세의 가을에는 민중적 신앙에 의해 성인에 관계된 초현실적(ultra-realistic) 개념이 발달한다. 그런데 그는 이 개념을 성모자에게는 소급시키지 않는다. 성모자에 대한 숭배는 여전히 심원했다는 것이다. 터너는 일단 이 점을 수긍한다. 성모자에 대한 숭배는 심원했고 신학적 의미와 이미지의 균형도 잘 맞았다. 하지만 그건 그 때 얘기지. 그는 중세 성기(High Middle Ages)에는 그랬지만 중세 말기(late Middle Ages)에는 달랐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역동적인 현상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고.
(터너는 다음 두가지 사항에서 후이징하에 불만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후이징가가 중세의 신앙을 서술할 때 성인과 성모자를 대척점에 놓았다는 것. 이미지 위주의 민중적 신앙은 성인에게 바쳐졌고, 정통적인 신앙은 (마리아를 포함한) 성모자에게 바쳐졌다는 것. 이 도식에서 성인숭배는 천상과 지상을 매개해주는 중간영역으로 설정된다. 마리아는 천상의 영역에 귀속되고. 예를 들어 후이징하는 성 요셉이 천상적 존재인 성모에 대비되어 아저씨같고 비천하게, 때로는 익살스럽게 묘사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성모와 성자에 동일한 분석을 하고자하는 터너에게는 이 점이 걸렸을 터.
둘째, 후이징하의 중세 성인숭배 서술에 있어서의 부정적인 태도. 그는 중세의 성인숭배의 양상이 건정한 신앙으로부터의 탈선임을 말하고 있다. 그는 성인숭배가 이미지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그 신앙의 기반을 약화시켰으며, 따라서 힘을 잃은 성인숭배는 이후 반종교개혁 당시의 대대적인 배척작업에 대해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이에 반해 터너는 성인숭배에서 나타난 이미지에 대한 고착을 병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지 않으며 그것이 현대에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3.
순례지 중에서 성모 사원은 가장 잘 나가는 곳이다. 백여개의 대표적인 순례지 중에서 성모의 것은 58개에 이른다. 성모 순례지는 종교개혁 이전만 해도 적어도 천 곳을 넘으며 1900년대 이후에도 새로이 생겨나는 형편이다. 그런데 숱한 성모 사원(Marian shrine)들 중에서 순례 중심지가 되는 것은 소수이고, 순례중심지가 되기 위해서는 이상(異像, vision)이 필요하다. 이상은, 성모가 양치기와 같은 미천한 사람에게 나타나 성당을 지으라고 말하고 성상이 숨겨진 곳을 가르쳐주는 패턴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기독교사에 항상 나타나는 패턴으로, 다른 전통으로부터 근원을 찾을 것도 없이 성서에 나오는 수태고지에서 가브리엘 천사와 성모의 역할이 전도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성모가 신의 소식을 듣는 사람으로부터 신의 메신저가 된 것이다.
종교사에서 이러한 성모와 같은 유형, 즉 최상급의 여성 초자연적 존재가 나타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을 재미있는 일이다. 줄루족은 천상의 공주 놈쿠불와나가 사춘기 소녀에게 나타난다고 믿는다. 인도 민간 문학에서 불교의 자비의 여신 관음의 등장은 빈번히 이야기되고 있다. 19세기에는 라마 크리슈나가 대모(大母) 칼리 혹은 두르가의 이상(異像)을 생생하게 묘사한 바 있다. 융의 이론을 갖다 붙이자면, 아니마(anima)는 대지모와 다른 여성 형태로 표현되어 충고의 역할을 수행한다. 아니마는, 꿈이나 예술적 심상에 등장해 남자에게 너무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활동에만 빠지지 말도록 경고하면서, 집단 무의식을 표상한다. 무서운 여성 원형은 내적, 외적 성격의 힘이 복수를 하리라는 징조이며, 만약 그가 집단 무의식과의 접촉을 상실한다면 그는 이성, 객관성, 기술의 메마른 사막에서 자신을 파괴할 것이라는 점을 지시한다.
성모의 이상은 분명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경제학에서의 마리아의 역할에 대한 배운자들의 이론과 무지랭이의 실천과 경험이라는, 두 근원 사이의 긴장에서 발생한다. 이상은 반대되는 문화들과 그 문화의 실재에 대한 규정들 사이의 주요한 압력의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이미 병든 사람들에 의해 극도의 긴장 아래 행해지는, 합성과 치료의 과정이다.



4. 성모의 역사1 -신이 될 수 없었던 여자
마리아 숭배의 역사는 로마 카타콤에 그려진 2세기경의 프레스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4세기 후반에 이르면 마리아 숭배와 이전 전통과의 혼합이 문제되기 시작한다. 콜리리디안(Collyridians), 필로마리아파(Philomarianites) 등의 그 예가 되는데, 그들이 행하는 마리아에게 케이크를 바치는 희생 봉납, 그들이 지닌 여사제들은 지중해에 널리 퍼져있던 여신 전통들(티아맛, 하토르, 누트, 이시스, 메허트, 데메테르, 아그벨레, 디니메네, 헤카테, 아르테미스, 마리)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이 외에도 대지모신의 관념은 인도 유럽 문화에 널리 퍼져있는 것이었기에(알-우짜, 이슈타르, 다누, 브리짓, 프레야, 논, 모이라 등), 이들 기존 관념과 닿아있는 민중적 신앙을 신학적으로 길들이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사실 선교 현장에서 여신 전통과 마리아 숭배의 상호 관계는 빈번하게 맺어진다. 선교사들은 기존 전통에서 구조적으로 마리아와 비슷한 위치에 있던 여신에 대한 개념, 그에 대한 신앙을 마리아의 것으로 전이시키려는 노력을 많이 해왔다. 예컨대 멕시코의 과달루페의 성모는 아즈텍 여신 토난친에 대한 희생이 바쳐지던 테페약 언덕에 위치한다. 토난친은 처녀인 채로 다른 신을 낳았으며 기우(祈雨)의 대상이었다. 아즈텍 출신 개종자에게 성모와 물의 관련성(홍수 때 성모가 구해준다는 식으로)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것은 기존의 여신 개념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여신이어서는 안된다. 마리아가 강조된 나머지 성육신의 교리가 훼손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신이라면 그 아들인 예수는 인성을 지닐 수 없게 된다. 그가 인성과 신성의 결합이라는 교리도 삐걱거리게 된다. 이러한 신학적인 난점들을 피해가면서도 마리아에 대한 숭배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그녀의 위치를 규정하기. 그것이 에베소 공의회에서 머리를 쥐어짜면서 하고자 했던 일이다.
그렇다면 에베소 공의회의 복잡한 신학적 논쟁 속에서 이러한 점들이 어떻게 다루어지는지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아시다시피 에베소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판결내리기 위한 공의회였다. 그런데 네스토리우스를 탄핵하는 논쟁에서 마리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는 핵심적인 쟁점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예수가 인간으로 태어났고 점차 신성을 갖추어 나갔다고 주장하는 네스토리우스의 입장에서, 마리아는 평범한 아낙에 불과하다. 그는 한 인간의 어머니일 뿐이요,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kos)이지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는 아니었다. 마리아가 신성을 지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만약 마리아가 신의 어머니라고 불린다면 그녀는 여신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는 마리아의 여신화가 몰고 올 신학적 혼란을 논의의 바탕에 깔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에베소측은 성육신론을 내세우며 ‘하느님의 어머니’로서의 마리아를 주장한다. 마리아는 육이 되신 말씀의 어머니이므로 신이 아니고서도 신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본성상 인간이고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신의 어머니이기에 마리아는 인간 중에서도 매우 독특한 존재이며 인류 구원 사역에서 일익을 담당할 수 있다. 그녀는 경배를 받는 대상이지만 숭배나 흠숭지례(worship, latria)의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상경지례(hyperdulia)는 성인에게 바쳐지는 공경지례(dulia)와 같은 종류이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한 단계 높은 것이다. 그녀는 단독으로 경배받지 않으며 항상 예수와의 관계성 안에서 존재한다. 그녀의 위대성은 신이라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중의 하나’, 그중에서도 아들잃은 슬픔에 우는 미약한 여인이면서도 그토록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는데 있다. 즉 성육신의 통로이자 도구로 쓰임받아 그것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는데 있다.
어쨋든 에베소측은 정치적으로 승리하였고, 그들의 마리아 구하기는 성공하였다.



5. 성모의 역사2
이렇게 자리를 잡은 마리아는 이후에 개념적 뒷받침을 받아 순례 대상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확보해 나가게 된다.
①마리아를 순례에 결부시킨 가장 중요한 교의는 성모승천(the Assumption of the Virgin)이다. 이에 따르면 마리아는 죽음 후에 몸과 영혼이 모두 하늘나라로 올라갔다고 한다. 8월 15일이 승천절로 기념된다. 마리아의 승천은 예수에 있어서의 부활에 해당하는 의미를 지닌다. 다른 인간들은 최후의 심판 이후에나 얻을 수 있는 하늘에서의 육체와 영혼의 재결합을, 마리아는 예수와 함께 성취하였다. 그럼으로써 다른 인간들의 구원을 돌봐줄 수 있는 신분을 획득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민간적 논리의 차원에서 볼 때, 승천은 마리아가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형태를 띄고서 출몰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성인들의 육체는 태워졌거나 사람들이 나눠가져서 흩어져 있는 반면에, 마리아의 육체는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그녀가 나타나고 싶을 때면 온전한 육체를 지니고서 나타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②가나의 혼인 잔치. 이 때 마리아는 결과적으로 예수를 시켜 술을 만들어오는 기적을 일으키게 한다. 사람들은 이 성서 기사를, 마리아가 떼를 쓰면 예수가 들어준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마리아는 특별한 부탁을 드리기에 적합한 존재가 된다.
③마리아가 속죄자 예수와 더불어 인류의 공동속죄자라는 견해. 이 경우 마리아는 인류를 죄에 빠뜨린 이브와 구조적으로 대립하는 존재로 설정되어, 이브에 의해 저질러진 죄를 무효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 견해는 2세기의 성 이레니우스에 의해 2세기부터 제시되었다. 순교자 쥬스틴은 이 견해를 발달시켜 마리아의 순결함과 이브의 타락을 대조한다. 그리스도가 아담을 속죄하는 역할을 하였듯이 마리아는 이브에 대해서 동일한 역할을 맡는다. 마리아는 교회를 상징하고, 이브는 교회 밖의 인류를 상징한다. 이브가 육체적인 임신으로 인류를 생산했다면 마리아는 정신적 임신으로 인간을 교회 내에서 재탄생시킨다. 방금의 진술에는 여성이 인류를 담는 그릇, 용기(容器)라는 은유가 숨겨져 있다. 뉴만의 용어를 빌려서 이를 표현해보면, 이브가 모이라, 논, 운명의 여신(Fates), 직녀(Weavers) 등에서 나타나는 고대적 반복과 연결된다면, 마리아는 입문의 변환의 상태와 연결된다. 이브가 원초적(elementary) 인물이라면 마리아는 변환적(transformative) 인물이다.
이상의 개념적 작업에 의해서 마리아는 순례에 있어서 아픈 이의 치유자로서 자리매김한다. 아픈 이들이 성모를 찾아가 탄원하면 그녀는 신, 특히 그녀의 아들에게 중재해서 이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신학적 용어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mediator)로 지칭되는 반면에 성모, 천사, 성자들은 중재자(intercessor)로 지칭된다.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갖추었기 때문에 신과 인간의 근원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중보가 가능하다. 반면에 성모, 성인, 천사의 중재는 인간 무리 중에서 좀 잘난 놈이 대표자격으로 호소하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중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재가 필요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성인의 통공(communion)이라는 신학 개념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이를 이해해보도록 하자.



6. 성인의 통공, 그리고 성모
역사적으로 경배라는 신앙적 태도는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에서 비롯된다. 1세기에 순교는 선택의 표시로 간주되었고 순교자들은 신의 면전에 직접 나아간다고 간주되었다. 사람들은 순교자들의 고통의 유여(有餘)한 성격을 말하게 되었다. 즉 성인들은 무지무지한 고통과 죽음으로써 은총과 축복을 받았는데, 이것은 자신의 구원을 이루고도 남아도는 것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끌어다 쓸 수 있는 양이라는 것이다. 신자들은 남아도는 축복을 자신에게 주기를 간구하며 순교자들의 순교일-천상에서의 생일-을 기념하였다. 사도시대 이후에는 천사들에 대한 대중적 신앙으로 인해 중재라는 개념이 강화된다.
그리고 성모 숭배는 이러한 중재 신앙의 본질적 표현으로 간주되면서 동급 최강의 자리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성인들과는 달리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혼의 순교를 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생각과 관련있는 것이 '통고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the Feast of the Seven Sorrows of Mary, 9월 15일)이다. 이후 성모의 생애의 마디들을 기념하는 날들이 대거 추가됨에 따라, 성모의 특별한 위치는 더욱 확고한 것이 된다.
정리해보면, 성인의 통공이라는 체제에서 성모는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고, 그것이 그녀가 가톨릭 순례에서 근본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원인이 된다. 그녀는 첫 번째로 축복받은 이이고 그래서 신과의 중재에 있어 으뜸가는 효험을 발휘한다. 그녀는 신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신과 인간을 묶는 연결지점이다. 그녀는 두 번째 이브로서 살아있는 인류의 영적인 어머니이다. 다른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덕스러운 삶의 모델일 뿐 아니라 교회의 살아 기능하는 일원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출현할 수 있었다.
이러한 내용들이 성모 상징체계에 대한 규범적인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규범적인 축은 역사를 통해 계속 유지된다. 반면에 성모의 정감적인 축, 즉 문화적으로 규정된 강점과 동기화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큰 진폭을 보인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갈 것은, 규범적 축과 정감적 축의 양상이 역사종교와 부족 종교에 있어 차이가 난다는 것. 부족 종교에서는 정감적 의미가 고도의 정합성을 유지하는데 반해 규범적 축은 심하게 변화한다. 역사종교에는 신학자 계급의 형성, 정치적 문화적 중심화로 인해 상징의 규범적 정합성이 지속된다.
정감적인 축의 사례들을 잠시 살펴보고 지나가자. 사람들은 마리아를 완벽하게 여성적인 경이로움으로 여기기도 한다. 대자대비하고, 부드럽고, 약간은 변덕스러우면서, 고통에 약하고, 무한히 모성적이고, 이해심이 깊으며, 세속의 죄에 대해 벌하기보다는 슬퍼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인류학 이론으로 설명된다. 즉, 부계 사회에 부계는 권위와 재산 물림이라는 엄격한 법적 라인을 구축하는 반면에 모계는 성소를 제공하면서 정감적이고 부드러운 측면을 이룬다.
한편 아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나타나는 어미의 공격성이 성모에서 나타나는 경우도 많이 있다. 강도를 만났을 때 찾는 성모가 그러한 경우이다. 재미있는 것은 뱃사람들이 섬기는 성모(Mary, Star of the Sea)의 경우이다. 여기에는 어휘의 굴곡의 역사가 첨부되어 있다. 성 제롬이 불가타를 번역할 때 히브리어 mâr는 라틴어 stilla(물방울)로 번역되었으며 이것이 stellar(별)로 잘못 읽혀졌다. 한편 마리아의 히브리 표기는 mâryâm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mâr+yâm(바다)으로, 즉 ‘바다의 물방울’로 생각했으며, 이것이 나중에 ‘바다의 별(star of the sea)’이 되었다. 어떤 전승에서는 마리아를 mâri(여주인)+yâm(바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어쨋든 이것이 바다와는 아무 성서적 관련성을 지니지 않은 마리아가, 뱃사람들의 수호신이 된 경위이다.


7. 성모 순례지의 여러 유형들
성모마리아 숭배의 역사적 발달을 따라서, 우리는 순례지의 유형을 다섯 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팔레스타인과 로마에 있는 원형적인(prototypical) 유형 ②이슬람 이후에 유럽에 생긴 복제 성소들 ③중세 중기과 말기의 유럽 성소들 ④종교개혁 시기에 파괴된 유럽 성소들을 대체하는 식민지의 성소들 ⑤산업 혁명이후 20시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출현에 의한 성소. 이들은 종말론적 성격을 지닌다.
①팔레스타인에 있는 원형적 순례지로는 다음이 유명하다: 나자렛에 있는 수태고지 교회(the Church of Annunciation), 이곳은 1964년 발표 성지 Top100 명단에서 1등을 먹은 곳이다. 시온 산에 있는 성모 잠든 교회(the Church of the Dormition of the Virgin), 성모가 죽었다고 전해지는 곳. 조사팟 계곡의 성모 교회, 이견(에베소가 기라는)이 있긴 하지만 성모의 승천이 일어났다고 알려진 곳. 팔레스타인의 초기 순례자들은 고위성직자나 신학자들이었다. 예수가 태어난 동굴을 보았다고 기록한 오리게네스가 대표적인 예.
로마에는 350년 경 세워진 산타 마리아 마기오르(Santa Maria Maggiore)가 최초이다. 여기의 마리아는 로마시의 수호자였고, 이는 이후 유럽 여러 성소에서 마리아를 도시나 국가의 수호자로 모시는데 원형이 되었다. 이곳의 창건 설화에서, 마리아는 여름에 눈을 보여주는 기적을 행한다. 그래서 얻게된 이름이 백설의 성모(Our Lady of the Snows). 백설의 성모는 과달루페의 성모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큰 위협이 닥칠 때 소방수로 활약한다. 역병이 창궐할 때, 로마인들은 성모의 그림을 들고 성 베드로 성당까지 행진을 하였다. 로마의 순례지에는 약간 애매한 성격이 있다. 순례지는 보통 구조화된 중심에서 떨어진 외진 곳에 존재하는 리미널한 공간이다. 그런데 로마에는 도시 한복판에 순례지가 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너는 로마는 황제의 권력에 대해 근본적으로 리미널한 공간이었다고 설명한다. 교회의 구조는 리미널하다면서.

②이슬람의 성립 이후 팔레스타인의 순례지가 봉쇄당하면서, 유럽에는 이것을 복제하여 재현하려는 움직임이 발달하게 된다. 이러한 복제 성지에서 중요한 것은 팔레스타인과의 연결성을 확보하는 것인데, 이는 주로 산지에서 조달된 성물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스페인의 필라의 성모(the Virgin of Pilar) 사원이 있다. 창건 설화에 따르면 성 야고보(그는 스페인의 수호성인이다)가 스페인에 처음 선교 왔을 때 당시 생존해 있던 성모가 나타나 벽옥 기둥와 성상을 내어주며 교회를 건립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예는 몬드세랏(Montserrat)의 성모가 있는데 그녀의 성상은 바르셀로나 주변의 첩첩산중에서 발견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는 예루살렘에서 만들어져 이집트를 경유하여 바르셀로나로 온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민중적 믿음에 따라 설명하자면, 유럽인들이 성소에 갈 수 없게 된다면, 성소가 혹은 그것의 물질적 증표가 유럽에 온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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