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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문화

은혜의 결혼식

by 방가房家 2007. 5. 24.
이것은 개신교 결혼식이 막 보급되기 시작할 때의 모습이다. 의식 절차에 있어서는 전통 혼인을 그대로 따르는데, 전통 혼인 이후에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덧붙여져 있다. 이 기록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개신교인은 중매라는 전통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개신교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의식이 초기부터 확고했다는 점이다. 현재의 교인끼리의 결혼이라는 의식이 상당히 오래된 것임을 볼 수 있다.


M. F. Mrs. Scranton, "Grace's Wedding," Korean Repository 5 (Aug., 1898): 295-297.


은혜의 결혼식


모든 한국의 젊은 남녀들의 인생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은 결혼이다. 그러나 결혼에 관련된 결정에 대해 그들은 거의 아무런 권한을 갖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은 자기 자녀들의 중매 상대를 교회 사람들 중에서 찾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그렇게 되어야 할 일이며 희망적인 징조이기도 하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의 결혼에서 보이는 반대할만한 점들은 버리고, 대수롭지 않은, 하지만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점들은 지키고 있다.


얼마 전 상동 달성 예배당(지금의 상동교회)에서 기독교식 결혼이 있었는데, 이 결혼식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신부는 65 Km 떨어진 시골에서 올라왔다. 점잖고 매력적이며 아리따운 아가씨로, 양반 계층 양갓집 규수라 훌륭한 며느릿감이었다. 그러나 이모들이나 중매쟁이들이 제시한 여러 청년들은 아무도 우리 은혜의 부모의 기준에 맞지 않았다.

4년쯤 전에 그들은 신실하고 착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은혜가 17살로 나이가 찼을 때, 나라의 풍습을 따르는 것이 바람직해 보였기 때문에, 그들은 기독교인만이 그녀의 신랑감이 될 수 있으며 시어머니도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긍정적인 제안을 내걸었다. 가족들이 사는 동네와 인근 마을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서울에 올라와 딸에 알맞은 배우자를 물색했다.

하나뿐인 자식에게 적당한 좋은 사람을 찾는 것은 미국에서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시어머니까지 고려해서 물색하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평균 정도 된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하나 추천할 수 있었다. 두 어머니는 만나 아이들의 장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든 것들이 유망해 보였고, 어머니는 집에 빨리 가서 남편에게 청년을 만나보고 그 집안과 더 가까이 지내라고 하였다. 남편이 와서 보고는 신랑감에 만족한다는 판정을 내렸고, 그 직후 결혼 준비가 시작되었다. 첫째, 사주를 보냈다. 이것은 한문으로 배우자감이 태어난 연도, 달, 날을 쓴 종이이다. 이 문서는 붉은 비단에 담겨 녹색과 금색 줄과 술로 장식되었다. 신부도 약혼자에게 비슷한 것을 보냈는데, 이쪽에서 보내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교도 집안에서는 이 종이를 무당에게 보내어 결혼을 위한 길일을 결정하도록 한다.


은혜의 경우 결혼을 위한 준비가 상당히 화려했는데, 이것은 그녀가 서울에 가 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혼수 외에도 비단, 솜, 린넨 등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은혜 편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신부 복장을 짓는 ‘새로운 패션 감각’을 가진 재단사는 없었다. 오직 어머니와 이웃 친구들의 사랑스러운 손길들로 이 옷들을 바느질해서 만들었다. 자신들을 위해 그러했던 것처럼, 또 할머니와 증조할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마침내 집을 떠나 서울에 가는 날이 되었다. 은혜의 소지품들은 소 등위에 높이 쌓여서 이 불쌍한 짐승이 가분수로 보일 정도였다. 불확실한 곳에 놓을 수 없는 귀중품들은 신부와 함께 가마에 싣거나 동행하는 친구들의 등짐 안에 넣었다. 아버지는 굉장한 등산용 지팡이(Alpenstock) 같은 단장을 지니고 가마 옆에 자리했다. 그리고 기차가 출발했다.

서울까지 여행은 이틀이 걸렸다. 여행객들은 우선 달성궁(현재 한국은행 터)에 왔는데, 그것은 어머니가 아이를 나에게 넘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심부름꾼이 급히 장모될 분의 집에 가서 나와 살피고 인사하도록 알렸다. 우리는 얼굴이나 생김새, 심지어 혼수에서도 흠잡을 것이 없음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은혜가 항상 온순하고 복종적이라는 것은 나중에 드러날 일이다. 시어머니는 통상적인 예물들, 즉 은비녀 두 짝, 은가락지 두 짝, 연노랑 비단 저고리와 자줏빛 트리밍, 옅은 색의 다른 저고리들, 식에서 입을 붉은 비단 치마 등을 갖고 왔다.

독자들은 신랑이 신부를 보고 싶어 호기심을 가졌으리라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의 신랑 역시 그녀를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나는 한국의 청년들이 그러한 체통 없음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이 장면에서 그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은 수모였다. 이 여인이 하는 일은 신부의 화장실을 정돈하고, 또 한국 예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절하는 것을 익히게 하고 도와주는 것이다. 주모의 첫 번째 일은 작은 족집게를 들고 와서 이마에 난 잔 머리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관자놀이까지 머리를 내리는 것을 좋아하지만, 위에 난 머리는 이마를 평평하게 보이기 위해 제거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눈썹을 손질한다. 잔털을 제거하고, 대칭되는 반원 모양만 남겼다. 그 다음은 화장이 진행되었다. 우리 은혜의 예쁜 얼굴이 완전히 뒤덮여 회반죽처럼 하얗게 되었다. 주홍빛 작은 점들이 양쪽 뺨과 이마 중앙에 찍혔고, 같은 색으로 입술이 칠해졌다. 머리는 목덜미 뒤에 낮게 만들어졌는데, 이미 화려해서 무거워 보이는 머리 위에 예식을 위한 장식들이 더 얹혔다. 12인치가 넘는 은비녀로 전체를 고정시켰다. 비녀들 끝에는 한문으로 ‘장수’, ‘부귀’, ‘다산’ 등을 의미하는 말들이 적힌 보라색 비단 리본 장식들이 달려있었다.

머리 장식 후 은혜는 옷 위에 옷으로, 치마 위에 치마로 돌돌 싸여서 커다란 물통과 같은 모양이 되었다. 최종적으로 입힌 옷은 노란 저고리와 땅에 끌리는 붉은 치마였다. 작은 관이 머리 위에 올려졌고 손은 하얀 모슬린 조각으로 감싸졌다. 모인 친구들은 그녀를 보며 ‘정말 예쁘다’를 연발하였다. 우리 눈에는 모든 아름다움이 떠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거의 우리가 절에서 흔히 보던 밝은 색 그림처럼 되어 있었다. 우리가 알던 사랑스런 소녀라기보다는 조각상처럼 되어버렸다.

때가 되자 신랑이 불려나왔다. 그는 결혼식 날의 여느 신랑들처럼 관복을 입고 등장했다. 눈을 감은 신부는 네 번 절했다. 신랑은 두 번 절했다. 그러고 나서 이들 낯선 남녀는 예배당으로 걸어가서, 거기서 기독교식 예식을 거행했다. 피로연이 이어졌다.


이들 부부는 서울의 안락한 집에서 시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그들은 행복하게 살고 있으며, 상냥하고 순종적인 은혜는 시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들은 일요일 예배에 항상 출석한다. 다른 기독교인 가정도 한국에 등장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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