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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발제

Comaroff, "Of Revelation and Revolution" II-5,6

by 방가房家 2023. 5. 8.
5. 식민지 주체 옷입히기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을 가르쳐주는 것은, 당시 영국의 빅토리아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 그들이 소비하는 방식을 가르쳐주는 일과 관련된다. 19세기 말의 한 담론을 인용하면, “야만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필요와 욕구를 깨닫게 하여 건전한 취향으로 일깨우는데 있어, 선교는 우리 시장에서 긍정적이고 이득이 되는 힘이다.”[선교사들이 부르주아적인 삶의 양식을 전파했다는 저자들이 주장할 때에는, 그것이 기독교의 일부로서 통합되어 제시될 때도 있지만, 선교사들의 아비투스가 전달된 것일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들은 전자의 경우만 주장하지만, 자료에서 나타나는 것은 선교사들이 꼭 의식적인 행위주체로서 신학적인 완결성을 갖고서 영향을 미치지 않은 부분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된다.] 빅토리아조 기독교 문화의 특성은 일상의 영역까지 성화시키려는 것이어서, 청소, 옷입기, 집안 정리 등의 행위들이 종교적 의미와 연결되었다. 특히 5장에서 저자들은 ‘말쑥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서구적 의복의 소비와 연결시켜서 분석하고 있다.
 
선교사들은 흔히 아프리카인들의 몸을 ‘기름때가 낀’ 더러운 것으로 묘사하였으며, 이것은 질병의 관념과도 결부되었다. [깨끗함 관념이 한편으로는 종교적인 함의를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위생학과 연결되었다는 것은, 메리 더글러스에 의해서 잘 지적된 바가 있다. 그녀 책을 한글로 번역할 때 "purity"를 ‘순수’라고 해 놓은 번역자에게 화 있을진저.] 타자의 몸을 야만 상태의, 금수에 가까운 것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처음에는 아일랜드인, 그 다음에는 북미 원주민들에게 적용되었던 것으로, 이제는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였다. 아프리카 인들의 의복 문화는 거의 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묘사되었고, 기독교는 그 위에 입혀져야 할 하나의 의복처럼 생각되었다. 다음의 진술은 역설적으로 그러한 인식을 보여준다. “베추아나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살아야 할 삶으로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입어야 할 옷으로 보였다. 그것은 필요할 때 입거나 벗을 수 있는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츠와나인들의 전통의상을 묘사하는 데 매우 둔감했다. 츠와나 의상은 야생 동물 가죽으로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았다. 츠와나인들이 의상과 장신구에 관련된 정교한 상징체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선교사들은 그러한 것을 알아차리는 데 둔감했을까? [비슷한 질문이 다음 장에서도 제기될 수 있다.] 어쨌거나,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푸르게 염색된 옷을 입었으며, 이것은 붉은색 계통의 전통 의상과 대비되었다.
 
처음에 구호물자 비슷하게, 영국의 자선 사업을 통해서 츠와나인들에게 전달된 옷들은, 일종의 샘플 비슷한 묘한 역할을 한다. 그들에게 주어진 옷들은 수요를 창출해서 이후의 상업 진출에 도움을 주는 소비의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선교사들은 청교도 특유의 ‘검박함’을 옷에 대한 덕목으로 지니고 있는 사람들인데, 츠와나 사회에서 옷이 일으키는 작용은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선교사들이 강조한 것은 단정하고 깨끗하고 검소한 옷차림인데, 똑같은 복장이 츠와나 인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은 다른 의미에서였다. [“잘 차려입음”의 종교적 의미가 현재까지도 잘 유지되고 있는 교파로는 몰몬교를 들 수 있겠다.]
츠와나 인들에게 서구의 의상과 장신구는 외부적 힘의 기호로, 세크고아의 본질을 담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족장이 전쟁에 앞서 “하얀 린넨 옷”을 입었다는 사례에서 서구인의 옷이 의례적 복장으로 기능한 것을 볼 수 있다. 옷은 서구인에게 발언하는 하나의 언어가 되었다. 서구인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비친 츠와나인들의 옷차림, 불완전한 복장이나 전통과 혼합된 양식의 옷입기는, 사실 츠와나인들의 상징 조합이었다.
처음에 선교사들이 츠와나 인들에게 옷을 주었을 때, 그들의 복장은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다. 부유한 사람은 옷을 있는 대로 걸쳐 벌집 모양을 연출하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셔츠만, 어떤 이는 바지만, 어떤 이는 연미복의 제비 꼬리만, 모자만 입고 나오는 등 여러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처음 서양 옷을 대하는 이들의 ‘미숙함’을 나타내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이상한 옷입기는 시간이 흘러도 지속되었다. 츠와나 인들은 선교사들의 의도를 거스르는 방향으로 옷을 입었는데, 거기에는 세크고아의 힘을 획득하려는 의도도 들어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세크고와와 세츠와나의 방식을 혼합하여 옷입는 문화를 새로 창출하려는 노력이 들어있었다. 두 문화의 만남을 잘 보여주는 예가 호랑이 가죽(정확하게는 표범 가죽)으로 만든 양복이었다. 이 호랑이 양복이야말로 기독교의 힘을 세츠와나의 방식을 통해 포착하고자 한 노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결혼식 의례 복장에서 혼합의 힘이 나타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그림4 참조.]
세츠와나의 옷 문화를 경멸했던 선교사들도 주고받음을 통해서 그들의 옷 입기 방식에 영향을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단 그들은 서구의 유행에서는 뒤쳐진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점차 황야의 사도의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단정함과는 거리가 멀어지며, 수염과 더부룩함을 지닌, 바르트가 “아베 피에르 도상”이라고 부른 개척자적인 종교인 이미지를 수용한다. 더구나 그들은 원주민들이 선물한 의상들을 조금씩 입게 되며, 특히 원주민들이 토착 재료인 가죽으로 만든 양복을 선물 받아 즐겨 입는 모습도 보여준다.
 
19세기 후반 들어,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의복 소비는 이와 맞물려 진척되었다. 공장에 나간 노동자들은 카키색 복장들을 입었고, 그들의 임금은 가사일을 하는 여인들의 옷을 구매하는데 소비되었다. 서양인의 상점에는 빅토리아 풍의 각종 의류들이 팔리게 된다. 부유한 사람들은 서양 의상들을 구매하였고, 기독교 엘리트들도 양복을 갖추어 입었다. 결과적으로 두 계층의 의복이 비슷해졌다. 반면에 하층민들은 “이교의 복장”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츠와나 인들의 전통의 지속을 보여주는 것은 어깨 위에 두르는 담요 복장이다. 이것은 ‘민속적’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재료나 문양에서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여성 복장에서 전통적인 화폐 단위인 소에 필적할만한 문화적 생명력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한편 츠와나 스타일은 서양의 복식에 채용되면서 그 쪽 디자인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6. 주님의 가옥
 
선교사 맥켄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인은 이교의 풍습대로 살 수 없다.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영광스러운 집을 준비해 두었다고 믿는 아프리카인들은, 지상에서도 자신을 위해서 깨끗한 집을 짓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처럼 집에 대한 생각은 성서적 도상, 개신교의 종교적 이상, 그리고 당시 중산층 기독교인들의 사회적 관심과 혼재되어 있었다. 집의 문제는 가사 영역이라는 사회적 공간 분할과 성차에 따른 노동 분화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건축과 동시 사회경제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선교사들이 바라본 츠와나 사회의 전통적인 주거는 거의 부재한, ‘빈 땅’으로까지 묘사되었다. 카메론 선교사는 츠와나 촌락에 대한 묘사에서, “아프리카 마을은 유럽의 도시와는 매우 다르다. 어떤 사원도, 첨탑도, 하늘의 영광을 맞이하거나 축복을 위해 쓰일 공적인 건물도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부재’의 묘사 방식은 이사벨라 비숍이 서울에 대한 첫 인상을 묘사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 특히 종교적 건축의 부재에 주목한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It lacks every charm possessed by other cities. Antiques, it has no ruins, no libraries, no literatures, and lastly an indifference to religion without a parallel has left it without temples, while certain superstitions which still retain their hold have left it without a tomb!”] 다른 선교사들도 전통 촌락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그들은 전통 촌락의 구불구불한 모습에 대해 거의 병적인 혐오를 나타냈다. 이것은 성서에서 “그 길을 곧게 하리라”(누가3:4-5)라는 구절이 관련되기는 하지만, 그렇다 하거라도 정작 선교사 자신들의 고향 역시 구불구불하게 형성된 공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아이러니하다. 그들이 비교의 준거로 둔 것은 현실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이상화하였던 공간 구성(종교적이면서도 근대적인)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선교사들의 묘사가 다른 서구인 방문자들의 묘사와는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다른 방문자들이 츠와나 촌락과 주택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후한 평가를 한 반면에, 선교사들은 거의 짐승들의 주거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잘 몰랐기 때문이라고 설명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여기에는 선교사들이 갖고 있었던 금수에 대한 은유와, 깨끗함/부정 관념이 작용한 탓이라고 생각된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초기 기록에도 한국 주거 환경의 더러움(예를 들어 이와 벼룩에 대한 묘사), 냄새에 관한 내용들이 많이 등장한다. 또한 한 방에서 온 식구가 함께 자는, 구획되지 않은 공간 활용에 대해서도 비판적 언급이 많이 등장한다.]
선교사들은 둥글고 곧지 않은 전통 촌락과 가옥을 네모반듯한 자신들의 표준으로 바꾸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이 가장 의존한 방법은 모범을 보이는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집을 건축함으로써, 단정한 집의 모범을 보이고자 하였다. 그것은 황야 속의 문명의 핵이었고,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는 핵이었다. 그들이 자신의 집을 통해 보이고자 했던 것은 건축 양식 뿐이 아니었다. 그것은 집안의 공간 구획을 통해서 남녀의 공간, 공사의 공간, 가사 노동의 공간을 나누는 것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거기에다가 창을 내고, 안에는 서양 가구들과 각종 생활 용품들이 집안에 들어찼다. 빅토리아 중산층의 가정이 재현되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가치가 집적된 이 공간에 사람들을 초대해서 보여주는 것을 즐겼다. [집에 초대해서 서양 문물을 보이는 것은 개항기 때 선교사들도 많이 했던 행동이다.] 선교사들은 집을 건축하는 것을 넘어서, 아름다운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교회로 대표되는 공적인 공간을 갖춘 도시 사회의 건설이었다. 선교사들이 남긴 도시 계획 메모를 보면, 직선으로 뚫린 길이 중앙에 나 있고, 공공건물들과 선교사 사택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선교사들은 개입을 통해서 일상의 변화를 시도하기도 했는데, 똑딱 시계와, 나중에는 교회 종과 차임벨을 통해서 시간과 노동 관념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선교사들은 주거 환경에 자신들이 의도한 변화가 나타났다고 만족해하는 기록을 남겼고, 실제로도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 변화는 긴 시간을 두고, 그러면서도 균일하지 않게 진행되었다. 저자들은 윌러비가 19세기 말에 남긴 사진 기록들을 분석하면서, 이 변화의 양상들을 추적한다. 그 결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츠와나 주거의 변화는 츠와나 사회에 형성된 계급 구성과 긴밀하게 연관된다는 것이다. 최상층 사람들은 유럽식 형태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그래서 츠와나 촌락 가운데는 서양식 가옥이 점점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양식은 세츠와나와 서양식을 조합한 새로운 전통적 가옥들이다. 어떤 가옥에서는 전통적인 츠와나의 둥근 가옥이 정방형 집과 함께 배치되어 있다. 이것은 창고나 보조적인 침실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가옥에서는 전통적인 방식의 울타리를 하고 지붕에 이엉을 올렸다.

 

이후 시기에 전통적 양식과 서양 양식의 조합은 더 진행된다. 기독교인들은 전통적 양식을 유지하면서 발전시켰고, 이제는 더러움의 함의는 내포되지 않게 되었다. 아도브와 지붕 이엉은 전통 양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이것은 변방의 건축 양식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백인들 쪽에서도 츠와나 전통양식을 차용하는 움직임이 나타나 이른바 남아프리카 스타일이 생긴다. [저자들은 혼합적 양식의 교회당의 예로 로바체에 있는 성 마가 성공회당을 꼽는다.(아래 그림) 공교롭게도 한국에서 전통적 양식과의 혼합을 보여주는 가장 걸작으로 꼽히는 건축물도 강화도에 있는 성공회당이다. 그림2 참조]
그림 1) 강화도 온수리 성공회 성당
마지막으로 저자들은 츠와나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문화 논리가 영국 내의 내부의 타자들인 노동자와 빈민에 대한 것과 동일한 것임을 보여주면서, 변방과 중앙에서의 타자에 대한 논리가 상호 교호함을 분석한다. 타자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는, 그들을 교육하고 그들이 처한 환경을 개선함으로써 그들을 야만의 상태에서 구원하여 문명화된 시민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인들에 대해서 그러하듯이, 도시 빈민들에 대해서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도시 빈민들에 대해서 아프리카 인들에 적용되었던 것과 동일한 수사가 적용되었다. 그들은 “아프리카 야만인 처럼” 거리의 정처없는 떠돌이들이었다. 그러므로 집 없이 떠도는 이들은 “어느 미지의 대륙의 떠돌이 부족”만큼이나 알 수 없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도시의 정글 안 둥지에서 어두운 무리를 지어 살다고 표현되었다. 선교사들의 선교 보고서가 기술되고 읽혔던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여기에는 인종주의적인 삼단 논법이 깃들어 있다. “기독교 선교의 영향으로, 야만인들은 개선되어서 깨끗한 집을 짓고 가정의 삶을 배워서 영적인 안정과 경제적 보답을 얻을 것이다. 만약에 이들 흑인들이 문명의 사다리에 올라선다면, 영국의 백인 하층민들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츠와나 인들의 삶의 개선을 이야기하는 선교사들의 낙관적인 기술에는 이와 같은 온정주의 논리가 전제되어 있다.
그림 2) 야만의 복식을 발견하는 선교사의 시선.
그림 3) 1930년대 개신교 결혼식 모습. 하얀 소복에 면사포를 쓴 신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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