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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메모

석마를 탄 앨리스

by 방가房家 2023. 5. 2.
아래는 1905년에 대한제국을 방문해 수잔 손택의 후임으로 1년간 황실 ‘서양전례관’으로 일했던 독일 여인 크뢰거가 쓴 조선견문기이다. 1909년 독일에서 출판된 이 책이 논란이 된 것은 아래 내용 때문이다. 여기서 묘사된 앨리스의 행위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엘리스의 남편 롱위즈가 뉴욕타임즈를 통해 책 내용이 허위이고 크뢰벨은 거짓말쟁이라고 언플을 했다. 진위여부는 논란으로 남아있었지만, 최근에 코넬도서관에서 사진기자 월러드 스트레이트의 사진이 발간되면서 사실이 입증되었다. 철없는 여성의 해맑은 모습이 전해지는 사진이다. 문제가 되는 행위가 일어난 곳은 명성황후의 묘소(1919년 현재의 홍릉으로 옮겨졌지만, 1905년에는 청량리의 숭인원 자리였음)였다.

갑자기 뿌옇게 먼지가 일더니, 위세 당당하게 말을 탄 무리가 나타났다. 바로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 공주’와 그녀의 약혼자, 그리고 수행원들이었다. 그런데 이 순간을 기다려왔던 하객들은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붉은색의 긴 승마복에 짝 달라붙은 바지를 무릎까지 올라오는 반짝거리는 가죽 장화에 집어넣고, 오른손에는 말채찍을 들고있고, 심지어 입에는 시가를 물고 있는 미국 대통령 딸의 모습을 고위층 하객들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녀의 전혀 다른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다.
황후의 능 앞에서 행렬이 멈추자. 하객들이 모두 머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이윽고 나는 의전관으로서 황실의 고관들과 함께 나서서 이 ‘기병대의 모습을 한 딸’에게 환영 인사를 했다. 그녀는 우리의 환영 인사에 겨우 고개만 까닥이며 감사를 표했다. 예절에 맞는 그런 태도는 아니었다. 그녀의 관심은 오히려 무덤가에 세워져 있는 각종 수호 석상들이었다. 갑자기 그녀가 한 석상의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그녀 약혼자에게 눈짓하자, 그는 재빨리 카메라를 꺼내 들고는 렌즈의 초점을 맞추었다.
황실 가족의 묘소에서 보여준 그녀의 ‘얼굴 찌푸리게 한’ 행동에 우리는 모두 경악했다. 미국인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는 한 단면이었다.
엠마 크뢰벨, <<나는 어떻게 조선 황실에 오게 되었나?>>, 김영자 옮김 (민속원, 2015), 236-237.

월러드 스트레이트 <서울사진>(서울역사박물관, 2015),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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