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nard S. Cohn, "History and Anthropology: The State of Play," Comparative Studies in Society and History 22-2 (1980): 198-221. 파일: Cohn-History_Anthropology.pdf
버나드 콘의 글은 인류학과 역사학의 현황과 만남에 대해 이야기한다. 상황 판단이 예리하고, 무엇보다도 그가 제시해주는 앞날의 그림(그중 많은 것들은 이제는 실현된 것이지만)에서 공감이 가는 바가 크다.
그는 서두에서 인류학과 역사학이 인식론적 차원(the epistemological level)에서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공통의 과제를 역설한다.
역사학자와 인류학자는 “타자”(otherness)라는 공통 주제를 갖고 있다. 한 쪽 영역에서는 타자를 공간 내에서 구성하고 연구하고, 다른 영역에서는 시간 내에서 구성하고 연구한다. 두 영역 다 텍스트와 콘텍스트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둘 다 어느 시간과 공간에 뿌리박은 사람들의 행위의 의미를 다른 시공간의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둘 다 번역(translation) 행위와 관련된 지식의 형태이다. 연구자들이 전개하는 설명의 목표는 이해와 설명이지, 경제학이나 사회학처럼 형식적으로 더 갖추어진 사회과학의 목표인 사회 법칙의 확립과 예측이 아니다. 둘 다 문헌 형식으로 그 결과는 보고하는 것에 의존한다. 역사학자와 인류학자는 19세기 자연사 형태로 비교를 위한 개념틀을 발달시켜서 사회와 문화에 대한 일반화에 도달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둘 다 변화에 대한 연구를 중심 과제로 설정하고 있으나, 현상태(status quo)를 설명하는 것 이외의 설명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에는 성공적이지 못하다. 우리는 사회와 문화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변형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다분히 ‘타자’의 문제와 변화에 대한 설명을 강조한 설명이라 맘에 꼭 든다. 이후 저자는 인류학나라(anthropologyland)와 역사학나라(historyland)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다분히 풍자적인 글쓰기이다. 이 나라들에서 이루어지는 학자들의 관행과 행태를 세밀한 지점까지 신랄하게 꼬집는다. 이 풍자에는 깊이가 있다. 구체적인 이론적 흐름을 지적하면서, 그러한 흐름에 안주해서 교수 자리나 얻어보려는 지적인 태만들이 여지없이 비판된다. 나는 이 글의 부제인 "The State of Play"를 "노는 꼬락서니"로 번역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풍자와 학사 개관이 혼합된 글 막바지에서, 그는 “아래로부터의” 역사라는 최근의 역사학 흐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엘리트 위주의 역사에 비하면 지금까지 역사에서 배제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연구라는 측면에서 더 복합적인 역사를 구성하는 데 기여하는 연구이다. 역사적 관심과 인류학적 관심이 어느 정도 만나는 모습이 감지되는 흐름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아직 이 흐름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그것을 다루는 소절에 “똥구멍 역사학”(proctological history)이라는 제목을 달아놓았다. 그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민중계층의 역사를 다루면서도 엘리트들의 세계관 같은 것을 상정하였다는 점이다. 역사 작업을 블럭 만들어 쌓아올리기로 생각하는 나쁜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적인 방향은 표상, 문화를 중심으로 해서 서술하는 것이다. 그는 주제에 대한 탐구를 제한다. “명예, 권력, 권위, 교환, 행위 규범, 사회 분류체계, 시간과 공간의 구성, 의례 등”이 그 예들이다. 뒤르켐 학파의 노선을 계승한 제안이라고 보인다. 이 인류학자가 인류학과 역사학의 만남을 주장하면서 제시한 많은 내용들은, 지금 종교학에서 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담고 있다. 종교학이라는 게 역사와 인류학 사이에 낑겨있는 위치에 가깝다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 같다. 거의 30년이 다 되어가는 글이지만, 이 글의 지적은 여전히 예리하고, 지금의 작업에도 많은 것을 제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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