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자전설을 이야기한 것으로 유명한 홍대용의 <<의산문답>>은 조선 시대 실학자들의 과학적 지식이 얼마나 현대 과학에 접근한 것인지를 증명하는 책으로 읽히기 쉽다. 그러나 내가 읽으면서 흥미를 느꼈던 것은 어떻게 보면 그와는 다른 방식이었다. 우리의 상식과 같은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서술하는 방식에 있어서 다른 것에 눈길이 갔다. 그것은 간혹 있는 홍대용 서술의 과학적 오류를 찾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과학적 이해가 어떻게 당시의 언어로 서술되는지, 당시의 세계관 이해의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세계관을 새롭게 정립하는가를 읽어내는가에 흥미를 느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물리학적 사실들이 유교와 도교의 언어들로 서술되고 있으며, 또 그 언어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조직하는 데 사용된다. 그의 책을 읽다보니, 뉴튼의 책과 비교해서 읽으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뉴튼은 기독교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이 뚜렷한 사람이었고, 그가 고민한 것은 과학으로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발견을 어떻게 신학 언어로 서술할 수 있을까였다. 그래서 그의 책은 매우 독특하고 새로운 신학 언어로 구성된다. 비록 이해되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어떻게 세계관과 조화시키며 발전시키는지에 관해, 두 지식인의 위치는 비슷한 데가 있었다.
책을 당대의 맥락에서 읽는다는 말이 길어졌다. 그렇다고, 내가 세밀한 독서를 한 것은 아니고, 심심풀이로 읽은 책에 가까워서 대략 그런 주제가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본 정도이다. 이 책에서 지구가 둥글고 자전한다는 사실은 중국이라는 특정한 지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중심의 상징을 해체하는 데 사용된다는 데서 의미가 있다.
중국은 서양에 대해서 경도의 차이가 180도에 이르는데, 중국 사람은 중국을 정기준의 세계로 삼아 서양을 반대쪽의 세계로 삼으며, 서양 사람은 서양을 정기준의 세계로 삼아 중국을 반대쪽의 세계로 삼는다. 그러나 사실은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역에 따라 다 그러하니, 옆쪽의 세계도 없고 반대쪽의 세계도 없이 모두 똑같은 정기준의 세계이다.
(홍대용, 이숙경·김영호 옮김, <<의산문답>>(꿈이 있는 세상, 2006), 70.)
물리적 사실에 근거할 때, 중국이라는 곳이 중심이 되는 것은 매우 자의적인 것이고, 그렇다면 세계의 중심은 내가 서있는 장소로 옮겨질 수 있는 것이 된다. 그것은 인간 문화를 바라보는데도 적용되어 종래의 ‘안과 밖’ 개념이 지워지고 인류학적인 의미에서의 상대성이 주장될 수 있는 것이다.
은나라의 머리에 쓰는 관인 장보(章甫)나, 주나라의 갓인 위모(委貌)나, 오랑캐가 몸에 그림을 그리는 문신(文身)이나, 남만에서 이마에 그림을 그리는 조제(雕題)는 모두 다 같은 자기들의 풍속인 것이다. 하늘에서 본다면 어찌 안과 밖의 구별이 있겠느냐? (164)
네 오랑캐가 중국을 침노하는 것을 떼도둑[寇]이라 하고, 중국이 네 오랑캐를 번거롭게 치는 것을 도적[賊]이라 한다. 그러나 서로 떼도둑이라 하고 서로 도적이라 하니, 그 뜻은 한가지이다. (164)
중심을 우리의 자리에 옮겨오면, 우리의 ‘중심’을 중심으로 새로운 법도와 세계관을 구성해야 한다. 여기서 역외춘추(域外春秋)라는 유명한 표현을 만나게 된다.
공자는 주나라 사람이다... 춘추란 주나라 책이므로 안과 바깥에 대해서 엄격히 한 것이 또한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나 공자가 바다에 떠다니다 오랑캐 족이 사는 곳에 들어와 살았다면, 중국의 법을 써서 오랑캐의 풍속을 변화시키고, 주나라의 도를 국외에 일으켰을 것이다. 따라서 안과 밖이라는 구분과, 높이고 물리치는 의리에 있어서도 자연히 중국이 아니라 마땅히 국외에 춘추[역외춘추 域外春秋]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성인된 까닭이다.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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