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 문경자 옮김, <<바보 예찬>>(랜덤하우스중앙, 2006)
에라스무스의 <<바보예찬>>(우신예찬)의 절정부는 당시 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쏟아지는 마지막 대여섯개의 섹션들이다. 사제, 수도사, 신학자, 그리고 주교들과 교황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거명하며 비판하는 부분은, 그 앞의 다른 풍자들과는 느낌이 다르다. 앞에서 학자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풍자와 해학의 느낌이 많이 풍긴다면, 이 뒷부분에서는 작심을 한 듯 준엄하다. 풍자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비판하기 힘든 세력을 대한다는 비장함이 서려있어서일까, 좀더 묵직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들의 야심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아니라 그들끼리 서로 달라지는 것”(146)이라는 수도승에 대한 야유도 재미있지만,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신학자들에 대한 공격이었다. 나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개념들과 현학적인 표현들 때문에 많이 고생해서 그럴 것이다. 신학자들의 추상의 잔치에 대한 공격이 내심 신났다. 성경을 인용해서 어떤 주장이든 합리화시킬 수 있다는 가장 완벽한 풍자는 책 말미에 나온다. 그 부분에서 에라스무스는 성경 구절들을 능숙하게 인용하며 미치광이에 대한 변론을 훌륭하게 보여준다. (174-179)
나(우신)는 현학적인 정의들과 결론, 필연적 귀결, 명백한 명제와 함축적인 명제 등 일개 군대를 그들(신학자) 주위에 포진시켜 주었다... 그들의 문장은 신조어와 이상한 용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온갖 신비의 비밀을 그들 나름대로 설명한다. 가령 이 세상은 어떻게 창조되고 분배되는가, 어떤 길을 통하여 원죄의 얼룩이 아담의 후손에게 퍼졌는가, 어떤 방법으로 어느 정도로 그리고 어느 순간에 예수가 성모의 태내에 생겨났는가, 성사(聖事)에서는 어떻게 실체 없이도 우연성이 존재하는가 등등. (134-135)
이어서 에라스무스는 기독교의 종교적 주제들이 교리화 과정을 통해 복잡해진 것을 구체적으로 비판한다. 중세를 거쳐 숱하게 신학 논쟁의 주제가 되었던 것들이 어떤 것들이었는지 잘 그려져 그 자체로 흥미롭다. 여기서 에라스무스는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당시 신학자들을 대조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대조에서 그의 개혁의 방향이 드러난다. 그의 생각은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자들과 견해를 같이했다. 다만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그러한 방향을 추구했기 때문에, 새로운 교회를 세운 루터와 손잡지 않고 독자 노선을 걸었다. 그랬기 때문에 개신교와 천주교 양쪽으로부터 혹독하게 비난받은 회색분자 처지가 되어버렸지만.
사도 바울은 자비를 완벽하게 실천했지만 고린도전서 13장 첫 번째 서한에서 변증법에 따라 그 자비심을 분할하거나 정의내리지 않았다. 사도들은 확실히 경건한 마음으로 성체를 신성시했다. 그러나 화체(化體)에 관해서, 한 육체가 여러 곳에 존재하는 것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육체가 천국에 있을 때와 십자가 위에 있을 때, 또 성사에 나타날 때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관해서, 또 화체가 일어나는 순간과 화체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영험한 말씀에 관해서, ‘어디에서’(a quo)와 ‘어디로’(ad quem)에 관해서 사도들은 어떤 대답을 했을까? ... 사도들은 예수의 어머니를 알고 있었지만, 그들 중 성모 마리아가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면제되어 있음을 우리 신학자들처럼 철학적으로 증명한 이가 있는가? ... 사도들은 가는 곳마다 세례를 주었다. 그렇지만 세례의 형식적, 실질적 원인과 동력, 목적이 무엇인가는 그 어디에서도 가르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세례의 소멸성과 불소멸성에 관해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사도들은 은총을 말했지만, 무상으로 주어지는 은총과 보상으로 주어지는 은총을 구별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선행위를 하도록 권장했지만, 실천중인 자선과 이미 행해진 자선을 구별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비를 가르쳤지만 선천적인 자비심과 후천적인 자비심을 구별할 줄을 몰랐으며, 그것이 우연한 것인지 본질적인 것인지, 창조된 것인지 또는 창조되지 않고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인지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았다. (137-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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