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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만남

강이천이라는 유생과 정감록과 천주교

by 방가房家 2023. 4. 16.

1797년(정조21년)에 “바다[海浪]에서 도적이 온다”는 말을 퍼뜨려 처벌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강이천(姜彛天)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사전을 찾아보면 고증학적인 연구를 한 유생이라고 나와 있기도 하고 처형된 가톨릭 교인이라고 나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일성록>>, <<승정원일기>>, 그리고 당시 재판 기록인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등의 자료들을 통해 추적해 본 그의 세계관은 상당히 다채롭다. [내가 직접 자료를 본 것은 아니고 일본 친구의 도움으로 내용을 소개받은 논문, 鈴木信昭의 <朝鮮後期天主敎思想と <<鄭鑑錄>>>을 통해 알게 된 내용이다.] 내가 보기에 강이천은 긴즈부르그의 책 <<치즈와 구더기>>에 나오는 메노키오 노인과도 같은 인물이다. 백승종이 이름지은 조선후기 ‘불만지식인’들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성격을 가지는데, 지식인과 민중적 상상력의 경계 지점에 위치하면서 그 둘을 종합한 세계관을 구성하였고, 또 그렇게 생성된 상이한 세계관 때문에 당국의 탄압을 받고, 그 탄압 때문에 남은 재판 기록 덕분에 현재 역사가들이 그 기록 안에 남은 민중적 세계관의 흔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강이천이나 그에게 영향을 받은 김건순같은 이들을 지금의 자리에서 유교인이냐 기독교인이냐를 규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보다는 그들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의 전통들이 어떻게 종합되는지를 바라보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강이천의 ‘해랑(海浪)의 적’ 이야기는 앞으로 일어날 병란에 대한 예언인데, 이것에는 당시 유행하던 정감록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는 천문의 운행을 계산하여 서해의 섬에 있는 사람, 즉 성인이 올 것이며 대란이 인천과 부평 사이에서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대란이 일어났을 때 피할 곳을 사람들에게 알려준다. 이 예언의 내용과 구조는 정감록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강이천의 세계관에서 더 흥미로운 부분은, 유학자 출신에 정감록을 받아들인 그가 주문모 신부와의 만남을 통해 천주교를 받아들인 대목이다. 그는 주문모 신부를 “해상진인”(海上眞人), “도중성인”(島中聖人), “서방의인”(西方義人)이라고 부른다. 주문모를 통해서 서해안 섬에 있던 진인이 올 것이라는 정감록 예언이 실현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강이천의 천주교에 대해서는 아래 붙여놓은 백승종의 글에 잘 서술되어 있다. 
이하는 서울신문에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으로 연재된 글 22회 “정감록과 천주교의 대화”의 일부이다.



정감록은 조선후기 한국에 전파된 천주교와도 만났다?

서쪽에서 들어온 새 학문이라 당시엔 서학(西學)으로 불린 천주교와 정감록의 관계에 관심을 둔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조금만 파고 들어가 보면 천주교와 정감록의 관계는 쌍방향 교류였다.
천주교 신자들은 정감록에 담긴 ‘해도진인(海島眞人)’이란 관념을 빌려갔다. 또한 ‘정감록’처럼 편년체 예언서 형식을 차용해서 ‘니벽전’이란 천주교신자들만의 예언서를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정감록 신앙집단은 ‘요한계시록’에 보이는 말세관에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발견했다. 얼핏 생각하면 서로 대립적이었을 것만 같은 정감록 신앙과 천주교 신앙 사이에 양방향의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관심거리가 될 만하다.
알다시피 18∼19세기 한국의 천주교는 일종의 비밀 종교단체였다. 정감록 신앙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천주교회에 호응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민중이었다. 정감록의 경우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양자는 저마다 종교 철학적 출발점은 달랐지만 신앙집단으로서 사회적 구성이 엇비슷했고, 그들이 처한 정치 문화적 배경도 같았다.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조선 후기 천주교와 정감록 신앙은 이를테면 이란성(二卵性) 쌍생아와도 같았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해도진인(海島眞人)으로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이때 정감록과 서학의 미묘한 관계를 증명하는 사건 하나가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천주교 신자들 중에는 청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정감록에서 말하는 해도진인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단 이야기다. 알고 보면 이미 1794년부터 주문모 신부는 국내에 잠입해 전교활동을 벌였다. 그 당시 국왕 정조는 천주교를 그다지 심하게 탄압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세는 나날이 확장되었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제사를 거부했기 때문에, 유교 국가인 조선왕조의 지배층은 이를 국가체제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하였다.
1801년 정월, 정조가 세상을 뜨고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올랐다. 섭정을 맡은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지배층의 정서를 대변하듯 천주교를 엄금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소동을 겪은 끝에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 신자 100여명이 처형되고 400명가량이 유배되었다. 그 중에는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 지도급 천주교 신자들 및 진보적인 학자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사실 신유박해는 천주교세의 팽창에 불안을 느낀 지배층의 종교탄압인 동시에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권력투쟁의 일부이기도 하였다.
신유박해에 관한 ‘실록’ 기사를 살펴보면 문제의 사건이 언급되어 있다. 그 대강을 간추려 보겠다. 당시 체포된 사람 중에 김건순이란 서울 양반이 있었다. 그는 집안도 좋고 재산도 많아 어느 모로나 부족함이 없었는데도 방술(方術)에 관한 책들을 유독 좋아해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이를테면 정감록과 같은 비결이나 도술에 관한 책을 늘 끼고 살았다. 자연히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주변에 몰려들었다. 그 중엔 천주교 신자들도 끼어 있었다. 신자들의 소개로 그는 주문모 신부를 만났다. 김건순의 눈에는 주문모 신부가 도사 중에서도 출중한 ‘이인(異人)’으로 비쳤다.
늘 주문모를 성심껏 모시던 김건순은 주문모에게 함께 해도(海島)로 들어가자고 간청했다. 섬에 들어가서 무기를 마련하고 큰배(巨艦)를 만들어 중국으로 쳐들어가자고 했다. 병자호란 등 청나라로부터 받은 원한을 씻어보자는 것이었다. 장차 진인이 해도에서 나와 세상을 평정한다는 정감록의 내용에 공명했던 김건순은 이런 제안을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주문모는 이를 거절했다. 김건순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주문모에 대한 그의 기대는 사그라지지 않아 결국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당시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 중에서 김건순은 지적 수준으로나 재력 면에서 최상위층에 속했다. 그런 그조차 해도에서 진인이 나와 세상을 바꾼다는 정감록의 예언에 매달려, 주문모를 진인으로 상정해 거사를 꿈꾸었던 것이다. 조선의 관헌 앞에서 털어놓은 말로는 장차 청나라를 공격할 생각이었다고 했지만 정말 그랬을지는 의문이다. 하필 가까운 조선을 놔두고 머나먼 청나라까지 쳐들어간다는 것이 애당초 어불성설이다.
역시 천주교 신자였던 김이백의 언사는 더욱 심했다. 그는 서울 사는 친척 김건순과 천안 사는 천주교 신자 강이천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편지를 전해주곤 했는데, 정감록 풍의 예언을 많이 지어냈다. 예컨대 “바다 가운데 품(品) 자 모양의 섬이 있는데, 그곳에는 군사와 말(兵馬)이 무척 날래다.”고 했다. 이런 말도 했다 한다.“바다 가운데 진인(眞人)이 있다. 진인은 육임(六壬)과 둔갑(遁甲) 즉, 점과 도술에 능하다.” 당국의 조사 결과, 강이천과 김이백은 그런 예언을 이용해 남의 재물을 빼앗으려 한 적도 있었다.
달리 말해, 자기들이 섬에 있는 진인의 군대와 잘 통하므로 미리 군자금을 제공하면 장차 좋은 수가 생긴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강이천이라면 꽤 유명한 선비였다. 일찍이 진사 시험에도 합격한 적이 있는 지식인인데, 그 또한 정감록의 내용과 논리를 빌려 포교의 기회를 노렸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아마도 강이천 등은 정감록 비결이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단 점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에, 천주교를 전교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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