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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문화

개신교와 제사문제

by 방가房家 2007. 5. 30.
 

개신교와 제사문제


  18세기 말, 천주교라는 새로운 사상이 민중들 사이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진산사건’에 비롯되는 제사문제가 야기되었다. 이렇듯 새로운 사상, 타문화의 유입・수용과정에서는 고유 전통이나 민족 감정과의 갈등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 뒤 다시 조선에서 제사문제가 큰 논란이 된 것은 20세기 초, 즉 일제 강점기이다. 이때는 일찍이 천주교를 민중 스스로가 수용하고 국가권력에 의한 탄압이 가해진 것과 달리, 일본의 국가권력에 의해 신도(神道)가 장려되는 과정에서 갈등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 시기의 제사문제를 논하려고 할 때, 키워드가 되는 것으로서 1) 조선총독부에 의한 포교규칙 및 신사사원규칙의 발령, 2) 동아일보에서의 논쟁과 삼종신기 모독사건, 3) 신사참배의 거부와 수용 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이때 일어난 제사문제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배경에 ‘신도’의 존재가 있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 문제를 특히 개신교를 중심으로 이 키워드에 따라 자료를 제시하려고 한다.


 1) 조선총독부에 의한 포교규칙 및 신사사원규칙의 발령


  이 시기 제사문제의 근본에는 1915년에 발령된「포교규칙」과 「신사사원규칙」, 그리고 이에 따른 종교에 대한 통제강화와 신사참배의 강요라는 일본의 정책적 힘의 개입이 있다.

  1915년 8월 16일 부령(府令) 제 83호를 통해,「포교규칙」이 발령되었다(10월 10일 실시). 이 법령은 모두 19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第 条 本令에서 宗教라 稱함은 神道, 佛道 및 基督敎를 謂한다.

    第 二条 宗教의 宣布에 従事하려고 하는 者는 左의 事項을 具하고 布教者의 資    格을 證明할 수 있는 文書 및 履歴書를 添付하여 朝鮮総督에 申告해야    한다. 但, 布教 管理者를 置하는 教派, 宗派 또는 朝鮮의 寺刹에 属하는

   者에 있어서는 第二號의 事項을 省略할 것을 得함.

   一 . 宗教 및 其 教派, 宗派의 名稱

   二 . 教義의 要領

   三 . 布教의 方法

   前項各號에 掲示한 事項을 変更하였을 때에는 十日以内에 朝鮮総督에 申   告해야 함.

    第 三条 神道 各教派 또는 内地의 佛道 各宗派에 있어서 布教를 하려고 할 때에   는 其 教派 또는 宗派의 管長은 布教 管理者를 定하고 左의 事項을 具하   고 朝鮮総督의 認可를 받아야 함.

   一 . 宗教 및 其 教派, 宗派의 名稱

   二 . 教規 또는 宗制

   三 . 布教의 方法

   四 . 布教管理者의 権限

   五 . 布教監督의 方法

   六. 布教管理事務所의 位置

   七.  布教管理者의 姓名 및 其 履歴書

    前項 各號의 事項을 変更하려고 할 때에는 朝鮮総督의 認可를 받아야 함.

  第 四条 朝鮮総督은 布教의 方法, 布教管理者의 権限 및 布教者 監督의 方法    또는 布教管理者의 権限 및 布教者 監督의 方法 또는 布教管理者를 不適   当이라고 認定할 때에는 其 変更을 命할 일이 있다.   

    第 五条 布教管理者는 朝鮮에 居住하는 者임을 要함.

   布教管理者는 毎年 十二月 三十一日의 現在에 依하여 所属 布教者名簿을    만들고 翌年 一月 三十一日까지 朝鮮総督에 申告해야 함.

   前項의 名簿에는 布教者의 姓名 및 居住地를 記載해야 함.

    第 六条 朝鮮総督이 必要하다고 認定할 때에는 第 三条 以外의 教派 또는 宗派   에 對해 布教管理者를 置하게 할 수 있다.

   前項에 依해 布教管理者를 置하였을 때에는 十日 以内에 第 三条 第 一項    各號의 事項을 朝鮮総督에 申告해야 함. 이를 変更했을 경우도 이와 같다.

    第 七条 前条의 布教管理者에 관해서는 第四条 및 第五条의 規定을 準用함.

   第三条 以外의 教派 또는 宗派에 있어서 其 規約 等에 依해 布教管理者를    置할 때에는 第四条, 第五条 및 前条 第二項의 規定을 準用함.

    第 八条 宗教의 宣布에 従事할 者 姓名을 変更하고 居住地를 옮기고 또는 布教   를 廃止했을 때에는 十日 以内에 朝鮮総督에 申告해야 함.

    第 九条 宗教의 用에 供하기 為해 教会堂, 説教所 또는 講義所의 類를 設立하   려고 하는 者는 左의 事項을 具하고 朝鮮総督의 許可를 받아야 함.

   一. 設立을 要하는 事由

   二. 名稱 및 所在地

   三. 敷地의 面積 및 建物의 坪数, 其 所有者의 姓名 및 圖面

   四. 宗教 및 其 教派, 宗派의 名稱

   五. 布教担当者의 資格 및 其 選定方法

   六. 設立費 및 其 支弁方法

   七. 管理 및 維持의 方法

   前項 第五號에 依해 布教担当者를 選定할 때에는 設立者 또는 布教管理者   는 其 姓名 및 居住地를 具하고 履歴書를 添付하여 十日 以内에 朝鮮総督   에 申告해야 함. 이를 変更할 때도 이와 같다.

    第 十条 前条 第一項 第三號에 依해 布教担任者를 選定하였을 때에는 設立者    또는 布教管理者로부터 其 姓名 및 住所를 具하고 十日 以内에 朝鮮総督   에 申告해야 함. 이를 変更하였을 때도 이와 같다.

    第十一条 宗教의 用에 供하는 教会堂, 説教所 또는 講義所의 類를 廃止하였을    때에는 十日 以内에 朝鮮総督에 申告해야 함.

    第十二条 朝鮮総督은 現히 宗教의 用에 供하는 教会堂, 説教所 또는 講義所의    類에 있어서 安寧秩序를 紊하는 虞가 있는 所為가 있다고 認定될 때에는    其 設立者 또는 管理者에 대해 이가 使用을 停止 또는 禁止할 수 있다.

    第十三条 布教管理者를 置하는 教派, 宗派에 属하는 者 또는 朝鮮의 寺刹에 属   하는 者가 本令에 依해 申告하려고 할 때에는 布教管理者 또는 本寺住持   의 副書를 添付해야 함.

    第十四条 朝鮮総督은 布教管理者, 布教担任者 또는 朝鮮寺刹 住持에 對해 必要   하다고 認定되는 報告의 提出을 命할 수 있다.

    第十五条 朝鮮総督은 必要한 境遇에는 宗教類似團體라고 認定되는 者에 本令을    準用할 수 있다.

   前項에 依해 本令을 準用해야 할 團體는 이를 告示함.

  附 則

  第十六条 本令은 大正 四年 十月 一日부터 이를 施行함.

    第十七条 明治 三十九年 統監府令 第四十五號는 이를 廃止함.

    第十八条 明治 三十九年 統監府令 第四十五號 第一条, 第二条 및 第三条에 依   해 認可를 받은 者는 本令 第二条의 申告를 하고 또는 第三条의 認可 或   은 第九条의 許可를 받은 者라고 看做함. 但, 本令 第二条에 該当하는 者에    있어서는 同条 第一項 第二號의 事項, 本令 第三条에 該当하는 者에 있어서   는 同条 第一項 第二號 第四號의 事項, 本令 第九条에 該当하는 者에 있어   서는 同条 第一項 第三號 第五號의 事項 및 布教担任者의 姓名 및 履歴書를    具하여 本令施行의 날부터 三月 以内에 朝鮮総督에 申告해야 함.

    第十九絛 本令 施行 時, 現히 宗教의 宣布에 従事하고 布教管理者를 置하고 또   는 宗教의 用에 供하는 教会堂, 説教所, 講義所의 類를 管理하는 者이면서    前条에 該当하지 않는 者는 本令 施行의 날부터 三月 以内에 第二絛 第三   絛 또는 第九絛의 事項을 具하고 朝鮮総督에 申告해야 함.              

     前項에 依해 第九絛의 事項을 申告한 者는 本令에 依해 許可를 받은 者로

   看做함.


  이 포교규칙에 의해 教派神道, 기독교에 대한 규제가 가해졌으며, 사찰령에 의한 불교와 보안규칙, 보안법과 집회단속에 의한 천도교와 그 외 유사 종교에 대한 단속과 함께 종교에 대한 규제는 완료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府令 第八十二號로써「神社寺院規則」도 발령되어, 神社神祠의 설립을 장려・통제되었다(한석희『日本の朝鮮支配と宗教政策』未来社, 1992). 

2) 동아일보에서의 논쟁과 삼종신기 모독사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포교규칙 등 일련의 법령 발령에 의해 각 종교에 대한 통제가 강화・체계화되었고, 신사 설립이 장려되었다. 초기에는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일은 없었으나, 천황 및 황실에 대한 절대적 존숭이 요구되었다.

  이처럼 일제의 정신적 지배가 심화되는 속에서, 포교규칙 발령 4년 후인 1919년에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나는 등 민중들의 일제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어갔다. 이에 대해 일제는 회유책의 일환으로 언론・출판을 제한적이나마 허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민족지로서 창간된「동아일보」에 게재된 논평이 발단이 되어 제사문제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 주요한 내용을 자료로서 아래에 제시한다.


중앙청년회 총무 이상재

「부모의 신주를 가지고 한 말로『우상』이라 부르며 부모의 혼령 압헤 절하는 것을 경솔히『우상숭배』라는 일 아래에 타메를 하는 것이 엇지 반다시 올켓다 할 수 잇스리요. ・・・ 나의 생각에는 오직 돌아간 부모를 사모하며 그리워한다 하는 그 마음으로 하는 일이라 하면 엇더한 형식으로 례식을 행하든지 다 반대할 수 업겟다 하겟스며 원래 조선사람의 도라간 부모의 령혼을 위하고 삼년 안에 조석상식과 혹은 평생을 두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오직 그 부모를 그리며 사모하는 효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교와 아모 상관이 업슬 뿐만 아니라『네 부모를 공경하라』하신 하나님의 가르침에 크게 적합되는 일일 것이다」(「동아일보」1920년 9월 1일자)


  이에 대해 감리교회의 양주삼은 반론을 한다.


종회남감리교회 양주삼 목사

「또 조상의게 제사하는 것을 조선정신과 조선혼을 보존한다 하면 그는 큰 오해라 나는 그 일에 찬성치 못하겠노라. ・・・ 조상의게 제사하는 것은 세계 인류가 다 경력하고 버서바리고저 하는 것이며 과학지식이 천단하고 종교사상(宗敎思想)이 불일하고 도덕관념이 유치할 때에 쓰던 일종 미신뎍 풍속이오 의식뎍 도덕에 불과한 것이라 그런 고로 조상의게 제사하는 사람의 수효가 날노 감하고 달로 줄고 해로 감축해야 불구에 세계상에 한 사람도 업게 될 것이 분명하도다」(「동아일보」1920년9월4일자 3면)


  유교 측의 김윤식은 양주삼의 견해를 비난하고,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대테  부모의 령혼을 추양하야 제사를 지내는 것은 개벽 이래로부터 시작된 정(情)의 표현이라. ・・・ 도라 부모를 추양하는 생각을 간절히 하는 데는 제사를 지내는 것 외에 더 조흔 것이 업슬가 하오」(「동아일보」1920년 9월 5일)

양주삼 목사

「헛된 것을 버리고 실디만 숭상하는 이십세긔에 복음진리의 교훈을 밧는 예수교인들은 정신뎍 도덕을 주장하기 위하야 제사를 폐지하거니와 불구에 예수를 밋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제사가 헛된 풍속일 뿐이오. 도덕의 원리가 아닌 줄을 깨닷고 폐지할 줄로 믿노라」(「동아일보」1920년 9월 11일)


  이처럼 양주삼은 제사폐지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맥락에서 9월 25일에 게재된 다음의 기사가 큰 문제로 부상되었다.


「偶像崇拜의 第一 顯著한 者는 木彫泥塑하고 粉面金身하야 神이 茲에 在하며 或 靈이 玆에 在하다 하야 이를 숭배할 뿐 아니라 有事乎 이에 대하야 降祥降福을 祈祷함이니 이는 確実히 偶像崇拝라 할 것이오. 説或 人身을 模作한 偶像은 無할지라도 或은 鏡으로 或은 珠玉으로 或은 劒으로 그 他 何等 模様으로든지 物形을 作하야 或処에 奉置하고 神이 玆에 在하며 或은 霊이 玆에 在하다 하야 이에 對하야 崇拝하며 或은 祈祷함은 一切 偶像崇拝라 할 것이니 大概 此理는 知者를 待하야 비로소 알 바 아니라 賢愚를 勿論하고 人의 知覚을 具備한 者는 반다시 廓然할지니 人手로 造作한 바 工과 塑匠의 彰施한 바 色이 엇지 神을 接할 수 있으며 神이 또한 이에 接하리오」(「동아일보」1920년 9월 25일)


  이 기사가 바로 일본 신사 신앙의 근본인 3寶를 ‘우상숭배’라 하여 부정하였다며,

총독부는「동아일보」를 ‘무기 발간 정지’ 처분으로 하였다. 그 근거에 대해 총독부는 ‘이유서’를 발행하였다.


「総督政治를 批判함은 公正한 理解를 하도록 힘쓰지 않고 根本的으로 否定하여 悪意的인 推断을 내려 総督政治에 대한 一般의 誤解를 더하도록 힘쓰는 듯하다. 本日의 新聞에서 偶像崇拝를 論하여 我 帝国臣民의 信念의 中枢인 劒・鏡・璽에 대하여 無理解한 妄説을 들고, 20世紀 印度를 引用하여 英国의 暴政을 論하여 은근히 朝鮮과 対象시킴에 資하고자 하는 듯하고, 其 内容 또한 誇張虚偽의 點도 不少하여 帝国의 新聞紙로 友邦과 国交를 阻害할 憂慮도 없지 아니하다. 編輯의 局에 當하는 者는 혹은 云謂할지라도 모른다. 同紙의 言説은 決코 偶意를 가지지 아니하였다고・・・ 그러나 都鄙의 読者의 実際에 있어 同紙의 反影이 顕著한 바가 있어 健全한 一般思想을 惑乱함이 顕著힌 바 있다. 以上 縷述함과 如히 東亜紙의 言論은 到底히統治의 根本方針과 相容되기 어려워 玆에 発行停止가 不得已함에 이르렀다」(『東亜日報社史』권1, p.152)


 


3) 신사참배의 거부와 수용


  2)의 시점에서는 아직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것은 아니었고, 「동아일보」가 발간정지 된 것도 천황 및 황가에 대한 숭경에 통하는「帝国臣民의 信念의 中枢인 劒・鏡・璽」를 비방했다는 이유이었다.

  그런데,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마침내 신사참배를 강요하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 대해서는 (『日本の朝鮮支配と宗教政策』韓晳羲, 未来社, 1992)에서 언급되어 있으므로 아래에 요약해서 번역・제시한다.


 ① 학교에 대한 강요


   신사참배 강요는 학교에서 시작되었다. 1932년 9월 秋期皇霊祭 때, 평양 서기산에서 「満州事変」戦没将兵慰霊祭가 거행되어 각 학교 학생들은 참배를 강요당했으나, 기독교계 학교들은 참가를 거부하여 문제가 되었다. 결국, 祭儀 後의 国民儀礼에만 참석한다는 것으로 타협하고 참가하였다. 그런데 国民儀礼란 忠魂塔과 納骨堂에 안치한「護国神」에 대한 拝礼이었다.

  그 후, 당국은 全国 学校에 国民儀礼로서 神社参拝를 厳守하도록 通達하였다. 그런데 1932년 9월의 第二十一回 長老会総会는 어디까지나 神社参拝를 拒否하고 当局과 交渉할 것을 決議하였다.

  그런데 天主教는 로마 교황청이 1932년 5월 26일부로 신사는 국가 의식이기 때문에 참배하도록 통달이 되었고,  감리교도 신사는 비종교이고 국민의 의무이기 때문에 참배해도 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단, 개인적인 참배 거부자도 상당 수 있었다.

  총독부는 더욱 태도를 강화하고 1932년 1월 25일부로, 참배를 거부하는 학교는 폐교시킬 방침을 결정했다. 또한 사립을 공립으로 변경시키거나, 교장을 바꾸게 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참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이로써 장로교계 학교 일부에서도 참배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총독부는 신사참배를 도구로, 기독교계 학교를 전면적으로 굴복시켰다. 그런데 유교, 불교와 일부 신종교들은 기독교회에 대한 대항 세력으로서 오히려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여전히 완고하게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장로교회에 대해, 총독부는 1938년 2월에 다음과 같은 방침으로 감시・탄압을 가했다.

  (1) 教役者 座談会를 개최시켜, 一般信徒를 계몽시킨다.

  (2) 指導 및 施設

  ① 教会에 日本国旗掲揚塔를 建設시킨다.

    ② 日本国旗에 대한 敬礼, 東方遥拝, 皇国臣民의 誓詞斉唱 등의 실시, 戦勝祝賀 会, 出征皇軍의 歓迎・送迎 등의 国家行事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킨다.

    ③ 学校 学生의 神社参拝는 絶対的으로 必要하지만, 一般教徒에 대해서는 우선 神社에 대한 観念을 是正・理解시켜 강제하는 일 없이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지휘한다.

    ④ 西紀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사용하지 않도록 한다.

  (3) 外国人 宣教師에 대해 以上의 項目을 実施하도록 自覚시킨다.

  (4) 賛美歌, 祈祷文, 説教 등에서 内容이 不穏한 것을 検閲하고 엄중히 단속한다.

  (5) 当局의 指導를 따르지 않는 信徒에는 法的措置를 취한다.

  (6) 国体에 適合하는 耶蘇教의 新建設運動에 대해서는 内容을 검토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이러한 방침을 바탕으로 한 총독부의 감시와 탄압에 의해, 장로교회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8년 9월 9일~10일의 第二十七回 朝鮮耶蘇長老会総会에서 강행적으로 다음과 같은 성명이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声明書


 우리는 神社는 宗教가 아니고, 기독교의 교리에도 어긋나지 않다는 本義를 이해하고, 神社参拝가 愛国的国家儀式임을 自覚한다. 따라서, 이에 神社参拝를 率先励行하여 적극적으로 国民精神総動員運動에 참여함으로써, 時局下에서의 銃後皇国臣民으로서 赤誠을 다할 것을 성명한다.


  昭和13年(1938)九月 十日

 朝鮮耶蘇長老教会 会長 洪麒  

   

 이상과 같이, 일제 강점기에 민족감정이 고조되는 가운데 동아일보 기사를 발단으로 제사문제에 대해 유교와 기독교 간에 논쟁이 벌어졌으나, 결국 총독부의 막강한 힘과 신사참배 강요에 의해 기독교의 주장은 물론 조선의 제사는 부인되고, 신사 참배가 ‘제사’로서 실시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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