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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선교사문헌

게일의 한국종교 서술(1909) 2

by 방가房家 2010. 5. 13.
제임스 게일의 1909년 책에서 한국종교를 서술한 것은 3장이다. 일부분을 발췌하여 번역하였다. 3장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한다.
James Scarth Gale, <<Korea in Transition>> (New York: Young people's missionary movement of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1909).

(82-92)
그러나 조상숭배가 한국의 영적인 영역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단순히] 가정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한국인의 위대한 종교이다. 이것은 거룩한 사회에 들어오고자 하는 이는 준수하고 따라야 하는 필수적인 형식인, 정통의 핵심적인 믿음이다. 영매, 축귀, 산신, 용, 점술, 점성술에 대한 신자가 되라고 강요당하지는 않지만, 조상숭배자가 되라는 강요는 받는다. 그렇지만 이집트가 나라를 황폐하게 하는 메뚜기 떼에 둘러싸여 있듯이, 이 나라 전체에 그 믿음들[영매, 축귀, 산신, 용, 점술, 점성술 등]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비숍 부인은 귀신숭배(demon-worship) 때문에 한국에서 매년 10,250 달러의 금이 지출된다고 말한다.
정령의 존재에 대한 생생하고도 정확한 묘사는 조지 허버 존스 박사의 저술에 의해 이루어진 바 있다. “한국인의 믿음 속에서는 하늘, 땅, 바다가 귀신으로 가득하다.……신의 편재성에 대한 성스럽지 않은 모방……” [Isabella Bird Bishop, <<Korea and Her Neighbours>>, 403-404. 존스를 전거로 인용한 대목]
잘못되거나 다른 이유 때문에 지상을 떠난 망자의 정령은 그 잘못에 대한 복수가 수백 배 이루어질 때까지 산 자를 쫓아다닌다. 그들 다수는 동물에게서나 사람에게서나 안식처를 찾지 못해서, 대개는 벌거벗은 식인종보다도 더 위험한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 이들 원한 품은 정령들은 실종되거나 전쟁에서 죽은 자들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공포를 지니고 다닌다. 병마, 광란, 가난, 모욕, 죽음 등이 그들의 복수에 등장한다. 관청에는 굶주리고 갈 곳 없고 흩어져 있는 모든 정령들을 모아 제사지내는, 여단厲壇이라고 불리는 제사 장소가 있다. 제의에서 하나라도 빠뜨리는 것이 있으면 주례자의 상투가 날아가기 때문에,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밤에는 그들이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때로는 눈앞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보통은 산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어떤 정령은 크고 어떤 정령은 작다. 어떤 정령은 온 마을을 보호해주고 모심을 받고 다른 정령은 장티푸스 등으로 마을을 공격한다. 어떤 정령은 산을 소유하며 호랑이 위에 올라타 있다. 이 산신령들은 무시당하거나 모욕당하면 장터에 불행을 퍼뜨려, 어린이들이 유산流產되거나 뱀에 물려 죽거나 다른 불행이 닥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산이나 마을에는 ‘주인’이 있어 재난과 직접 관련이 있는데, 이들은 자신을 위해 군대를 불러낼 수 있다.
맹인 축귀사인 판수는 부지런히 귀신(demon) 쫓는 일을 업으로 한다. 그들은 예를 들면 조지 워싱턴 같은 위대한 이름을 갖고서 그들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하면서 귀신을 쫓는다. 그리고 무당이라는 여자들이 있다. 그들은 악귀(devil) 등에 의탁해서 예언을 하거나 신비를 계시하는 말을 한다.
반은 귀신이고 반은 요정인 도깨비는 항상 어디론가 가는 중이고 각종 장난을 벌이고 있다. 그는 한국인이 보고 있지 않을 때, 별 생각 없이 평화롭게 걷고 있을 때 상투를 잘라버리곤 한다. 그 사람은 그걸 모르고 있다가 머리 위를 만져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여보시오, 이게 누군가? 이게 나인가, 중인가? 중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일걸. 허허, 도깨비가 나타나 내 상투를 잘라갔구먼.” 도깨비는 접시를 뒤집어 놓고 문풍지에 모래를 뿌려 놓으며 밤에는 산등성이에서 불장난을 한다. 
한국 여기저기에서는 이를 싱긋 드러내고 무서운 얼굴을 하고 흉악한 눈과 귀를 한, 거칠게 나무로 깍은 기둥이 길가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악귀가 지나가는 것을 막으러 그곳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보통 이런 장군, 저런 장군이라는 장군 이름으로 불린다. 그들은 흔히 하나는 장군, 하나는 장군의 부인으로 짝을 지어서 나란히 서있거나 마주보고 있다. 얼굴 아래에는 “천하대장군”이라고 새겨져 있고, 부인 얼굴 아래에는 “지하여장군”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들은 대대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예측하기 힘든 힘으로부터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을 탄탄하게 보호해 왔다.
용은 기어 다니는 비늘 덮인 짐승의 우두머리이다. 그는 억수같은 비가 내릴 때 하늘 높이 올라간다. 그리고 측량할 수 없는 물속 가장 깊을 곳까지 내려간다. 용은 괴물 신격(monster divinity)이다. 그는 산 아래에 존재한다. 가끔은 산길에 생살처럼 드러난 부분에서 돌 포장에 의해 그의 등이 드러나기도 한다. 영국에서는 성 조지가 용을 살해했지만, 동양에서는 아직 번성하고 있다. 일본 화폐에는 많은 소용돌이와 함께 있는 용의 발톱 모양을 볼 수 있다. 중국 깃발에서는 용이 바람에 맞서 있다. 한국에서 가장 존중받고 있는 경전 <<역경>>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었다. “여섯 번째 효爻는 용이 밖에서 싸우는 모습이다. 용의 피는 자주색과 황색이다.” 용이라는 이름은 왕에서부터 방앗간 뒤 하녀까지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
한국인들이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무서운 세계의 관념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야기된 것 같다. 한국인의 삶의 길의 모든 순간은 공포의 지배를 받는다. 전에 말했듯이 한국인은 천성적으로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는 운명론자fatalist가 된다. 정령들이 그의 생년월일시를 점유하고 있어 운명을 좌지우지하며, 호랑이가 잡아온 불쌍한 마을 강하지를 다루듯 갖고 놀고 겁을 준다.
독자들이 지금까지 읽은 이 세계를 종합해 본다면, 한국인의 삶을 무서운 긴장 속에 놓이게 할 정도로 모든 이성을 능가하는 교활함과 변덕을 지닌 조상 정령들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도 옛 한국에는 귀신, 도깨비, 요정, 용, 산신 등이 있다.
선교사들은 이 세계에 귀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성서를 갖고 들어왔다. 한국인들은 성서를 읽자마자 매혹되었다. 신약성서에 수많은 귀신들이 나오지만, 그들은 갈릴리 비탈을 내리달려 도망갔다.(<마태복음> 8:32)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가 나타나자 도망가서 맹인이 눈을 뜨고 영혼에는 불이 밝혀졌다.(<마태복음> 7:22) 귀신의 군대는 앙앙대는 귀신에 다름 아니었다.(<마가복음> 5:15) 또 귀신은 경련을 일으키고 입에 거품을 문다.(<누가복음> 9:39, 맥락상 귀신이 사람에게 경련과 거품을 일으키는 것이지만 저자는 이렇게 이해한 것 같음.)
한국사에서 귀신 세계가 사정없이 해치워지는 일은 전에 없었다. 이 기적을 행하는 일꾼들이 널리 퍼져서, 모든 죄인들의 죄를 감해주어 그분을 받아들이게 하고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이 나라 전역에서 그분의 이름으로 귀신들린 이들을 위한 기도가 행해져 구원을 받고 있다. 치유를 위한 기도를 통해 병이 낫고 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기도를 통해 하느님이 구원을 재력을 보내주시고 있다.
이 나라처럼 복음이 필요하고, 꿈꿔왔던 복음이 이처럼 기적적으로 그 필요에 부응하는 곳이 또 있을까? 우리 중 일부는 동양에 와서 예수님이 인간성을 상실한 가장 절망적인 사람들을 기적적으로 해방시키실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귀신이 이 세계에 정말로 존재하며 예수께서 그들을 쫓아내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서가 진실임을 다시 한 번 배웠고 하느님께서 그것을 뒷받침하심을 배웠다. 그분의 목적이 아시아를 구원하는 것임을 알고, 그 일이 미국, 캐나다, 영국 등의 젊은이들을 통해서 주로 이루어질 것임을 알았으니, 누가 겸손하게 그분 앞에 무릎 꿇고 말할 것인가. “주여, 여기 내가 있습니다. 나를 보내주십시오.”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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