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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선교사문헌

언더우드, "한국의 부름" 3장

by 방가房家 2009. 10. 1.
Underwood, Horace G., The Call of Korea (New York: Fleming H. Revell, 1908).

언더우드, <<한국의 부름>> 제3장

[종교 없음]
한국인들은 종교 없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분명히 그들은 그다지 종교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몇 개 안 되는 사원과 사당을 갖고 있다. 우리는 한국인들이 사원에 북적이는 것을 본 적이 없고, 그들이 공적이거나 개인적인 예배에 많은 시간, 돈, 정성을 쏟는 것을 본 적도 없으며, 사제들의 금고에 봉헌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게다가 사제들은 매우 낮은 계급이다. 아프리카인들의 미신, 인도, 티벳, 중국, 그리고 심지어 일본의 신봉자들과 비교해 볼 때, 사실 한국인들에게 오래된 형태의 종교들은 그들에게 거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영향력들이 복합되어 오래된 종교들에 대한 한국인의 신앙은 냉랭해지고 약화되었고 그들의 예배는 형식적이고 진심이 결여된 것이 되었다. 심지어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지녔던 세 종교를 버렸으며 왜 타국에서 들어온 네 번째 종교를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들은 한 종교를 택한다면 고유의 숭배들 중에서 하나 골라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들  세 종교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유교]
첫째로 유교를 보도록 하자. 유교는 이른 시기에 중국 문명과 문자와 함께 전래되었고, 처음부터 사람들의 사상과 생활을 형성하는 데 거의 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볼 수 있듯이, 처음에 중국에서 온 것이 무엇이었든지, 이 땅에서 지금 어떠한지 간에, 우리가 한국에서 보는 유교는 종교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거의 없다. 그것은 종교라기보다는 모든 사람들이 행해야 하는, 혹은 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효도에 기반을 둔 윤리 체계이다.
그러나 유교는 이 땅의 문학 생활과 문화로서도 존재해왔다. 유교는 가장 학문적인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중국 고전 공부에 의존하는 것이어서, 충실한 유교인은 훌륭한 학자라는 인식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결과 문사(文士)의 이름을 열망하는 사람들은 모두 유교인임을 자임한다. 이 숭배를 강하게 따른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보면, 그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보더라도 조용하게 회의하는 상황을 보면 유교가 그들에게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서울의 사원들]
서울에는 사원이 없다는 이야기를 흔히 한다. 이것은 큰 실수이다. 왜냐하면 꽤 큰 유교 사당들이 몇 채, 무당집 약간이 있으며, 저택의 뒤뜰 경내에는 조상 위패를 모신 건물이 있어서 정해진 때가 되면 3대, 4대, 때로는 드물게 5대까지 조상 신주에 제사를 드리기 때문이다. 위의 말이 잘못되었음은 쉽게 알 수 있다.

[조상숭배]
조상숭배는 유교의 필수적인 부분이고 한국 전체에 퍼져있다. 이 의식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동료들의 눈에 무신론자, 불신자, 추방되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
사람이 죽을 때는 세 영혼이 분리되어 하나는 저승으로, 하나는 무덤으로, 다른 하나는 조상 신주로 간다고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다. 신주는 맞대어 붙인 두 장의 좁은 나무판자로 되어 있는데, 그 안쪽 면에 정령의 이름이 쓰여 있다. 위쪽 근처에는 조그만 구멍이 나 있어 내부를 바깥 공기와 통하게 해주는데, 이것은 정령이 드나들기 위함이다. 신주들은 서있을 수 있도록 받침대에 끼워져 있다. 삼년간의 일반적인 애도기간 동안에는 과일 접시가 항상 망자의 위패 앞에 놓이고 정해진 때에 특별 제사가 드려지며, 남자 상주들은 삼년 간 특별한 복장을 입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위패 앞에서 특별한 예배를 드린다.
그 이후에는 아버지, 조부, 증조부의 기일에 집이나 사당에서 위패에 제사를 드린다. 이외에도 한국의 여덟 명절에 제사가 있다. 이 모든 제사의 중요성은 중국에서와 같다. 한국인들은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망자와 살아있는 자의 행복이 제사에 크게 의존한다고 믿는다.
이 모든 경우에 장자가 주된 상주이자 주요 사제이다. 한국의 씨족 조직은 매우 견고하다. 종가집의 장자는 가문의 수위 사제이고, 모든 제사 비용은 [가문] 부동산으로 충당한다. 그래서 이 수위 사제는 가문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수장이 되고, 그의 관리 아래 신주가 놓인다. 그런 가문의 어른 혹은 수위 사제가 기독교로 개종하여 가문이 난리가 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때로 웃어른의 가족 전체가 개종했을 때에는 가족 성원의 동의를 얻어내는데 웃어른이 영향력을 행사해서 별 어려움이 없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수위 사제의 기능이 포기되어 불완전한 가계가 이루어지고 무수히 많은 어려움이 야기된다. 낡은 법률에 따르면 조상 신주를 파괴하는 것은 죽음에 처할 행위이다. 이 점이 가족에 영향력이 큰 양반일수록,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의 길 앞에 놓인 장애물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였다. 교육받은 사람들은 이 제사의 유효성에 대한 믿음은 없으며 이는 단순히 효도의 표현일 뿐이라고 주저 없이 선언한다. 그러나 조상숭배에는 모든 형태와 유사한 형태의 숭배가 있고, 굳이 종교적 사안에 대해 선교사들이 법제화를 하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러한 제사들이 한분 진실한 하느님에 대한 예배와 양립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 결과 현재에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조상 숭배를 중단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 잘 알려져 있으며, 그 결과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복음의 진실이나 심지어 그에 관한 말을 듣는 것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도 듣지 않으려 한다.
한국에서 조상숭배는 유교에 남아있는 유일한 종교적 요소이다. 기독교가 유교인들 가운데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모님이 살아계실 동안의 효도를 통해 그 과시적인 숭배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살아계신 동안에 부모님을 소홀히 했던 사람, 그리고 사치스럽게 사는 바람에 부모님들이 가난의 고통을 겪도록 한 사람들이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절차에 따라 제사를 드리는 것이 훌륭한 유교인으로 불린다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국인들 자신이 알고 있다. 조상숭배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한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는 신앙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본심의 바람에 대한 해답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이 만든 신앙이고, 자연적인 종교적 본능의 요구를 전혀 충족시킬 수 없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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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머니즘]
한국의 신앙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샤머니즘의 한 종류이다. 샤머니즘은 유교와 불교가 한국에 들어오기 이전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 그리고 현재 볼 수 있는 바에 따르면, 불교와 유교가 최상의 위치에 있었을 때도 샤머니즘은 그들 아래, 그리고 그들을 통해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했다. 오늘날에도 불교 승려는 여전히 샤머니즘 신앙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굳건한 유교인도 샤머니즘이 바보같다고 말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그 영향력 안에 꾸준히 머물러 있다. 이것은 종교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한국의 샤머니즘은 세계를 정령, 데몬, 선신과 악신들―주로 악신―로 채우고 있다. 일반적인 믿음에 따르면 이 정령들은 보통 사람의 복지에 반하는 음모를 꾸민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달래어져야 하고, 행복과 행운을 바란다면 그들의 선한 의지를 얻을 수도 있다. 모든 언덕, 길, 산, 냇물, 집자리, 집, 부엌, 거의 모든 방에는 신이나 데몬이 있다. 이 많은 적들에 둘러싸여서 한국인들이 좋은 시간을 가질 수나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화재와 불은 부엌신의 일이고, 그렇게 선택된 건물은 신에 대한 제사로 바쳐져야 한다. 만약 마을에 불이 일어나면, 건물 주변을 보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무리의 반은 나팔과 징을 들고 꾸준히 신을 설득해서 한 집을 골라 즐겁게 살게 해서 다른 집은 무사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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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머니즘은 선교사가 한국에서 만나 가장 완강한 적이다. “선교사들이 주로 공격한 종교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어떤 공격도 행해지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외국 선교지에 나가는 선교사는 낡은 신앙을 공격하는 데 낭비할 시간이 없다. 그가 할 일은 단순히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굳게 세우는 것이고, 그러면 그 분 앞에서는 다른 어떤 신앙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고,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한국인들은 십자가를 얻어가는 중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가 이 땅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이곳에 속속들이 역사하시었음을 알게 된다. 이 땅 전역의 남녀들은 오래된 종교에 대한 신앙을 잃게 되었다. 교육받은 양반들은 그런 것들[오래된 종교들]은 여자나 어린이에나 맞는 것이라고 항상 하는 말하는 데, 이것이 생각의 흐름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리라.
대다수의 유교인들은 조상 숭배가 효도를 표현하는 것 말고는 무용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불교의 가장 열성적인 신봉자일거라고 우리가 예상하는 불교 승려들은, 일반적으로 스스로가 인지하고 있듯이 단순히 생계로서 그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평민 계급의 사람들은 종이신 앞에 소지(燒紙)를 사르고, 움직이지 않는 나무줄기에 천과 실을 동여매고, 짚으로 만든 인형을 던져 버리고, 신목이나 바위 주변의 서낭당에 돌을 올려놓는 등의 행위들보다, 병이 났을 때 더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자신들이 믿어왔던 것이 과연 상식에 맞는 알맞은 방법이 무엇이며 무엇이 적절한 치료방법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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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보아도 이들 세 종교의 미신과 교리들이 얼마나 기독교에 반하는 작용을 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상숭배는 인간 본성의 가장 강력한 두 감정인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죽어서도 기억되고 싶은 욕망을 통해서, 불교는 보편적인 자비와 널리 퍼진 윤회 관념을 통해서, 샤머니즘은 신비적이고 시적이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미신에 대한 지배를 통해서, [이 종교들은] 복음이 전진하는 것을 가로막는 강력한 장애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선교사들이 출현한 당시 사람들은 이 오래된 종교들에 대해 냉랭해졌고 꽤 많이 신앙을 잃었다.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의 힘에 의해 인간이 만든 신앙들의 공허함과 그릇됨을 볼 수 있을 것이고, 동시에 그들의 종교적 본능에 의해 그리스도를 안내받을 때 진리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며 그 분의 가르침을 열성적으로 실천할 것이다. 
처음 우리가 도착했을 때 우리는 옛 [종교] 체계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태도로 인해 그들에게 종교적 감정이 부족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선교 작업의 결과, 한국인이 두드러지게 종교적인 사람들이라는 점이 증명될 수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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