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하디의 "한국의 종교"(전반부)
R. A. Hardie, "Religion in Korea," <<The Missionary Reviews of the World>> 10-12 (Dec., 1897): 926-31.
한국인들의 종교에 관해 매우 상충되는 진술들이 제시되어 왔다. 어떤 이는 엄밀하게 말해서 한국인들은 종교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다른 이는 현재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적은 불교 외에도 두 구분되는 종교들이 성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유교 규범을 윤리로 삼고 있는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하위 계층에 국한된 미신적인 광신(superstitious fanaticism)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고 싶다. 불교, 유교, 그리고 다른 형태의 우상숭배들이 존재하지만, 한국의 모든 종교 신앙의 뿌리에는 실제로 유일하게 모든 계층을 포괄하는 강력한 악령숭배(evil spiritism)가 존재한다.
불교는 5세기 인도에서 발생하여 서기 371년경에 중국 황제 함안(Ham An)에 의해 한국에 소개되었다. 300년 전에 한반도에 진출했던 유교에 비해 여러 면에서 우월했던 불교는 한국 문명을 발달시키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서기 천년 경에 불교는 국가의 비호를 받아 모든 계층에 유행하는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1392년에 현재 왕조[조선]이 시작되면서 여러 환경이 이 체제에 불리하게 되었고, 결국 금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아직도 많은 산에는 샘물 근처에 은신처가 있어 매혹적인 경치를 굽어보는 위치에 수도원[암자]들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엔 대여섯 명에서 백명 이상에 달하는 승려들이 있어서 절을 장식하는 성상에 예배를 드리며 살아가고 있다. 이들 머리 깍은 채식주의자[승려]들은 핀둥핀둥 기름지게 살아간다. 이들은 모든 계층들에게 부랑자—최하층 계급—취급을 받긴 하지만, 그들의 성스러운 은신처에 가는 길 굽이굽이 신실한 신자들 무리가 종이, 초, 쌀, ‘돈’을 바치러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참배객들이 도착하는 날에는 규정된 재계(齋戒)를 행한다. 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 훨씬 전에 그들이 바친 예물이 단 위에 놓이고, 북소리, 징의 울림, 승려들의 기이한 찬송이 가득하고 말없는 신자들의 절과 삼배가 자주 이어지는 가운데 그들을 위해서 기도가 올려진다. 그러나 이 단[불단(佛壇)]이 한국인들이 절을 올리는 유일한 곳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이와 비슷한 정도로 그들은 유교에서 종교의 맛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요소인 조상숭배의 노예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불교가 폐지된 위에 중국 고전 연구가 부활했다. 거의 오백년간 공자와 맹자의 책들이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경건하게 존중되었다. 훌륭한 윤리 규범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유교는 한국에 법, 질서, 도덕의 척도를 마련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유교는 자만심, 이기심, 전제주의, 일부다처제, 무신론을 배양하는 불가피한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앞서 말한 장점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교육 수준이 높은 한 한국인은 이렇게 말한다. “유교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한국이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교로 인해 한국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의 억눌린 민중들, 일반적인 빈곤, 믿을 수 없고 잔인한 관리들, 더러움과 불결, 뒤떨어진 여성들, 황폐한 가족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을 보시고 유교가 한국에 무엇을 해주었나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교는 이론상으로는 하나의 체계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유교에서 가장 자랑하는 효도조차도 돌아가신 부모의 영혼에 대한 두려운 경배를 의미하는 것에 불과한 경우도 흔하다. 나이 든 아버지나 어머니가 무시당하고 학대받고 심지어는 서둘러 생을 마치게 할 수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은 무덤 앞에서 규정된 제사를 정확히 지킴으로써 충분히 만회된다. 육신에 갇혔을 때 영혼은 폄하되거나 무시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몸에서 벗어나면 영혼은 있을 수 있는 악한 일에 강력한 영향을 갖고, 그 이후엔 존경받고 존숭받으며 예배의 대상이 된다. 모든 사람들은 세 개의 영혼을 갖고 있다고 믿어진다. 죽은 후에 세 영혼 중 하나는 조상 위패―망자의 이름이 쓰여진 호두나무 목판―에 거하게 된다. 다른 영혼은 육체를 따라 무덤 속으로 가고, 세 번째 영혼은 육신을 가졋을 때의 삶에 따라 하늘로 가거나 “저승 감옥”에 가게 된다. 부모의 죽음 후 삼년 동안 맏아들은 망자가 살았던 방에서 위패 앞에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내고 묘소에 많은 제물을 바친다. 조상 신주 앞에서 행해지는 제사에서 맏아들은 삼베옷을 입으며 두 동생은 절반쯤 상복을 갖춘다. 친구나 친지 셋 중 한 명이 망자의 선행을 회상한다. 다른 때는 한국 가정에서 사용되는 물건이 아닌 의자 위에 위패가 놓여진다. 강요된 통곡, 절, 부복,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제사’를 받아들라고 혼령(shade)에게 고하는 일이 끝난 후, 참석자 모두는 잠시 물러나 영혼이 제사음식의 맛을 평화롭게 흠향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런 후에 돌아와서 음식을 나누어먹고 술을 돌린다. 셋째 해가 지난 후에는 제사 지내야 할 의무가 일년에 네다섯번으로 제한된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제사는, 고향에서 떨어져 있던 한국인들도 모두 나라 가장 먼 곳까지라도 이동해서 무덤 앞에 참배해야 하는 10월 10일이다. 조상제사가 모든 계층―상위 계층뿐 아니라 하위계층까지―에서 지니고 있는 위력은 과소평가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일 때 조상제사는 버리기 가장 어려운, 마지막 일이다. 조상 사당을 무시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가족생활에서나 따돌이―“살 수 없는 배신자 개”―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상 숭배에서 우리는 다음 부류의 종교를 예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조상 숭배가 순수하게 샤머니즘의 기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원시종교는 의심할 여지없이 희미한 유일신론이었지만, 중국인과 한국인들은 항상 악한 정령(evil spirit)들의 존재를 믿어왔고 그들이 인간사에 개입한다고 믿어왔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 신앙은 타락의 전통으로 바로 소급될 수 있을 것 같다. 정령의 힘이 해악과 불운을 가져온다는 믿음으로부터 이를 달래는 제사(propitiatory sacrifice)라는 관념이 생겨났고, 이것이 효도의 교의와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믿음과 결합해서 조상 숭배(ancestor worship)로 귀결된 것이다. 공자는 하늘에 제사드릴/숭배할(worship) 권리는 황제에만 있다고 가르쳤고, 그 가르침은 지켜져 왔다. 그러나 공자가 더 나아가 공자는 영혼 숭배(spiritism)를 돌아가신 부모의 영혼 대한 숭배로만 제한하고자 했을 때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오늘날 한국의 진짜 유교 숭배는 적어도, 미신, 주물숭배, 마법, 그리고 하늘, 땅, 바다에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악령을 달래기 위한 제사가 크게 뒤섞인 샤머니즘 혹은 악령숭배(Demonolatry)이다. 산의 신, 나무와 바위의 요정(genii), 수없이 많은 가신(家臣, household deities)들에 대한 숭배 때문에 끊임없이 종교 의식들이 이어진다. 산길마다 꼭대기에 지어진 작은 절들, 마을 입구마다 모셔지는 나무들, 집집마다 있는 조야한 주물들―볏단, 빈 호리박, 오래된 단지―혹은 더 과장된 상들이 힘 있고 악한 정령(spirit-demon)의 사당을 대표하는 것들이다. 사람들은 삶의 모든 병고의 탓을 이들에게 돌린다. 질병, 역경, 불운, 재앙은 악령들의 불만의 결과에 다름 아니며, 이것은 기도나 제사를 드려서 방지하거나 위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령들이 모두 꼭 악한 것만은 아니며, 때로는 이들에 수호신 관념이 결합되기도 한다. 흔히 집 지붕 위와 둘레를 감싸고 있는 독사는 집을 수호하는 정령의 상징으로 성스럽게 여겨진다. 용의 존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절에 그려진 용의 그림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인들이 용에 바치는 제물을 물 속 깊이 던진다는 보고는 많이 있다. 다른 많은 신화적 동물들도 마찬가지로 여러 수준의 상상력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은, 매우 불완전하고 미약하긴 하지만, 만물 존재의 원인이 된다고 이야기되는 유일한 초월적 존재―하나님, 하늘의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하느님을 예배를 통해 다가갈 수 있는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아버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절망의 극단에서 가망 없이 울부짖는, 두려워해야 할 존재로 알고 있다. 악령(Demon)들만이 한국인들의 예배 대상이다. 불상, 유교 신주, 조상 묘, 혹은 어떤 악령의 제단에 절하든 간에, 한국인은 이 모든 것에 대한 하나의 이름을 갖고 있다. 그것은 ‘귀신 예배(kwesin yaba)’, 즉 악령숭배(demonolatry, or devil-worship)이다. 악령이 씌어서 안녕과 복의 대가로 굿과 제사를 요구할 때를 제외하고는, 한국인들은 그들이 절하는 물질적 대상에 대해서 조금도 존경심을 표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0장 19, 20절에서 바울이 하신 말씀보다 더 좋은 논평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우상은 무엇이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방 사람들이 바치는 제물은 귀신에게 바치는 것이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귀신과 친교를 가지는 사람이 되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이들이 너무나도 타락해서 “마귀와 사탄인 오래된 뱀, 용”에게 “자기 의지로 사로잡혀서” 그들의 사자에게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것이 어찌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 주님이 “마귀의 손아귀로부터” 해방되도록 준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복음을 전해서 암흑으로부터 “빛으로, 그리고 사탄의 권능으로부터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하라는 그분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이 1800년 이상 이러한 운명에 놓여있었던 것은 더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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