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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종교 연구에서의 물질적 전환(소니아 하자드)

by 방가房家 2025. 2. 26.

아래 논문의 번역이다. 물질종교 연구라는, 종교학의 새로운 연구 경향을 소개한 논문의 번역이다. 도식화된 요약과 번역 순으로 수록하였다.

Hazard, S. 2013. “The Material Turn in the Study of Religion”. <Religion and Society> 4(1).

 

 

 

(번역)

종교 연구에서의 물질적 전환

소니아 하자드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물질적 전환을 겪고 있다. 여기서 "물질적 전환"은 물질적 사물과 현상 물체, 관행, 공간, 신체, 감각, 정서 등이 학문적 탐구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었다는 주장을 의미한다. 종교학자들은 자기 분야의 중심 범주에 대한 특별한 도전과 역사적 무게를 맞이하고 있지만, 그들도 이러한 경향에서 예외가 아니다. 16세기 종교 개혁 이후 서구 담론에서 구성된 종교는 여전히 개별 신자에게 사상적 일치를 부여하는 신념 체계라고 주로 정의된다. , 종교는 흔히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으로 묘사되고, 드물게 또는 부차적으로만 물질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종교는 분명히 주관적이고 사적이며 인지적인 것으로 보이고, 구체적이고 매개되거나 느껴지는 것으로는 희미하게만 보일 뿐이다. 종교에 대한 이러한 관념론적 전제들은 종교의 물질적 차원을 보조적 역할로 격하한다. 물질적 차원은 교리, 경전, 고백과 같은 담론적 형태에서 더 완전하게 표현되는, 선행된 신념이나 사상이 약화하여 표현된 것으로 간주된다. 믿음의 우선성은 여러 날카로운 비판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술적, 대중적 담론에 계속 스며들어 있다(: Asad 1993; Fitzgerald 2000; Keane 2008; Morgan 2010; Vásquez 2010). 다른 학자들이 보여주었듯이, 이러한 편견들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다. 이들의 지속은 사회적으로 제도화되고 유지되는 여러 이해관계 종교적, 경제적, 식민지적에 기여한다.

물질성에 대한 이러한 편견을 인식하고 대항하는, 늘어나고 있는 종교학자들 그룹을 물질 종교연구자 혹은 종교와 물질문화연구자라고 부를 수 있다. 그들은 종교가 마음과 텍스트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와 감각을 포함한 물질세계에도 존재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방법론적 연대 덕에 많은 새로운 연구가 나왔다. 예를 들어 성지의 상품화, 일본 불교의 성스러운 물건, 미국 유대교의 새로운 의례 실천, 순바 선교 접촉에서의 기호 형태의 물질성, 푸에블로 춤, 가나의 대량 생산된 예수 성상, 쿠바 팔로에서의 망자와의 관계, 오프라의 미디어 제국의 종교, 미국의 인종화된 예수 이미지, 이슬람 시각 문화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연구를 촉발했다.

그러나 물질성으로의 전환에는 단순히 공백을 채우거나 종교 현상에 대해 더욱 풍부하고 상세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물질종교 학자들이 물질문화를 진지하게 다룬다는 데는 동의하고 있지만, 방법론이라는 중요한 문제가 바로 뒤에 있다. 학자들은 종교의 물질적 형태에 어떻게 접근하고 해석해야 할까? 물질문화를 진지하게 다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특히 오랫동안 다른 쪽을 보도록 훈련된 종교학자들에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답하기 어렵다. 물질종교 연구는 단순한 요약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 분야는 종교학, 인류학, 역사, 미술사, 민속학, 커뮤니케이션 연구, 문화 연구, 지역학이 상호 직조하는 물음을 통해 성장하고 있다. 이 분야는 학제 내부에서도 다른 학문적 체계를 활용한다. 전 세계 크고 작은 종교들에 초점을 둔다.

이 논문은 현재 학문적 풍경을 구성하는 세 가지 반복되는 방법론을 개괄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대안을 설명한다. 여기서 관심사는 물질종교 학문의 계보학이나 "사상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방법론적 경향의 지속적인 가능성과 적용을 조명하는 것이다. 첫 번째 접근법은 물질적 사물과 실천을 그들이 지닌 종교적 의미를 해석해야 할 상징으로 본다. 두 번째 접근법은 권력 문제에 더 주목하며, 종교와 종교적 주체의 형성에 있어 물질적 훈육의 역할을 강조한다. 현상학 전통에 근거를 둔 세 번째 접근법은 인간의 경험과 인지에 영향을 미치는 물질적 사물의 역할에 주목한다. 이 세 가지 접근법은 중요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강한 인간중심주의적 경향을 공유한다. 즉 물질적 사물은 인간 주체와 신체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주는 한에서만 분석에 포함되어, 인간적인 것이 여전히 특권적인 분석 대상으로 남는다. 인간에 대한 공통적 관심으로 인해, 이들은 인간의 감각이나 지식의 지평을 넘어선 사물의 다양한 활동을 간과할 수 있다. 따라서 오랫동안 물질성의 부정을 전제로 해온 종교 연구의 편견들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할 수 있다. 그러나 잠정적으로 "신유물론"이라 명명된 새롭게 등장한 네 번째 접근법은 이러한 맹점을 더 성공적으로 벗어난다. 인간 중심적 접근법과 달리, 신유물론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선험적 대립을 거부한다. 사물들이 더 이상 인간 주체의 렌즈를 통해 완전히 알려질 수 없기 때문에, 학자들은 사물 자체의 물질성에 더 면밀하게 주목하게 된다. 종교학자들이 신유물론의 분석적 가능성을 탐구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것이 학문적 탐구를 위한 더 나은 문제들을 열어줄 잠재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네 가지 방법론을 구분하는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물질종교 연구에 있어 접근 방식의 명확성을 높이는 것이다. 불가피하게도 이 목적은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았다. 어떤 분류 체계 도식도 그것이 정의하고자 하는 다양한 데이터 배열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많은 학자들이 자신의 방법론을 명명하거나 설명하기를 꺼리며, 이러한 분류를 인식하거나 확정하지 않는다. 다른 학자들은 자기 방법을 분명히 밝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동시에 여러 방법을 끌어들인다.

이 논문은 이러한 험난한 지형 위에 오늘날의 주도적 방법론들의 지도를 그리려 시도한다. 결정적이라는 태도도 취하지 않고, 이러한 방법들이 항상 명확하게 구분되거나 상호 배타적이라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종교적 물질문화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방법론적으로 더욱 세심해지고, 물질문화가 자체로 해석되거나 투명하게 접근할 수 있는 것처럼 진행하기보다는 특정 접근법의 전제, 한계, 장점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두 번째 목적은 첫 번째 목적에서 파생된다. 제시된 방법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다른 종류의 작업을 수행하는 별도의 방법들을 개발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 논문은 방법론적 대안으로 "신유물론"을 지지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물질적 사물 자체에 더 충실해지는 움직임을 북돋고자 한다.

 

 

상징으로서의 사물

 

첫 번째 접근법은 물질적 사물과 실천을 의미와 사유의 상징으로 다룬다. 이 견해가 널리 퍼진 것은 주로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의 작업으로부터이다. 1970년대 초부터 여러 학문 분야에 걸쳐 현대 종교 연구에 미친 그의 영향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잘 알려져 있듯이 기어츠(1973: 91)는 종교를 언어나 텍스트처럼 작용하는 상징 체계로 정의했다. 종교의 물질적 실천과 대상예를 들어 성지, , 순례, 부적은 내면의 종교적 의미, 즉 우주적 질서에 관한 근본적인 믿음, 가치, 태도, 사유를 담는 용기 역할을 하는 외부 상징으로 기능한다. 다시 말해, 물질적 사물은 종교의 청사진이나 진정한 본질로 여겨지는 다른 무언가를 구현한다. 믿음과 의미와 같은 관념적이고 비물질적인, 일차적이고 환원 불가능하며 독립적인 무언가를 구현한다는 것이다. 학자는 이러한 상징을 얼마나 정확하게 읽거나 해독하는가에 따라 능력이 측정되는, 기본적으로 기호학자가 되었다. 종교 문화의 유능한 해석자라면 예를 들어 승려의 빈약한 식단에서 체중 감량을 위한 거식증적 추구가 아닌 열반을 향한 금욕적 추구의 징후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올바로 본다면 금 십자가는 죽음의 최종성이 아니라 부활의 약속을 상징하게 된다.

인간의 의미에 대한 기어츠적 관심은 물질문화 연구가 하나의 연구 분야로 시작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아르준 아파두라이는 그의 중대한 편집본 사물의 사회적 삶(1986)에서 물질적 사물이 정확히 특권적 의미 전달자로서의 지위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얼핏 보면 아파두라이는 인간의 프로젝트와 별개로 사물 자체에 관심을 쏟는 것처럼 보였다. 사물에 오랫동안 받아야 할 주목을 주기 위해, 그는 학자들이 물질적 사물을 더 인간과 같은 것으로 여기고, 따라서 마치 사물이 경력, 생애, 사회적 삶을 가진 것처럼 시공간을 통해 물질적 사물 자체를 따라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아파두라이(1986: 5)는 자신의 접근법이 물신주의로 간주될 가능성을 부인하며 "방법론적 물신주의(methodological fetishism)"라는 표현을 선호했다. 그는 사물 자체에 대한 높아진 관심이 사물 그 자체에 대한 물신주의적 관심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의미를 밝혔다. 왜냐하면 사물은 "인간의 거래, 귀속, 동기가 부여하는 것 외에는 의미가 없는" 불활성 물질일 뿐이기 때문이다(ibid.). 대신 사물은 문화에 대한 정보의 담지자로 접근되어야 했다. , 인간의 의미를 의미하는 본질적으로 기어츠적인 기호로서 말이다. "그들의 의미는 그들의 형태, 용도, 궤적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ibid.). 이 책의 한 기고자가 제시한 예시인 수쿠 오두막의 전기는 수쿠 마을 사람들과 세심한 분석가에게 중요한 문화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방문객이 환대보다는 음식 준비에 더 적합한 낡은 오두막에 머문다면, 그것은 그녀의 열등한 사회적 지위를 지시할 것이다(Kopytoff 1986: 67). 요약하자면, 사물에 대한 주목은 인간 문화, 그 관념화, 그리고 의미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기능한다. 사물은 학자들이 달리 접근할 수 없는 인간의 주관성이나 사회에 대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다.

물질종교 연구에서 사물에 대한 상징적 접근은 지속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출간된 멕시코 십자가의 전기(傳記)(2010)에서 역사학자 제니퍼 셰퍼 휴즈는 중앙 멕시코 토톨라판의 시골 나우아와 메스티소 공동체에서 '크리스토 아파레시도'로 알려진, 3피트 높이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조각상이라는 특별한 물건의 사회적 생애를 서술한다. 아파두라이의 방식을 따라, 그녀는 토톨라판 신자들의 종교와 문화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크리스토의 시공간을 통한 여정을 추적한다. 예를 들어, 16세기 중반 원주민 공동체가 스페인 수도사들의 크리스토를 죄와 고통에 연관시키려는 시도를 거부한 것은 스페인과 원주민 기독교 사이의 복잡한 문화적 교섭을 나타낸다. 그 생애의 또 다른 에피소드로, 성상이 19세기 중반 멕시코시티에서 오랜 머문 후 축복받으며 토톨라판으로 복귀한 일은 두 가지 더 큰 종교 현상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도시의 부르봉 시대 세속주의자들과 개혁가들 사이에서는 종교 성상에 대한 평가 절하가 있었고, 토톨라판 신자들 사이에서는 민간의 실천과 집단 종교 정체성이 만연했다. 요약하면, 이 하나의 물체는 물질적으로는 작을지 몰라도 상징적으로는 밀도가 높다. 그것은 주변 주체들의 더 큰 문화적, 종교적 풍경의 "소우주"로 기능한다(ibid.: 5). 휴즈(2012: 442)가 후속 논문에서 설명하듯이, 크리스토에 대한 그녀의 관심은 "물체에 대한 이론적 호기심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출발점은 "신자들과 실천자들 자체에 가까이 머물고 실제 물질적 현실과 그들 삶의 조건에 가까이 머물겠다는 헌신이었다"(ibid.). 휴즈가 보기에 물질적 사물의 사회적 생애를 추적하는 것은 그 사물과 관계를 맺은 나우아 주체들의 종교 문화의 측면을 드러내는 전략이었다.

 

물질적 훈육

 

상징적 접근법은 인기가 있지만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것이 소개된 지 오래지 않아, 20세기 중반의 사회적 격변 이후 등장한 후기구조주의와 관련 담론의 부상은 기어츠적 작업의 특징인 관념의 우선성과 자유에 대한 학문적 가정에 심대한 도전을 제기했다(: Foucault 1995; Derrida 1998). 이러한 논의에 주목한 많은 종교학자들은 종교적 주체의 몸과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힘을 강조했다. 그들은 물질적 사물과 실천을 인간의 의미 부여에 순응하는 기호와 동일시하는 것이 관념에 과도한 권위를 부여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와 반대로 그들은 물질적 사물과 실천이 순순히 의미를 의미화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것들은 단순히 선행하는 생각이나 믿음의 표현이 아니다. 인간의 의도나 심지어 인지와도 관련이 없을 수 있다. 대신 그것들은 인간의 주체성을 훈육하는 방식으로 권력의 적용자 역할을 하며, 따라서 그 가능성의 조건, 즉 관념과 믿음의 바로 그 조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한마디로, 사물은 인간에게 작용하고 인간을 형성한다. 아마도 우연하지 않게 이러한 주장은 훈육이라는 내재적 범주와 탈식민지 맥락에서의 권력 행사의 결과를 잘 알고 있는 이슬람학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종교 연구에서 물질적 훈육에 대한 강조는 인류학자 탈랄 아사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는 종교적 믿음과 의미에 대한 기어츠의 가치 부여가 그것들을 구성하는 물질적 실천과 훈육에 주목하지 않고 순진하게 종교를 권력에서 분리한다고 주장한다. 아사드의 설명에 따르면, 종교적 사물, 실천, 발화는 단순히 근본적인 믿음이나 의미의 외적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특정 역사적 순간에 동기가 부여되고 규제된 행동, 혹은 훈육에 의해 촉진된다. 그는 "그들의 가능성과 권위적 지위는 역사적으로 독특한 훈육과 힘의 산물로 설명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1993: 54). “훈육은 아사드에게 강력한 개념이다. 그것은 법, 인식된 신의 제재, 가족의 기대, 교실 교육, 금식, 참회 및 무릎 꿇기와 같은 규정된 물질적 실천의 반복적인 습관화와 같은 강압적 힘을 포괄한다(Asad 1983: 242243). 이러한 훈육은 느리고 미묘하지만 그만큼 더 강력하다. 예를 들어 금식은 승려의 몸을 금욕주의 체제로 교육한다. 마찬가지로 학교의 의식은 아이의 몸을 지도에 요구되는 앉는 자세에 익숙한 존재로 서서히 만들어간다. 이러한 훈육은 근본적이다. 예를 들어, 기어츠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신자의 무릎 꿇기 관행을 그녀의 경건함과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대신 무릎 꿇기 실천은 실제로 신자를 얼마나 진심으로 느끼는가와는 별개로 경건함과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권위적이고 심지어 가능해지는 일종의 주체로 훈육한다.

사바 마흐무드는 경건의 정치(2004)에서 이집트 모스크 운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에 대한 민족지를 통해 아사드의 연구를 강화했다. 마흐무드는 그녀의 대화 상대자들이 인간 주체가 신체적 훈육과 습관의 체계 안에 얽혀 살아가는 정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마흐무드는 종교적 주체들이 이러한 물질적 훈육에 의해 구성된 방식으로 실천하고 사고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훈육이 마음이나 감정의 겉보기에 내면적이고 무제약적인 상태보다 우선시된다. 예를 들어 이집트 여성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히잡 착용에 익숙해지는 것은 실제로 그녀에게 경건함과 겸손의 상태를 함양한다. 비록 그러한 종교적 덕목의 함양이 그녀의 원래 의도가 아니었을지라도 말이다(Mahmood 2004: 2324, 157161). 따라서 히잡은 단순한 경건의 상징이 아니다. 사물로서 히잡은 신체를 훈육한다. 즉 착용자에게 습관의 힘을 행사하여 경건의 상태로 만든다. 경건이라는 그 주체의 상태는 결코 그것을 구성한 물질적 사물과 실천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현상학

 

현상학은 종교적 물질문화에 대한 세 번째 접근법을 제시한다. 이 복잡하고 다학제적인 전통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지 않고 말하자면, 현상학은 인간의 경험과 의식을 분석의 중심 범주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의 목적을 위해 현상학은 "개인이나 집단의 의식에 나타나는 현상에 관한 연구", 또는 간단히 말해 "우리의 삶의 경험에서 나타나는 사물에 관한 연구"로 이해될 수 있다(Desjarlais and Throop 2011: 88). 즉 현상학은 인간 주체에게 나타나는 경험적 현상에 관심을 두며, 이는 세계에 대한 객관주의적 설명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전통은 또한 주체들 사이에서 지적 인식의 수준으로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자명하고 주어진 실재 혹은 "생활세계"로 인식되는 것을 구성하는 일상적이고 친숙한 경험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Husserl 1970). 현상학자들은 지난 10년간 종교적 물질문화 연구에서 우위를 주장해 왔다. 예를 들어 학자들은 네팔의 욜모 불교도, 미국의 노동자 계급 가톨릭 신자, 에티오피아의 페레스 무라 유대인, 그리고 태국과 미국에서의 초자연적 경험을 연구하기 위해 현상학을 활용해 왔다(Desjarlais 2003; Orsi 2005; Seeman 2009; Cassaniti and Luhrmann 2011). 최근 일부 종교학자들은 인간의 감각기관의 현상학적 중심성을 강조하는 "감각 문화"로 물질문화를 확장할 것을 주장했다(Promey and Brisman 2010).

데이비드 모건은 물질 종교의 현상학적 연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학자 중 한 명을 대표한다. 그는 특히 인간의 신체를 의식과 경험의 장소이자 외부 물질세계와의 주체적 인터페이스로 주목한다. 모건(2010)에 따르면 종교는 주로 감각의 한 형태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물질적인 신체 과정을 통해 보이고, 들리고, 맛보이고, 만져지고, 상상된다. 이러한 신체 과정에는 외부 세계로부터의 감각(예를 들어 순례를 가거나, 이미지를 보거나, 기도하며 무릎을 꿇는 것)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 또는 상상력을 통해(환영, , 환시, 환각의 형태로) 생성되는 감각도 포함된다. 모건(2012: 5-16, 55-83)은 최근 현상학적 경험을 개인 신체에 의해 느껴지는 것뿐만 아니라 더 확장하여 신체들의 집단 또는 사회적 신체에서도 탐구했다. 그는 상호주관적 감각 경험, 특히 시각이 이러한 집단적 경험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주장한다.

물질문화의 현상학적 설명에서는 인간 신체의 물질성이 외부 물질적 사물들보다 더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다. 사물들은 신체의 인터페이스를 통해 감각과 인식으로 전달되는 한에서만 분석적 중요성을 유지한다. 그것들은 인간의 경험 외부에서 연구될 필요가 없다. 모건(2010: 73)에 따르면, "물질문화는 단순히 물건이나 건축 기초 또는 보석이나 그림만이 아니다." "사물들은 사물들 이상이다. 그들의 가장자리는 우리가 그들을 인식하고 배치하는 데 의존하는 가치 체계로 흐려진다. 그들의 경계는 실천 속에서 배치되면서 흐려지고, 감정의 매개체 속에서 신체와 공간으로 융합된다. 사물은 우리의 활동을 이끄는 목적과 필요에 따라 존재하거나 부재한다." 사물들이 자체적인 독립적 존재를 가지고 있다는 점그들만의 무게, 색깔, 모양, 질감, 중량 등은 이 설명에서 부차적인 것으로 남는다. 결국 그들은 "사회적 행위자, 개인, 인간이 자리를 잡는 무대"로서 작용하는 한에서만 중요하다(ibid.).

종교학자들이 주목하기 시작한 인지 신경과학 분야의 연구는 대체로 이러한 현상학적 관점을 지지한다. 예를 들어 인지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시오는 모건과 같은 현상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의식과 그 신체적 기반에 관심을 갖는다. 다마시오(1999: 11)에 따르면, 의식은 "물체의 물리적 구조가 신체와 상호작용할 때" 발생하며, "대상과 자아를 함께 가져오는 통합된 정신적 패턴"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믿음, 반성, 논리와 같은 모든 생각은 그 근본적으로 신체적인 의식에서 발생한다. 비교적 새로운 분야인 신경현상학은 인지과학과 경험에 대한 현상학적 설명을 결합하려고 한다(Varela 1996; Thompson 2007). 신경현상학은 특히 불교 명상에 관한 종교 연구에 열정적으로 적용되어 왔다(Varela et al. 1991; Wallace 2003; Lutz et al. 2007).

현상학은 이미 논의된 두 가지 접근법과 대조된다. 한편으로 종교적 물질문화의 상징적 설명과 달리, 현상학적 접근에서 물질적 신체와 사물은 그들이 의미하는 근본적인 믿음을 찾기 위해 뒤져봐야 할 기호가 아니다. 현상학자들은 물질적 실천과 사물에 선행하고 관념적인 무언가의 증거로 취하기보다는 그것들의 풍부하게 체화된 효과에 주목한다. 그들은 사물이 인간의 신체와 감각기관에 의해 인식, 감정, 기억, 상상, 실천의 형태로 등록된다고 주장하며, 이는 담론적 또는 상징적 설명으로 환원될 수 없는 방식이다. 종교는 해석되고 인지될 뿐만 아니라, 느껴지고 만져지고 들리고 냄새 맡아지고 보입니다. 사물들은 인간과 깊이 신체적인 관계단지 또는 주로 기호학적 관계가 아닌를 맺는다. 다른 한편으로 현상학적 경험은 신체에 대한 공통된 관심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훈육과 동등하지 않다. 훈육적 접근법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상학은 그 신체에 가해지는 훈육보다는 감각하는 신체 자체에 더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권력의 작용은 현상학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나 종교적 물질문화에 대한 세 가지 지배적 접근법은 그들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분석에서 인간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사성을 공유한다. 상징적 접근법은 물질적 기호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다. 훈육적 권력에 대한 강조는 우리가 그 권력에 의해 어떻게 구성되는지 묻는다. 현상학자들은 사물이 우리의 생생한 경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자 한다. 작동하는 용어우리, 우리의는 여전히 인간 중심적이다. 물질성에 관한 이 모든 논의에도 불구하고, 방법론적 수준에서 인간 주체는 여전히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며, 인간의 경계 밖의 물질적 사물들은 주변부로 밀려난다. 인류학자 웹 킨은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를 자신의 분야에서 물질문화에 대한 학문의 강한 성향으로 간주한다. 인류학자들이 물질적 사물과 관행을 고려할 때, 그들은 이것들이 "다른 무언가에 대한 증거로 기능할 것"(2008: S110)을 기대하며, "주로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세계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데 있어서"(2006: 197) 그렇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우리는 킨의 관찰이 종교에 대한 학제간 물질 문화 연구로도 확장될 수 있음을 본다.

종교학자들은 물질적 사물이 인간 중심적 참조를 지니는 한에서만, 즉 인간 경험, 사고, 문화, 또는 주관성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한에서만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헌신은 종교학자들이 상징을 통한 인간의 관념화, 훈육을 통한 인간 주체 형성, 또는 현상학적 분석을 통한 인간 경험을 강조하든 변함없이 유지된다. 우리는 이러한 접근법들을 특징짓는 일종의 방법론적 우회성을 볼 수 있다. 학자들은 물질세계로 잠깐 들어갔다가 인간의 관심사라는 더 편안한 모래사장으로 급히 후퇴한다. 결과적으로 세 가지 지배적 접근법의 종교학자들은 물체에 대해 특정한 질문들만 던진다. 그 윤곽이 사고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인간의 것인 질문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물질적 전환'은 단지 부분적인 선회일 뿐, 여전히 같은 자리에 뿌리를 둔다고 느껴질 수 있다. 완전한 전환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새로운 유물론: 인간과 비인간의 집합체

 

새롭게 등장하는 이론적 문헌들은 종교학에서는 아직 낯설 텐데, 이들은 물질성에 대한 앞의 세 가지 지배적 접근법의 특징인 인간중심주의와 결별한다. 이 네 번째 대안적 접근법과 관련된 학자들은 물질적 사물들이 인간의 감각이나 지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놀라운 범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물질적 사물 자체의 물질성을 신중히 고려해야 하며 단순히 인간의 관심사에 대한 함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신유물론"이 이러한 맥락의 작업을 설명하는 가장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명칭으로 나타났다. 이 용어는 1990년대 후반 철학자 마누엘 데란다와 로지 브라이도티가 서로 독립적으로 만들어냈다(Dolphijn and Van der Tuin 2012: 93).

신유물론은 빠르게 성장하는 대화이다. 일부 이론가들은 명시적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상세히 설명하고 있고(: Coole and Frost 2010; Dolphijn and Van der Tuin 2012), 다른 이들은 예술(Bolt and Barrett 2013), 신자유주의 비판(Connolly 2013), 생태비평(Iovino and Oppermann 출간 예정)에 그 통찰을 적용하려 노력한다. 여러 사상가들은 "생기 유물론"(Bennett 2010), "행위자-네트워크 이론"(Latour 2005), "행위적 실재론"(Barad 2007), "초신체성"(Alaimo 2010), "포스트휴머니즘"(Braidotti 2013), "객체지향 존재론" 또는 "객체지향 철학"(Bryant 2011; Bogost 2012; Morton 2013)이라고 불리는 유사하거나 인접한 이론적 입장을 발전시켰다. 더 많은 학자들이 이름을 붙이지 않고 유사한 이론적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Gell 1998). 나는 적어도 현재의 목적을 위해 이러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신유물론"이라고 부르는 것을 고수한다. 이 용어는 최소한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조작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질성 연구에서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움직임이다.

이 넓은 신유물론 분야(및 그 주변)에서 작업하는 많은 학자들은 질 들뢰즈와 그의 협력자 펠릭스 가타리의 작업에 공통된 지적 계보를 둔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특히 이분법이나 변증법의 논리, 주체와 객체 사이의 대립을 드러내는 것을 넘어서고 노력하면서 신유물론을 위한 결정적인 철학적 이정표를 계속 제공해 왔다. 이는 대담하고 특이한 움직임이었다. 인간 주체가 문자 그대로 물질적 객체를 "물체화"(objectifying)하면서 물질적 객체와 분리되어 초연하게 존재하는 주체/객체 관계는 비판 이론(: Marx 1972; Adorno 1973; Hegel 1977)과 근대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상식적인 방식에서 여전히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비인간 객체와 존재론적으로 또는 변증법적으로 분리된 개별 인간 주체라는 기존 모델 대신 매우 다른 세계를 제시했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소위 주체와 객체라고 불리는 것들이 서로 뒤섞이고, 협력하고, 융합한다. "아상블라주"(Assemblage)는 이른바 주체/객체 분할을 따르지 않는 혼종적 형성물을 가리키는 그들의 용어이다(Deleuze and Guattari 1987: 325; 3441; 7173; 8891; 32337; 5035). 이후 다른 이들이 아상블라주 이론을 확장했다(: DeLanda 2006: 1025, 2846; Bennett 2010: 2038).

아상블라주는 우리가 보통 별개이거나 변증법적으로 대립된 실체로 간주하는 이질적인 것들이 제멋대로인 얽힌 것이다. 이들은 인간과 비인간, "주체""객체" 모두를 포함하는 실체들로 구성된다. 또한 "자연"(: , 미생물, 신체 부위, 허리케인, 쿼크)"문화"(: 언어, 가부장제, 전쟁, 소다병, 성경, 사원, 요리책, 성지)와 연관된 것들을 모두 포함할 수 있다. 그리고 조각상, 나무, , , 동물, 우산과 같은 인식 가능한 요소들뿐만 아니라 라디오파, 자기력, 음악의 진동, 페로몬 입자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거나 공간적으로 제한되지 않지만 여전히 물질적 효과나 강도를 발휘하는 것들도 포함할 수 있다. 아상블라주의 핵심 특징은 각 요소가 다른 요소들에 영향을 미치거나 수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안에서 종속이나 우위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 더욱이 아상블라주는 쉽게 체계화되거나 개념에 담기지 않는다.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비록 일시적으로 안정될 수 있지만). 대신 이들은 임시적이고 개방적이며 과정적이다. 항상 다른 이웃 요소들과 다른 형태로 해체되고 재조립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한 아상블라주의 구성 부분들은 동시에 다른 규모의 다른 아상블라주들에 연결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의 목적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아상블라주가 인간 주체만을 중심으로 한 분석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우리의 이분법적 또는 변증법적 사고 습관 때문에 분리된다고 생각하더라도, 인간과 사물은 깨끗하게 구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인간과 사물은 협력적이든 대립적이든 근본적으로 상호 구성적이어서, 그들 사이의 구분이 흐려질 뿐만 아니라 실제로 더 이상 전혀 유지될 수 없는 정도에 이른다. 아마도 들뢰즈와 가타리(1983: 2)가 이를 가장 잘 표현했을 것이다. "이제 인간이나 자연이라는 것은 없고, 오직 하나를 다른 하나 안에서 생산하는 과정만이 있다... 자아와 비자아, 외부와 내부는 더 이상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다." 인간, 비인간, 자연, 문화, 주체, 객체, 이 모든 것들은 아상블라주에서 "하나의 동일한 본질적 현실"이다(ibid.: 5). 그들은 단일한 존재의 차원에 존재한다. 그들을 나누는 단단한 경계, , 또는 용기 없이, 인간과 사물은 지속적으로 공존, 상호 의존, 통합 관계에 들어간다. 이론가 제인 베넷(2010: 32)의 표현에 따르면 비인간 사물과 그들의 인간 동반자 모두를 활성화시키는 "생기의 무리"에 들어간다.

아상블라주는 더 나아가 행위성세계 내에서 영향을 미치는 능력이 인간과 같은 의도적 행위자의 고유한 영역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에 도전한다. 아상블라주에서 사물들은 불활성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 의도의 수동적이고 유연한 도구가 아니다. 또한 그들은 단순히 인간 의지의 실현을 방해하거나 적대시하는 제약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더 확장해서 사물은 베넷(2010: viii)이 말하듯 "자신만의 궤적, 성향, 또는 경향을 가진 준행위자 또는 힘"으로서 생성적 힘을 발휘한다. 그들도 행위성을 발휘하며, 이는 아상블라주 전반에 걸쳐 실현된다. 여기서 암시된 방법론은 사물이 힘을 가졌다는 듯이장난스럽게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상블라주의 개념을 사용하여 우리의 뿌리 깊은 사고와 인식 습관을 완화하고, 사물의 일상적 힘이 부각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인간의 의지와 행동이 더 큰 그림의 작은 부분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사물이 힘을 가진다는 주장은 처음에는 터무니없게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이론가이자 인류학자인 브루노 라투르는 그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서 이 아이디어를 매우 명확하게 제시한다. 여기서 우리의 목적에 맞게 "네트워크" 개념이 "아상블라주"와 얼추 비슷하다고 하자. 그는 미국 총기 협회(NRA)의 중심 주장에 대한 분석에서 이 개념을 설명한다(1999: 176180). 라투르에 따르면, NRA"총기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사람만이 사람을 죽인다"라는 주장은 총기와 같은 물질적 사물을 인간 의지의 부지런한 도구로 간주하는, 보다 인간 중심적인 행위성 이해에 기반하고 있다. 반대로 라투르는 사람이 총기를 집어 들면 그 사람은 이전과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총기는 인간과 연결될 때 새로운 네트워크나 아상블라주를 형성하여 특정 종류의 행동, 특히 살인을 가능하게 하거나 강화한다(아무튼 누군가가 장미 꽃다발을 만들기 위해 총기의 총신을 사용할 일은 없을 것이다). 총기의 폭력적 잠재력에 대한 공유된 인간 인식예를 들어 뉴스나 영화에서 비롯된은 소지자의 감정적 반응을 유도하여 그가 강하고 위험하다고 느끼게 할 수 있다. 총기의 물리적 무게와 표면의 윤곽 및 질감은 그러한 감정을 강화하고 폭력에 대한 경향성을 강조할 수 있다. 방아쇠는 손가락에 맞게 형성되어 총알의 인간적 작동을 유도한다. 그리고 물론 총알의 속도는 누군가가 맨손으로 살인을 시도하는 것보다 훨씬 쉽게 살인을 가능하게 한다. 라투르에 따르면, 사람이 총기로 살인할 때 단순히 그 사람이 죽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큰 아상블라주가 죽이는 것이다. 그 살인적 행위성은 손가락, 방아쇠, 총알, 인간의 뇌, 폭력적인 영화 등 여러 부분에 분산되어 있다. 행위성은 항상 복잡한 행위성이며, 인간과 사물의 아상블라주 전반에 걸쳐 분산되어 있다.

라투르의 예시는 상대적으로 작은 아상블라주를 제시하지만, 아상블라주는 조사 대상이 되는 특정 문제에 따라 다른 규모로 작동한다. 아상블라주는 사회 전반에 걸쳐 넓게 확장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정치 이론가 윌리엄 코놀리(2008: 39-41)는 오늘날 미국의 지배적 힘이 복음주의와 자본주의의 요란한 아상블라주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그 자체로 다양한 인간과 비인간 요소들의 이질적인 아상블라주로, 서로를 증폭시키고 강화하며 그들의 복잡한 중첩으로 인해 더욱 강해진다. 아상블라주는 또한 행성 규모일 수 있다. 생태비평가 티모시 모턴(2013)은 오늘날의 생태 위기가 인간에 대한 신자유주의 모델, 자동차 배기가스, 허리케인, 상품의 이동 등을 포함한 어지러운 양의 상호 구성적 인간 및 비인간 요소로 구성된 거대한 아상블라주(또는 그의 용어로 "초객체")로 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상블라주는 라투르의 예시보다 훨씬 더 작을 수도 있다. 생물학 연구를 바탕으로 베넷(2010: 112)은 평균적인 사람의 팔꿈치 안쪽이 인간과 비인간 실체의 미세 아상블라주로 기능한다고 지적한다. 여기에는 6가지 다른 종류의 박테리아가 살면서 피부의 원료 지방을 처리하여 피부를 촉촉하게 유지한다. 아상블라주는 모든 규모에서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학자로서 지구 온난화, 피부 과학, 총기 폭력의 증가 등 우리의 비판적 관심을 끄는 특정 문제를 부각하기 위해 아상블라주의 윤곽을 그릴 수 있지만, 아상블라주의 다양한 미시적, 지역적, 사회적, 행성적 규모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미시와 거시는 불가피하게 서로 마주치고 겹치게 된다(DeLanda 2006: 4-7, 32-46 참조).

이러한 다양한 아상블라주의 예시들은 신유물론이 사물 자체에 대한 무비판적인 전환을 의미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중요한 것은 완고한 물질적 증거에 대한 과장된 해석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사물이 어떤 신비하거나 신격이 부여한 힘을 소유한다고 가정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다른 이름의 애니미즘(영혼이 사물에 거주한다는 믿음)이나 생기론(신격이 사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믿음)이 아니다. 신유물론은 확립된 지식이 규정한 바를 넘어 생각할 의지를 요구하지만, 여전히 매우 현실적이다. 중요한 것은 경험적 방식으로 진행하여,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 또는 변증법적 분리를 가정하지 않을 때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아상블라주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신유물론은 우리의 인간중심적 편견에 반대하면서 실제 사물이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그 현실이 처음에는 아무리 왜곡되어 보일지라도볼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비전은 신유물론의 비평가들에게는 다소 지나치게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가장 일반적인 비판은 신유물론이 주관성과 같은 더 전통적인 인문주의적 범주와 언어, 재현, 의미화, 의식, 믿음 등 주관성에서 파생된 다른 범주들근대성(그리고 종교의 현대적 연구)에서 오랫동안 가치 있게 여겨진 범주들을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유물론자들은 반드시 학자들에게 이러한 범주들을 전면 폐기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학자들에게 이러한 범주들을 지방화할 것을 요청한다. 이론가 다이애나 쿨과 사만다 프로스트(2010: 20-21)는 이러한 범주들을 "결코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자기 생성적 자연의 분산된, 우연한 산물"로 보고, "그 기원에서 지울 수 없이 물질적"인 것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데란다(2012: 46)는 주체를 "문자 그대로 습관적 행동에 의해 구조가 주어지는 (, 소리, 향기, , 질감)의 강도들로 구성된" 것으로 설명한다. 코놀리(2013: 400)는 신유물론의 인간 주체관을 간결하게 요약하여 "실재적 형성물이지만 동시에 사물의 근본적 토대가 아닌 것"이라고 말한다. 요약하면 신유물론자들에게 주체와 언어와 같은 그 수반물들은 더 이상 모든 것이 의존하는, 주어지거나 근본적인 범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다른 아상블라주들의 내재성에 접혀 있는 특정 종류의 물질적 아상블라주로 여겨진다. 즉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이 객체화하던 물질과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종교에 대한 신유물론적 연구는 여전히 언어, 주관성, 믿음과 같은 범주들을 통해 움직일 수 있지만, 그것들에 멈추지 않을 수 있다. 이들은 이러한 범주들을 아상블라주의 구성요소로 고려하고 통찰을 제공할 수 있지만, 더 이상 그들의 학문적 시선의 움직임을 결정하고 모든 기획이 결국 귀속되는 유일한 중력의 중심이 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신유물론이 종교 연구에서 더 일반적인 물질문화에 관한 세 가지 관점과 다르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상징적 접근법과 달리 신유물론자들은 물질이 텍스트로 환원되거나 교환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물들은 기호학적 의미에서의 "객체"가 아니다. 그들의 힘과 가치는 그들에 앞서 존재하는, 사고하고 말하는 주체에 의해 배타적으로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상학자들과 더 유사하게 신유물론자들은 사물들이 관념화나 의미화로 환원될 수 없는 방식으로 문화적 작업을 수행하는 감각적 실체로 이해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실제로 현상학 전통의 이점은 생생한 경험에 주목할 수 있게 하여 배타적으로 담론적이거나 기호학적인 문화와 현실 모델을 넘어설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현상학자들은 이미 인간의 신체성, 즉 물질성을 강조함으로써 주체와 객체 사이에 전제된 분리를 흐리게 한다.

그러나 신유물론자들은 현상학자들보다 더 급진적으로 인간 주체를 탈중심화하려고 한다. 현상학은 인간 주체, 즉 표피의 경계 내에 담긴 것으로 추정되는 의식과 경험을 분석의 중심 범주로 삼는다. 이러한 관점은 자의적으로 물질성을 감각하는 신체에만 제한한다. 또한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완충된" 개인의 역사적으로 우연한 구성(Taylor 2007: 37-42에서 설명된 대로)을 암묵적으로 보편적이고 주어진 인간 모델로 고정시킬 수 있다. 현상학자들과 반대로 신유물론자들은 인간의 인식, 인지, 사용과 독립적인 물질세계가 분석적 주목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인간에게 우선권을 부여하지 않고 인간과 비인간 사물 및 힘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더 폭넓게 초점을 맞춘다. 신유물론자들은 또한 현상학자들보다 더 나아가, 우리가 표면적인 인간으로서 인간과 비인간의 변화무쌍한 아상블라주라고 제안한다. 인간 신체의 물질 덩어리뇌와 신경계, 뼈와 장기는 외부 세계와 결코 단절되지 않고, 음식, 공기, 금속 판, 미생물 및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다른 것들과 지속적으로 뒤섞인다. 즉 인간은 단일 유기체가 아니라 다양한 유기체와 물질 형태의 아상블라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간은 흔히 부여되는 일관성과 예외주의의 일부를 잃기 시작한다. 신유물론자들은 더 나아가 종종 인간의 현상학적 감각이나 느낌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요소들이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 모두를 포함하는 매우 물질적인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강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리는 귀에 울리는 외부 진동이다. 냄새는 코로 들어오는 비인간 입자이다. 슬픔이나 기쁨과 같은 감정은 혈액의 화학 물질과 신경의 흥분과 관련된 다공성 생리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신유물론자들은 물질적 훈육 학자들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특히 인간의 행동을 지시하고 믿음을 형성하는 사물의 힘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신유물론자들은 문화 생산 과정이 한편으로는 비인격적 훈육 구조와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주체 사이의 변증법적 협상이라고 가정하지 않는다. 신유물론적 관점에서는 주관성과 구조 사이의 개념적 이분법이 없다. 주체나 구조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역사적이고 감각적으로 특정한 방식으로 조립되는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문화의 이질적인 물질적 요소들의 배열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유물론은 깊이 반환원주의적이다. 어떤 특정 아상블라주도 더 큰 훈육 구조나 현상학적 개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 아상블라주는 오직 특정 시간에 특정 배열로 환원 불가능한 물질적 충만함 속에서만 존재한다. 다양한 요소들이 조립되는 방식은 훈육적 접근에서와 같이 권력의 효과에 민감하게 남아 있지만, 권력은 더 이상 외부에서 적용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대신 권력은 아상블라주의 편재성 속에 안겨 있다. 일정 기간 동안 특정 형태로 응고될 수 있지만, 결코 불침투성 "구조"와 동등하지는 않다.

신유물론은 종교 연구에서 겨우 채택되기 시작했다. 그 이론과 방법에 대한 명시적인 참여는 여전히 드물지만(: Ochoa 2010), 일부 초기 연구 영역이 추가 조사를 위한 비옥한 토양을 제공한다. 종교와 기술의 교차점에 관한 학문은 그러한 영역 중 하나로, 특히 커뮤니케이션 연구 학자 제레미 스톨로우의 편집 도서 데우스 마키나(Deus in Machina)(2013)의 선구적인 작업을 고려할 때 그렇다. 여기서 스톨로우는 그가 "도구주의"라고 부르는 것, 즉 기술이 선행하는 종교적 의도를 더 잘 충족시키기 위한 유연한 도구 역할을 한다는 종교학자들 사이에 흔한 개념을 명시적으로 거부한다(ibid.: 7-10). 스톨로우에 따르면, 도구주의는 한편으로는 종교를 인간 행위성과 동일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을 불활성 물질성과 동일시하는 잘못된 이분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상블라주""신유물론"과 같은 용어가 그의 설명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의 분석 틀은 그러한 담론들과 매우 친화적이다. 예를 들어 그는 종교와 기술이 별개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서로 공통 네트워크에서 "무분별하게 섞이는" 상호 구성적 현상이라고 주장한다(ibid.: 3). 이러한 혼합은 순전히 인간중심적 시각을 가정하는 모든 학문적 프로젝트를 문제화한다. 그는 우리가 기술을 "인간과 다른 행위자들 사이의 공유된 교류 틀 안에 포함시키고, 그 교류에서 생성되는 인간/비인간 혼종체에 선입견 없이 우리 자신을 내맡길 것"을 요구한다(ibid.: 15). 기술은 텔레비전이나 축음기와 같은 새로운 기술뿐만 아니라 더 넓게는 성상, 텍스트, 음악, 향 등 현대와 전근대의 다양한 물질적 기술을 지칭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인류학자 비르기트 마이어와 같은 다른 학자들은 그녀가 편집한 책 미학적 형성: 종교, 미디어, 그리고 감각(2009)에서 신유물론적 접근법을 연상시키는 유사한 용어로 "미디어"를 설명한다. 마이어는 종교가 존재하고, 지속되며,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간 주관성의 경계를 넘어 미디어 속에서 물질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이어에게 인간 상상력의 사회 구성주의적 힘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상상력이 공간 구조, 건축, 의례 수행을 통해 물질화되고 신체적 감각을 유발함으로써 마음의 영역 밖에서 만져질 수 있어야 한다"(ibid.: 5). 마이어는 종교 형성에서 인간 마음 외부의 이러한 사물들의 역할에 주목하는 더 충분한 개념적 틀로 "미학적 형성"이라는 용어를 제시한다. 그녀가 "아상블라주"라는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미학적 형성은 신체, 감각, 미디어, 사물, 관행, 태도, 아이디어의 아상블라주로 설명될 수 있다. 물론 마이어는 스톨로우보다 더 인간중심적이다. 현상학자들처럼, 그녀는 종교적 주체와 그들의 경험을 우선시하며, "종교적 매개가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고 동원하며 미학적으로 형성하는지 더 잘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ibid.: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인간중심적 접근법을 넘어서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중요하다. 독자들은 이를 받아들여 저자가 예상한 것보다 더 신유물론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스톨로우와 마이어 모두 비인간중심적 대안을 추구하는 종교학자들이 미래에 더 충실히 참여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하며 길을 열고 있다.

마이어의 미학적 형성과 스톨로우의 도구주의 비판은 이미 활발하게 성장하는 물질종교에 관한 문헌에 추가된다. 더 넓어진 학문 문헌 목록은 얼마 전까지 텍스트와 믿음 중심 접근법이 지배하던 연구 분야에서 강력한 물질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이루어진 모든 작업을 칭송하면서도, 우리가 여전히 물질성의 포기를 전제로 한 종교 패러다임의 편견에 무의식적으로 빠져 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물질종교 학문은 너무 흔히 인간중심적 방법의 제한적인 흔적을 지니고 있어, 의미, 경험, 또는 그것을 구성하는 훈육을 강조하든 인간 주체의 우선성을 거의 의문시하지 않는다. 인간이 근본적인 참조점이라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정설로 남아 있으며, 피부로 둘러싸인 개인의 한계 밖의 물질성은 거의 선명하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우리가 물질적 전환을 열망하는 한, 우리는 아마도 오직 인간적 관점의 특정 질문들에 사로잡힌 인간중심주의 패러다임 내에 머물 때 우리의 전환의 한계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신유물론은 우리가 세 가지 지배적 접근법이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는 종교적 물질성에 대한 접근법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한다. 신유물론적 패러다임에서 사물은 상징적 표현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단순히 현상학적 인식을 위한 수동적 데이터도 아니다. 그들은 "훈육"과 같은 개념으로는 부적절한 광범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많은 기본 가정과는 반대로, 물질적 사물 자체가 종교적 현실을 구성하고 생성하며, 학자가 더 근본적인 인간의 의미, 주관성, 또는 경험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해석해야 하는 파생적 증거 형태가 아니다. 방법론으로서 신유물론은 특권화된 인간 주체의 윤곽이 아니라 추정된 주체와 객체 모두의 물질성에 주목한다. 그것은 우리가 종교가 성경, 금판, 대서양 횡단 전신 케이블, 전파, 페로몬, DNA 가닥과 같은 인간과 비인간 사물들로 가득 찬 복잡한 얽힘임을 보는 데 도움을 준다. 그 사물들은 성지, 눈알 세트, 전기 그리드, 카펫, 교황 의복, 수도사 로브, 미생물, 메노라, 불꽃, , , 의자, 서예 패널과 조합할 수 있다. 차례로 그들은 자기력, 행성의 움직임, 팩스 기계, 집의 냄새, 문신, 케이블, 사진, 엽서, 중세 삼단 제단화, 발화하는 뉴런과 연결되고 증폭될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통해 종교를 추적하려면 우리는 인간을 통과하고 주변을 돌아야 한다. 하지만 물질성 학자의 역할은 사물의 끈질긴 끌어당김에 주목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허용한다면, 그것은 반복적으로 정적인 인간중심적 배열을 탈중심화하고 우리를 움직임 속에 유지할 수 있어,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또한 다른, 덜 익숙한 장소들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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