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르켐은 <종교 생활의 기본 형태>의 논의를 시작하면서 이른바 ‘원시종교’를 다루는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시의 추구가 새로운 맥락에서 이루어짐을 밝힌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원시, 그리고 기원의 문제가 연대기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라는 접근방식의 전환이 잘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있는 연구는 종교의 기원이라는 낡은 문제를 다시 제시하되 새로운 조건 아래 제시하는 것이다. 만약 기원적인 것이 절대적인 최초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 문제는 절대 과학적인 것이 아니게 되겠지만, 이 점은 반드시 배제되어야 한다. 종교가 존재하기 시작한 절대적인 순간은 있을 수 없으며, 그 지점은 마음속으로 우리를 그곳에 갖다놓는 우회적인 방법으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다른 모든 인류의 제도들처럼, 종교는 어디에서도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추측들은 모두 적절하게도 신뢰를 잃고 있다. 이 추측들은 어떤 종류의 검증 없이 오직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추론으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제기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것이다. 나는 종교적 사유와 실천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가 의존하는, 항존하는 원인을 분별하는 수단을 찾고자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이유 때문에, 관찰 대상이 되는 사회가 조금 덜 복잡하다면 그 원인을 더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기원에 더 가까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유이다.
Emile Durkheim, Karen E. Fields (tr.), <<The Elementary Forms of Religious Life>> (New York: Free Press, 1995), 7.
뒤르켐은 이 부분에 대한 각주에서 원시와 기원의 구조적 의미를 확실하게 밝힌다.
(주3) ‘원시적인’(primitive)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내가 ‘기원’(origin)이라는 단어에 전적으로 상대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앞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원이라는 말은 절대적인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것 중 가장 단순한 사회 상태를 의미한다. 즉 현시점에서 우리가 더 이상 접근 불가능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내가 역사나 종교 사상의 기원과 시초를 말할 때는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확실히 판데르레이우나 엘리아데 같은 종교학자들이 원시종교를 다루는 방식은 타일러와 같은 초기 학자들의 순진한 방식과는 다르다. 그 세련됨은 그 원시성을 인간의 보편적인 심성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다루는 데서 비롯된다. 이것은 키펜베르크가 지적하듯이 매럿을 전환점으로 일어난 대전환의 결과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러한 전환의 논리가 상당히 앞선 논의인 맥레난의 글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맥레난은 토테미즘을 종교학계에 소개한 학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법과 사회를 다루는 과학에서, 오래됨이란 연대기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다. 즉 가장 고대적(archaic[시원적])인 것은 발전이라고 인식되는 인류의 진보의 출발점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고, 가장 근대적인 것은 그 출발점에서 가장 떨어져 있는 것이다.
J. F. McLennan, <<Primitive Marriage: An Inquiry into the Origin of the Form of Capture in Marriage Ceremonies>>(London: MacMillan & CO., 1886[1865]), 3.
구조적인 오래됨을 명시한 것도 눈에 띄지만, 더 놀라운 것은 'archaic'이라는 단어를 엘리아데가 쓰는 방식과 똑같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 (엘리아데 저작에서 이 단어는 ‘시원적’이라고 다소 의역된 형태로 번역되고 있는데,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식의 논리를 더 뜻밖의 책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중국인에게 기독교 영혼론을 소개하기 위해 저술된 <<영언여작>>에서였다. 이 책에서 “왜 아니마[영혼]를 나에게 주어지는 자리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때에 만들어지는 것이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답변이 주어진다.
날마다 육신을 만들고, 육신이 만들어지면 또한 날마다 영혼을 만들어주니, 늘 새로워 묵은 것이 아니다. 만들어질 때 바로 주어지고, 주어질 때 바로 만들어지니, 만드는 것과 주는 것은 근원적 선후(原先後, ordo originis)는 있지만 시간적 선후(時先後, ordo temporis)는 없다.[卽成時, 更賦畀, 卽賦畀時, 更成, 成與畀, 但有原先後, 無有時先後.]
프란체스코 삼비아시, 김철범 & 신창식 옮김, <<영언여작: 동양에 소개된 스콜라철학의 영혼론>> (일조각, 2007), 30.
내용 자체는 다소 이해하기 어렵지만, 근원적 선후라는 개념이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은 당시 스콜라 철학의 논의를 중국어로 옮긴 책이기 때문에, 근원적 선후/시간적 선후의 구분은 스콜라 철학 내에서는 확립되어 있었던 개념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 중국인에게는 다소 낯선 서양 개념이 등장하면 주해를 덧붙여서 설명해주는데 근원적 선후 개념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준다. 그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경우와 같이 서로 원인이 되어 존재하는 것은 근원적 선후는 있어도 시간적 선후는 없다. 그것은 어째서인가? 아들이 없을 때는 당연히 아버지라 부를 수 없고, 아들이 있어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호칭은 동시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31)
근원적 선후의 논리는 다음 내용에도 등장한다.
대개 아니마는 마음에 머물면서 여러 부분에도 머물고, 마음을 살리면서 여러 부분도 살리고, 마음의 형상이 되면서 여러 부분의 형상도 된다. 시간적 선후는 없고, 단지 근원적 선후만 있을 뿐이다.(43)
스콜라 철학에서 확립된 개념이라면 그 모체가 된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에도 등장할 가능성도 있겠지만, 아직 그까지는 내 능력과 독서가 닿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