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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변잡기

슈퍼스타 감사용과 롯데 자이언츠

by 방가房家 2023. 5. 22.

출국할 날이 많이 남지 않았다.
숙제를 하듯이, 밀린 한국 영화들을 빌려 보는 중이다.


그 중에서도 <슈퍼스타 감사용>, 아, 대단한 작품이었다. 혼자 한 번 보고, 코멘터리 틀어놓고 한 번 더 보고, 부모님 보여드린다고 한 번 더 보았는데, 세 번 모두 눈물을 흘렸다. (몸이 허해진 다음 변화가 자주 질질 짜게 되었다는 것. 삼순이 보면서 매주 울 정도니. 오늘은 영웅 프로토스 박정석의 플레이를 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지더라는... --;;) 괜찮은 영화라는 생각에 흥행 성적을 살펴보니 75만, 신통치 않았다. 개나 소나 100만은 넘던데, 인정을 충분히 받지 못한 아쉬운 영화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 뻔하면서도 무서운 진리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성공한 쿠데타는 벌할 수 없다는 나라가 아니었던가. 야구판에서 이 명제가 어떻게 통용되는지 알려면, 야구 한 번 본 후 다음날 스포츠 신문 기사만 읽어보면 대번에 나온다. 한 판의 야구에는 온갖 사건들이 복합적으로 일어난다. 투수의 투구 하나하나와 이에 대한 타격, 감독의 작전 지시와 선수 기용, 심판 판정, 수비, 주루플레이, 팬들의 반응. 이 많은 요소들이 엮어가는 한 판의 야구는, 그러나 신문 기사를 보면 승리를 향한 일직선의 내러티브로 무자비하게 정리되어 있다. 숱한 요소들이 버려진다. 대수롭지 않은 것들도 있고 야구팀의 흐름을 읽는 유의미한 것들도 있고. 한 경기를 보는 관점은 다양하기 때문에, 기자가 나름대로 한 경기의 핵심을 파악해서 기술했다면 지면의 부족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는 스포츠 찌라시들의 핵심 파악이 성에 안 찬다. 게임을 읽는 눈이 무르익지 못했기에, 기자들은 영웅담(스타 플레이어의 성적)에 매달려서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승리투수나 홈런 친 타자를 들먹이는 기사가 대부분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며, 관중들은 승자만을 기억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나는 야구의 진정한 팬들이라면 패배를 음미할 줄 알 거라고 생각한다. 한 경기라는 단위 안에 있는 플레이 하나하나를 음미하고, 그것이 모여 하나의 게임을 완성한다는 것 자체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든 이기든 야구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들이다.
“꿈을 던지는 패전투수”라는 아름다운 카피를 가지고 있는 <슈퍼스타 감사용>은 이러한 정신을 주제로 만들어진 영화라 마음에 쏙 들었다. 보통 영화들이 담고 있는 성취나 성공의 이야기가 아닌, 그 인생의 정점이 패전이었던 투수를 그려낸다는 게 사랑스럽다. 이런 스포츠 영화가 있었던가 싶다. 그가 선발로 던진 한 경기를 집중적으로 보여준 영화의 절정부는, 김우열에게 만루홈런을 맞고 허무하게 지는 것으로 끝난다. 영화에서 그렇게 열심히 보여주면 으레 이기기 마련이기에, 관객 중에는 패배라는 결말에 뜻밖인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패배라는 결말 때문에 흥행이 더 저조해진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야구를 아는 사람들은 그 패배를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는 박철순 투수가 22연승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20연승 경기인 영화의 경기가 베어스의 승리로 끝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감사용은 1승 15패의 기록을 가진 투수이다. 그러므로 그의 1승을 영화의 절정에서 다루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을 거다. 하지만 그랬다면 더 안 좋은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15패의 리얼리티를 정면으로 다룬 게 이 영화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들기 위한 변형들이 있었다.
감사용이 박철순의 20승 경기에서 맞대결하는 것은 똑같지는 않지만 매우 그럴 듯하다. 실제로 감사용은 박철순의 16연승에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의 김우열의 만루홈런은 82년 삼성-오비의 한국 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 차용한 듯 싶다. 그 경기 막판에 이선희 투수가 김우열에게 만루홈런을 맞고 경기장에 주저앉아 울었다. 나도 같이 울었기에 기억이 나는 장면이다.
[아, 여기서 프로야구 원년도의 나의 비극을 말하고 넘어가야 겠다. 프로야구 처음 생기고 어린이 회원 가입하는 것이 유행이었고, 나도 어머니께 롯데 자이언츠 회원 해달라고 졸라대었다. 어머니는 알았다고 하시고는, 나를 신세계 백화점(!)으로 데리고 가셨다. 무정하신 어머니는 아무거나 하면 되는 거 아니냐며 내가 싫어했던 삼성의 어린이 회원에 나를 가입시켰던 것이다. 며칠을 울었지만 삼성 회원으로 몸을 배려버린 것을 이찌할 수는 없었다. 마침 그 해 삼성은 코리언 시리즈에 올라갔고, 회원인 나로서는 삼성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삼성은 오비에 비참하게 졌고, 김우열 선수의 홈런에 나도 펑펑 울었다는 슬픈 이야기.]

그 정도 변형은 충분히 할 수 있는 건데, 좀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극화의 과정에서 야구적이지 않은 부분들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감사용은 처음에 패전처리로 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장면은 매우 불쌍하게 그려진다. 일단 그가 패전 처리라는 것은 설정이다. 위의 자료를 보면 그의 첫 해 성적은 1승 14패이며 132이닝이라는 엄청난 양의 투구를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건 그가 처음부터 주축 선발 투수로 뛰었기에 가능한 기록이다. 패전처리 투수는 승패를 기록하지 않는다. 그건 그렇다 치자.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영화에서 감사용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등판이 패전 처리로 나올 때 실망하는 모습이다. 물론 중계가 끝나 자막이 올라가고 관중들은 게임을 포기하고 운동장을 떠날 때 등판하는 모습은 처연하다. 그러나 야구 내적인 논리로 볼 때, 감독이 패전이 확정된 경기에 신참 투수를 올려보내 경험을 쌓게 하고 실력이 검증되면 좀더 중요한 순간에 내보내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투수 입장에서도 자신의 실력을 검증받을 기회가 주어진 것은 고마운 일이기에 경기 상황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 투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감사용의 실망이나, 그 때 인호봉이 “어, 이거 다 끝난 경기인데요”라고 말한 것은 야구적이지 못한 장면이다. “어떤 자리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프로야”라고 한 감독의 말이 정답이다. 아울러 스타급 선수 양승관을 자기만 잘난 선수로 그리거나, 금광옥 포수(이혁재)를 무능력하게 그린 것도, 당사자에게 양해는 있었겠지만, 과장이다.
좀더 야구적 리얼리티에 충실한 영화로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했다면 75만이 아니라 50만도 안 보았을 것이다. 대신에 나같은 이들만 열광하는 컬트 성격의 영화가 되었으리라.

영화 마지막에 자막이 올라온다. 얼마 후 부산 구덕 운동장에서 감사용 투수가 그렇게 바라던 1승을 거두게 된다고. 그 자막을 보면서 찌릿찌릿한 감동이 전해져 온다. 그렇다! 감사용이 유일한 1승을 거둔 팀은 롯데 자이언츠였던 것이다! 롯데는 그런 팀이다. 약팀의 특성이겠지만, 롯데는 강한 투수에게는 무지하게 약하면서(선동렬 투수의 최고의 밥이 롯데였다) 신진 투수나 약한 투수에게도 의외의 일격을 받는 일도 자주 있었다. 무명의 투수가 롯데를 상대로 호투를 해서 이기는 일을 한두번 있는 게 아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승패의 아픔을 나눌 줄 아는 팀이었다.
“최후의 삼미 슈퍼스타즈 팬”의 정신은 오늘날 롯데 팬들에게 계승되고 있다. 오랜 패배와 꼴찌의 역사를 통해 롯데는 야구를 아는 팬들을 길러내었고, 오늘날 한국 야구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영화에서 오비팬들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자기의 약팀을 응원하는 이들은 자꾸만 내 모습과 오버랩된다. 나는 서울에서 오랫동안 꼴찌팀을 외로이 응원했던 사람이므로.

그저께 광주 경기에서 카메라는 한 롯데 팬의 응원 문구를 잡아주었다: “맨날 져도 좋다. 난 롯데가 좋다.” 바로 그거다. 그게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비록 그날 경기는 장원준의 미친듯한 호투로 기아에 완승을 거두어서 응원 문구가 무색해지긴 했지만. 노히트 노런 직전까지 갔던 장원준도 있었지만, 9회 패전처리로 나와 5실점을 하고 들어간 기아 투수 박정태(장원준과 고등학교 동창이다) 역시 그 날 경기를 완성시킨 장본인이었다. 장원준도 그렇게 맞으면서 성장한 거고, 그게 야구다. <슈퍼스타 감사용>을 보며 가장 감동을 받았을 사람들은 옛 삼미 팬들이었겠지만, 롯데 팬들도 역시 영화를 즐겼으리라 생각한다. 지든 이기든 한판의 경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올 초 롯데가 잘 나갔을 때 유명했던 한 만화를 퍼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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