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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만남

19세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한국 종교 서술

by 방가房家 2023. 5. 16.

개항 이전 천주교 선교사들은 박해의 와중에서, 조선 민중들 사이에 숨어서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다른 서구 관찰자들과는 한국인들을 경험한 ‘깊이’가 달랐다. 그래서인지 종교적 편견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선교사들의 기록에서 그냥 지나치기 힘든, 정곡을 찌르는 관찰들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초기에 활동한 이들 중에서 종교에 대한 기록은 프티니콜라(Petitnicolas)와 다블뤼(Daveluy)가 본국에 보낸 서한 및 보고서에서 찾을 수 있다. (이하 두 사람 자료는, 조현범, <<19세기 중엽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인식과 문명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2)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대충 뭉뚱그려 말하면, 프티니콜라는 조선에는 종교가 없다, 다블뤼는 지고한 존재에 대한 막연한 신앙이 존재한다는 의견이다. 그러나 종교의 있고 없음으로 단순히 정리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며, 의미를 잘 분석할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무엇이 이 두 사람의 의견을 갈라놓았는지에 대해서도 더 고민할 부분으로 남아있다.

프티니콜라는 “조선인들이 너무나 물질적이어서, 유물론적인 종교 외에는 다른 어떤 종교도 신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았다.”(132) 그는 조선인들을 물질적 이득을 추구하는 무신론자들로 기술한다. (요즘 신문 기사들을 많이 보아서 그런가, 이런 묘사들이 그냥 지나쳐지지가 않는다. ‘실용’을 추구하는 정부 아래 살다보니, 한국인들의 본성이 정말 그렇게 천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떠나지 않는 탓이다.)
“내 생각에 조선인들은 무신론자라고 해야 한다고 본다. 나는 과연 조선인들이 종교적 혹은 초자연적인 진리로 이루어진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조선의 외교인들이 가진 신조를 이렇게 단언할 수 있다. 잘 마시고 잘 먹고 멋진 옷을 입는 것, 많은 부를 모으는 것, 감각적인 쾌락을 마음껏 즐기는 것, 크건 작건 고위직을 얻는 것, 좋은 행실 때문이 아니라 양반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 결국에 가서 자기 일족을 퍼뜨리고 조상들과 자신을 추념하는 제사를 받기 위해서 아들을 두는 것.”(132)

같은 맥락에서 프티니콜라는 유일신적인 신 존재에 대한 개념이 부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점은 다블뤼의 진술과 대조된다.
조선에서는 아무도 신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보다 더 높고 고귀한 생각으로 고양되고자 하지 않는다. 이는 조잡한 유물론이다. 조선의 외교인들은 육체만을 위해서 태어난 듯 하며, 영혼에 대해서는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다. 이 불쌍한 나라의 외교인들은 종교를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실천하지도 않는다. 지고한 존재(l'Etre suprême)에 대한 숭배를 연상시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신이라는 이름은 조선말에 존재하지도 않는다.(132-33)


다블뤼 주교의 관찰은 프티니콜라보다 훨씬 우호적이다. 그는 조선의 ‘종교’를 이야기하고, 지고 존재에 대한 개념을 이야기한다. 그는 한국인의 하늘 개념이 유교의 상제에서 비롯한 것으로 파악하는데, 나는 이것이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상제가 누구인지 물으면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관찰, 그리고 하늘에 대한 제사가 흔히 기우(祈雨)와 관련된다는 서술도 굉장히 정확하다.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유교에서 조상 숭배의 측면이 강조되는데, 이것은 타당한 내용이기도 하지만 한국 천주교 전래사를 반영한 내용이기도 하다.
조선의 종교는 유교이다. 그러나 이는 조상들의 종교라고 이름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유교는 조상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 숭배 행위는 법적으로 규정된 것이어서 이를 어기면 처벌받고, 심지어 죽기도 한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사건이 이를 잘 보여준다. 유교에서는 만물의 창조자로서 지고한 존재를 인정한다. 그것은 바로 상제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념들은 어느 정도 교양을 갖춘 사람들에게도 불명료하다. 일반 백성들은 상제가 누구인지도 모르면, 대중적인 언어에서는 모든 것이 하늘이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하자면, 사람들이 하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신이나 섭리의 관념이 첨부되는 것은 명확하다. 예를 들어 백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하늘이 곡식을 여물게 하고 수확을 보장해 준다는 것이다.
종종 나는 이 나라에서 지고한 존재에게 바치는 숭배에 대해서 질문을 해보았지만 분명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 내가 아는 것은 비를 내리게 해 달라고 비는 기우제나 홍수를 그치게 해 달라는 제사 정도이다. 제사를 맡은 관리가 지은 제문에 따르자면 사람들은 상제나 하늘에 이런 것을 빈다.(134)
1874년 출판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는 다블뤼의 보고를 토대로 작성된 것인데, 종교 분야에 대한 서술은 특히 그러함을 볼 수 있다. 다음은, 샤를르 달레, 안응렬․최석우 공역, <<한국천주교회사>> (분도출판사, 1980)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첨부파일:  a0100509_496ab5e852d0d.pdf) 그는 상제/하늘 개념에 대해 다블뤼의 견해를 받아들여 “상제(上帝)에 관한 다소 막연한 관념이 첨가되는데, 대개 이 상제를 천(天)과 혼동한다.”고 이야기한다.
선교사들은 자주 아주 유식한 조선 사람들에게 그들이 상제(上帝)라는 말에 어떠한 뜻을 부여하는지를 물어 보았으나 한 번도 명백하고 정확한 대답을 얻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말로 우주의 창조자이며 관리자인 하느님을 가리키고,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곡식을 생산하고 보존하고 익게 하며, 병을 물리치는 섭리적인 힘을 가졌다고 간주되는 단순한 천(天)이라고 주장하고, 대부분은 알지도 못하고 별로 개의치도 않는다고 고백한다. 비를 빌거나 날이 개기를 빌기 위하여 또는 여러 가지 재액(災厄)을 쫓기 위하여 나라에서 제사를 드릴 때, 그 기원은 그 제식을 맡은 수령이 지은 기도문에 따라 혹은 하느님에게 혹은 하늘에게 바쳐진다.(210)

국민의 대다수가 알고 충실히 믿고 있는 유일한 종교는 조상숭배이다.(212)

영(靈)에 관련된 언어적 다름과 혼선을 지적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나는 이 언어적 문제가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본다. 전통적인 영 개념, 성리학적 논의에서의 귀신 개념 등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우리에게 남아있고, 거기에 서구적인 영 개념이 뒤섞여서 혼란스럽다. 나 자신도 그런 혼란을 정리할만한 공부가 되어있지 않다.
“이 나라에서는 영혼과 육신의 구별이나 영혼의 영성(靈性)에 대하여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 천주교 책에서 영혼과 그 성질을 가리키는 데에 쓰이는 혼(魂), 신(神), 영(靈) 등의 단어를 외교인들은 정령(精靈)과 죽은 사람들의 혼백(魂魄)을 가리키는 데에만 사용합니다.” (215)

다블뤼는 유교와 불교를 ‘무신론’으로 규정한다. 이 대목에서는 프티니콜라의 견해가 반영된 느낌이 든다. 한국 사람들의 심드렁한 태도를 유럽의 자유사상가에 비교한 언급이 흥미롭다.
이 두 가지 교리[유교와 불교]는 실상은 무신론의 두 가지 다른 형태에 불과하다. 이 두 교리의 법률상의 공존과 자기들의 종교적 신앙을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는 국민의 정신에 있어서의 그것들의 필연적 혼합으로부터, 거의 모든 조선 사람들의 특징이 되어 있는 저 실제적인 무신앙과 내세에 대한 무관심이 빚어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신주 앞에 꿇어 엎드리고 제사를 드리나, 그 효과를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적다. 그들은 어떤 높은 권능과 영혼의 존재에 대하여 막연한 개념은 가지고 있으나 그런 것을 상관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죽은 뒤에 무엇이 올 것인가를 말하면, 그들은 우리나라의 상류 및 하류계급의 자유사상가들과 같은 어리석은 대답을 한다. “그걸 누가 알아, 죽었다 살아온 사람은 없다. 중요한 것은 목숨이 있는 동안 그것을 즐기는 것뿐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조선 사람이 실제적으로 무신론자이기는 하지만 그 반면 또한 불가피한 결과로 그들은 가장 미신을 잘 믿는 사람들이다. (218-19)

마지막으로 흥미로운 것은 한국인들의 귀신 관념과 축귀 행위를 성서에 언급되고, 천주교 전통에서 유지되어 왔던 엑소시즘과 연속선상에 놓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국 전통에 가톨릭이 연착륙하는 토대로서 큰 의미가 있다. 20세기 초반 가톨릭 자료에서 한국 귀신들을 대상으로 천주교인이 엑소시즘을 벌인 것(예를 들면, 가톨릭과 무교의 만남5)은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때때로 귀신이 자연 법칙에 어긋나는 현상으로 인간이나 사물 속에서 그의 존재와 힘을 나타낸다는 것, 마술의 의식을 통하여 마귀와 직접 교통하는 진짜 마술사, 특히 무당들이 있다는 것과 같은 사실은 절대로 확실하다. 진정한 의미의 부마(付魔)를 때로는 볼 수 있다고 선교사들이 증언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귀신에 홀리는 일도 흔하지는 않지만 드물지도 않은데, 천주교인들 중에도 그런 일이 있다. (223)
조선에서 일어나는 이런 종류의 사실들은 모든 이교국(異敎國)에서도 일어났었고 지금도 아직 일어나는 일이다. 신약이나 구약 성경의 어느 페이지에나 이와 비슷한 예가 얼마든지 있으며...(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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