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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의 근원과 삼교의 진리

by 방가房家 2023. 4. 25.

종교란 개념은 근대 서구에서 만들어졌으며 비서구사회에 근대 사회가 형성되면서 이식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면 만만치 않은 반론을 만난다. 즉, 비록 종교(宗敎)라는 언어 자체는 동아시아 문화권에 존재하지 않았으나, 지금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현상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는 것. 유교, 불교, 도교가 독립된 전통으로 존재해 온 것이 좋은 증거라는 것. 종교라는 말이 생긴 것이 무어 대단한 변화냐는 것.

그러나 19세기 말 일본인들이 서구 열강들과의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religion’의 번역어로서 ‘종교’라는 말을 고안함으로써, 동아시아에 종교라는 말이 도입된 것은 작은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이름 없이 존재하던 현상에 이름이 붙여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 구조가 도입되고 근대라는 틀거리 안에 종교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구획 안에 세계관에 대한 기존의 사상과 행위들이 재편성되어 담기는 것을 의미한다. 말의 생성은 그러한 사회문화적인 재배치 과정의 한 산물일 뿐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근대 이전 우리나라에 종교 현상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상이 담겨지는 인식의 틀이, 사유의 관점이 바뀌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은 머릿속의 변화를 넘어서 실제적인 변화임을 말하는 것이다. 푸코, 푸코, 말들은 많이 하지만 담론(discourse)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 점을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조상들이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종교’라는 말을 통해 이해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나부터가 그러한 일에는 소홀했다. 그냥 이전과는 달랐다고 말하지만, 어떻게 달랐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구체적이지 못했다. ('민족' 개념에 대한 베네딕트 앤더슨의 주장이 우리나라에서 잘 수용되지 못하는 것도, 조상들의 '족'에 대한 생각과 서구의 민족 개념의 차이점에 대한 잘 정리된 설명이 부족한 게 이유가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그 쪽 논의를 많이 찾아 본 것은 아니라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다.)
홍대용 글의 첫머리를 읽으며 그런 생각들을 했다.
 
허자는 숨어 살면서 30년 동안 독서를 하며 하늘과 땅의 조화는 물론 사람의 본성과 우주 만물을 지배하는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그 은밀함을 연구하였다. 이에 나무, 불, 흙, 쇠, 물, 즉 오행(五行)의 근원과 유교, 도교, 불교, 즉 삼교(三敎)의 진리를 모두 깨달아 사람의 도리를 바탕으로 만물의 이치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홍대용, 이숙경·김영호 옮김, <<의산문답>>(꿈이 있는 세상, 2006), 21.)
 
허자라는 가상의 인물을 소개하는 이 부분의 표현은 상투적이다. 상투적이기에 그 시대의 전형성을 보여준다. 여기서 유교, 불교, 도교라는 표현은 원문에서는 그냥 유불도, 혹은 유가(儒家), 불가(佛家) 등으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유교, 불교 등이 원문에 있는지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비록 유가, 불가보다 쓰임은 덜 했지만 유교, 불교 등도 분명히 존재했던 표현이다. 중요한 것은 그 때의 유교, 불교 개념이 지금 현재 언어, 즉 'Confucianism', 'Buddhism'의 번역어로서의 유교, 불교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여기서 교(敎)는 말 그대로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불교는 한 개체의 종교가 아니라 ‘불가의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가르침이기에 유불도는 ‘삼교의 진리’로 묶여 이야기될 수 있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오행의 근원’이 ‘삼교의 진리’와 대칭되는 문구로 쓰이고 있는 점이다. 오행이 유교에 속한다든지, 아니면 도교에 속한다든지 하는 구분 없이 세계를 설명하는 이치들의 하나로 동등하게 이야기된다. 오행이나 유불도나 세계를 설명하는 원리들이다. 서로 대안적이고 경쟁적인 관계이지만 상호보완적이기도 한, 말 그대로 가르침들이다. 그런 맥락에서 삼교회통(三敎會通)의 전통이 존재해 온 것이다.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삼교를 모두 깨달은 분’이 현자에 대한 칭송일 수 있으나, 서구 문화에서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을 모두 통달한 성인’이라는 칭송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칭송이 아니라 화형당해 죽을 놈에 대한 죄목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학자들(특히 신학자들)이 보기에 동아시아의 삼교회통은 종교 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의 한 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교’가 구획되어 있는 방식, 교를 경계짓는, 혹은 넘나드는 방식이 달랐음을 일단 전제해야 한다. 삼교회통을 혼합주의(syncretism)라고 서술하는 서양 학자의 견해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잘못된 것이다. 현대의 종교 개념을 근대 이전 동아시아 전통에 들이대었기 때문에 나오는 오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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