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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교리

영어 잘 하는 목사님

by 방가房家 2023. 4. 20.

조용기 목사의 신학을 논할 만큼 책을 읽어보거나 설교를 들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에 관련된 글을 좀 보면서 눈에 띄었던 것은 그의 삶에서 영어가 차지하는 비중이다. <<여의도 순복음교회30년사>>에서 조용기 목사의 인생을 서술한 부분이 있다. 목사님에 대한 존경이 가득한 서술인데, 어린 시절 목사님의 비범함을 내보이는 측면 중 하나는 영어이다. 요즘 어린이 마냥 영어 배울 환경이 주어진 것이 아닌데도 성취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대목이다.

그가 다니던 부산공고에는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평소 어학에 뛰어난 재질을 가지고 있던 그에겐 영어를 다 깊이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학교공부를 하면서 틈만 있으면 운동장에 있는 병사들에게 쫓아가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며 어울렸고, 영어실력은 하루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1학년 말 즈음에는 학교장과 미군 부대장 간의 통역을 그가 맡아 했다.

그의 비범함을 예시하는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다. 고등학생 조용기가 병원에 진찰받으러 갔을 때의 이야기이다. “삼성당 영어 콘사이스”가 눈에 띄는 어휘이다.
대나무가 영어로 무어라고 하느냐는 어느 교수의 물음에 서로가 얼굴들만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이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조용기 학생이 앞뒤 가리지 않고 그거 뱀부(bamboo) 아닙니까, 대나무 말입니다 하고 자신있게 말했다.
시선들이 일제히 집중되며 경탄하며 놀라와 했다. 아니 어떻게 그런걸 알고 있느냐고 어느 교수가 말하자 신바람이 난 그의 부친이 그 애는 삼성당 영어 콘사이스를 A부터 Z까지 몽땅 외우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영어가 결국 그를 기독교로 인도하게 된다.
거리에서 우연히 켄 타이즈 선교사의 천막부흥회 포스터를 목격하게 됐다... 낯선 소년(조용기)이 선교사에게 다가와 낭낭한 어조로 설교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말을 했다. 의외의 영어 솜씨에 놀란 선교사가 오히려 감사하며 언제 영어를 그렇게 배웠느냐고 물었다. 조용기는 말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교과서를 몽땅 외운 사실과 현재의 투병 생활의 고통도 이야기하였다...
켄 타이즈 선교사는 그의 두 손을 꼭 잡고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훌륭한 통역자를 보내주셨으니 이 젊은 종을 통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한국인들에게 예수를 전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여의도 순복음교회30년사>>(여의도순복음교회, 1989), "조용기 목사", 274-293쪽.)

영어 구사는 그저 한 특기가 아니라 그의 기독교 인생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면이 있다. (한국 침례교의 거물인 김장환 목사의 생에서도 영어 실력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사실도 상기된다.) 그의 초기 활동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통역이다. 관련된 부분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켄 타이슨의 소개로 부산에서 활동하던 리차드의 통역이 되었다... 조용기의 결혼식 주례는 리차드 목사가 담당하였다.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곧 바로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서 선교사들의 통역으로 일하면서 공부하였다. 이 당시 순복음 신학교에서 일하던 선교사는 스텟츠(Stets)와 존스톤(Johnston)이 있었는데 특히 조용기는 존스톤의 강의를 통역하였다.
1957년 10월 말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부흥사인 허만(Herman)이 내한하여 중앙청 앞 광장에서 24일간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한국에서의 부흥집회도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이 때 통역은 신학생 조용기였다.
1958년 여름에 버드(Ralph Bird) 목사가 수원, 대전, 부산 등지에서 성회를 인도하였다. 이 때 버드와 함께 온 선교사가 바로 헐스톤이었다... 조용기는 이 선교사들과 동행하면서 부흥집회의 통역을 담당하였다.
1961년 하나님의 성회 선교부는 "지구정복"의 프로그램을 따라서 "치유의 소리"(Voice of Healing) 선교회를 초청하여 본격적인 천막신유집회를 시작하였는데 그 강사는 샘 토드(Sam Todd)였다. 샘 토드는 치유의 소리와 관련을 가지며 1960년부터 1964년까지 하나님의 성회에서 일했다. 이 집회의 통역은 조용기였다.
(박명수, "조용기와 세계오순절", <<한국교회 부흥운동 연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3), 191-212쪽.)


한국 개신교가 미국과 밀접히 관련된다는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통역은 알바가 아니라 신학 형성의 핵심적인 이력이다. 이후 교회 역사를 보아도 국제 대회 개최와 빌리 그래함, 팻 로벗슨과 같은 미국 기독교인들 불러들이는 것이 주요 활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미국은 은혜의 나라이자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은, 다른 어디서 주입된 것이 아니라 그의 삶과 교회사를 통해 자연스레 도출된 사실이다. 그가 지금 친미집회 열심히 하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된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고 앞으로도 나아질 것 같지 않지만, 한국사회에서 영어는 다만 하나의 언어가 아니다.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닌 본질적으로 성취해야할 그 무엇이다. 영어 실력 획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형태의 굴절된 인생도 고려될 수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 아닌가. 그러한 언어 현실이 한국 기독교사에 아로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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