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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_자료/영상

... 통하였느냐?

by 방가房家 2023. 4. 18.

(2004.11.19)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이다.
나는 이렇게 장면 하나하나에 공이 많이 들어간 예쁜 영화를 좋아한다. 스캔들은 한국 전통미의 탐구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전통 문화로부터 아름다운 화면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한 영화이다. 한복, 한옥, 화장품, 나전칠기, 동양화, 한식 등의 요소에 갖은 정성을 쏟았다. 뱃놀이, 책방, 저자거리, 연못, 정원 등 어느 하나 놓칠만한 장면들이 없다. 음악이나 구성에도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다. 여러 대목에서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비사실적인 대목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런 것마저도 새로운 시도들을 감안할 때 눈감아 줄 수 있다. 적어도 제작진은 역사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하였고 그를 바탕으로 ‘이럴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물어보는 것이기에, 그 방식은 깜찍하다. 예를 들어, 그 당시의 천주교가 그런 식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줄거리에 집어넣는 발상이 재미있기 때문에 점수를 주고 싶다.

요컨대 이 영화는 한국의 미를 담뿍 담고 있으면서, 고전 영화 [위험한 관계]의 리메이크이기 때문에 서양 관객들에게도 익숙한 줄거리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낯선 조선의 풍물을 담고 있으면서도 서양 관객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음악 또한 그들에게 친숙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했다. 얼마 전에 이 영화가 뉴욕에서 개봉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영화 관계자들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한 게 틀림없다. 친숙한 줄거리에 담겨진 낯설고 이국적인 풍광, 그것이 미국인들에게 매력적인 영화로 다가설 것이라고...
그런 생각을 하고 내가 갖고 있는 DVD로 이 영화를 미국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다. 살인의 추억을 보여줄까, 이 영화를 보여줄까 망설이다가, 친구가 예쁜 영화로 보고 싶다고 해서 스캔들을 골랐다.
이 영화가 미국 애들에게 통하였느냐고?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아니었다.
이 영화를 보여주면서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다. 일단은 전형적인 조선 역사는 아니기 때문에 그런 점을 이해시켜야 한다는 것이 걱정이었다. 또 유교의 클리쉐들로 가득 찬 대사들이, 마음을 직접 드러내지 않으며 속을 떠보는 능청스러운 대화의 주고받음이 제대로 이해될 지가 걱정스럽고, 그 외에도 장면별로 부가 설명해야 할 게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보는 내내 옆에서 떠들어댈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처음에 좀 떠들다 이내 영화에 다 맡겨버리고 말았다.
처음 들어온 질문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조선의 양반과 사무라이의 관계가 무어냐는 거였다. 처음에는 이 녀석이 조선의 사(士) 계층인 양반과 일본의 사 계층인 사무라이를 비교하는 수준 높은 질문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녀석은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물어본 것이었다. 그러니까 양반이 사무라이의 하위계층이냐는 질문이었다. 이 첫 질문에, 영화의 배경을 해설한다는 나의 생각이 얼마나 야심찬 것이었는지가 대번에 드러났다. 기본적으로 줄거리라도 따라가는 게 문제였다.
불행하게도, 미국애들은 영화의 줄거리를 잘 따라가지 못했다. 한 녀석은 [위험한 관계]의 줄거리를 알고 있어 약간 나았는데, 다른 녀석은 끝날 때까지 전혀 다른 줄거리를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다. 문제는 딴 게 아니었다. 미국애들은 한국 사람들의 얼굴을 전혀 구분하지 못했다! 남자와 여자는 구분할 수 있었는데, 조씨부인 이미숙과 숙부인 전도연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 게다가 다른 배역들, 소실로 들어온 소옥과 그녀를 사랑한 권도령, 그리고 여러 하인들이 뒤섞이면서 영화는 거대한 혼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누가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지, 누가 누구와 붙어먹는지를 헷갈리고 있으니, 안 그래도 복잡한 남녀 관계가 풀릴 수 없는 실타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친구들은 화면이 바뀔 때마다 저게 누군지를 물어보기에 바빴고, 나는 대답하면서 절망해버리고 말았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애들은 나름대로 구분의 기준을 찾은 것 같았다. 그것은 헤어스타일이었다. 조씨 부인의 거대한 머리 장식과 숙부인의 민머리를 통해 구분을 할 수 있었나 보다. 하지만 가끔 조씨 부인이 민머리로 나오면, 어김없이 질문이 들어왔다. 누구와 누가 사랑을 하였는가, 마지막에 누가 빠져죽고, 누가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는가...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중국으로 도피하는 조씨 부인이 민머리로 나오기 때문에 애들의 혼란은 영화 끝까지 지속되었다. “똑같이 생긴 동양인의 얼굴”이라는 생각지 못한 암초를 만나, 그들에게 이 영화는 전혀 통하지가 않았다. 그게 그리 똑같게 보일까... 아마 내 친구들은 나하고 배용준 얼굴도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이 영화를 뉴욕에서 개봉했다는 영화 관계자들은 이런 벤치 마킹을 해 보았을까? 뉴욕 개봉되었다는 이야기만 듣고 어찌 되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미국 관객들이 이미숙과 전도연을 구분하지 못하는 한 제대로 되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이해되기 위해서는, 배우들 마빡에 이름을 삽입하던지, 전도연 대신 동남아 배우를 캐스팅해야 하지 않을까?
미국애들의 무감각을 탓하다가, 나 역시 흰둥이들을 구분하는 데 애를 먹었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작년 내가 처음 미국 왔을 때,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는 착각을 했기 때문이다. 머리를 민 백인 남자애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전혀 다른 두 애를 한동안 한 명으로 착각했다. 한 명은 활달하고 나한테 말도 많이 거는 재미있는 친구였고, 한 명은 수업 시간에만 보는, 심각하고 오만할 정도로 똑똑한, 차가운 친구였다. 그런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애를 하나라고 했으니, 혼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 애가 말로만 듣던 다중인격자라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주변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다가, 수업 시간만 되면 얼굴이 굳어져서 수업에만 집중하는, 지킬박사와 하이드같은 무서운 놈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별로 비슷하게 생기지도 않은 둘을 근 한 달 넘게 착각하면서 엉뚱한 생각을 했던 내가, 어찌 미국애들을 탓할 수 있으랴... 살인의 추억 보여줄 걸, 잘못했다.

 

OST-조원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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