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독교사자료/교리

기독신보 1934년 6,7,월, 1935년 1,2월 사설들

by 방가房家 2009. 1. 11.

자료를 통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데(또 위험한데), 나는 이 시기 기독신보 사설들을 읽으면서 1930년대 한국 개신교의 지적인 쇠퇴를 느낀다. 당시 교계 여론을 이끄는 교계 지성인들의 사설에서 거의 창조적인 생각은 나타나지 않고 상투적인 논리와 언어의 반복을 통해서 지면만 잡아먹는 글들이 계속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 감각인데, 그 감각을 자료를 통해 ‘증명’하는 것은 까다롭다.
1920년대부터 한국 청년들의 두뇌는 개신교가 아니라 사회주의를 비롯한 다른 집단으로 몰리기 시작한다. 1930년대의 지적 쇠퇴는 사실 그 때 예견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나는 ‘두뇌가 어디로 몰리는가’라는 것, 문화 현상의 역사적 흐름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1990년대에는 젊은 두뇌들이 영화판에 몰렸고, 요즘에는 드라마판에 몰린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인터넷, 게임, 바둑 등 한국이 잘 나가는 분야에 공통되는 현상이다. 나는 ‘문학의 위기’라는 것도 이런 식으로 본다. 2,30년 전이라면 시나 소설을 썼을 문화적 재능들이 이제는 영화나 드라마에 뛰어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즘 나오는 시나 소설이 후졌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나의 이런 유물론적(?)인 이해를 지지해줄만한 학문적인 설명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1934년 6월 6일 (제966호)
분류: 사설
제목: 道德的 口腔衛生
한성치과의사회에서 구강 위생에 대한 강연을 하였는데, 우리는 도덕적 종교적으로도 구강 위생을 단행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모든 더러운 것과 독이 사람을 죽이고 사회를 해하는데 이르지 않도록 적절한 방법으로 구강위생을 하여야 하겠다.

1934년 6월 13일 (제967호)
분류: 사설
제목: 平信徒運動의 意義
요즘 의무교역자 양성이나 평신도 수양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요즘을 비상시라고 하는데, 이러한 시기에 조선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은 참된 교사와 목자이기도 하지만 참된 부르심을 받은 평신도 또한 요구하여 마지 않는다.

1934년 6월 20일 (제968호)
분류: 사설
제목: 呼吸狀과 視力檢査
하느님은 호흡하는 폐부를 주는 동시에 공기를 주셨고, 눈을 주는 동시에 빛을 주셨다. 우리의 생을 가장 건전하고 신성한 방면으로 이끌 것을 섭취하는가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생을 시들게 하고 영퇴케 하는 악독한 탄소가 드나드는가 하면 우리 눈이 차차 난시화하여 사물을 제대로 보는 것이 드물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신의 바람이 우리 호흡기를 소제하며 눈에는 새로운 안약을 발라야 한다. 하느님의 기운, 즉 성신을 절실히 요구한다.

1934년 6월 27일 (제969호)
분류: 사설
제목: 未來에 着眼하자
희년을 자축하는 우리 교회들은 과거의 여하를 솔직히 고백하는데, 과거가 비교적 아름다웠음을 감사하는 중에 현재를 바라보게 된다. 귀중한 희년 행사를 감리 따로 장로회 따로 선교사만의 회합을 따로 갖는 것이 유감이다. 초대 교회의 방향으로 돌아가 현재의 분산과 무실력을 통절히 느껴 남김없이 회개할 것이다.

 
1934년 7월 4일 (제970호)
분류: 사설
제목: 革新一週年을 當하야
하느님 능력으로 20년 전에 본보가 탄생하였고, 또 하느님이 자라게하는 은혜를 주사 작년 7월 본보 혁신을 단행하여 과거 19년간 선교사의 직접 경영으로 운영되던 것이 작년부터 경영 일체를 우리에게 넘겨 시행하게 된 것이다. 여러분의 진정한 편달과 또는 피섞인 성의의 후원이 더욱 필요하다.

1934년 7월 11일 (제971호)
분류: 사설
제목: 하느님으로 중심하리
인간은 이기적이고 자기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자기 명예를 드러내기 위해 하느님의 이름을 장사하는 이가 있다. 성신의 감동을 입은 자들은 침묵을 깨치고 무고한 대중을 지도하라.

1934년 7월 18일 (제972호)
분류: 사설
제목: 夏期利用과 滌署1)問題
여름 더위가 오면 산으로 바다로 왕래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더위로 더불어 투쟁하기 위한 생각을 정돈하지 못하고 더위의 세력에 압박을 받는다. 이번 여름도 이렇게 졸렬한 생애를 보낼 것인가, 아니다, 여름의 의미를 잘 음미해서 더위의 효력을 충분히 흡수할 것이다. 하기임간 성격학교나 해변(혹은 강변) 성경학교가 그 방법이다. 부처처럼 고요한 자리를 찾아가 사찰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1934년 7월 25일 (제973호)
분류: 사설
제목: 가증한 것과 난처한 일
눈으로 차마 볼 수 없는 것과 귀로 차마 들을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가증한 것의 가장 중요한 예는 외식, 즉 ‘체’하는 것이고, 난처한 일로는 ‘오해를 받는 것’이다. 외식에 대해서 주의 권위를 체받아 일곱번씩 일흔번을 용서하면서 철저히 응징하고, 오해에 대해서는 인간의 죽음이 인간의 오해에 기인한 것임을 알 것이다.


 
1935년 1월 1일 (제996호)
분류: 사설
제목: 새해를 마지하면서 -복흥과 개혁
새날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자신이 늙어졌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진리가 세월이 흘러 드러워 졌는가 하는 문제이다. 반드시 진리 그대로 첫 열심 그대로 첫 진실 그대로를 복흥하여야겠다. 진리를 믿음에 있어 옛날로 돌아가서 아무 도금한 것이 없는, 아무 섞임이 없는 그리스도교를 회복할 것이요, 오늘날과 같은 미지근한 무능한 그리스도교를 만든 재래의 방식의 결함을 발견해야할 것이다.

1935년 1월 9일 (제997호)
분류: 사설
제목: 消極에서 積極으로
우리 민족을 소극적으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니라 종교이다. 세상에서 벗어나 아담하게 집세우고 해탈의 도를 닦는 것, 매양 움직임에 정중을 주장하고 복종하는 습관을 짓고 하지말라는 것이 더 많은 종교들이 우리 생각을 가라앉게 하고 우리 생활을 미지근하게 하였다. 철두철미하게 적극인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범사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에도 다른 종교의 찌꺼기가 있다. 가령 십계명에서 상반보다 하반을 많이 가르쳤다. 표면은 그리스도지만 이면에는 유교도 있고 불교도 있는 게 사실이니 우리는 여기서 분기하여야 한다.

1935년 1월 16일 (제998호)
분류: 사설
제목: 書會事業과 새 期待- 書會主日을 앞두고
예수교서회는 조선기독교의 문화 계발을 위해 세워진 최초요 또 하나인 출판기관이다. 이 기관이 존속해온 것은 책파는 장사가 아니라 책을 전파하는 사업을 하는 기관이었기 때문이리라.

1935년 1월 23일 (제999호)
분류: 사설
제목: 信仰의 貴重性
가치있는 사랑은 믿음을 가진 이에게만 있을 수 있다. 전도, 교육, 구제와 같은 우리 사업들에도 믿음이 중요하다. 그 인격과 믿음의 분량에 따라 사업의 성적이 나타날 것이다.

1935년 1월 30일 (제1000호)
분류: 사설
제목: 生命은 躍動한다
우리 신문이 나이로는 20년, 호수로는 1천을 헤아리게 되었다. 주를 믿는 조선 사람들이 가질 정론을 창작하거나 수집해오기를 천 번에 이르렀음에 감사와 찬송으로 자축한다.

1935년 2월 6일 (제1001호)
분류: 사설
제목: 삶과 죽음
죽음으로 생기는 번뇌를 없이하려고 철인이나 종교가 있었다. 그러나 죽음은 삶과는 떨어지지 않는 것이고, 때로는 야비한 삶의 노예가 되느니 죽음의 진중까지 돌진하여 그 안의 보화를 내 것으로 하려는 각오가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생이나 사나 그 자체에는 아무런 가치를 찾지 않는다. 길게 살아도 그 삶이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독이 되면 그건 죽은 개만도 못할 것이다. 생이나 사나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가치를 발휘한다.

1935년 2월 13일 (제1002호)
분류: 사설
제목: 新春三題
자유: 각자 독특한 향기를 품은 신앙의 꽃들이 참된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니 서로 흉보지 말라. 평화: 비상시대라 하지만 성도의 모임에서는 소아를 버리고 대아를 이루라. 찬송: 진리는 자유를 주고 사랑은 평화를 이루며 평화와 자유는 노래를 지어낸다. 찬송가의 재개편문제는 조심하고 협동하고 합심하여 이루라.

1935년 2월 20일 (제1003호)
분류: 사설
제목: 『한경희』 목사의 순교
십자가의 용장 한경희 목사는 호림, 요하 두 현에 거류하는 동포들이 날로 박해를 받고 있다는 것을 찾아 위로하며 선후책을 강구하려는 목적으로 북만노회의 명령을 띠고 시찰하는 중 정체모를 폭도들에게 순교의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의 피는 만주 전체를 물들일 것이다. 목자를 잃은 만주 동포와 유가족들에게 실질적인 대책과 보상이 필요하다.

1935년 2월 27일 (제1004호)
분류: 사설
제목: 선지자를 기다리는 마음
이 시대에는 하느님의 교훈이 좀더 명백하게 나타나기를 바란다. 즉 참선지자가 나타나서 우리 교회의 지난 역사를 엄정하게 비판하며 현재를 투철하게 규명하며 미래의 계획을 듣기 원한다. 과거에 쌓은 것에 폐단이 없지 않은지 검토하며, 현재에는 돈의 명령과 명예, 권세의 명령을 하느님의 명령보다 중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면 회개하여야 할 것이다.


1) 척서(滌暑): 더운 철에, 찬 것을 먹거나 목욕을 하거나 서늘한 바람을 쐬거나 하여 몸을 시원하게 함.
 

화이부동  07.03.22 09:23 
방가님의 쏠림이론은 충분한 근거가 있지 않을까요? 일본에서도 인재라 할만한 인간들이 전부 애니로 쏠리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다른 장르가 죽더라는 말이 있으니 말이죠. 불연속적으로 천재들이 튀어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래도 쏠림 속에서 뭔가 기반이 다져진 이후에 탁월한 것들이 생산되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 아닐까 짐작은 해보는데.. 이거, 근거가 못되겠는데요. ㅎㅎ
 
房家  07.03.22 14:04 
얘기해볼만한 자료를 추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게다가 기반이 다져져야 한다는 말씀은 정말 맞는 말이죠. 기반이 없는 데서 대가가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잖아요. 그래서 우리나라 인문학에서 대가의 출현은 아직 헛된 기대인거고요.^^
 
유리배  07.03.23 01:09  신고 
유물론...까지는 모르겠지만 쏠림 현상을 분석한 이야기들이 있긴 했습니다. 청소년 하위문화가 어떻게 문화산업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성장하는가에 대한 분석논문이었어요.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이론을 가져와서 설명했던 듯 합니다. (학회 발표 논문이었던지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1990년대에 청소년 시절을 겪은 이들은 문화적으로 풍요로웠던 경험을 할 수 있었고, 결국 현재에 이르러 일정한 형태의 문화자본을 형성한다는 얘기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오랜만에 찾아와서 희미한 기억 하나 슬쩍 던져 놓으니 무안하네요.. ㅎㅎ 방가님 부동님 모두모두 안녕하시죠?
 
房家  07.03.23 15:31 
아, 유리배님~~
요즘 제가 올리는 글들이... 발제와 과제로 점철된 아름답지 않은 제 생활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부끄러워요.^^ 오랜만에 오셨는데, 이렇게 힘겹게 사는 모습이나 보여서야...
저는 이렇게 살아요. 유리배님도 여전히 바쁘게 지내시죠?
아, 해주신 말씀에 대합 답변은, 잘 들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