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athan Z. Smith,“When the chips are down,” Relating Religion: Essays in the Study of Religio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4), 1-32.
*조너선 스미스가 자신의 스스로 자신의 학문적 여정을 되돌아보며 정리한 글이다. 학자 스미스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글이다. 내가 입문서 <조너선 스미스>를 쓸 때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던 글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그 책의 10개의 키워드는 이 글에서 스미스가 정리한 5개 주제를 중심으로 적당히 추가해서 만든 것이다.
아래는 이 글의 번역이다. 내용이 길어 ‘생애’와 ‘학문적 주제’ 두 파트로 나누어 올린다.

III: 지속적인 관심사들
60년대 후반 시카고대학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던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나에게 엘리아데는 종교사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모범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읽은 것 같았고, 가장 이질적인 자료들을 일관된 구조 안에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나는 대학원 시절에 엘리아데의 『종교유형론(Patterns in Comparative Religion)』의 엄청난 참고문헌에 언급된 거의 모든 문헌을 읽기로 결심하고, 필요한 언어들을 배우기 위해 개인 교사까지 고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독서가 이 분야에 대한 나의 배움을 이루었다. 엘리아데는 나의 스승님이었고, 한 번 뵌 적도 없었기만 그의 지적인 힘은 한층 강하게 내게 느껴졌다. 한번은 1965년 노테르담대학 학회에 차를 몰고 가다가 시카고에 들러 몇 시간 동안 공중전화 부스에 앉아 있기도 했다. 엘리아데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달라고 하려다 용기가 나지 않아 하지 못했다. 2년 반 뒤 산타바버라 근교 빌라로 엘리아데를 만나러 가던 첫날 밤, 그날의 운전만큼 초조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알고 보니 엘리아데는 온화한 거인이었다. 지적이면서도 웃음기 가득하고, 호기심 넘치며, 즐겁게 농담하는 분인 동시에 이국적 지식의 거장이었다. 그는 내 작업을 지지해 주는 동시에 우리 가족까지 자신의 넓은 인간관계에 포함해 주었던, 가장 관대한 선배 동료가 되었다. 그와 맺은 인연은 내 생애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와 나눈 대화가 몹시도 그립다.
이러한 존경과 애정을 염두에 둘 때, 인간 엘리아데와 거리를 두지 않으면서 엘리아데 사유의 특정 측면에서 나를 어떻게 분리해 내느냐가 문제가 되었다. 이 딜레마는 1971년 엘리아데가 참석한, 엘리아데 작업에 관한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이러한 [몇 가지 비판적 소견]을 밝히면서, 나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의 처지를 뼈저리게 느낍니다. 다만 (‘OTSOG’[on the shoulders of giants]라 애착을 담아 줄여 부르는 이 고통스러운 문구를 로버트 K. 머튼의 명석한 역사적 탐구를 좇아 감히 확장해서) 더 멀리 내다보았다는 주장을 덧붙이지는 않겠습니다. 이 문구의 거인은 우리 모두에게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그리고 더 중요하게 우리가 보게 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 그의 제자인 우리는 다만 우리의 주변적 시야에서 비롯된 질문들, 모호한 점들, 그리고 그림자들을 내놓을 뿐입니다.”
시카고 시절 초기 내 작업의 상당 부분은 엘리아데와의 이견에 대한 건설적인 대안과 이를 표현하기 위한 적절한 수사적 표현을 찾는 데 할애되었다.
1. 전복과 반란, 위치 지정과 유토피아
나는 1968년 8월, 정말로 산타바버라에서 시카고로 이주하는 도중에 집필하여 고등교육종교학회 연례 모임에서 발표한 논문 「거꾸로 된 탄생인가, 바로 선 탄생인가?(Birth Upside Down or Right Side Up?, 1970)」에 수사적 표현의 측면에서 특별한 의미를 둔다. 베드로의 거꾸로 된 십자가 처형에 관한 외경 전승을 다룬 논문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이 논문은 1962~63년에 시작된 영지주의 주제와 텍스트에 관한 일련의 탐구의 연속선상에 있다. 여기서 새로운 점 하나는 영지주의에 관련해 발생론적 관심으로부터 좀 더 형태론적 관심으로의 전환했다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는 영지주의는 헬레니즘 지중해 세계 여러 종교 전통 내에 존재하는 하나의 구조적 가능성이다. 영지주의는 신종교나 기독교 이단이 아니라, 신비주의나 금욕주의와 유사한 하나의 구조다.” 내가 이 구조의 특징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용어는 특별히 시원적 전통과의 관계에서의 ‘전복(reversal)’과 ‘반란(rebellion)’이었다. 이 사례들은 이러한 요소들이 결코 ‘헬레니즘 지중해 세계’에 국한되지 않음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또 다른 관점에서 이 논문은 이전 작업과 여러 단절 지점을 보여준다. (1) 첫 번째 단절은 비교 자료의 범위와 관련되는 것으로, 이는 내가 이해한 엘리아데 전통에 충실함을 보여준다. 「수치의 의복(The Garments of Shame, 1966)」에서 나는 나체 전통을 폭넓게, 동물 가죽을 입고 진행하는 퇴마 의례를 이보다는 좁게 다루었지만, 사례들은 지중해 세계나 기독교의 텍스트에 한정되어 있었다. 즉 시공간적 인접성에 의해 보장되는 발생론적 관계—내가 훗날 ‘상동성(homology)’이라 명명한—를 전제하고 있었다. 반면 「탄생」에서는 그러한 제한을 두지 않았다. 이 논문은 상징이나 원형의 의미를 ‘즉각적으로 파악’하려는 엘리아데적 수법으로 시작하여, 종교사가가 베드로의 거꾸로 된 십자가형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물었다. “거꾸로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현상학적 정신의학자 E. W. 스트라우스의 견해를 빌려 “그것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비인간적으로 되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런 다음 서구와 비서구 전통, 신화, 제의, 문학 텍스트에서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했다.
(2) 『도마 복음』이 제기한 문제를 초기 기독교에 대한 전통사적 접근의 맥락 안에서 다룬 「의복」과 달리, 「탄생」은 『베드로 행전』이 제기한 문제를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메리 더글러스, 빅터 터너뿐만 아니라 에밀 뒤르켐과 마르셀 모스, 로베르 헤르츠, 미국의 민족지학자들, 그리고 조르주 뒤메질 등이 대표하는 광범위한 인류학적, 이론적 맥락 안에서 다루었다.
(3) 이 논문은 엘리아데와의 이견을 진술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1974년에 집필된 여러 논문을 지배하는 주제가 되었다. 우주 발생 신화에 관한 엘리아데의 견해를 요약하고 그것이 고대 지중해 문화의 측면들에 적용될 수 있음을 주장한 뒤(코르넬리우스 로[Cornelius Loew]의 범바빌로니아 학파의 결론 요약을 이용하였다), 나는 대안적 주장을 제시했다.
“우리는 많은 시원적 문화에서 태초에 질서 잡힌 우주에 대한 깊은 믿음, 질서를 부여하는 태고의 행위에 대한 즐거운 축하, 그리고 신화의 반복, 의례, 행위 규범 또는 분류체계를 통해 그 질서를 유지하려는 깊은 의무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문화에서는 질서의 구조, 그 질서를 쟁취하거나 규정한 신들, 심지어 창조 그 자체가 악하고 억압적인 것으로 발견되기도 한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모범에 반하는 반란을 일으키고 그 권력을 뒤집으려 한다. ...
창조를 갱신하고 운명의 패턴을 재확립하는 대신, 그 패턴들이 근본적으로 왜곡된 것으로 인식된다. ... 실재는 창조를 통해 질서 잡힌 우주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위, 세계 너머에서 발견되며, 존재의 목적은 자기 자리라는 제약된 한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나는 “반란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rebellion)”이 요청된다고 결론지으며, “그러한 연구가 오랫동안 지체되었고, 현재 상황에서 엄밀한 학술적 의미 이상의 중요성을 가질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이제 필요한 일은 이 이원론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었다. 여러 선택지를 검토한 끝에, 「사회 변화에 대한 상징의 영향(1970)」에서 첫 번째의 좀 더 엘리아데적인 유형에 ‘위치 지정적(locative)’이라는 용어를, 「흔들리는 중심축(The Wobbling Pivot, 1972)」에서 두 번째의 반란의 유형에 ‘유토피아적(utopian)’이라는 용어를 확정했다. 이렇게 나온 ‘위치 지정적/유토피아적’이라는 이분법은 오늘날까지 계속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첫 번째 거리두기 노력의 정점은 1971년 엘리아데 저서를 주제로 한 학술 행사였고, 그 결과물이 「흔들리는 중심축」(1972)이다. 이 논문은 비판의 필수 전주곡으로 엘리아데의 성스러운 공간과 성스러운 시간 범주를 최대한 공정하고 정확하게 요약하는 시도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비판은 외교적으로 표현된 일련의 질문 형식을 취했다. 카오스(chaos)는 속(profane)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최선인가? ‘중심(Center)’이라는 범주가 지리적 상징이라는 측면에서 너무 좁게 논의되지는 않았는가? 주변부(periphery)에 동일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중심에만 집중할 수 있는가? 신화적인 태초는 모두 모범적이며 의례적으로 반복되어야 하는가? 전복과 반란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주 내의 근본적인 긴장을 표현하는 신화들은 어떠한가? “분명히 이러한 신화들은—그중 다수는 지극히 시원적임에도 불구하고—엘리아데가 근본적인 ‘고대 존재론’이라고 묘사한 것과는 다른 영적 지평을 가리키고 있다. 엘리아데가 묘사한 자료들이 과연 ‘고대’와 ‘현대’라는 범주 아래 가장 잘 조직될 수 있는가? 신화적-순환적 시간과 선형적-역사적 시간이라는 이분법이 과연 다양한 문화에 존재하는 풍부한 시간적 의미의 패턴들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가? 여기서 나의 의도는 각 질문에 부정적인 답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일관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흔들리는 중심축」은 또 다른 면에서도 흥미롭다. 위치 지정과 유토피아라는 구분을 처음 도입한 뒤, 이 이분법에 “명시적인 진화론적 발전 도식”를 부여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예컨대 위치 지정을 원시적·시원적 사회와 동일시하고 유토피아를 현대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언제나 공존해 온 실존적 가능성이다. ... 특정 문화, 특정 시기나 장소에서 어느 한쪽이 더 지배적으로 나타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두 가지 모두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든 기본적으로 선택 가능하다는 가정”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 점은 강조될 필요가 있는데, 내가 자주 사용하는 지중해 세계 사례들이 마치 위치 지정적인 고전 전통이 항상 유토피아적인 후기 고대 자료보다 앞선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내 자신의 언어 표현이 때때로 그러한 이해를 부추기기도 했다.)

2. 상황, 불일치, 그리고 사유
「흔들리는 중심축」에서 나는 여담으로 다음 이야기를 했다. “우주관(즉 위치 지정과 유토피아)을 그것들이 발견되는 사회 세계와 연관시키면 많은 것을 배울 것 같다.” 나는 분명 내 입문 수업의 특징이었던 ‘텍스트 위치시키기(situating)’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72년부터 나는 이러한 노력을 저술 활동으로 옮기는 방법들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1974년 5월 시카고대학교 학부로부터 ‘종교와 인문학’ 윌리엄 벤턴 석좌교수 부임을 기념하는 취임 강연 요청을 받았을 때, 나는 그러한 강연의 관례를 빌려 이미 수행한 작업을 요약하는 동시에 새로운 방향성을 예고했다.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Map Is Not Territory, 1978)」라는 강연에서 엘리아데에 대한 찬사와 비판이라는 이중 기획에 작별을 고하는 동시에, 다른 진로를 가리켰다. 이제 ‘반란과 전복’ 대신에, 신화와 의례를 복제가 아닌 의미에서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지극히 구체적인 ‘상황’ 내에서 경험되는 ‘불일치(incongruity)’에 주목하였다. 여기에는 “불일치의 인식이 사유를 낳는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이 강연은 이제 ‘지도’라고 명명한 위치 지정적 우주론을 재론하는 것으로 시작되지만, 여기에는 반전이 있다. 논점은 더 이상 이 유형을 수용하느냐 다른 유형과 병치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고대 문화와 현대 학계 둘 모두에서 사회적 상황의 측면에서 이 유형을 의심하는 것에 관한 문제가 되었다.
“나는 이러한 우주론을 세계에 대한 ‘위치 지정적 지도’라고 부를 것이며, 그러한 세계를 조직하는 이는 제국적 인물일 것이다. 그것은 일치(congruity)과 순응의 구조를 통해 의미와 가치를 보장하는 세계 지도이다.
종교학자들은 이러한 위치 지정적이고 제국적인 세계 지도를 기술하고 해석하는 데—특히 고대의 도시 문화 내에서—가장 성공적이었다. ... 그러나 이러한 지형학의 성공이야말로 주의를 요하는 신호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주로 도시적, 농경적, 계급적 문화의 문헌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치 지정적이고 제국적인 세계관의 가장 설득력 있는 증인들은 이동성을 제한하고 장소에 가치를 두는 데 깊은 이해관계가 있었던, 잘 조직되고 자의식이 강한 서기 엘리트들의 산물이다. 그 텍스트들은 대체로 신전과 왕실의 산물이며 그들의 존재 이유(raison d’être)를 제공한다. ... 우리는 대부분 위치 지정적 세계 지도에서 자기충족적 이데올로기를 마주하고 있으며, 이를 종교적 경험과 표현의 보편적 패턴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여기서 단수형인 ‘보편적 유형’은 엘리아데의 ‘고대 존재론’을 지칭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비판은 확장되었다. “나는 반복에 대한 현상학적 기술이든, 피드백 메커니즘에 대한 기능주의적 기술이든 간에, 일치와 순응에 주된 강조를 두는 다양한 종교 접근법에서 동일한 보수적,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발견한다. ...”
강연은 그다음에 이 비판의 주된 함축으로 밝혔는데,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상황 그 자체보다는 일치에 높은 가치를 두는 태도가 사유의 노력과 지적 비판의 중요성을 부정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었다. 특히 그 태도가 소위 ‘원시인’들에게 투사될 때 그러했다. 불일치의 인식을 논쟁의 지점으로 삼아, 강연은 그러한 견해의 결과들에 반박했다.
“그러한 견해는 개념적 수준에서 그들로부터 인간성을 박탈한다. 우리가 인간 존재의 본질로 인식하는 상징적 기획이 바로 차이(discrepancy)와 불화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시인을 경험이 믿음에 도전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는 환상의 수준으로 격하한다. ... 그 환상의 세계에서 불일치는 사유를 낳는 대신 사유를 통해 지워진다.”
불일치와 사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강조가 갖는 한 가지 함의는, 태초의 신화에 대한 낭만주의 이론과 달리 신화란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사려 깊은 전략”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강연에서 이는 새로 들려온 가축을 설명하기 위한 오세아니아의 언어유희적 설명, 아프리카의 점술, 호주와 아프리카의 성인식 시나리오에서 나타나는 기대와 실재의 병치, 그리고 스람섬 하이누벨레(Hainuwele) 신화에 관한 상세한 논의를 통해 이를 예증했다. 반란과 전복이라는 유토피아적 주제를 확립하기 위해 이전에 사용했던 후기 고대 자료들은 짧게 언급되었을 뿐 깊이 논의되지 않았다.
강연은 두 종류의 결론으로 맺어졌다. 하나는 내가 이전에 몰두했던 위치 지정과 유토피아의 구분을 되돌아보고, 이것들이 수많은 ‘지도’ 중 단 두 가지에 불과하다는 점을 시사했다. 강연은 이 지도들 외에 또 하나의 지도를 스케치했다. 그것은 “불일치를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불일치한 요소들을 그대로 두는 농담(joke)에 더 가까운” 전통들, “불일치 사이에서 유희하며 사유의 기회를 제공하려 하는” 전통들이다.
다른 결론은 하이누벨레 신화와 관련하여 제시된 것을 일반화하려고 한 것이었다.
“스람섬의 하이누벨레 신화는 ... 딜레마를 해결하거나 불일치를 극복하거나 긴장을 해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원주민에게 사유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것은 새로운 상황과 자료에 대해 원주민의 범주가 얼마나 적절하고 적용 가능한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무엇보다 합리적이고 합리화하는 기획이며, 실험적 방법의 한 사례이다. 실험은 실패했다. 백인은 원주민의 범주에 순응하지 않았고, 여전히 호혜성이라는 도덕적 요구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의 성공을 그런 식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우리는 참신한 것과 불일치한 것을 이해의 영역 밖으로 내버려 둔 이들을 박하게 평가한다. 반면 (비록 실패할지라도) 지적 명료함을 얻기 위해 끈질기게 시도하는 이들, 이해라는 길고 험난한 길을 선택한 이들에을 가치 있다고 평가한다.”
내가 자신을 종교에 대한 ‘주지주의적(intellectualist)’ 이해를 가진 사람으로 규정할 때, 그것은 바로 이 인용문이 시사하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종교 상상하기』에 수록된 여러 논문은 이러한 주제들을 정교화하는 데 할애되었다. 문화 간 충돌의 상황(「값진 진주와 얌 화물」[1976], 「알지 못하는 신」[1982]), 문화 내적 불일치의 상황(「의례의 적나라한 사실들」[1980]), 그리고 어떤 현상을 독특한 것으로 분류하여 결과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학술적 담론(「존스 씨 안의 악마」[1982]) 등이 그것이다.
상황적 불일치에 대한 가장 지속적인 탐구는 1985년 브라운 대학교에서 행한 메릴 L. 하센펠드 기념 강연에 기초한 『자리 잡기: 의례 내의 이론을 찾아서(To Take Place: Toward Theory in Ritual, 1987)』였다. 여기서 쟁점은 예루살렘의 특정 장소(성전과 성묘 교회)를 위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두 체계적 의례—하나는 유대교 의례, 하나는 기독교 의례—가 겪은 자리바꿈(displacement)의 문제였다. 각 집단은 역사의 우연성으로 인해 그 장소에 대한 접근 권한을 상실했다. 각자에게 의례는 새로운 지적 구성물로 대체되어야만 했다. 그것은 미슈나(Mishnah)와 같은 텍스트로 대표되는 ‘깨끗함/부정의 공간적 체계’와, 전례력(典禮曆)으로 대표되는 ‘시간성의 체계’이다.
3. 분류와 비교
어릴 적의 식물학에 대한 관심과 벼과 식물 분류에 대한 매혹은 비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나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뜻하는 바를 고민하며 수많은 시간을 보냈다. “식물의 자연 분류란 구조에 나타난 유사성에 따라 서로 다른 종(種, species)들을 군(群, groups)으로 배열하는 것이다.” “군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개념은 대개 형태학적 유사성에 기초한 추론이다.” “한 종류로 보일 만큼 서로 닮은 개체들은... 동일한 종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어떤 것들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나 구분되는 종인지, 아니면 커다란 변이를 보이는 몇몇 구분되는 종인지에 대한 의문은 항상 제기된다.” 이러한 의문들 때문에 저자는 ‘뚜렷한 변종’, ‘덜 뚜렷한 변종’, 그리고 ‘추가적인 형태’를 구분하게 되었다.
1952년 여름, 내가 운영하던 작은 오솔길 박물관에서 기획한 야심 찬 전시 중 하나는 ‘동일함, 비슷함, 다름(Same, Like, Different)’이라는 제목이었다. 이는 흔한 야생 식물의 사례를 통해 분류학에 수반되는 쟁점들을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간단히 말해 분류학은 명백한 개별적 변이들 속에서 유사성을 찾고, 겉으로 보이는 유사성 앞에서도 유의미한 차이를 주장하는 비교 기획으로 보였다. 이러한 초기 인식은 약 30년 후 다음과 같은 진술에 반영되었다.
비교가 결코 ‘동일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자명하다. 비교는 그 자체가 흥미로워지기 위한 근거로서 ‘차이’를 수용할 것과, 명시된 인식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 차이를 방법론적으로 조작할 것을 요구한다. 비교의 문제는 차이에 관한 판단의 문제이다. 비교 탐구의 흥미 내에서 어떤 차이를 유지해야 하는가? 당면한 지적 과제에 비추어 어떤 차이를 정당하게 완화하고 상대화할 수 있는가?
예일대학교 대학원에서 인류학 강의를 듣기 시작했을 때, 나는 친족에 관한 인류학의 관심을 이해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 결국 친족 체계는 인류가 만든 가장 정교한 분류적 구성물 중 하나이며, 인류학자들의 친족 체계 비교 연구는 분류에 있어서 가장 인상적이고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공부하는 젊은 학생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 그들을 통해 루이스 H. 모건의 선구적인 연구인 『고대 사회(Ancient Society)』와 『인간 가족의 혈연 및 인척 체계』를 접하게 되었다. 이후 토테미즘에 관한 프레이저, 뒤르켐, 로버트슨 스미스의 저작을 찾아 읽었으며, 대학 시절에는 뒤르켐과 모스의 분류에 관한 연구뿐만 아니라 레비스트로스의 초기 친족 연구들도 읽었다. 헤시오도스의 계보에 대한 구조적 연구를 진행하면서, 1940년대 중반 이후 발표된 북미 원주민, 아프리카, 호주 및 기타 오세아니아 사회의 친족에 관한 문헌들을 체계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예일대학교에서 내 흥미를 가장 끌었던 것은 이 체계들의 다양한 공식화(formalizations)를 둘러싼 논쟁들이었으며, 이러한 흥미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의 기본 구조』 제2판이 출간되었을 때 다시금 깨어났다. 이 시기 내내 나는 생물 분류학의 이론적 문헌들과 식물 분류체계 학술지들을 계속해서 읽어 나갔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나는 비교와 분류를 항상 떼어놓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해 왔다. 내 출판물에서 한 주제는 항상 다른 주제를 수반한다. 생물 계통학에 의존하여 분류학적 쟁점에 집중한 일련의 저작으로는 「신화와 전설 속의 동식물」(1974), 「울타리와 이웃」(1980), 「차이가 만드는 차이」(1985), 「분류」(2000) 등이 있다. 거기서 파생되는 관심이 ‘세계 종교’라는 문제적 분류군(taxon)이다.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1978), 「종류의 문제」(1996), 「종교, 종교들, 종교적인」(1998), 「분류」(2000)에서 다루어진다. 다른 파생 관심은 토착적인 분류 범주들이다. 「대지와 신들」(1969), 「거꾸로 된 탄생인가, 바로 선 탄생인가?」(1970), 「악령의 힘 해석을 향해」(1978), 『자리 잡기』 3장(1987), 「미분 방정식」(1991), 「지혜의 장소」(1995), 「다양한 종류의 근접 조우」(2001)에서 다루어진다. 또한 비교에 더 집중한 논문들도 있다. 「아데 파르붐(Adde Parvum)」(1971), 「비교 안에 마법이 깃들어 있다」(1982), 『신성한 노역(Drudgery Divine)』(1990), 「에필로그: 비교의 ‘종언’」(2000), 「감사의 글: 형태론과 역사」 1-2부(2000) 등이 그들이다.
비교의 문제를 처음 연구할 때 내 주된 관심은, 많은 학자의 관행에서 너무나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방식을 배제할 수 있는 엄밀한 방법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었다. 그 관행은 학자에게 우연히 눈에 띈 ‘x’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y’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x’가 어떤 방식으로든 ‘y’와 같을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을 말한다. 초기에 조지 P. 머독과 ‘인류관계 지역 파일(HRAF)’이 제시한 통계적 절차에 열광했던 이유는 그것이 그러한 엄밀함을 제공해 주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절차상 결함이 있었으며, 특히 ‘표본(sample)’에 관련해 더욱 그러했다. 그럼에도 60개 사회의 표본을 통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2만 개 이상의 상관관계를 도출해 낸 그 기획의 요약된 결론은 여전히 지적 자극을 준다. 이와 반대로 대부분의 종교학자는 비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기껏해야 수십 개 정도 다룰 뿐이다.
또한 종교학의 수많은 비교는 각 특성이 복잡한 현상 속에 내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일 특성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이미 역사적 연구들(「수치의 의복」, 「요셉의 기도」)에서 요소들의 군집(cluster)을 비교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그런 글을 썼지만 레비스트로스는 내 주장의 불충분함을 일깨웠다. 중요한 것은 요소 자체가 아니라 요소들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었다. 나는 1970년대의 상당 기간을 비교의 문제점과 그 해결책—통계적 절차와 같은 엄밀함이 바람직하며, 다원적 특성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옳다는 확신 속에 작업한 바 있다.
이러한 사안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1978년 성서학회(SBL) 연례 학술회에서 학회 창립 100주년 기념 기조강연 요청을 받은 것을 계기로 촉발되었다. 당시 점차 중요해지고 활동도 활발하지만 명칭이 마땅치 않았던 한 분야—신구약 중간기 유대교, 성서 이후 유대교, 초기 유대교, 후기 유대교, 헬레니즘 유대교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던 분야—의 정의 문제에 대해 한 말씀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강연 내용은 로버트 크래프트와 니켈스버그가 편집한 백주년 기념 논집 『초기 유대교와 현대 해석자들』에 포함될 것이었다. 나는 이 과제에 응하여 「선 긋기(To Draw the Line)」라는 제목의 강연 초안을 여러 번 썼으나, 이 문제가 단순히 명칭의 다양성에 반영된 편향이나 관심사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음이 이내 분명해졌다. 더 심각한 것은 분류, 비교, 그리고 함축적으로는 정의와 관련된 일련의 이론적 문제들이었다. 비슷한 시기(1975-76)에 ‘비교 역사의 문제들’ 강의를 다시 개설할 준비를 하며, 나는 전통적인 생물 계통학의 진화론적 관심을 비판하고 계통발생적 역사와 상관없이 모든 특성을 고려할 것을 주장하는 표현형적(phenetic) 및 수치 분류체계의 최신 문헌들을 읽고 있었다. 나는 칸트가 초기 저작에서 제시했던, 동시대의 복잡한 유사성(Naturbeschreibung, 자연지학)과 역사적·계보적 관계에서 비롯된 유사성(Naturgeschichte, 자연사) 사이의 구분이 이 문헌들에서 반향되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나는 특히 ‘인종’ 범주의 발명과 관련지어 이 칸트의 구분을 ‘비교 역사의 문제들’ 강의에서 가르친 바 있었다.
100주년 기념 강연인 「울타리와 이웃」(1980)에서 나는 새로운 수치 분류체계의 제안들을 요약하며, 이를 “완벽하고 고유한 단일 차별성을 포기하고, 부류(class)에 포함되기 위한 ‘필요’ 조건은 유지하되 ‘충분’ 조건이라는 개념은 버리는 자의식적인 다원특성(polythetic) 분류체계의 양태”라고 설명했다. 비교는 다수의 특성에 기초하며, 부류의 개별 구성원이 이 모든 특성을 반드시 다 가질 필요는 없다. 나는 이어서 유대교라는 분류군(taxon)에 대한 앞으로의 다원특성 묘사를 향한 두 가지 ‘실험’을 기술했다. 첫 번째는 분류 지표 중 하나인 할례의 ‘범위’를 지도화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묘비명 전집에서 수집한 유대인 정체성의 다양한 지표들을 분석한 것이었다. 결론은 계획을 제시하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성찰과 탐구를 움직인 동력은 종교학자들이 초기 유대교에 대한 ‘본질’이나 고유한 차별성이라는 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확신이다. ... 지도는 훨씬 더 무질서해 보인다.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특성들의 유동적인 군집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유대교들’을 지도화해야 한다.
인류학자가 문화를 잘 짜여진 고도로 통합된 메커니즘으로 보는 기능주의적 견해를 버리기 시작했듯이, 종교학에서도 우리는 전체화, 통일화, 통합을 향한 낡은 신학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충동들을 해체해야 한다. 초기 유대교에 대한 단일특성적(monothetic) 정의가 아니라 유대교들의 다원특성적(polythetic) 분류를 성취하려는 노력은 이 목적을 위한 예비적 단계에 불과하다.
나는 10년 후 1988년 루이스 H. 조던 강연에서 비교에서의 단일성(singularity) 문제로 되돌아갔는데, 이번에는 생물학이 아닌 철학의 유사성 이론(resemblance theory)의 도움을 받았다. 여기서의 제안은 더 형식적이었다. 즉, 비교 진술을 “x는 y를 닮았다”는 식의 2항적 관계로 간주하기보다, 최소한 3항적인 “다항(multiterm)” 표현, 즉 “~라는 측면에서 x는 z보다 y를 더 닮았다”거나 “~라는 측면에서 w가 z를 닮은 것보다 x가 y를 더 닮았다”는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79년 나는 제이컵 노이즈너의 초청으로 미국 종교학회(AAR)의 유대교사 섹션에서 기조 논문을 발표하며 엄밀함과 단일성에 대한 이러한 쌍둥이 관심사로부터 비롯된 성찰들을 집약했다. 「비교 안에 마법이 깃들어 있다」(1982)라는 논문 자체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저명한 인류학자이자 파푸아뉴기니 전문가인 피츠 존 포터 풀(Fitz John Porter Poole)이 보여준 반응이었다. 이후 학회에서 발표된 그의 논문은 필자에게 지난 20년 동안 비교를 다룬 가장 시사점 풍부한 연구로 남아 있다. 필자의 관심을 가장 끌었던 문장은 다음과 같다. “비교는 현상을 전체로서(in toto) 혹은 입체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현상의 양상적 특성(aspectual characteristic)만을 다룬다.” 이는 단일성과 본질에 대한 의구심을 표현하는 나의 일반적인 언어보다 훨씬 더 나은 문제 설정 방식이었다. 그것은 종교 연구에서의 보수적 이데올로기가 가진 총체론적 가정들에 대한 나의 초기 비판과 잘 연결되었고, ‘양상적’이라는 용어는 내게 일련의 깊은 의미를 주었다. 나는 1988년 미국 종교학회 연례 학술회에서 할당된 다소 기묘하게 표현된 주제인 “무엇이 어떤 범주를 다른 범주보다 비교에 더 적합하게 만드는가?”라는 논문에서 이를 다룰 수 있었다. 이 논문은 『신성한 노역』(1990)의 제2장 「비교에 관하여」의 초안 일부가 되었다.
「비교에 관하여」는 비교 기획에 대한 내 현재 이해를 보여주는 외곽선을 그려준다. 비교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유의 결과이다. 훈련된 탐구의 도구로서의 비교는 다음과 같다.
[비교는] 학자 자신의 지적 이유를 위해 학자의 마음이라는 공간 안에서 차이들을 한데 모은다. ... 비교는 반드시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 모델이나 은유와 마찬가지로, 비교는 사물이 어떻게 개념화될 수 있는지, 어떻게 ‘재기술(redescribed)’될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 [비교는] 차이 내부에서 지적 유의미성을 가질 수 있는 특정 특징들을 집어 올려 강력하게 표시하며, 이를 규정된 방식에 따라 ‘닮았다’는 수사로 표현한다. 비교는 우리가 이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상을 우리의 자료로 ‘재시각화(re-vision)’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비교는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능동적이고 때로는 유희적이기까지 한 기획이다. 그것은 만화경처럼 학자에게 자신의 이론적 관심과 본보기로 규정된 자료 사이의 관계를 협상할 수 있는 일련의 유동적인 특성들을 제공한다.
이와 같은 구절에서 ‘양상적’이라는 관념이 확장되었다. 그것은 자료뿐만 아니라 학자의 지적 관심까지도 지칭한다.
「비교에 관하여」의 논의 과정에는 다음과 같은 종속절이 등장한다. “모델은 그것이 적용되는 대상과 다른 바로 그때 유용하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당시 나는 주로 지도 비유와 소비에트 ‘형식주의’ 문예 비평가들이 도입한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개념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비교에 내재된 병치가 가져오는 중요한 결과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이 책에 수록된 몇몇 논문에서, 인식적 이득을 위해 지적 ‘대상’이 현상과 달라야 한다는 관념은 종교학을 생각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아래 5절 참조)
『신성한 노역』에서는 이러한 함의들이 본격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다. 나는 대신 18세기 리처드 오웬의 영향력 있는 구분인 상동(homology)과 상사(analogy)를 재검토하고 확장하여 이에 비견되는 논점을 만들었다. 오웬에게 상동(공통 조상에 의해 설명되는 유사성)은 ‘실재적’인 것이었다. 즉, 그것은 역사가들이 계보, 접촉, 전파를 증명하기 위해 선호하는 종류의 계보적 비교였다. 반면 상사(유추)는 ‘관념적’인 것이다. 즉, 그것은 정신적 구성물이며, 특정 관심 지점에 대해 규정된 가정적 관계에 기초한다. 나는 『신성한 노역』에서 J. S. 밀의 격언을 찬성하며 인용했다. “만약 우리가 A와 B 사이에 아주 미세한 실재적 연결이라도 가정할 이유가 있다면, 그 논증은 더 이상 유추(analogy)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요셉의 기도」(1968)와 같은 초기 논문들이 상동적 의도를 가졌던 반면에, 이제 나는 유추(analogy)야말로 비교를 위한 적절한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자리 잡기』(1987)와 『신성한 노역』(1990)은 모두 야심 찬 비교의 시도들이었다. 『자리 잡기』의 주된 관심은 랍비 유대교와 콘스탄티누스 사후 기독교의 체계적 구성물 사이, 즉 미슈나로 대표되는 사유의 노력과 기독교 전례력의 정교화 사이의 비교에 있었다. 또한 칠파(Tjilpa) 족의 장대에 관한 초기 논의에서 엘리아데의 분류 범주인 ‘중심’과 관련하여 비교를 다루었다. 『신성한 노역』은 초기 기독교와 후기 고대 종교들(특히 소위 ‘신비종교’) 사이의 비교사에 대한 두터운 비판적 기술이며, 위치 지정과 유토피아의 구분을 재배치함으로써 새로운 비교를 시도한다.
비교와 분류 모두에 수반되는 차이의 조작 문제는 ‘차이’라는 용어에 대한 새로운 집중으로 이어졌다. 이 용어를 통해 필자는 ‘전복’, ‘반란’, ‘불일치’, ‘간극’과 같은 이전의 어휘들과, 인류학과 종교학에서의 비교 역사에 대한 과거의 관심들을 지난 10년 동안 내 작업의 특징이 된 새로운 역사적·이론적 관심사들과 결합할 수 있었다. 이 책에 실린 여러 논문이 이를 보여준다. 즉 문화와 차이의 관계, 차이가 긴급한 지적인 문제로 부상한 장소로서의 아메리카 ‘발견’과 그것이 인종 범주의 발명과 맺는 관계, 그리고 ‘지도’, ‘모델’, ‘패러다임’과 같은 예전 용어를 대체하는 ‘재기술(redescription)’이라는 용어, 그리고 정의에서 설명에 이르는 일련의 지적 작업들이 어떻게 재기술의 양태로 이해될 수 있는가 하는 쟁점들이다.
4. 문화, 차이, 그리고 사유
1974년에 나는 시카고 대학교의 연합 감리교 재단이 후원하는 신학 시리즈 강연에 초빙되어 “성스러움의 지속(The Persistence of the Sacred)”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맡게 되었다. 이 주제는 “인간은 언제나 종교적이었다”라는 진부한 테마의 변주처럼 보였다. 여러 강연에서 흔히 하던 방식대로 처음에 제목에 관한 질문들을 던진 후, 제목을 “성스러운 지속(Sacred Persistence)”으로 뒤집고, 그 사례로 ‘경전(canon)’이라는 범주를 선택했다.
강연에서는 경전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를 준비하기 위해 세 가지 상호 연관된 관찰을 보여주는 사례를 도입했다. 즉 모든 문화에서 이용할 수 있는 가능한 자연 식재료의 충만함, 특정 문화가 실제로 섭취하는 식재료의 자의적인 제한, 그리고 이러한 제한이 식재료의 다양한 조리법을 통해 극복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식품이 ‘제한’으로 특징지어지는 현상이라면, 요리(cuisine)는 ‘다채로움(variegation)’으로 특징지어지는 현상이다.” 이 비유는 “성스러운 지속”에서 주로 경전에 대한 유비로 사용되었으나, 여기에는 ‘문화적 활동의 일반 모델’과 더불어 ‘기지(ingenuity)’라는 용어를 통해 이러한 문화적 역동성과 사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암시를 담았다.
(자연 내에서) 손에 넣을 수 있는 거의 무한한 가능성의 지평은 (문화에 의해) 일련의 기본 요소들로 자의적으로 축소된다. ... 처음의 자의성은 때때로 그 축소를 설명하려는 이차적 설명을 통해 극복된다. ... 그 후, 그 축소를 극복하고 흥미와 다양성을 도입하기 위해 가장 강렬한 기지가 발휘된다. 이 기지는 대개 복잡한 규칙들을 수반한다.
즉 축소와 정교화의 역동성은 앞서 언급한 상황, 불일치, 사유(위의 2절 참조)에 관한 정식화와 연결되지만, 거기서 ‘상황’이라 불렸던 것이 외부에서 부여될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 생성될 수도 있으며, 예상치 못한 사건이라기보다는 규칙적인 사건이라는 관념이 추가되었다. 사유의 과정인 그 반응은 이전 논문들에서 ‘적용’, ‘실험’, ‘합리화’, ‘순응과 조정’, 또는 ‘사례 추론’이라 불렸다. 여기서는 그것이 ‘기지’라고 불린다. 식품/요리의 유비는, 신화를 “특정 상황에서 적용되고 사유되고 작업 되고 실험되는 고정된 범위의 문화적 의미를 지닌 제한된 요소들의 집합”으로 묘사한 이전의 설명과 짝지어진다.
이 모델을 가장 명확하게 활용한 것은 애리조나 주립대학교 종교학 강연인 「미분 방정식: ‘타자’의 구성에 관하여(Differential Equations, [1992])」였다. 나는 인간 문화에서 차이의 구성이 널리 존재한다는 사실을 넘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화 자체가 차이를 만들고 동시에 그 차이들을 상대화하는 이중적인 과정에 의해 구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근본적인 사회적 기획 중 하나는 우리가 만들어낸 차이들을 사유하고, 또한 사유를 통해 그 차이들을 지워버리는(think away) 집단적 능력인 것인 것 같다.
이보다 앞서 「아데 파르붐」(1978)에서 나는 로버트 레드필드가 ‘원시적 세계관’을 ‘인간/비인간’ 및 ‘우리/그들’이라는 상관관계가 있는 한 쌍의 이원적 대립으로 설명한 것을 바탕으로, 구축된 인간 차이들에 대한 초보적인 분류를 시도한 바 있다. 나는 ‘우리/그들’ 이원성의 네 가지 세부 사양을 제안했다. “(1) 그들은 우리와 같다, (2) 그들은 우리와 같지 않다, (3) 그들은 우리와 너무나 닮았다(로버트 프로스트의 ‘좋은 울타리가 좋은 이웃을 만든다’), 또는 (4) 우리는 그들과 같지 않다(‘고유성’에 관한 표현과 논쟁들).” 나를 계속해서 매료시킨 것은 세 번째 공식이었는데, 그것이 흔히 사유를 가장 자극하기 때문이다. 「차이가 만드는 차이」(1985)에서 나는 이를 ‘인접한 타자(proximate other)’의 문제라고 명명하며 ‘타자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타자성은 절대적인 차이보다 상대적인 차이의 문제이다. 차이는 동등하다고 판단되는 실체들 사이의 비교 문제가 아니라, 대개 위신과 서열의 위계(hierarchy)를 수반한다. 이러한 구분선은 ‘가까운 이웃’ 사이에 가장 날카롭게 그어진다. ... 이는 ‘타자성’이 필연적으로 상호작용의 용어인 한 상대적인 범주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타자성 이론’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우리는 수천 개의 ‘다른’ 사회와 세계관을 알고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멀리 떨어져 있음’은 우리의 무관심을 보장한다. 대체로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은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으로서 콰키우틀족이나 도교인(道敎人)의 ‘타자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 왔다. 타자성에 관한 그리스도교 신학 사상의 다수는 (바울로부터 시작해서) ‘다른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좀 더 가끔은 유대인이나 무슬림처럼 ‘그리스도인에 근접한’ 것으로 간주되는 집단들을 향해 있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종교적 갈등과 타자성에 대한 종교적 인식의 역사는 주로 종 내부적(intraspecific)이다. 즉 불교도 대 불교도, 그리스도인 대 그리스도인, 무슬림 대 무슬림, 유대인 대 유대인의 갈등인 것이다. 다만 중대한 예외들은 ‘근접성’이 사유의 문제라기보다 영토의 문제가 되는, 이론적으로는 흥미롭지 않지만 역사적으로는 흔한 순간들에만 발생한다.
나는 이후의 저작들에서도 이 ‘인접한 타자’라는 주제로 끈질기게 되돌아갔으나, 1976년의 식품/요리 유추와 명시적으로 연결된 것은 1999년의 미발표 원고에서였다. 나는 감식안(connoisseurship)의 판별력에 호소했다. 예컨대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을 구별하는 것에는 지적 흥미가 없다. 그것들은 완전히 다르며,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사유의 모든 노력은 같은 포도원이라도 서로 다른 해(빈티지)에 생산된 것들이나, 서로 다른 포도원에서 생산된 동일한 품종의 두 사례를 구별하는 데 집중된다. 문외한의 입맛에는 똑같아 보이는 항목들 사이의 이러한 미세한 차이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중요한 차이들이다. 내가 「미분 방정식」(1992)에서 주장했듯이, “가장 깊은 지적 쟁점은 이질성(alterity)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유사성, 때로는 동일성에 대한 인식에 근거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접한 타자와 무관한 차이가 심각한 인지적 충격으로 다가와, 기존의 인간학적, 우주론적 가정을 위협함으로써 그 다름을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의 문제가 시급해지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서구 담론에서 그러한 계기가 바로 아메리카의 ‘발견’과 북미 원주민과의 예기치 못한 만남이었다고 오랫동안 제안해 왔다. 이 사건은 ‘인간 본성’에 관한 질문들을 불러일으켰고 인문학에 긴급성을 부여했다. 또한 그것은 ‘인종’이라는 범주의 발명과 관련된 지적 문제들을 낳았다. 이 책에 재수록된 몇몇 예비적 연구들이 발표되었지만, 이 사례에 대한 완전한 역사적 논증과 인류학 이론에 대한 함의는 여전히 진행 중인 과제로 남아 있다.
5. 재기술, 번역, 그리고 일반화
1995~96년에 발생한 두 사건 때문에 이전에 미완성 상태였던 관념들이 명료하게 되는 계기를 맞이했다. 이 관념들은 이미 내 대학 강의뿐만 아니라 여러 미발표 강연과 세미나 논문에서 말하기와 쓰기 방식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첫 번째 사건은 1995년 성서학회(SBL) 연례 학술회의 ‘기독교 기원에 관한 고대 신화와 현대 이론 협의회’의 개회 세션이었다. 두 번째 사건은 1996년 웨스턴 메릴랜드 칼리지에서 열린 주로 젊은 학자들의 컨퍼런스인 “종교사 재구성하기: 문제와 가능성”의 기조 강연 요청이었는데, 여기서 내 역할은 마치 ‘과거의 크리스마스 유령’과도 같았다. 첫 번째 사건은 나의 참여만큼이나 버튼 맥(Burton Mack)의 논문이 중요했는데, 그는 내가 미처 도달하지 못한 명료함과 간결함으로 내 작업의 측면들을 요약해 주었다. “왜 종교를 상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강연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두 번째 사건을 나는 마치 유언처럼 받아들였다. 이 두 사건은 이후의 작업에서 계속해서 재등장하며 광범위한 주제에 대한 내 논의를 틀 짓는 새로운 연쇄적 요소들과 정식화를 담은 논문들로 이어졌다.
나는 1979년 「성스러운 지속」에서 메타포와 과학적 모델을 비교한 맥 블랙(Max Black)과 메리 헤세(Mary Hesse)의 논의를 빌려 ‘재기술(redescription)’이라는 용어를 처음 도입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메타포와 모델 모두 우리로 하여금 한 가지 사물을 다른 사물의 관점에서(대개 문제가 되는 것을 상대적으로 더 잘 이해된 것의 관점에서) 해석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사물을 새롭고 흔히 예상치 못한 시각에서 볼 수 있게 한다. 요컨대 모델은 하나의 ‘재기술’이다.
나는 이 용어를 사용할 때 종교학의 고전적 범주들을 ‘교정(rectified)’하기 위해 재기술한다는 핵심 목표를 표현했다. 따라서 「성스러운 지속」의 부제는 “경전의 재기술을 향하여”였다. 그 논문이 분명히 밝혔듯, 재기술과 교정으로 가는 경로는 비교이며, 비교는 세심한 기술(description)을 전제로 한다. 버튼 맥은 협의회 기고문에서 나의 작업에 나타난 이 ‘네 가지 작업(four operations)’을 처음으로 정식화했다. 2000년에 나는 이 작업들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재설명했다.
비교의 ‘목적(end)’은 비교 행위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나는 비교 기획에서 기술, 비교, 재기술(redescription), 교정(rectification)의 네 단계를 구분하고자 한다. 기술(description)은 작업의 역사적 또는 인류학적 차원을 포괄하는 이중적 과정이다. 첫째, 주어진 사례에 지역적 의미를 부여하는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환경의 풍부한 결 안에 그 사례를 위치시켜야 한다. 기술의 두 번째 과제는 수용사(reception history), 즉 우리의 이차적 학술 전통이 그 사례와 어떻게 교차해 왔는지에 대한 면밀한 기록이다. 즉, 그 자료가 논증의 목적을 위해 어떻게 유의미한 것으로 수용되었는지를 기술해야 한다. 이러한 이중적 맥락화가 완료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동일한 이중적 방식으로 수행될 [최소한] 두 번째 사례의 기술로 넘어갈 수 있다. 최소한 두 개의 본보기를 확보했을 때, 우리는 우리가 관심을 두는 특정 범주, 질문, 이론 또는 모델과 관련하여, 유의미하다고 간주되는 양상과 관계의 측면에서 비교를 수행할 준비가 된다. 이러한 비교의 목적은 (각각을 서로의 관점에서) 본보기들을 재기술하고, 그것들이 상상되어 온 학술적 범주들을 교정하는 것이다.
비교 없이는 사유가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원한다 하더라도 비교하기를 멈출 수 없다. 그렇다면 비교의 기획에 헌신하는 이들의 과제는 우리의 가정을 명확히 하고, 절차를 교정하며, 목표를 정당화하는 것이 된다.
1995년 협의회의 ‘응답’과 「왜 종교를 상상하는가?」 모두에서 새로운 주제가 제시되었는데,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비교의 의제와 관련이 있지만 그 역할을 넘어선다. 나는 오랫동안 번역 이론에 매료되어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 왔으며, 70년대 후반에는 이 주제로 대학 세미나를 열었고, 80년대 초에는 학부생들에게 『종교 생활의 기본 형태』에 있는 뒤르켐의 기획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적 장치로 번역을 도입하기도 했다. 이제 번역은 종교학의 가장 도전적인 목표인 ‘설명(explanation)’과 관련된 핵심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두 논문 모두에서 동일한 종류의 논증과 유사한 문구들이 반복된다.
설명과 해석 모두 ‘놀라움’에서 비롯된다. ... 자연과학과 인간과학 모두에서 놀라움은 미지의 것을 기지의 것과의 관계—유사성과 차이의 관계, 환유와 은유의 관계—속으로 가져옴으로써 감소된다. 이러한 작업이 성취되는 과정은, 다시 두 과학 모두에서 번역(translation)이다. 즉 한 영역(기지의 것/친숙한 것)에 적합한 이론적 이차 언어가 다른 영역(미지의 것/낯선 것)에 적합한 이론적 이차 언어를 번역할 수 있다는 제안이다. 종교학에서 이 절차의 가장 강력한 예는 뒤르켐이 『기본 형태』에서 ‘종교’에 적합한 언어(이 저작에서 그에게 미지의 것)를 ‘사회’에 적합한 언어(그에게 기지의 것)로 번역한 것이다. 뒤르켐의 기획과 견해를 달리할 수 있는 지점은 그가 ‘설명적 단순성’이라는 목표를 수용했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레비스트로스의 정식화가 더 좋겠다. “과학적 설명이란 복잡한 것에서 단순한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덜 지성적인 복잡성을 더 지성적인 복잡성으로 대체하는 데 있다.”
이 논증은 이러한 이해가 가져오는 한 가지 결과로 이어진다.
너무나 많은 종교학자의 작업이 ‘기술’이나 ‘바꾸어 말하기(paraphrase)’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는 번역의 매우 취약한 양태들로, 사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대상의 자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요약하자면 이론, 모델, 개념적 범주는 단순히 자료를 크게 써놓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
기술과 바꾸어 말하기를 선호하는 것은 앞서 ‘양상적(aspectual)’이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논의한 전체성에 대한 보수적 관심의 또 다른 사례일 뿐이다(위의 3절 참조). 반면 번역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다. “개념적 언어이든 자연 언어이든, 문화 간 번역이든 문화 내 번역이든, 번역은 결코 완전히 적절할 수 없으며 결코 전체적일 수 없다. 언제나 불일치가 존재한다. 만약 불일치가 없다면, 그것은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많은 종교학자가 바로 이 후자의 가능성(타자의 언어를 말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그것은 번역의 필연적 부적절함이 가져오는 결과, 즉 ‘비교와 비판이라는 이중적 요구’에 굴복하는 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번역의 이러한 필연적 불완전함은 그것이 교정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교정 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1990년대 중반 내 작업에 도입된 마지막 새로운 용어인 ‘일반화(generalization)’로 이어진다. ‘일반적인 것’은 예외를 허용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것’과 다르며, 고도로 선택적이라는 점에서 ‘특수한 것’과 다르다. 이 두 가지 특징은 일반화가 언제나 교정 가능하다는 것을 보장한다. 비교와 마찬가지로 일반화는 이질적인 현상들을 학자의 지성이라는 공간 안에서 한데 모은다. 그 결과 종종 놀라움이 발생하며, 이는 설명과 교정의 노력을 불러일으킨다. 종교학의 한 가지 목표는 확고하게 위치 지어진 자료의 면밀한 기술에 기초하되, 명시된 지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제안되는 ‘비교적 일반화’를 내놓는 것이다.

차이, 그리고 그것과 사유의 관련성에 관한 더 복합적인 이해와 결합해 재기술, 번역, 일반화라는 새로운 개념들을 도입함으로써, 내가 처음에 분류 문제와 연관시키고 나중에 전복, 반역, 상황적 부정합성에 관한 초기 논문에서 발전시킨 문제들이 한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종교학에서 이론적 구성물의 지위에 관한 고민은 종교에서 얻은 자료에 대한 관심과 만나고, 종교 서술에서 통일성과 일치성을 강조한 학자들을 비판한 오랜 흐름에 합류한다. 이러한 꾸준한 관심들에서 공통된 점은, 지형보다 지도를 우선 선택할 때 일어나는 뒤틂의 인식 능력에 계속 주목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종교 연구자(student of religion)인 동시에 종교학 연구자(student of the study of religion)였던 한 개인의 경력과 관심사들을 전달하고자 했다. 내 모든 행보와 실험을 통해 지속되었던 것, 즉 종교란 특정 양태의 경험을 낳는 ‘계시’로 이해되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는 주장을 전달하고자 했다. 반대로, 종교는 ‘상황’을 철저히 사유하려는 끈질긴 인간적 활동이다. 이는 “인간은 언제나 똑같이 훌륭하게 사유해 왔다”는 레비스트로스의 격언에 동의하는 인식이다.
그러한 관점에 따른 다른 결과는, 루디야드 키플링의 『평지 이야기(Plain Tales)』에 나온 문구인 “이론이 그를 죽였다(Theory killed him dead)”를 묘비명으로 쓰기를 거절하는 것이다. 나는 이론이 인간을 소생시키거나 자신이 선택한 학문 분야를 부활시킨다고 주장할 만큼 강박적인 학구파는 아니다. 하지만 이론이 삶 자체는 아니어도, ‘삶다움(liveliness)’임은 분명히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