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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섭-몽고메리, “정동과 종교학”

by 방가房家 2025. 9. 3.

Jenna Supp-Montgomerie, “Affect and the Study of Religion”
Religion Compass 9/10 (2015): 335345.
[정동 이론을 종교학에 적용하는 방식을 요령 있게 요약한 글. 글 전반에 걸쳐 부흥회 사례를 이용하여 설명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제나 섭-몽고메리, “정동과 종교학

하늘의 불길”(Heavenly fire)1801년 켄터키주 케인 리지(Cane Ridge)를 휩쓸었다. 2만 명이 숲속에 모여 서부 부흥운동의 최대 야영 집회에 참여했다. 자서전에서 이 행사를 묘사한 피터 카트라이트(Peter Cartwright, 1856, pp. 3031)에 따르면, “하느님의 위대한 능력이 아주 이례적인 방식으로 나타났으며많은 이들이 자비를 구하는 쓰라리고 큰 울음속에서 눈물을 흘리도록 이끌었다고 한다. 종교적 격정이 천둥처럼 참석자 위를 휘몰아쳐 수백 명이 전장에서 쓰러진 군인들처럼 하느님의 강력한 능력 아래 엎드렸다고 한다. 날이 갈수록 자발적인 열정의 폭발이 이 몸들을 전율하게 하며 새로운 신앙 경험을 만들어냈다.

진실한 증인들에 따르면 때로는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큰 소리로 외쳤고, 그 함성은 수 마일 밖에서도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이 집회에서 뿜어져 나온 에너지는 참석자들의 떨리는 몸을 넘어 신생 미국의 떠오르는 종교들에 빠르게 퍼져나갔고, 이는 미국 개신교에 주요한 재구성을 초래했다. 특히 장로교(Presbyterian Church) 내 대규모 분열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제자회(Disciples of Christ)와 그리스도의 교회(Churches of Christ)의 탄생을 이끌었으며, 그 외 감리교(Methodist), 침례교(Baptist), 셰이커(Shaker) 등 여러 집단의 성장도 견인했다.

종교와 감정 연구자들은 오랫동안 종교와 사회 에너지의 흐름, 19세기 수일간 이어졌던 부흥회를 충만하게 했던 고도로 충전된 감정 상태 간의 깊은 상호작용을 인식해왔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정동 이론(affect theory)이 종교학의 학문적 담론에 논쟁적으로 진입한 이유일 것이다. 일부 정동 이론가들은 정동을 감정에 대한 기존 논의를 거의 고려하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제시한다. 이들은 정동이 행복·슬픔 같은 감정 어휘로 표현되지 않는, 느끼는 주체조차 초과하는 에너지에 주목하기 위해 이 개념을 활용한다.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정동 이론이 전혀 새롭지 않고 오히려 감정과 종교에 관한 연구를 난해한 이론적 언어로 재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이들은 감정이 이미 사회적이고, 신체적이며, 문화적으로 규정된 현상임을 지적한다. 어느 입장도 상대 영역의 풍부한 자산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가장 뛰어난 정동 이론 연구는, 여러 감정 및 종교 연구를 수행하면서도 정동과 감정 사이의 결정적 차이와 생산적 중첩 지점을 모두 주목하고 경우에 따라 유연하게 용어를 교차해 사용하는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참고: Hamner 2014; Ibbett 2014; Schaefer 2014).

정동(affect)을 정의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 가지 방법은, 정동을 주체, 의미, 문화가 생성되고 조직되며 해체되는 사회적 에너지라고 보는 것이다. 필자는 일관된 주체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 주체들이 끊임없이그리고 우연히존재하게 되는 사회적 에너지의 상호작용을 다룰 수 있게 해주는 정동 개념을 옹호한다. 정동은 일관된 주체에 앞서거나 그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균열, 불일치, 해체의 현장인 존재를 통해 긴밀히 작동한다. 정동은 종교적 주체와 그 집단을 지속적인 역동성에 의존하는 조직화의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즉 정동은 어떤 존재의 양태가 모였다가 흩어지는, 결집과 해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운동이다.

정동 연구가 뚜렷한 위치를 확보하지 못하는 핵심적인 어려움은, 단일한 정동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동은 감정, 정서, 열정, 에너지, 물질 등 여러 방식으로 설명된다. 흐름을 타고 움직이며, 구조 속에 고정되기도 하고, 전염되어 퍼지거나 선택적으로 순환한다고도 한다. 정동과 언어, 정동과 인지, 정동과 주체성, 그리고 당연히 정동과 감정의 관계에 관한 활발한 논쟁이 존재한다. 아래에서 다룰 이론가들은 정동의 일부 측면과 그 개념을 설명하는 어휘에 대해 뚜렷한 견해 차이를 보이지만, 필자는 이 분야 전반을 형성하는 기본적 합의의 핵심 기준에 집중할 것이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정동 연구 내부의 여러 논쟁을 우회한다. 대신 정동과 감정 연구가 스피노자(Spinoza)와 공유하는(하지만 매우 다르게 활용되는) 계보에 주목하고, 정동 이론이 종교 연구에 제공하는 중요한 보완점을 살필 것이다. 그것은 특히 감정의 주체로서의 개인에서 벗어나 몸과 사물 사이에서 생성되는 사회적 삶으로 관심 전환하기, 육체성과 물질성에 관심 두기, 대표성을 넘어서는 창조적 에너지에 초점 두기이다. 감정과 정동 모두 이러한 주제들을 공유하지만, 정동 이론의 독특한 접근법은 종교 운동, 주체, 공동체를 새롭게 바라볼 여러 중요한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 논문 마지막에는 정동과 종교의 접점을 탐색하는 중대한 시도를 다룰 것이다.

 

정동(affect)과 감정(emotion)

감정(emotion)과 정동(affect)의 정의에는 오랜 모호함이 존재하며, 이는 감정에서 정동을 명확히 구분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방해하고 두 분석적 렌즈 사이의 난감한 경계의 근원이 되었다. 감정과 정동 논의의 중요한 근원지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이 둘을 혼동스럽게 만든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에게 이런 혼란에 대한 책임을 돌려 문제를 회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감정과 정동을 정념(passions)”이라는 철학적 계보를 통해 이해하며, 이는 두 개념 모두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논의의 핵심이 된 이유는 특히 정념과 인지 사이에 얽혀있는 관계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2001)에게 마음은 정념의 대상이고, 정념은 항상 어떤 관념에 대한 반응으로 발생한다. 다이애나 케이츠(Diana Cates, 1996), 존 코리건(John Corrigan, 1993),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2001) 같은 종교·감정 연구의 주요 학자들에게 감정은, 개인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인지적(반드시 합리적이진 않음)이고 사회적인 반응을 가리킨다. 이 개인이나 집단의 내면적 느낌은 특정한 어휘(분노, 슬픔, 기쁨 등)로 기술된다.

정동 이론(affect theory)은 이러한 스피노자 사유의 단초를 프랑스 이론가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78)를 통해 이어받는다. 들뢰즈는 감정과 정동의 생산적 구분을 매력적이고 이해하기 쉽게 제시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두 용어, 아펙시오(affectio)와 아펙투스(affectus)를 강조한다. 두 용어는 모두 모든 신체의 사회적 상황에서 파생된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 모든 신체는 다른 신체의 영향을 받고 또한 영향을 미친다. 들뢰즈에 따르면, 아펙시오(affectio)는 감응(affection)으로 번역되며, 이는 어떤 신체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주변 신체의 영향을 받아 나타나는 상태이다. 이때의 감응은 현대 종교와 감정 연구에서 다루는 감정과 매우 유사하거나 동일하다. , 개인 신체의 인지·사회적 반응이다.

반면 아펙투스(affectus)는 들뢰즈(1978, p. 5 of 16)가 정동(affect)으로 번역한 개념으로, ‘행위능력의 연속적 변화(continuous variation of the power of acting)’이다. 들뢰즈는 두 명의 가상 인물피에르와 폴을 예로 들어 이를 설명한다. 피에르는 무능력한 인물이고, 그를 본 후 우리의 행위능력은 감소한다. 반면 폴은 멋진 사람이며, 그를 본 후 우리는 웰빙 느낌으로 가득 차 더 잘 행위할 수 있게 된다. 들뢰즈는 자신도 인정하듯이 이 멍청한(stupid)’ 사례그리고 이것 역시 스피노자의 탓으로 돌린다인 폴과 피에르는 삶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다양한 요소를 대표한다. 들뢰즈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행위능력 또는 존재의 힘은 끊임없이 연속적인 선상에서 증가하거나 감소하는데, 이것을 우리는 아펙투스(affectus), 즉 존재라 부른다.(1978, p. 5 of 16)

정동(affect)이란 삶을 위한 잠재적 에너지의 지속적인 흐름이며, 곧 존재 그 자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에서 정동은 개인이 경험하는 것이라기보다 개인을 구성하는 것이다. 존재로서의 정동은, 처음부터 개인이나 그 밖의 존재 양태가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다. 감정/감응(affection)과 달리, 정동은 신체의 상태가 아니고, 끊임없이 밀려오고 빠지는 에너지의 파동이 신체들 사이를 흐르는 것이다. , 정동은 우리를 존재하게 하고, 해체시킬 뿐 아니라, 서로를 연결하고 분리한다. 파티에 들어가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입장하자마자 한 사람은 방 안에 넘치는 축제의 에너지에 휩쓸려, 공동체의 일부가 되고 그 분위기를 공유하며 강한 정체성을 느낄 수 있다. 반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들 무리로부터 소외감을 느끼며 내성적이고 불안해질 수도 있다(Brennan 2004, p.1). 이처럼 순환하는 정동은 자기 감각(sense of self)을 형성하거나 무너뜨릴 수 있다. 정동은 존재들 사이의 확고한 경계를 거부하며, 우리 사이를 흐르는 힘의 선들에 주목하게 한다. 감정을 신체의 내부 현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정동의 영역은 사이(between)’에 있다.

정동은 또한 들뢰즈(Deleuze, 1978, p. 2 of 16)가 말하듯 비표상적(non-representational) 사고 방식이다. 정동 역시 인지의 한 양태이지만, 슬픔, 기쁨, 분노처럼 고정된 어휘와 연결되지 않는다. 정동의 밀고 당김은 일관된 감정 없이 우리를 작동시키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정동은 무언가를 대신하지도 않고, ‘정동이란 무엇인가정동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구분을 필요로 하는 체계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정동에는 특정 대상(object), 즉 뚜렷한 원인, 목표, 적용점이 없다. 다시 말해, 정동은 X라는 감정이 아니고, Y에 대한 감정도 아니다. 들뢰즈의 논의를 확장하면, 정동은 분류하는 어휘와 대상에서 해방된 순간, X에 대해 Y라는 감정을 느끼는 주체에도 더 이상 고정적으로 얽매이지 않게 된다.

스피노자에 대한 들뢰즈의 독해는 감정과 정동 연구 간의 중요한 공통 기반을 보여주는 핵심이 될 수 있다. 첫째, 감정과 정동은 모두 깊이 사회적이다. 둘째, 감정과 정동은 절대적으로 신체적(corporeal)이고, 반드시 물질적 신체()의 안팎에서 일어난다. 셋째, 감정과 정동은 생명 자체에 힘을 불어넣는 원동력으로, 때로는 생명을 활성화하는 동인(Corrigan), 번영 또는 행복(eudaimonia)의 원천(Nussbaum), 잠재 에너지의 변화(Deleuze)로 간주된다. 이러한 풍부한 이론적 공통점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감정과 정동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간주하기 쉽다.

그러나 들뢰즈는 정동 이론을 위해 중요한 경계도 설정한다. 들뢰즈의 감정/감응(affection)과 정동(affect) 구분은 바로 이들 교차 영역을 새롭게 고찰할 계기를 제공한다. 정동의 사회적, 신체적, 생동적 특징은 바로 이 비개인적이고, 비표상적이며, 물질적인 에너지로서의 성격에 고유하다. 정동은 사물, 해당 사물이 야기한 감정, 그리고 감정을 느끼는 주체의 직접적 연관을 벗어나서, 여전히(항상) 생성 중에 있는 문화적 생명 양태를 가리킨다. 정동은 정합적인 이론화에서 손에 잡히지 않더라도, 그 사회적, 신체적, 에너지적 측면은 종교 연구에서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정동

정동(affect)과 감정(emotion)은 문화적으로 특수한 현상이다. 두 현상 모두 그들이 생성되는 일상 속에서 중요한 방식으로 형성된다. 이 점에서 정동은 감정과 유사하지만, 이것은 감정을 움직임(in motion)’으로 이해할 때만 그렇다. 문화적 힘은 특정 경험을 감정과 정동으로 포화시키거나 또 다른 경험에서 밀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동은 자체적인 힘으로 추진된다. 정동은 순환하면서 결을 만들고, 원심력적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집요하게 축적되며, 거의 붙지 못하는 곳을 조용히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굉음을 내며 침식하기도 한다. 정동의 움직임은 한 문화의 살아 움직이는 지형을 만들어낸다. 특정 시공간의 문화는 특수한 정동의 형태를 만들어 내지만, 정동 역시 그것이 생성되는 과정에서 문화를 형성한다. 감정과 정동이 구분되는 점은, 정동이 개별 주체를 통과하고 그 안에서 움직일 수는 있지만, 개인이 정동의 고유한 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정동에 대한 소유권이 없다. 정동은 인간·동물 등 다양한 신체와 사물들 사이를 순환한다(가령, 특정 기호나 국기의 에너지적 힘을 생각해 보라). 이렇게 확장된 의미의 사회적 정동성존재들 간의 연결과 분리의 출현이라는 확장된 의미은 사회적 삶이 그 참여자의 합계를 뛰어넘는 방식을 탐구하는 데 중요한 시각을 제공한다.

사라 아메드(Sara Ahmed)는 정동이 문화를 구성하는 방식과 동시에 문화에 의해 구성되는 방식을 탐구한다. 아메드는 정동의 사회적·정치적 본성을 이론화할 때 감정의 어휘를 사용하며, ‘경험의 혼란스러움(messiness)’을 포착하기 위해 감정과 정동을 구분하지 않으려 한다(Ahmed 2010, p. 22). 그녀는 감정이 정동 경제’(affective economy)의 순환 속에서 잉여가치를 가진다고 설명한다(Ahmed 2004, p. 44). 예를 들어 테러에 대한 공포라는 특정 감정이 사람들 사이에서 힘을 얻게 되면, 실제 그 대상의 효과를 넘어서는 과도한 힘을 갖게 된다. 워싱턴포스트 블로거(2014)의 지적처럼 미국 시민이 테러 공격으로 사망할 확률보다 심장병으로 사망할 확률은 35,079배나 높지만, 심장병에 대한 공포는 문화적으로 별 의미를 갖지 못하고 그것과 관련된 경보나 영화 줄거리도 나오지 않는다. 반면 테러에 대한 두려움이 힘을 증대시킴에 따라, 미국에서는 정부의 승인 하에 감시가 일상화되었다. 이렇게 순환을 통한 가치의 축적은 정동이 개인과 집단의 감정적 삶을 넘어 문화에 의해 형성되고 또한 문화를 형성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아메드는 최근 저서 행복의 약속(The Promise of Happiness)(2010)에서 정동과 문화의 이러한 관계가 감정의 교훈적 역할을 통해 어떻게 작동하는지 논의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행복을 원한다’(Frey & Stutzer 2002, p. vii, Ahmed 2010, p. 1 인용)라는 진리처럼 행복과 같은 감정을 우선시한다. 이 감정들은 정상적인 사람의 지표가 된다. 결혼 같은 이벤트, 특정 물건(이 차, 저 집), 또는 긍정적 사고방식과 같은 존재 양태와 함께 행복이 보장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결국 행복은 타인에게도 요구되는 사회적 규범이 된다. 이 사건, 물건, 존재 방식에 만족하지 못할 때, 그 불행은 사회적으로 평가절하되고, 그것을 문제 삼는 자(‘페미니스트 킬조이’, ‘불행한 퀴어’, ‘멜랑콜리 이주자)는 이미 자신에게 좋다고 지정된 것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책망받는다. 아메드의 작업은 감정의 사회적·정치적 양상을 다룬다. 이처럼 정동은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소용돌이치며 축적되고 소멸한다. 정동은 (행복처럼) 특정 신체 내부에 존재하는 객체가 아니라, 신체와 주체 밖에서 순환하는 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느낌의 운동이며, 그 결과 어떤 신체와 주체가 특정 사회 맥락에서 출현할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Ahmed 2010).

이러한 개념 틀에서 보면, 18, 19세기 부흥회들은 주어진 목사의 카리스마에 추동되어 공유된 종교적 열광이 우연의 일치로 표현된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하고 문화적으로 가치가 주어진 형태의 열광의 순환이다. 정동의 사회성은 영적 감각의 고양을 경험한 종교적 주체를 생각하기보다는, 특정한 감정적 느낌과 종교적 주체들이 평가 절하되거나, 가치가 부여되거나, 훈련받는 상호적인 과정을 생각하게 한다.

크리스찬 룬드베리(Christian Lundberg, 2012)는 정동이 어떻게 사회를 구성하는 데 기여하는지를 다르게 해석한다. 아메드가 논의를 시작하는 것은 특정 공공(public, : 미국 시민)이 이미 존재하는 시점이지만, 룬드베리는 공공 자체가 어떻게 생성되는지를 다룬다. 그는 공공이 낯선 이들 사이에 친밀감의 실천과 정동적 투자(affect investment)가 이루어질 때 그 과정에서 상호 간에 정체성의식을 생산하며 조직·출현한다고 주장한다(Lundberg 2012, 154). 우리는 고정된 정체성과 공동체 소속감을 가진 일관된 주체로 존재한다는 환상을 품고 살아가지만, 자크 라캉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의 조건이 통일적으로 하나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언제나 내게 불경스러운 거짓말로 작용해왔다”(Lacan 1970, p. 191; Lundberg 2012, p. 2 인용). 견고한 주체의 감각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우리의 시도 이면에는, “주체성, 사회 세계, 담론은 미리 주어지거나 자연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과 불확실성의 산물이라는 자각이 존재한다(Lundberg 2012, 2).

이렇게 파편화된 현실과 우리가 가장하고 싶은 통일성 사이의 긴장된 틈에서, 우리는 사회적 실천을 통해 (필연적으로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주체와 그들의 사회적 세계를 만들어낸다. 룬드베리에게 이 작업은 크게 정동적이며, 특정 은유(: 국가)에 에너지가 투자되는 방식에 따라 특정 공공이 탄생한다고 본다. 그는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멜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를 주목한 사례를 분석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영화가 그리스도의 몸이 상처 입는 모습에 부여하는 강렬한 정동적 주의가 투자와 조직의 결절점(nodal point)이 되어, 미국 복음주의 집단이 피해자성(victimhood)을 정체성으로 조직하는 데 힘을 줬다고 본다.

이처럼 몸들 사이에 정동이 사회적으로 이동하는 운동은 문화적 에너지의 더 넓은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정동을 문화 현상으로 포착한 대표적 이론은 문화연구자 로렌스 그로스버그(Lawrence Grossberg, 1992, 2010)의 논의에서 볼 수 있다. 그로스버그에 따르면 정동은 사람 사이의 흐름의 무질서한 공간이 아니라, 각 문화적 맥락에서 특유하게 구조화된 투자 구조다. 그는 정동의 조직화를 의미 지도의 작성(mattering map)’으로 설명하는데, 이 지도는 투자 대상(우리가 무엇에 신경 쓸 수 있는가), 투자 방식(어떻게 신경 쓸 것인가), 그리고 그 투자 속에서 우리가 되어가는 요소와 주체 간의 일관성을 결정한다(Grossberg 1992, p. 8283). 의미 지도는 단순히 우리의 투자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투자 실천 자체를 구조화한다.

“의미 지도는 투자의 다른 지점들을 연결하는 선을 포함한다. 이 지도는 한 투자에서 다른 투자로, 다양한 정체성의 단편을 엮어낼 가능성을 규정한다. 어떤 지점(실천, 효과, 구조 등)이 중요한지, 그리고 왜 중요한지도 정의한다. 아울러 해당 지도에 속한 이들에게는 살아 있는 일관성을 구축해준다.”(Grossberg 1992, p. 84)

따라서 정동은 감정이나 열정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이 둘의 역사적으로 규정된 구조 자체를 사유하는 길을 제공한다. 투자의 결절점이 정동으로 가득 찰수록(그리고 종교는 이런 포화의 문화적으로 풍부한 매개체가 된다), 그 지점들은 더 많은 정동을 끌어들이고 더 넓은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케인 리지(Cane Ridge) 부흥회에 참석한 이들은 단순히 종교적 광기에 휩싸인 추종자들이 아니다.  수일간 이어지는 야영 집회, 신체로 구현되는 영적 힘, 고백적 소통 실천에 대한 에너지 투자가 중요하게 작동했던 특정한 문화적 맥락에서 이들을 보아야 한다. 이 맥락은 회개’, ‘공개 고백’, ‘개인적 변화의 부름 속에서 자기 결정의 정치를 띤 종교적 주체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울음, 기절, 외침 등 격렬한 신체적 퍼포먼스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함으로써 압도되고 변화된 사람을 만든다. 정동의 문화적 이해에서 더 중요한 것은, 기존의 주체들이 무엇을 느꼈는가가 아니라, 이 맥락에서 어떠한 주체성이 가능해졌고 주위를 둘러싼 정동 구조에 따라 이들이 어떻게 행동할 수 있었는가이다. 수천 명이 일상적 농사나 기존 예배보다 부흥회 참여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을 때, 우리는 정동 투자가 실제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힘을 볼 수 있다.

체화된 정동

문화 이론가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감성의 구조(structures of feeling)’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했다. 이는 현재 시제에서 문화를 말할 필요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오늘날에는 정동 이론의 초기 형태로 간주된다. 윌리엄스는 문화가 언제나 고정되고 정적인 제도로서 습관적인 과거 시제로만 분석된다는 점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만약 사회적(social)인 것이 고정되고, 명확하며—알려진 관계, 제도, 형성, 위치 등—모든 것이 고정되고 명확하다면, 그 순간 살아 있고, 움직이는 모든 것, 고정적이고 명확하고 알려진 것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벗어나 보이는 모든 것은 개인적(personal)인 것으로 파악되고 정의된다. 즉, 여기, 지금, 살아 있고, 활동적이며 ‘주관적(subjective)’이다. (Williams 1977, p.128)

정동(affect)은 이처럼 고정되고 수동적인 것과 능동적이고 개별적인 것, 사회적과 개인적인 것 사이의 구분을 거부한다. 오히려 정동은 우리를 에워싼 구조들을, 그리고 사실상 그 구조들 속에 존재하는 우리’(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형태 모두)를 만들어내는 살아 있는 과정에 주목하게 한다.

따라서 정동의 사회성(sociality)은 신체, 주체, 그들의 일상적 퍼포먼스를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동은 신체와 주체가 사회의 생동(애니메이션) 속에서 생성되고 등장하는 방식을 촉진한다. 정동은 특정 개인이 느끼는 감정(스피노자의 아펙시오affectio: 타인의 영향을 받는 신체의 상태)이 아니라, 삶에 필요한 에너지의 흐름이자, 개인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밀물과 썰물 같은 힘이다. 패트리샤 클라우(Clough, 2008, p.1)의 표현대로, 정동은 감정의 주체로서의 주체로 돌아감을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정동으로의 전환은 오히려 신체 물질과 물질 일반에 내재한 역동성—즉, 물질의 자기조직화와 형태를 유지하는 능력—에 주목한다. 이것이야말로 정동적 전환(affective turn)의 가장 도발적이고 지속적인 기여라 말할 수 있다.(Clough 2008, p.1)

따라서 정동 논의에서 신체가 표면화되더라도, 그 신체가 일관된 주체성을 당연히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신체는 정동을 통해 활기를 얻으며, 이는 언제든 주체와 육체의 일치 가능성 자체를 복잡하게 만든다. 우리는 원하지 않은 욕망에 동공이 확장될 수도 있고, 오히려 욕망이 우리를 느끼는 것”, 혹은 욕망이 느끼는 우리를 조직한다고 말하는 편이 더 어울릴 수도 있다.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 2002, p.59),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Félix Guattari)천 개의 고원번역자이자 정동 이론가로서, 신체가 내용을 갖지 않는 기억(‘memory without content’)으로서 정동을 지니며, 비표상적(non-representational)육체의 관점이 저장되고 활성화된다고 본다. 우리 정동의 자율적 활동은 마음이 물질을 지배한다는 환상을 거스르며, 신체를 전면에 드러나게 한다.

이처럼 정동과 물질의 친밀성은 이브 코소프스키 세지윅(Eve Kosofsky Sedgwick, 2003, p.17)이 자신의 저서 제목을 Touching Feeling으로 붙인 말장난에 기반을 둔다. 동일한 이중적 의미(촉각적tactile + 감정적emotional)‘touching’이라는 한 단어에 이미 스며 있으며, ‘feeling’이라는 단어 속에도 내포되어 있다. , 정동은 비물질적 힘이 아니라, 끊임없이 촉각적인 차원으로 현실화된다. 제인 베넷(Jane Bennett, 2010, p.xii)생동하는 물질(Vibrant Matter)에서, 만약 스피노자의 정동 개념 즉, “어떠한 신체든 타인에 영향을 주거나(affect) 받는(affected) 능력이라는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유기체·무기체, 자연·문화적 사물모두가 정동적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정동은 거주하는 물질에 추가된 영적 생명력이 아니라, 바로 그 자체로 물질적이라고 말한다(Bennett 2010, p.xiii).

이러한 물질적 생동의 관점에서 케인 리지(Cane Ridge)를 적외선 영상처럼 재구성해보면, 화학의 요동, 집중의 고조된 순간 속 분자들의 열광, 흔들리는 신체와 벤치, 발 아래 눌리는 풀,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종교 부흥회를 개별 주체의 종교적 열정 표출이 아니라, 격렬한 열정이 신체의 혈관을 타고 맥동하며, 손끝에서 전율하고 피부 표면을 춤추게 하는 흐름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활성화된 분자들은 종교적 주체로 표상되기도 하고, 동시에 해체 중인 주체 또는 자신을 움직이는 정동에 좌우되는 주체로도 인식된다. 종교를 연구하는 방식이 이제 제도적·개인적 형태에서 벗어나, 물질적·신체적·퍼포먼스적 활동으로 초점을 이동하게 된다.

 

에너지로서의 정동

정동(affect)에 대한 흥미 중 상당 부분은 최근 사유 방식을 지배해온 의미화(signification)에 대한 강조가 점차 힘을 잃어가는 데서 비롯된다. 캐렌 바라드(Karen Barad, 2008, p. 120)는 이렇게 한탄한다.

“언어적 전회, 기호적 전회, 해석적 전회, 문화적 전회: 요즘은 어떤 ‘것’이든—심지어 물질성마저—언제나 언어나 문화적 표상의 한 형태로 전회되는 것 같다.”

정동의 에너지적 측면은 표상의 논리에서 벗어난 문화적 과정 연구의 가능성을 연다. 정동은 언어적 표상 자체를 거부하며, 주체·객체의 언어적 토대마저 어지럽힌다.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 1977, p. 132)가 말하듯, “감성의 구조들은 정의·분류·합리화가 이뤄지기도 전에 이미 경험과 행동에 실질적인 압박을 가하고 유효한 한계를 설정한다.” 정동은 우리를, 우리를 통해,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사이에서 작동하면서, 동시에 , , 우리를 존재하게 이끌고, 해체로 밀어내며, 이 끝없는 밀물과 썰물 속에서 등장할 나, , 우리를 빚어낸다. 들뢰즈 식으로 표현하면, 이 에너지의 흐름, 즉 정동 자체가 바로 존재한다는 것이다(Deleuze 1978, p. 5).

정동의 에너지적 측면을 가장 깊이 주목한 인물 중 하나는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 1987, p. xvi). 그는 정동을 개인 이전의(prepersonal) 강도(intensity)’로 본다. 이러한 정동 개념은 감정에서의 중요한 분기를 이룬다. “감정과 정동정동이 강도라면은 서로 다른 논리를 따르고, 서로 다른 질서를 가진다”(Massumi 2002, p. 27). 감정은 언제나 개인적이며, 강도가 언어로 옮겨지고 내러티브·기능·의미가 부여된 상태에서야 성립한다. 감정은 이런 언어적 실천에 의해 규정되지만, ‘정동은 규정되지 않는다’(Massumi 2002, p. 28). 강도란 언어 밖에 있으며, 정동을 감정의 어휘로 말로 표현하는 순간, 오히려 정동의 본질을 훼손하게 된다. 그렇기에 정동의 영역은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의 영역으로, 이는 언어·정체성·시간·공간에서 구체화·정착되기 이전이다. 정동은 현실화된 것(the actual)으로 떠오를 수도 있으나, 불안정성을 근본적으로 내포하여 언제나 구체화의 포획을 벗어나 잠재적인 것으로 되돌아간다.

이러한 정동 개념은 스피노자의 뿌리로부터 중요한 단절을 보여준다. 언어에서 정동을 엄격히 분리하면 인지(인지적 활동)로부터도 정동을 분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멜리사 그레그(Melissa Gregg)와 그레고리 J. 시그워스(Gregory J. Seigworth, 2010, p. 1)정동 이론 논문집(The Affect Theory Reader)서론에서 정동을 의식적 인지를 초월하거나 곁에 있거나 전체적으로 다른, 본능적(visceral) 이라 정의한다. 이런 위치에서의 정동 개념은 여러 저자(Brennan 2004, Bennett 2010)에게서도 공명된다. 좋은 정동 이론의 표지는 정동의 비표상적(asignifying) 성격을 인식하고, 이 무의미한 에너지가 언어·텍스트·구조에 의해 강렬하게 형성되는 세계의 역동성을 어떻게 이끄는지를 사유할 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캐슬린 스튜어트(Kathleen Stewart, 2007, p.3)투명한 힘(Ordinary Affects)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감성의 구조는 ‘의미’ 자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체·꿈·드라마·사회적 세계와 같은 모든 장(場)을 통과하며 농밀함과 질감을 형성하는 방식, 그 과정을 통해 힘을 발휘한다.”

이에는 말로 짜인 신체··드라마·세계가 필연적으로 포함된다.

이런 관점에서 케인 리지(Cane Ridge)는 창조의 현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세기 초 미국 전역에 순환하던 에너지가 켄터키의 깊은 숲에 응축되어, 신앙 주체·운동·제도가 탄생했다. 이 정동적 에너지는 다른 것을 대신하거나, 어떤 특정 의미·고정된 다수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케인 리지에서 작동한 정동은 특정 존재방식(: 떨리는 몸), 집단적 행위(동시다발적 외침), 주체와 집단(수백 명이 쓰러짐 등)이 살아 움직였던 생명력의 폭발이었다. 정동은 언어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케인 리지에서 정동은 하늘의 불길의 절박한 타오름 속에서 표상을 거부했다.

종교와 정동

정동(affect)과 종교에 관한 논의는 최근 사상에서 점차 확산되고 있다. 2013년 미국종교학회(American Academy of Religion)종교, 정동, 감정 그룹(Religion, Affect, and Emotion Group)’이 결성된 것이 이를 반영하며, 동시에 이 대화를 촉진했다. 그룹의 창립자 도노반 셰퍼(Donovan Schaefer)는 그의 저서 종교적 정동(Religious Affects: Animality, Evolution, and Power)(출간 예정)에서, 종교를 정동으로 이해할 때 종교가 인지적·인간적이라는 기존 전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책은 종교학에 정동 이론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최초의 저서로, 종교를 기본적으로 언어를 초월하거나 앞서는 체화된 경험으로 이해하며, 종교를 사적·개인적 영역에 국한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거부한다. 셰퍼는 독자적인(sui generis) 종교론에 대한 비판을 확장하며, 종교·역사·권력의 얽힘을 강조하는 연구자들과 달리 언어 중심적 접근을 거부한다. 정동은 종교의 사회적·체화된·에너지적 활동을 언어적 텍스트로 해석하지 않으면서도, 종교 내에서, 종교와 함께, 종교를 관통해서 작동하는 역동적 힘의 지형을 탐구하는 새로운 길을 연다.

그의 작업은 이 분야의 중요한 진전이다. 정동과 종교에 관한 초기 연구들은 주로 타 분야 학자들이 광의의 정동 논의를 위해 특정 종교 전통이나 역사를 끌어오면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테레사 브레넌(Teresa Brennan)The Transmission of Affect(2004)에서 유대 및 초기 기독교 사상, 윌리엄 코놀리(William Connolly)Why I Am Not a Secularist(2000), Pluralism(2005), 앤 츠벳코비치(Ann Cvetkovich)Depression: A Public Feeling(2012)에서 다룬 영적 무감각과 절망, 크리스천 룬드베리(Christian Lundberg)Lacan in Public: Psychoanalysis and the Science of Rhetoric(2012)에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대한 복음주의적 열광 논의, 이브 코소프스키 세지윅(Eve Kosofsky Sedgwick)Touching Feeling(2003)The Weather in Proust(2011)에서 불교와 정동을 다룬 논의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정동을 직접적 연구 대상은 아니더라도 생산적으로 언급하는 종교학자들의 연구가 있다. Jason Bivins(2008), Virginia Burrus(2008), Robert C. Fuller(2006, 2008), Amy Hollywood(2002), Janet R. Jakobsen Ann Pellegrini(2003), Catherine Keller(2015), Jean-Luc Marion(2006), Thandeka(1995, 1999) 등이다.

미국 종교 연구에서는, 다양한 학자들이 미국 내 종교의 특수성을 사유하며 미래 연구의 방향을 제시한다(다른 맥락에서 미국을 다룬 정동 연구는 현저히 부족하다). 코놀리, 비빈스(Bivins), 야콥센(Jakobsen), 펠레그리니(Pellegrini), 셰퍼(Schaefer) 등은 미국 문화의 정치적 가치가 종교적 실천 방식을 구조화하는 방식, 그리고 종교 실천이 미국의 정치와 권력을 형성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특히 이들은 정치가 단순히 대중 리더십이나 여론을 통해 형성되는 권력 체계가 아니라, 역동적이고 질감 있는 에너지적 투자 공간임을 강조한다.

이 새로운 연구 분야는 종교 집단을 제도나 정체성 너머에서 사유하는 새로운 길도 연다. 비빈스와 룬드베리는 미국 복음주의를 정치적으로 물든 수사를 둘러싸고 역동적으로 조직되는 운동으로 분석한다. 비빈스(2008)공포 정치’, 룬드베리(2012)피해자성을 중심으로 복음주의 조직화를 논의한다. 셰퍼(출간 예정)는 복음주의 및 정동의 독특한 교육학을, 다큐멘터리 예수 캠프(Jesus Camp, 2006)사례로 고찰한다. 특정 정동적 투자를 매개로 미국 종교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추가로 탐구하면, 소속(membership)이나 제도 중심 논리를 넘어서는, ‘무종교인(nones)’ 증가 시대에 특히 중요한 연구 전략이 될 것이다.

셋째, 정동은 종교와 의미의 관계를 검토할 새로운 방법을 제공한다. 룬드베리 논의에 따라, 앞으로 미주 종교 연구에서 종교적 은유의 순환이 정동적 차별적 투자에 의해 구현되는 방식을 분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본 연구는, 미국 공공영역에서 종교가 이상한 형태로 작동하는 이유에 대한 새로운 해답을 제공할 수 있다. 예컨대 왜 학교 기도(Prayer in School)’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은 끊임없이 공론장을 흔들지만, 돈에 인쇄된 종교적 표시는 거의 인식되지 않는가? 다른 방향에서, 셰퍼의 연구는 의미 체계를 넘어서는 정동적 영역으로서의 종교 연구의 길을 안내한다. 그리고 표상을 넘어서는 의례의 작동은 무엇인가? 의례 행동을 더 이상 인간 특유의 현상이라 가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의례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결론

1801년 켄터키 케인 리지에서 열린 야영 집회는 정동 이론이 종교 연구에 기여할 수 있는 풍부한 가능성특정 문화적 순간에 나타나는 사회적, 체화된, 에너지적 과정으로서의 종교을 잘 보여준다. 어떤 들뜸(buzz)”이 신체를 사로잡아 개신교 부흥회로 이끌고, 전기처럼 집중하게 만들고, 외침과 눈물을 불러일으켰으며, 마치 베어진 것처럼 땅에 넘어뜨렸다. 종교는 이러한 에너지에 참가자와 관찰자가 부여하는 의미만도 아니고, 이후 등장한 정체성이나 제도적 형태 그 자체만도 아니다. 종교란 바로 이 사회적이고, 물질적이고, 생명을 북돋는 에너지의 들뜸 그 자체다.

정동에 주목하는 것은 사회적 삶의 결집과 해체, 그들에게 중요한 것, 물질의 흥분에 힘입은 신체적 퍼포먼스, 표상을 거부하는 주체·정체성·의미·삶의 방식의 창조적 에너지를 전면에 부각시킨다. 정동의 역동성은 감정적 상태와 나란히 존재하지만 결정적으로 구별되된다. 그것은 변화무쌍한 문화적 삶의 특정 방식에 활기를 불어넣는 종교를 끊임없이 생성 중인(becoming)’ 현상으로 사유하도록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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