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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

동작구 종교 이야기

by 방가房家 2023. 6. 4.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산 지 10년이 조금 넘었다. 고장의 내력을 파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지만, 종교 이야기라면 귀를 쫑긋 세우는 직업적 습관 탓에, 그리고 최근에 관련된 작업을 한 덕에, 귀에 익은 내 주변 지명들에 얽힌 종교적 사연들이 하나둘 쌓였다. 현재 지자체에서는 동작구를 사육신묘를 근거로 ‘충효의 고장’으로 브랜드화하고 있다. 하지만 동작구는 유교 문화 외에도 숱한 종교들의 만남과 자리 잡기가 명멸한 곳이다. 나는 이 글에서 근대 이후의 종교적 변화들을 기독교들을 중심으로 풀어가려 한다.
 
 
1. 노량진이 경기도 과천군에 속했던 대한제국기 이야기다. 이 지역에는 도성 외곽의 무당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1906년에 일제가 노량진에 인천수도공사를 설립하자, 일제에 의한 토지와 가옥의 무단수용을 염려한 주민들이 교회 설립을 청원하여 동작구 최초의 교회인 노량진교회가 설립되었다. 선교사 헐버트가 초기 예배를 인도해주었다. 교회의 자료밖에 보지 못해 무당촌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이 이야기는 교회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1900년대 중반의 민중들이 기독교를 ‘대안적인 힘’으로 인식하고 수용하였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한편 흑석동에는 일본인 집단거주지가 형성되었고, 1912년에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현재 효사정 자리)에 한강신사(漢江神社)가 건립되었다.


2. 동작구 일대는 1914년에 시흥군으로 통합되었다가, 1936년 경성부 확장으로 서울의 일부(영등포구)가 된다. 최초의 서울 ‘강남’이었기에, 지금도 상도1동에 서울강남초등학교가, 노량진동에 강남교회가 있다. 옛 흔적을 간직하고 있어 오히려 지금 사람들에게는 생뚱맞게 들리는 이름들이다.

3. 1950년 한국전쟁 직전에 한국 기독교계 신종교에서 중요한 사상적 위치를 갖는 김백문의 이스라엘수도원이 상도동(현재의 숭실대입구역 근처)에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스라엘수도원은 경기도 파주에 설립되었고 서울 집회소를 상도동에 세운 것인데, 김백문은 이곳에도 자주 머물렀던 것 같다. 이 시기에 후에 통일교를 창시할 문선명이 상도동 집회소를 출석하였다. 문선명은 일본에 유학하고 돌아와서 흑석동 집에 머물면서 6개월가량 상도동을 오갔는데, 이 시기에 김백문과 문선명의 사상적 만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문선명이 거주하던 흑석동 집과 그가 상도동을 오갈 때 기도를 드렸던 서달산은 현재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에서 성지로 여기는 곳이다. 그러나 서달산의 기도 장소는 현재 현충원 경내에 있어서 공식적인 참배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4. 1938년에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다가 1954년 서울에서 재건되어 영락교회 임시 시설에 머물러 있던 숭실대학교가 1957년에 상도동에 입주하였다. 한편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통합과 합동이 분열된 이후, 통합 측의 교단신학교인 총신대학교가 1965년에 사당동에 입주하였다. 이로써 서달산의 양편에는 교단신학교는 아니지만 통합 측의 영향력이 강한 숭실대학교와 합동 측의 총신대학교가 각각 자리 잡게 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세력이 조직한 독자적인 보수 교단 대한예수교장로회 순장총회가 1955년부터 신대방동에 본부를 두고 있다.

5. 올해 큰 물의를 일으킨 신천지(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작구 상도동에 다다르게 된다.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은 유재열이 이끌던 장막성전으로부터 독립해서 1984년에 이만희가 세운 종단이고, 유재열의 장막성전은 김종규의 호생기도원에서 나와 1966년에 세운 종단이다. 호생기도원은 동작구 국사봉의 사자암 아래에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유재열을 1960년대 초부터 상도동 호생기도원에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한다. 김종규는 1966년에 호생기도원을 과천 막계리(현재 서울랜드 자리)로 이전하였고, 이곳이 이후 장막성전과 신천지예수교장막성전의 근거지가 된다.

 
6. 1979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마더 테레사가 1981년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테레사 수녀는 방문 둘째 날인 5월 5일에 사당3동을 방문해 그곳 어린이들과 어린이날을 보낸다. 사당 2, 3동은 도심 빈민들을 강제 이전하여 형성된 동네로 당시에도 주거 환경이 열악하여 ‘가마니촌’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테레사 수녀의 사당3동 방문은 서울의 치부를 보이고 싶지 않았던 정부 당국자를 당혹케 했다고 한다.

7.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동작 일대 교회들도 산업화 시기에 크게 성장하였다. 각 교회의 연혁에는, 처음에는 가정집이나 작은 공간에서 시작한 교회가 부지를 매입하고 예배당을 짓고, 다시 주변 토지를 매입하여 확장된 부지에 예배당을 다시 짓고, 교육관과 주차장을 확보하는 성장 이야기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런데 건축과 확대 재건축은 대부분 1970, 80년대에 몰려있고 90년대에는 간혹 등장한다. 2000년대 이후에는 리모델링을 제외하고는 건축 이야기가 잘 등장하지 않아, 교회의 외적 성장은 1990년대에 거의 정점에 다다랐음을 실감할 수 있다.
동작구에는 교회 성장의 와중에 있었던 한 교회의 흑역사도 존재한다. 이 교회는 담임목사의 무리한 공사확장과 목사를 위한 방만한 지출 때문에 교인과의 심각한 갈등이 빚어지고, 결국 연회에서 목사를 해임하게 된다. 그러나 3년 후 대법원에서 해임 결정이 무효라는 판결이 나고 원래의 목사가 돌아와 교회를 무리하게 장악하는 와중에 교인이 10분의 1로 줄었다. 그 목사가 은퇴한 후 교단에서 교회 수습을 위해 파견한 다른 목사는 도리어 리베이트 등 여러 부정행위를 저지른 의혹을 받다가 최근에 교단을 탈퇴하였고, 장승배기역 근처 알짜배기 자리에 있던 이 교회의 부지는 매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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