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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

종교학의 테크 트리

by 방가房家 2023. 6. 3.

종교학과의 첫 만남을 만들어주는 1학년 전공과목을 준비하다 보니 신경 쓰이는 부분이 많다. 그중에서도 학생들이 이 학문을 배우는 체계가 갖추어져 있는지에 대해 반성할 부분이 많이 눈에 띈다. 얼마 전 한 선생님께 종교학도 테크 트리를 제대로 갖추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투정을 부린 적이 있었다. 무엇이 준비 단계이고 무엇이 고급 단계인지 온통 헝클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목들의 체계 문제라기보다는 그 체계를 운영하는 현실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일단 내가 아는 몇몇 체계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내가 나가고 있는 한 종교학과의 과목 체계.

 

단순한 편의 구성이다. 큰 줄기는 이론 분야와 전통 분야이다. 이 두 계열의 각 분야들이 고루 섞여 있고 그것이 1,3,4학년에 배치되어 있다. 이 체계는 좀 고리타분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전통별로 이론 분과별로 대개 필요한 내용이지만, 그중에는 이제는 그다지 중시되지 않아 정체가 불분명한 것도 있다. 더 큰 문제는 현재의 중요한 학문적 쟁점을 소화하기에는 버거운 틀이라는 것. 하지만 체계의 문제를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1학년 두 과목을 제외한 나머지 과목들은 난이도 차이 없이 뒤섞여 있다는 것. 학년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과목의 난이도는 주로 누가 그 과목을 맡았냐에 따라 정해진다. 우리나라 현실상 과목을 담당한 강사에게 주어진 것은 강의명이 전부인 경우가 많다. 강사가 과 교과 운영의 전체 그림을 머릿속에 담고서 자신의 강의를 진행할 수가 없다. 강사에게 재량이 최대한 부여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전반적인 교과운영에 대한 인식이 전혀 공유되고 있지 않은 것은 문제이다.
 
내가 나가고 있는 다른 학교 종교문화학과의 교과목 편성은 이보다 화려하다. 전통과 이론이 아니라 전공일반을 거친 뒤 전공심화와 전공실용이라는 두 계열로 나뉜다.(교직과정은 폐지된 것으로 알고 있다.) 종교학이 사회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분야들을 개발하여 전공실용이라는 영역을 구성하였다. 새로운 의제들을 훌륭하게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을 만든 것이다.
역시 문제는 운영의 현실이다. 내 생각에는 과목들이 지나치게 많다. 전체적 조율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과목 하나하나가 실험적 성격이 강해 잘 유지되고 있는지 의문인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도 과목을 만든 사람 따로 가르치는 사람 따로이며, 강의 내용은 다만 강사가 강의명을 듣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감에 의해 정해지는 일이 많은 것 같다. 
 
미국 애리조나대학의 구성을 찾아보니 단순하다. 첫 번째 학교와 비슷하지만 여기에는 ‘이론’이라는 틀은 배제되어 있다. 전통과 짝을 이루는 것은 주제와 지역이라는 실용적인 범주들이다. 시사적인 논쟁들을 잘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다. 
체제상으로는 눈에 잘 안 들어올지 모르지만 이곳에서 느낀 것은 과목간의 위계가 선명하다는 것이다. 이 학교에서는 과목코드로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노골적으로 학년을 붙여놓았다. 종교학과 1학년 과목은 REL100, 3학년은 REL300, 이런 식이다. 2백번대는 2학년 과목, 4백번대는 4학년 과목이고, 내 기억에는 이 구분은 꽤 의미를 지녔던 것 같다. 물론 강사의 재량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적어도 순서가 암묵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현실이 문제인데 하다 보니 둘 다를 이야기하고 말았다. 내가 보기에 한국에서 아직 종교학의 테크 트리는 갖추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저그보다도 열등한 종족이다. 물론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한편으로는 학문 자체의 성격이 체계성에 저항적인 속성이 있어서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급 단계의 지식이라고 할 만한 콘텐츠 자체가 갖추어지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판단하기에 더 체계성을 갖추고 더 친절해질 수 있는 여지는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고민이 된다. 그냥 생각중인 문제라 별 주장 없이 고민만 늘어놓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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