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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_자료/문헌

<아트라하시스>의 결정적 장면들

by 방가房家 2023. 6. 2.

메소포타미아의 대표적인 신화 <아트라하시스>는 <길가메쉬 이야기>와 더불어 창세기 홍수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현대인들의 독서는 대부분 이 지점에 집중된다. <아트라하시스>를 통해 안티기독교인들은 성서의 이야기가 이전부터 존재한 신화를 베껴먹은 날조된 것이라는 증거를 잡았다고 흥분하며, 어떤 기독교인은 성서의 이야기가 그 이전의 역사책(?)에 기록된 문자 그대로의 진실임이 증명되었다고 감사드린다. 그러나 <아트라하시스>는 창세기가 형성되기 천년 이전(기원전 1700년 경)에 기록된 문헌이고, 그 자체를 이해하는데 있어 성서와의 관련성이라는 현대 독자의 논쟁들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성서의 유사한 대목과의 비교는 우리에게 ‘재미’를 주는데, 여기서 재미란 같은 신화적 재료를 갖고 고대의 신화저자들이 자신의 지적인 맥락에서 재구성하여 사용하는 솜씨를 감상하는 재미를 말한다. 이 신화를 읽으며 흥미롭게 다가왔던 몇 대목들을 결정적 장면으로 제시한다. [메소포타미아 신화들은 조철수의 훌륭한 우리말 번역인 <<수메르 신화>>(서해문집, 2003)를 통해 접할 수 있다. 그 외에 Stephanie Dalley, <<Myths from Mesopotamia>>를 참조하였다.]


1. 태초에 파업이 있었다
이 신화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신들이 사람 대신에 노동을 하고 노역을 감당했을 때,
신들의 노역이 너무 많아서, 노동은 고되고 고생이 컸다.
아눈나키 큰 신들은 이기기 작은 신들에게 일곱 배의 노동을 감당하게 하였다
.
일반적으로 신화라 하면 연상되는 웅장한 신들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현실적이기 그지 없는 신의 묘사이다. 신들의 세계에도 큰 신과 작은 신의 위계가 나누어져 있었고, 큰 신들은 십장이 되어 작은 신들에게 고된 일을 시켰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신들은 운하를 파야 했고, 대지의 생명줄인 수로를 청소해야 했다.
신들은 티그리스 강(바닥)을 팠으며, 유프라테스 강(바닥)을 팠다.
이것은 이 신화가 메소포타미아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 노가다의 고된 현실 속에서 상상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범람을 방지하기 위해서 강바닥을 준설하는 극한 노동의 와중에서, 사람들은 ‘왜 우리가 이런 힘든 짓을 해야 하는 걸까?’라는 푸념을 하였을 것이고, 그 푸념의 상상력에서 태초에 신들이 우리 대신 노가다를 하였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더불어서, 이 신화는 수로 사업을 진행할 정도로 발달된 고대 국가를 배경으로 한다. 오래된 신화라고 해서 단순히 원시성을 기대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일을 시키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었다는 주제는 창세기에 희미하게 나타난다. 야훼 전승(J문서)의 창조이야기(창세기2장)에서 창조 이전의 상태를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으므로”라고 묘사한 것은 인간의 창조 이유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노동에 고통 받던 작은 신들은 결국 파업을 일으키고 큰 신들에게 항의한다. 이에 신들의 회의가 소집되었고, 그 회의에서 엔키가 인간을 만들어 대신 일하게 해주겠다는 묘책을 제시하여 작은 신들의 농성이 풀리게 된다. (사이보그에 대한 논의는 요즈음의 일이지만, 대체 인력의 제작과 그렇게 제작된 녀석들에 대한 불안은 사천년 전 신화의 주제이기도 했다.)

2. 인간 창조의 장면
신 엔키가 닌투에게 명하여 사람을 만들게 한다. 우선 정결례를 한 후에 다음과 같이 인간을 만든다.
신 하나를 잡아 죽이면 (그 피에) 잠기어 신들은 정결해 질 것이다.
닌투는 그의 살과 피를 진흙에 섞을 것이다.
그러면 신과 사람은 진흙 안에 함께 섞일 것이다.
영원히 북소리(박동)를 들리게 하고, 신의 살에서 혼이 생기게 하자.
그것이 그가 살아있는 징표가 되게 하자. (살해된 신을) 잊지 말라고 혼이 존재하도록 하자.
기본적으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혼을 불어넣는 방식이다. 이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전승된 신화적 사유이다. <에리두 창세기>에서는 정결례 후에 안, 엔릴, 엔키, 닌후르상이 ‘검은 머리’의 사람들을 빚어내었다고 간단히 언급된다. <인간의 탄생>에서는 엔키가 넓적다리를 때리고 나서 솜씨 좋게 임마-엔과 임마-샤르가 나오게 하였다. 그리고 닌마에게 명령하기를 압수의 지붕에 있는 점토(the Apsu's fathering clay)를 적시면 임마-엔과 임마-샤르가 태아를 키울 것이라고 하였다. <아트라하시스>는 이러한 전승들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반란군 신을 죽여 그의 피를 섞어 인간을 만든다는 모티브를 추가한다. 인간의 본질 내에 반란의 불온함이 함께 존재한다는, 이 죄성에 대한 고찰이 나타난다. (이 주제가 어떻게 확장되는지는 더 알아보아야 한다.) 이러한 묘사는 반란군 대장 킹구의 피를 섞어 인간을 만드는 <에누마 엘리쉬>에서도 나타난다.
이 인간 창조 전승의 다른 연속선상에는 창세기의 인간 창조 묘사들이 있다. 야훼 전승(J문서)의 창조이야기(창세기2장)에서는 “주 하느님(야훼)이 땅의 흙으로 사람으로 지으시고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고 묘사한다. 하느님의 구체적 행위가 드러난, 전통적인 전승에 충실한 묘사이다. 반면에 제관계 문서(P문서)의 창조이야기(창세기1장)에서는 보다 추상적으로 “하느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라고 나온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오랫동안 기독교인들을 괴롭혀온 알쏭달쏭한 구절,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가 등장한다. 이 ‘우리’는 메소포타미아 신화 전승의 신들의 회의에서 인간 창조가 결정된 대목이 창세기에 변형되어 들어가는 과정에서 찌꺼기처럼 남은 표현이다.

3. 인간들이 시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그들을 쓸어버려라.
인간을 창조한 후 일은 이렇게 진행된다.
600년, 600년이 지나기도 전에,
사는 땅은 넓어졌고, 사람들이 너무 많이 불어났다.
땅은 울부짖는 황소처럼 시끄러웠다.
신은 떠드는 소리에 불안해했다.
인간들이 너무 시끄러워서 신들이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이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강조된 주제이다. 바벨탑 이야기의 초기 전승을 짐작케 해주는 <엔메르카와 아라타의 주>에서 엔키가 원래 동일했던 사람들의 언어를 민족마다 다른 말들로 분리해버린 이유는, 사람들의 한목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였다. 너무 시끄럽다는 이 이유로 해서 신들은 인간들을 홍수로 쓸어버리자는 결정을 내린다. 반면에, 창세기에서는 홍수의 이유를 도덕론적인 것으로 전환시켜서 제시한다. 창세기 6장에서 “사람들이 땅 위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부터는 비슷한 구조를 지니지만, 인간들의 악행이 늘어나 하느님이 그들을 쓸어버리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변형시켜서 접목시켰다.

4. 아트라하시스
신들의 홍수 계획을 알고 이를 대비한 인간 현인의 이름이 아트라하시스이다. 수메르어로 지우수드라로 불리며(<에리두 창세기>) 그것의 아카드어 번역이 우트나쉬팀이다.(<길가메쉬 이야기>) 베로수스 기록에는 지수쓰로스(Xisuthros, 지우수드라의 페니키아어 음차)로 나온다. 프로메테우스가 아트라하시스의 그리스어 번역 이름이 가능성이 있으며, (우트)-나쉬-(팀)의 축약형이 팔레스타인에서 노아로 발음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Stephanie Dalley, <<Myths from Mesopotamia>>, 2.)
<에리두 창세기>에서 지우수드라는 사제의 역할을 겸한 왕으로, 신통력을 통해서 신들의 회의의 내용을 듣게 된다. <아트라하시스>에서 아트라하시스는 엔키를 통해 징조를 얻고 그가 꿈을 해석해주는 말을 듣고 신들이 홍수를 일으키는 계획을 미리 알게 된다. 여기엔 사제 왕이 신과 소통하는 방식이 반영되어 있다. 한편, 이 부분에 대한 창세기의 처리는 간단하다: “주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아트라하시스는 엔키의 말을 듣고 방주를 준비한다. 엔키가 지시하는 방주는 창세기에 나오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지붕을 만들고, 안을 위와 아래로 구획하고, 역청을 안팎으로 칠하는 것(6:14-17)이 일치한다.
앞수처럼 지붕을 쳐라. 그래서 태양이 그 속을 보지 못할 것이다.
위층과 아래층이 있게 하여라. 엮이는 곳이 튼튼해야 한다.
아스팔트가 끈끈해야 힘을 준다. 내가 곧 비를 내릴 것이다.

5. 큰물 질 때
<아트라하시스>의 홍수 장면은 그리 상세하지 않고 알아보기 힘든 부분이 많다. 아트라하시스가 모래시계를 보며 일곱 밤을 홍수를 기다린 것은 창세기에서 주님이 한 말, “이제 이레가 지나면”과 일치한다. 홍수가 일어나는 양상에 대해서 창세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이레가 지나서, 홍수가 땅을 뒤덮었다. 땅 속 깊은 곳에서 큰 샘들이 모두 터지고, 하늘에서는 홍수 문들이 열려서,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비가 땅 위로 쏟아졌다. (7:10-12)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서 창조과학회 사람들은 불필요한 과학적 논증들을 동원하는데, 이것은 메소포타미아의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묘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들이 상상한 세계에서 하늘 위와 땅 아래는 물로 가득 찬 영역이다. 하늘과 땅에는 물이 쏟아져 나오지 않도록 하는 마개가 있으며, 그 빗장을 신들이 관리한다. 대홍수는 신들이 하늘과 땅(혹은 바닷속)에 있던 마개를 열어버린 사건으로 이해된다.

6. 큰물 진 뒤
<아트라하시스>에서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이 홍수를 일으킨 직후 신들의 반응이다. 그동안 인간을 쓸어버리자고 기세등등했던 신들이 홍수 직후에는 꼴이 말이 아니게 된다.
위대한 여신 닌투의 입술에 흰 서리가 끼었다.
아눈나키 큰 신들은 갈증과 굶주림으로 앉아 있었다.
여신들은 울면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인간으로부터의 공물이 끊기자 신들은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리고는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시켰는지 책임 소재를 따지기 시작한다.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생각도 없이 이런 식으로 멸망시킬 수 있냐고 때늦은 분통을 터뜨린다. 그들은 갈증과 굶주림으로 쓰러져간다. 바로 그 때, 아트라하시스가 소와 양을 잡아 희생제의를 올린다. 그러자,
신들은 냄새를 맡고
제물 주변으로 파리 떼처럼 모여들었다.
신들의 망가짐이 극에 달하는 장면이다. 사회학자 뒤르켐도 말한 바 있는, ‘인간이 없으면 신은 굶어죽는다’라는 명제가 이보다 극적으로 잘 표현된 장면은 없으리라. 이처럼 제물을 얻어먹고 난 후 신들은 홍수를 일으킨 주동자들을 맹렬히 비난한다.
창세기에서는 이 이야기를 사용하되 하느님을 망가뜨리지 않고 우아하게 묘사하는 데 주력한다. 신학적 변용이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창세기에서도 큰물이 진 뒤 노아가 희생을 드린다.
노아는 주 앞에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집짐승과 정결한 새들 가운데서 제물을 골라서, 제단 위에 번제물로 바쳤다. 주께서 그 향기를 맡으시고서, 마음 속으로 다짐하셨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8:20-21)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여러 신들의 상호작용으로 이 난리가 일어나는데, 창세기에서는 한 명의 신만 등장시켜 동일한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아트라하시스>에서는 이쪽 편 신들이 주동이 되어 홍수를 일으킨 뒤 저쪽 편 신들이 그것을 비난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지만, 창세기 저자는 한 명의 주인공으로 이것을 마름질하기 위해 고민을 해야 했다. 이런 경우 할 수 있는 선택은, 정신 분열이 되거나 변덕을 부리거나이다. 창세기에서는 신의 변덕으로 이 신정론적 상황을 처리한다. 이 장면에서 하느님은 후회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을 한다. 신학적으로는 전능한 신이 후회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문학적으로 볼 때 다수의 주인공을 하나로 합쳐놓았을 때의 틈새를 마름질하는 최상의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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