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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출판물

뱀다루기와 종교학하기

by 방가房家 2023. 6. 1.

서평으로 제출하기 위해서 쓰긴 썼는데.... 서평의 장르적 성격을 무시한 크로스오버 글쓰기 ;;
학술지에 실린 모습

 
 
주제서평:
뱀다루기와 종교학하기: 스네이크 핸들링에 빗댄 종교 연구 태도의 논의들

Dennis Covington, Salvation on Sand Mountain: Snake Handling and Redemption in Southern Appalachia, New York: Penguin, 1995.
Robert A. Orsi, "Snakes Alive: Religious Studies between Heaven and Earth," Between Heaven and Earth: The Religious Worlds People Make and the Scholars Who Study Them,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5.
Russel T. McCutcheon, ""It's a Lie. There's No Truth in It! It's a Sin!": On the Limits of the Humanistic Study of Religion and the Costs of Saving Others from Themselves,"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74-3(September 2006): 720-750.

 



1. 뱀꾼들의 교회

1908년 경 미국 남부 테네시 주의 한 교회에서 조지 헨슬리(George Hensley) 목사가 마가복음 16장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었다. 설교가 무르익자, 몇몇 장정들이 상자 가득 방울뱀을 갖고 와서 그가 설교하는 앞에 풀어놓았다. 헨슬리 목사는 뱀을 집어든 채 설교를 계속 하였으며, 뱀에게 전혀 물리지 않은 채 설교를 마쳤다. 아래의 구절에서 예수가 이야기한, 믿는 자에 따르는 표징이 나타난 것이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징들이 따를 터인데, 곧 그들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으로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들며, 독약을 마실지라도 절대로 해를 입지 않으며, 아픈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다."1)
 
헨슬리 목사의 이 전설적인 설교 이후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미국 남부의 오순절 교회 안에 형성되었다. 그 무리는 1920년에서 40년에 이르는 기간에 미국 남부 애팔래치아 산간 지방을 중심으로 교회를 형성하면서 발전하였다. 집회 중에 독사를 집어들고 방언을 하며 독약(주로 스트리크닌(strychnine))을 마시는 예배를 드리는 이 사람들을 “스네이크 핸들러”(Snake Handlers)라고 부른다. 이들이 만든 교회에는 ‘표징이 따르는 교회’(the Church of God with Signs Following)라는 이름이 주로 붙는다.
1940년대 후반 이들의 집회에서 뱀에 물려 죽는 사람들이 발생하자, 이 종교행위에 대한 사회적인 논쟁이 일어났다. 몇몇 주에서 스네이크 핸들링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정하였고, 1948년에는 이 법에 의해 헨슬리 목사가 체포되기도 한다. 특정한 의례 행위를 금지하는 이 법에 대해서, 종교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을 근거로 한 반론도 있었지만 현재 테네시 주에서는 이 금지법이 유지되고 있다.
1955년 이 운동의 창시자격인 헨슬리 목사가 집회 중에 뱀에 물려 사망할 무렵 이 운동의 성장은 정체된 상태였지만, 지금까지도 스네이크 핸들링을 하는 교회들의 명맥이 끊긴 것은 아니다.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현재 천 명에서 이천 명에 이르는 교인들이 애팔래치아 산간 지방을 중심으로 분포한다고 알려져 있다.2)
 
독사를 집어드는 행위에서 오는 강렬한 첫인상으로 인해, 게다가 한국인 독자의 입장에서는 머릿속에 그려본 적조차 없는 미국 남부 애팔래치아 산간 지방이라는 낯선 지리적 맥락으로 인해, 스네이크 핸들러라는 종교 집단은 전적인 타자로 인식될 것이다. 우리가 이 글에서 볼 것은 이 타자를 다루는 방식이다. 타자와의 만남과 거기서 야기되는 비교의 인식이 종교학의 기본적인 물음의 구도라고 할 때, 스네이크 핸들러와 종교학이 조우하여 물음을 던지는 과정은 종교학하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된다.
여기서 다루려는 글들은 스네이크 핸들러들을 탐방하고 쓴 한 권의 책과, 그 책을 재료삼아 종교학에서 대상과의 관계를 논한 두 종교학자의 논문이다. 데니스 코빙턴(Denis Covington)의 <<샌드 마운틴에서의 구원>>3)은 신문기자인 저자가 스네이크 핸들링을 하는 교회를 취재하며 겪은 일을 기록한 책이다. 펭귄북으로 출판되어 상당히 많이 판매된, 기자로서의 경험을 기술한 대중적인 저술이다. 학술서적은 아니지만, 종교 연구가들의 관심을 끈 책이다. 내가 아는 미국 종교사 선생님은 매학기 학부 수업 말에 이 책에 대한 서평 과제를 요구한다. 책에 담긴 정보를 묻기 보다는, 책에서 나타난 종교에 대한 접근 태도에 대한 의견을 묻는 과제였다. 이 책이 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미국 가톨릭을 연구하는 학자 로버트 오시(Robert Orsi)의 최근 저서 <<천상과 지상 사이에서>>의 마지막 장(章)인 <살아있는 뱀: 천상과 지상 사이에 있는 종교학>4)은 코빙턴의 책에서 나타난 경험을 종교학자와 연구 대상 간의 관계에 대한 논의로 끌어들이는 글이다. 오시는 코빙턴의 책을 언급하면서 연구자가 대상에게 도덕적 판단을 적용하기보다는 대상이 되는 종교인의 경험을 이해하는 자리에 서야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러셀 맥커천(Russel T. McCutcheon)이 최근 JAAR(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에 발표한 논문 <“그건 거짓이라네. 옳지 않아. 그건 죄악이야”: 인간적 종교 연구의 한계와 타자를 그들 자신으로부터 구해내는 데 드는 비용에 대하여>5)는 오시의 주장에 대한 반론의 성격을 띤다. 맥커천은 연구 대상에 대한 철저한 공감의 입장이 언제나 지켜져야 할 철칙이 될 수는 없는 예들을 제시하면서, 타자를 ‘그들’의 자리로부터 우리의 연구의 대상으로 위치시키는 데에는 치러야 할 몫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이야기책과 그 이야기를 이용해 논의를 펼친 두 논문이라는 점에서, 한 권의 저널리스트의 책과 두 편의 종교학자의 논문이라는 점에서, 이 서평은 균등한 세 글을 다루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한 낯설고도 매혹적인 이야기를 소개한 후, 학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살필 것이다. 코빙턴의 이야기를 다루는 학자들의 글은 종교연구자와 대상간의 문제라는, 오래되었으면서도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다룬다. 이 짧은 글에서 그 논쟁에 뛰어들어가는 일까지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오래된 문제를 요즘 학자들이 새로운 재료를 갖고 어떻게 논의하는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2. 뱀꾼들의 교회 취재하기

신문기자 데니스 코빙턴은 한 재판을 취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스네이크 핸들링을 하는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 재판은 앨라버마에 있는 스네이크 핸들링을 하는 교회 목사 글렌덜 서머포드(Glendel Buford Summerford)가 부인에게 독사가 든 상자에 손을 집어넣도록 강요해 살인 미수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 대한 것이었다. 재판 결과 목사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재판정에서 교회 사람들과 친분을 갖게 된 코빙턴은, 남은 교인들이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인도하는 집회에 찾아간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는 스네이크 핸들링 집회에 참여하면서 애팔래치아 각지의 스네이크 핸들러들을 만나고 그들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스네이크 핸들러에 대한 코빙턴의 참여 관찰은, 그가 집회에 참여하는 횟수가 많아지고 집회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커지다가 결국에 뱀을 집어드는 행위에 직접 참가하는 데서 절정에 이른다. 샌드 마운틴에서 열린 집회에서 분위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한 친구가 그에게 방울뱀을 넘겨주었고, 그는 순순히 받아든다. 그 순간의 생각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뱀이 내 자신의 일부인 것 같았다.”6) 핸들러들의 경험에 공감한 그는 “이제 나는 왜 핸들러들이 뱀을 집어 올리는지 알았다.”7)고 진술한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일어난 극적인 사건을 끝으로 코빙턴의 집회 참여는 종결된다. 그는 조지아 주에 있는 한 교회에서 교인들의 결혼식 이후 있었던 집회에 참여한다. 그 날 모였던 핸들러 중에는 방울뱀으로 땀을 훔친다는 전설적인 핸들러 펀킨 브라운(Punkin Brown)도 있었는데, 그가 코빙턴의 동료인 여자 사진가 멜리사를 비난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코빙턴에 따르면 브라운은 집회 중간에 멜리사에게 삿대질을 하며 여자가 청바지를 입고 남자들의 일을 하는 것은 하느님이 정해준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소리를 지른다. 멜리사가 소요 때문에 집회장 뒤편으로 어색하게 물러나 있는 와중에도 집회는 계속 진행되어 한 핸들러가 코빙턴에게 연단으로 올라와 설교를 해줄 것을 요청한다. 생애 처음 해보는 설교에서 코빙턴은 마가복음 16장을 주제로 설교를 해나갔고, 교인들은 아멘과 “말씀 안에 있습니다”(You're in the Word)로 화답한다. 그러나 코빙턴이 예수가 부활 후 다른 제자들보다도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났음을 상기시키며 교회 내 여성들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주장을 꺼내자, 회중들의 반응이 이내 싸늘해지고 아멘 응답도 사라진다. 아는 교인에게 자신이 말씀 안에 있냐고 물어보아도 그는 “말씀 밖에 있습니다”(You're out of the Word)는 대답을 들을 뿐이었다. 냉랭해진 분위기에서 펀킨 브라운이 마이크를 이어받아 분위기를 되살린다. 그는 옳지 못한 교리를 퍼뜨리는 자들이 있다고 비난하고 자신들의 건전한 교리를 수호하자고 외친다. 그는 퇴장하는 데니스 코빙턴의 등 뒤에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건 거짓이라네, 데니스. 옳지 않아. 그건 죄악이야!”(It's a Lie, Denis. There's No Truth in It! It's a Sin!)8)
비록 코빙턴의 참여는 이러한 파국으로 마무리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 책에서 코빙턴이 보여준 참여의 정도는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그의 참여가 자신의 종교적 뿌리에 대한 자각에서 오는 동질감에서 비롯한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묘사된 스네이크 핸들링에는 미국 남부 산간 지방의 정서가 깔려 있는데, 그것은 코빙턴 자신이 속한 고향의 정서이다. 그는 귀신 나무(spirit trees)라는 남부 지방 풍습을 이야기하며 책을 연다. 남부 시골사람들은 집 뒤뜰 나무를 색칠한 유리병으로 장식해 놓는데, 사람들은 그 유리병들에 악령들이 갇혀 사람들을 해코지하지 못한다고 믿는다고 한다. 이 간단한 언급에서, 그는 이 저작이 자신이 속한 미국 남부 산간지방 사람들의 종교성에 대한 탐색임을 암시한다.
코빙턴은 한 집회에 어린 딸 둘을 포함해 가족을 동반해서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는, 뱀이 사용되는 집회의 분위기에 어린 딸들이 전혀 낯설어하지 않고 그 분위기를 즐겼다는 점에 놀라게 된다. 이를 계기로 그는 자신의 집안의 핏줄에 스네이크 핸들러의 종교 경험과의 친연성이 있는지를 찾아보게 된다. 코빙턴 집안은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하여 미국 남부의 척박한 지역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삶에는 감리교, 성결운동, 오순절운동, 그리고 스네이크 핸들러로 이어지는 미국 남부지역 종교사의 영성운동의 흐름이 배어 있었다. 그리하여 데니스 코빙턴의 고조할아버지는 샌드 마운틴 근처에서 말을 타고 다니며 설교를 한 감리교 순회 전도사였으며, 그가 찾은 어느 신문 기사에서는 알지 못했던 같은 성씨 사람들 알렌 코빙턴과 조지 코빙턴이 스네이크 핸들링을 해서 벌금을 물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9) 그러므로 코빙턴에게 스네이크 핸들링은 타자가 아니라 자신의 뿌리와 맞닿아 있다는 동질감을 주는 존재이다. 그가 스네이크 핸들링에서 찾은 것은 잊고 있었던 고향의 종교성이며, 그러한 뿌리찾기가 그의 적극적인 참여를 설명해주는 동기가 된다.


3. 아직 살아있는 뱀

미국 가톨릭의 신앙 양태를 주로 연구하는 종교학자 로버트 오시는 연구 대상에 대한 종교학자의 접근 방법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코빙턴의 이야기를 끌어들여 사용한다. 오시가 지적하는 것은, 코빙턴이 상당한 수준까지 종교인의 경험에 동참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대목에 가서는 종교에 대한 자신의 규범적인 기준을 적용해서 ‘자신’과 ‘그들’ 사이에 선을 긋고 ‘그들’을 이해하는 데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시의 분석은 코빙턴이 조지아에서 스네이크 핸들러의 집회를 떠나게 된 그날 밤에 대한 묘사에 집중된다. 그 장면은 코빙턴과 스네이크 핸들러 펀킨 브라운과의 대립구도로 묘사된다. 코빙턴은 펀킨 브라운을 냉혈하고 완고한 보수주의자로 그린다. 그가 돌아설 때 브라운은 “셔츠 자락을 내놓고 큰 방울뱀을 어깨에 걸친 채 괴상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10) 이 때의 브라운은 코빙턴에게 전적인 타자이다. 오시는 이 대목에서 코빙턴이 종교에 대한 규범적인 가치 판단을 적용해서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있다고 지적한다. 여성의 위치를 인정하고자 하는 코빙턴의 입장에 선 사람들과 여성의 교회 내 역할을 허용하지 않는 보수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사람들이, 좋은 종교와 나쁜 종교로, 다른 표현으로는 우리의 하느님에 속한 사람들과 성스러움의 영역 바깥의 사람들로 나뉘어진다는 것이다.
오시는 가치 판단에 의해 타자가 형성되는 이 지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그 지점이 종교학자들의 연구에도 형성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좋은 종교와 나쁜 종교의 구분은 참된 종교와 그렇지 않은 종교의 구분이고, 그것은 또한 종교와 종교 아닌 것의 구분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종교에 대한 규범적인 전제는 종교 정의의 문제와 직결된다. 그는 자기 수업 시간에 만난 미국인 학생들과의 대화를 예로 든다. 미국 뉴욕에 있는 성 루시 성당에는 프랑스의 루르드(Lourdes) 성지를 복제해서 만든 분수가 있고, 신자들은 그 분수에서 나오는 물에 효험이 있다고 생각해서 (분수에서 나오는 성수가 사실은 수돗물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병을 위해 물을 받아간다고 한다. 심지어는 자동차를 몰고 와서 분수물을 채워 냉각수로 사용하면 채우면 성수가 도로에서 자동차를 보호해줄 것이라고 믿는 신자들도 있다고 한다.11) 오시가 수업시간에 위의 이야기를 하면 학생들은 보통 어떻게 그렇게 속된 것들이 종교가 될 수 있느냐며 그것은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는 불쾌한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종교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인 인식은 종교학자의 연구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오시는 주장한다.
나는 종교학 연구에 있어 규범적 전제에 대한 오시의 이야기가 상당히 미국적 맥락을 지닌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종교학자들에게 있을 수 있는 규범적 전제의 강도와 내용은, 미국 학자들의 것과 연속선상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다르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점에 주의하면서 오시의 논의를 따라간다면, 우리와 다른 미국 종교학의 자리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오시는 20세기 초반 미국 대학교에 종교 교육이 설립되는 역사적인 맥락을 설명해준다. 당시 미국 공교육에서 제공된 교육은 분명 신학이 아니라 종교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었다. 그럼에도 미국 사회에서 상상된 ‘종교’는 특정 교파에 속한 것이 아닐 뿐이지 기본적으로 미국에 있는 개신교파들의 총합을 크게 넘어서는 범위의 것이 아니었다. 이 종교 교육은 미국 시민종교의 이상에 부합하여 시민으로서 품성을 배양하는 데 기여하는 학문이었다. 종교에 대한 학문은 “좋은 종교”(good religion)를 가르치는 일이었고, 미국 사회 내에서 도덕적 역할12)을 수행하였다. 물론 20세기 후반부터 객관적인 학문으로서 정립하기 시작한 지금의 미국 종교학이 1세기 전의 종교 교육과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미국 종교학회(AAR)의 7,8할이 여전히 전신인 성서교육자협의회(NABI)의 속성을 가진 회원인 점을 감안할 때, 지금의 미국 종교학자들이 종교학의 모체로부터 물려받은 규범적 전제의 유산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주장은 지나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시가 말하고자 한 바는, 종교학자가 연구 대상에 접근할 때 자신의 도덕적이고 규범적 전제가 적용되지 않도록 노력하며 타자 이해에 도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요약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교훈적인 주장을 하기 위해 코빙턴 이야기가 이용된 방식에 대해서는 잠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오시 글의 제목인 “살아있는 뱀”은 코빙턴이 스네이크 핸들링 집회에 참여해서 직접 들어올린 그 뱀을 의미한다. 살아있다는 표현은 코빙턴이 그 뱀을 묘사할 때 등장한 단어이다. 오시에게 살아있는 뱀은 종교학자가 공감을 통해 타자에 대한 이해에 도달한 상태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얼핏 보기엔 뱀을 들어올리는 기묘한 행위는 타자를 나타내며, 신문기자라는 코빙턴의 직업은 객관적 연구자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오시가 코빙턴 이야기를 끌어다 쓴 것에는 이러한 일반적 연상에 기댄 면이 있다.
그러나 당연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코빙턴은 종교학자가 아니다. 그의 책은 타자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를 목표로 접근하여 나온 성과가 아니다. 코빙턴과 종교학자를 함께 논의한 것은 다른 영역에 속한 것들을 같은 자리에 놓는 비교의 행위이다. 더 결정적으로,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코빙턴이 뱀을 들어올리고 스네이크 핸들러의 세계에 들어간 것은 타자의 세계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에서 자신의 핏속에 흐르는 조상의 신앙과의 동질성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코빙턴이 도달한 이해는 그 대상이 타자가 아니라 우리의 일부라는 발견 때문에 가능했다. 나는 오시가 자기 논리와 코빙턴 이야기의 원래 맥락과의 차이점을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시가 자료를 왜곡해서 사용하였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여기서 환기하려는 것은 코빙턴 이야기가 사용된 방식이다. 종교학자의 연구 태도에 대한 오시의 논의에서 코빙턴 이야기는 표현적인 효과 때문에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논리를 증명하는 자료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종교학자의 연구 태도에 대한 우화(寓話)로 사용된 것이다.


4. 고약한 친구들은 어찌 다룰 건가?

오시가 코빙턴 이야기를 빌려 종교학자는 타자의 설정을 극복하고 대상에 대한 이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면, 러셀 맥커천은 꼭 그렇지는 않다는 반론을 편다. 반박하기 힘들어 보이는 오시 이야기에 맥커천이 딴지를 거는 방식은 흥미로운데, 그것은 현실이 타자 이해에만 매진하기에는 그리 녹록치 않다는 실제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다.
일단 맥커천은 오시를 종교 연구는 종교 신자의 동의를 얻어가며 수행되어야 한다는 고전적인 주장을 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나 최근에 타자 이해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글13)을 발표한 카베존(José Ignacio Cabezón)과 같은 진영으로 분류한다. 그가 이들 진영에 대한 반론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연구 대상이 되는 타자들이 다 수동적으로 연구자의 이해받기를 기다려주고 결과에 (어떻게 동의를 받는 건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겠지만)동의를 해주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발언권을 갖고 학자의 이론에 직접 반론을 제기하고 때로는 위협을 가하는 거친 친구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최근 몇몇 미국의 인도종교 연구자들이 민족주의 성향의 인도인들과 가진 껄끄러운 관계들을 예로 든다. 대표적인 인도 종교 연구가인 웬디 도니거(Wendy Doniger)는 인도 종교의 성적인 측면을 주로 언급하고 특히 <<바가바드 기타>>가 파괴적인 행위를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는 글을 발표해 인도인들과 인도계 미국인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며 최근 영국에서 있었던 강연회에서는 계란 세례를 받기도 했다. 도니거의 제자들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제프리 크리팔(Jeffery Kripal)은 라마크리슈나의 신비주의에 있는 동성애적인 모티브를 연구한 <<칼리의 아이>>14)를 출판한 후 라마크리슈나의 추종자들로부터 곤욕을 치룬 적이 있다. 폴 커트라이트(Paul Courtright)는 가네샤와 쉬바의 관계를 프로이트적으로 분석한 책15)을 출판하여 비난을 받았다. 한 인도계 미국인은 인터넷 서점 아마존의 서평란에 커트라이트가 반힌두적인 편견에 가득 찬 미국 기독교인 교수이며, 자신이 경멸하는 종교를 가르치는 자라는 혹평을 올려놓았다.16)
맥커천은 이전에는 타자의 이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오시, 켄트웰 스미스, 카베존 그룹 쪽 의견을 가졌던 커트라이트가 최근 인도인들과의 논쟁을 겪은 후에는 학자의 인식의 권리를 주장하는 쪽으로 입장이 바뀌었음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맥커천은 타자 이해의 문제가 단지 학자 개인의 인식의 노력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타자와의 힘의 관계라는 현실적인 맥락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임을 환기시킨다. 물론 이 관계 설정의 문제가 간단한 것은 아니다. 맥커천은 타자 중에서는 치러야 할 비용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들이 존재하는가 하면 치러야할 비용이 많은 이들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원론적인 구분 이상의 논의를 진척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맥커천이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지점에 멍석을 잘 깔아놓았다고 생각한다. 종교학에서 타자와 학문의 관계에 대한 고민은 오래된 고민이기도 하지만 911 사태 이후 미국 종교학자들에게 더욱 긴급해진 고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신종교나 소종파를 연구하는 학자들, 카베존이 언급한 ‘커밍 아웃’을 고민하는 불교 연구자들17), 개신교의 강력한 자장과의 관계를 고민하는 연구자 등 고민의 내용은 가지가지인데 이러한 경우들을 모아서 생각할 논의의 장은 진척되지 않은 실정이다. 모으기만 한다고 해서 능사는 아니겠지만 미국 학자들의 비슷한 고민을 경청하는 것이 이 어려운 문제를 모색하는데 도움을 주는 방법인 것은 분명하다.
맥커천 역시 코빙턴의 이야기를 사용한다. 그가 이야기에서 끌어낸 대목은 코빙턴이 교회 내 여성의 문제에 대한 이견을 내고 스네이크 핸들러 집회에서 빠져나올 때 펀킨 브라운이 외친 “그건 거짓이라네, 데니스. 옳지 않아. 그건 죄악이야.”라는 일갈이다. 맥커천은 이 일갈이 종교학자의 연구에 “그건 거짓이야”라고 반발하는 타자의 목소리라고 상상한다. 타자와의 거리를 넘어서기 위해서 요구되는 엄청난 비용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오시와 마찬가지로, 맥커천의 논리에 수사적으로 사용된 이 표현은 펀킨 브라운의 목소리와는 일정한 거리를 갖는다. 브라운이 코빙턴에게 한 일갈은 연구 대상과 연구자 간의 언쟁이 아니라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를 놓고 두 신자가 벌인 신학적 논쟁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코빙턴의 이야기는 인식의 언어가 아니라 고백의 언어에 속한다. 기자와 스네이크 핸들러 사이에 타자의 경계선이 그어진 것이 아니다. 코빙턴과 뜻이 맞는 스네이크 핸들러들과 펀킨 브라운으로 대표되는 더 보수적인 스네이크 핸들러(그들은 “옛 테네시 사람들”(Old Tennessee)이라고 불린다)들 간의, 즉 스네이크 핸들러 내부에서 그어진 경계이다. 맥커천의 논의에서 코빙턴 이야기가 인용된 방식은 액면가 그대로 인용된 것이 아니라 표현의 효과를 높이는 하나의 우화로서 사용된 것이다. 오시에 대한 지적과 마찬가지로, 나는 여기서 맥커천의 인용이 잘못되었음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인용된 방식을 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틀림없이 이런 지적은 노파심이다. 나의 노파심은, 뱀꾼 이야기가 코빙턴, 오시, 맥커천의 입을 거쳐 한국의 독자에게 전달되는 동안, 한국에서 들릴 리 없는 애팔래치아 뱀꾼 교인의 목소리가 인용들의 회로 안에 묻혀 망실될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자료의 성격이 무엇이었는지, 인용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잊었을 때,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눔바쿨라 이야기가 엘리아데에 의해 우주의 축으로 해석된 방식을 밝히기 위해서 조나단 스미스가 “수풀을 헤치며” 자료를 거슬러 올라갔던 것과 같은 고생스러운의 작업이 요구될지도 모른다.18) 나라고 뱀꾼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은 적이 있겠냐마는, 그래도 우연히 코빙턴 이야기를 읽은 후에 혹시나 해서 이정표를 세워놓는다.


1) 마가복음 16:17-18, 표준새번역 개정판. 문헌 비평의 입장에서 보면, 마가복음이 권위있는 사본들은 대부분 16장 8절에서 종결된다. 위 구절이 포함된 16:9-20은 후대에 첨가된 부분이다.
2) 스네이크 핸들링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는 버지니아 대학에서 운영하는, 종교 운동에 대한 소개 웹페이지에 잘 정리되어 있다. ("Religious Movement Homepage: Serpent Handlers," http://religiousmovements.lib.virginia.edu/nrms/Snakes.html) 스네이크 핸들링을 취재한 몇 편의 다큐멘터리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1967년에 제작된 <<성령의 사람들>>(Holy Ghost People)이 유명하다. 다음의 웹 주소에서 동영상 파일을 내려받을 수 있다: http://www.archive.org/details/HolyGhostPeople
 
3) Dennis Covington, Salvation on Sand Mountain: Snake Handling and Redemption in Southern Appalachia, New York: Penguin, 1995.
 
4) Robert A. Orsi, "Snakes Alive: Religious Studies between Heaven and Earth," Between Heaven and Earth: The Religious Worlds People Make and the Scholars Who Study Them,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5.
 
5) Russel T. McCutcheon, ""It's a Lie. There's No Truth in It! It's a Sin!": On the Limits of the Humanistic Study of Religion and the Costs of Saving Others from Themselves,"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74-3(September 2006): 720-750.
 
6) Covington, Salvation on Sand Mountain, p.169.
 
7) Covington, Salvation on Sand Mountain, p.170.
 
8) Covington, Salvation on Sand Mountain, p.235.
 
9) Covington, Salvation on Sand Mountain, pp.126-127.
 
10) Covington, Salvation on Sand Mountain, p.235.
 
11) Robert Orsi, "Everyday Miracles: The Study of Lived Religion," in David D. Hall ed., Lived Religion in America: Toward a History of Practic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7, p.4.
 
12) 심형준의 표현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미국의 사회적 가치에 봉사하는 이러한 측면이 미국 종교학의 ‘스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미국의 종교학이 한국과 달리 번성하고 있는 것은 상당 부분 스펙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심형준, <종교학의 스펙>, <<종교문화비평>> 10(2006)을 참조할 것.)
 
13) José Ignacio Cabezón, "The Discipline and Its Other: The Dialectic of Alterity in the Study of Religion,"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74-1 (March 2006): 21-38.
 
14) Jeffrey Kripal, Kali's Child: The Mystical and the Erotic in the Life and Teaching of Ramakrishna,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5.
 
15) Pual B. Courtright, Ganesa: Lord of Obstacles, Lord of Beginning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5.
 
16) McCutcheon, "It's a Lie. There's No Truth in It! It's a Sin!," pp.723-726; 동료 교수의 입장에서 최근 사건들을 간단히 정리한 글로는 Martin Marty, "Scholars of Hinduism Under Attack" (http://www.benifit.com/story/128/story_12899_1.html)을 참조. 인도 민족주의자 입장에서 웬디 도니거의 학문과 제자들의 작업에 대해 본격적으로 비판한 글로는 다음 웹페이지를 참조할 것. Rajiv Malhotra, “Wendy's Child Syndrome” (http://rajivmalhotra.sulekha.com/blog/post/2002/09/risa-lila-1-wendy-s-child-syndrome.htm)
 
17) Cabezón, "The Discipline and Its Other: The Dialectic of Alterity in the Study of Religion," pp.32-33; 나는 이민용의 <해외 불교학의 형성과 오리엔탈리즘: 서구 불교학의 창안과 오리엔탈리즘>(종교문화비평 8호(2005))의 마지막 부분 이야기가 커밍 아웃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불교학은 불교의 신앙체계에 나름대로 동참할 수밖에 없다. 이는 마치 예술품에 공감함이 없이, 예술품의 아름다움과 창조성을 음미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동안 객체화된 대상으로 불교를 연구해 온 서구의 학자들이 이제 불교의 신행에 공감을 표명하며 연구하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불교 신행에의 진입이 불교로 개종을 한다거나 신학의 차원으로 빠지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개종의 형태가 아니라, 연구의 공감을 위한 수행적인 차원(performance)이다.”
 
18) Jonathan Z. Smith, To Take Place: Toward Theory in Ritual,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1장. “학문의 수풀을 헤치며”는 스미스의 작업을 진전시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자료를 조사한 샘 길의 비유적 표현이다. Sam Gill, Storytracking: Texts, Stories, & Histories in Central Australia,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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